〈 29화 〉029화
“아 죄송해요. 제가 지금 너무 많이 마셔서 좀 쉬어야 할 거 같아요.”
효주는 한석이 저번에 술을 권하는 선배와 싸운 경험이 있어서 언제 터질지 모른다고 생각해 최대한 선을 그으려고 노력했다.
효주의 노력을 알았는지 한석은 뚱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이 조금씩 반복되던 도중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자꾸 생기기 시작했다.
“한석아, 짠해야지.”
한석이 옆에서 다른 여자 선배들과 술을 계속 마시고 있었다.
처음 한두 번은 예의상 받아주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주고받는 잔이 많아지자 효주는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없었다.
그때, 또 다른 선배가 와서 효주에서 술을 권했고 이번엔빼지 않고 마셨다.
“오~ 효주 잘 마시는데? 저번엔 남자친구가 빼더니 오늘은 좀 잘 받나봐?”
문제는 이 선배가 저번에 한석과 싸운 사람이라는 것.
옆에서 한석이 뭐하냐는 눈빛으로 효주를 쳐다보았지만 효주는 신경쓰지 않으려고했다.
‘자기는 되고 나는 안돼?’
“한 잔더할래?”
선배가 재차 술을 권해왔고, 효주는 술잔을 뻗었다.
“그만하시죠.”
그 순간 한석이 효주의 팔을 잡으면서 정색하고 말했다.
선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석에게 소리쳤다.
“야! 효주가 받겠다는데 네가 또 왜 막는 건데? 너도 여태까지 옆에 애들 주는 잔은 다 받으면서 여자친구는 안돼?”
눈치를 보아하니 이 선배도 한석이 술을 빼지 않고 다 받는 것을 보고 지난번 일을 복수하려고 찾아온 듯했다.
한석은 약간 당황한 듯 효주의 눈치를 살폈지만효주는 한석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저, 저는 어쩔 수 없었고, 형은효주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순간 테이블에 정적이 흘렀다.
효주도 한석의 내로남불에 어이가 없었고, 선배도 저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한 듯했다.
선배는 효주의 표정을 한 번 살피더니 비웃음을 지으며 한석에게 말했다.
“하. 그래? 우리 한석이 대단한 일 하고 계셨나 보네. 미안하다 내가 방해해서 수고해라 그럼.”
주변 사람들도 낌새를 느꼈는지 서서히 효주와 한석으로부터 멀어졌고, 효주는 한석에게 조용히 얘기했다.
“우리 잠시 나가서 얘기 좀 해.”
한석은 자신의 말실수를 인지한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효주를 따라 나섰다.
“한석아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효주는 인적이 드문 곳에 멈춰 서서 한석에게 바로 쏘아댔다.
“하…. 효주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한석은 한숨을 푹 내쉬고 짝다리를 짚은 채 ‘또 이러네’라는 표정으로 효주에게 짜증섞인 말을 건넸다.
효주는 한석의 태도에바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 아니. 또 왜 우는데?”
효주의 눈물에 당황한 한석이 효주를 달래려 손을 뻗어왔지만, 효주는 손을 쳐냈다.
“야 남한석! 너는 다른 여자랑 찝쩍대도 되고 나는 다른 남자랑 말도 섞으면 안되니? 넌 애가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효주는 처음 한석을 만날때를 떠올렸다.
처음 그는 그녀에게 헌신적이고, 항상 달콤한 말을 건네왔고, 그녀가 항상 1순위인 듯 모든 걸 그녀에게 맞췄다.
효주도 이 남자를 받아준다면 당연히 조금은 바뀔 걸 주변에서 들어와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한석은 사귀면서 처음으로 이렇게 화를 내는 효주를 보며 눈을 내리깔고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생각이 많이 짧았어. 다신 안 그럴게.”
하지만 효주는 그 모습이 더 짜증스러웠다.
지금까지 많이 참아왔고 많이 배려를 해왔다고 생각했다.
근데 고작 저 정도 사과로 넘어가려고?
“뭐가 미안한데? 난 지금 네가 이 상황 모면하려고 그냥 미안하다고 하는 거 같은데?”
사과했음에도 쏘아대는 효주의 모습에 한석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사과해왔다.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이기적이었어.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효주야. 믿어주면 안 될까?”
너무 화가 나고 짜증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냥 같이 화를 내준다면 이감정을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꾸 이 상황을 모면하려 사과하는 한석이 너무 미웠다.
긴 대치가 이어졌다.
효주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내뱉지 못한 채 식히는 중이었고, 한석은 그런 효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때, 한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자, 잠시만 효주야.”
효주는 고개만 끄덕이고 한석의 통화에 자연스레 집중이 갔다.
‘네. 네네. 네 지금 갈게요. 그냥 대충 달래고 들어갈게요. 네알겠어요, 선배.’
[대충 달래고….]
식어가던 감정이 다시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구야?”
“아…. 소정 선배. 언제 오냐고 하시길래 곧 들어간다고 했어.”
‘심지어 여자?’
“우리 얘기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가겠다고? 대충 달래서? 지금 장난해?”
한석은 통화내용이 들린 걸 몰랐는지 정말 당황한 표정으로 어버버 거리고 있었다.
“너 이런 일 없을 거라고 한 지 몇 분도 안 됐어. 그냥 대충 사과하고 넘어가면 다 끝나는 줄 알았어?”
한석은 이번 실수는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다는 걸 직감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효주의 말을 들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또 소극적으로 대충 때우려는 태도에 효주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야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또 이딴 식으로 넘어갈 거야? 왜 매번 이런 식이야? 차라리 화를 내! 왜 매번 나만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건데!”
쉬지 않고 쏘아대는 효주에 한석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 그럼 어쩌라고. 내가 잘못해서 잘못했다는데 더 무슨 말을 하면 되는데? 넌 여태까지 잘못안해서 내가 넘어간줄알아? 나도 많이 참았어. 너도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돼?”
“뭐? 네가 뭘 넘어갔는데? 그걸 여태까지 어떻게 참았데? 말해 봐!”
한석은 머리를 쓸어올리고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너 저번에 현수 때만 해도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몰라?”
조용히 나직하게 으르렁대듯 말하는 한석의 말에 효주는 어느 순간 눈앞의 남자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말문이 막히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흘러내렸다.
“지금 현수 얘기가….”
쏟아져 내리는 눈물에 더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항상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한석이 자신을 위협하듯 으르렁대는 모습에 가슴 한켠이 찢어져 나갈 듯 아파왔다.
효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한석은 한숨만 내리 쉬며 머리를 긁어대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 있을게.”
한석의 한 마디에 더욱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벤치에 앉아 한참을 울던 효주는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해야할 것 같았다.
* * * *
“그래서 한석이는 그냥 들어간 거야?”
현수는 이런 기회를 준 한석이 너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좀 어이가 없었다.
‘진짜 전형적인 연애 초보네. ...등신인가? 아 그래, 저 나이대 모쏠 딱지 뗀 애들은 다 등신 맞지.’
“응…. 처음엔 완전 나만 바라보는 헌신적인 애인 줄 알았는데 역시 남자는 다 똑같나 봐.”
효주는땅을 보고 걸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나라면 그렇게 안 했을 건데….”
현수는 효주에게 은근한 말을 내비쳤다.
효주는 현수의 멘트에 약간 당황했지만 부드럽게 대처했다.
“그러게. 현수 너라면 아마 여자친구 생기면 엄청 잘해줄 거 같아.”
“그렇지. 나보다 좋은 남자 찾기 엄청 힘들걸?”
현수는 효주의 선 긋기에 대처하며 다음 단계로 진입했다.
현수는 아직 쌀쌀한 날씨에 몸을 약간 떨며 효주에게 말했다.
“안 추워? 약간 얇게 입었더니 난 조금 춥네.”
“아 진짜? 난 너무 열을 받아서 그런지 별로 안 추운데?”
효주의 멘트에 환하게 웃어주며 현수는 손을 슬쩍 비비며 말했다.
“와. 나 손 진짜 차가워. 만져볼래?”
현수는 순진한 얼굴로 효주를 향해 손을 뻗었고 효주는 별 생각 없이 손을 잡았다.
효주가 손을 잡자 현수는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현수가 파악한 효주의 성격상 효주는 지금 상황 파악을 하느라 바쁠 거다.
“엄청 차갑지?”
“어? 어…. 차갑네.”
여기서 정신을 차리기 전에.
‘지금 휘몰아쳐야 한다.’
현수는 이미 인적이 드문 길이지만 은근슬쩍 길옆에 나 있는 나무 뒤로 효주의 손을 이끌어 데리고 들어갔다.
효주는 너무 당황해 동공이 팽글팽글 도는 것처럼 보였다.
현수는 효주가 뒤로 빼지 못하도록 목 뒤쪽을 살포시 잡았다.
얼굴을 마주 보고 천천히 가져다 댔고, 조금씩 뒤로 빼려는 효주의 목을 살짝 잡아당겼다.
이내 저항감을 사그라들었고 효주는 점점 눈을 감았다.
현수는 눈을 감은 효주의 입술에 입술을 맞닿았다.
‘여기서 떼면 안 된다.’
현수는 입술을 맞닿은 채로 살짝 혀를 내밀었고, 효주의 굳게 다문 입술도 서너 번의 두드림에 천천히 벌어졌다.
닫혀있던 입술 속으로 들어가자 알싸한 알코올의 향이 따뜻하게 달궈져 묘한 느낌이 들었다.
현수는 이미 이 상황을 예측해 가글을 해 둔 상태였지만 효주는 현수가 가글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신이 없어 보였다.
현수는 남아있던 한 손으로 효주의 허리춤을 잡았고 그렇게 둘 사이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키스를 한참 하던 도중 현수는 실눈을 떠보자 효주의 손이 갈 곳을 못 찾고 붕 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허리춤에 올려둔 손으로 그의 허리에 양손을 올리게 했다.
이젠 남들이 보면 영락없이 불장난하는 커플처럼 보였다.
현수는 그리고 여기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효주의 양손이 자신의 허리에 올라간 것을 확인한 현수는 그의 손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올리기 시작했다.
허리에 올려진 그녀의 양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더 이상의 저항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현수는 멈추지 않고 효주의 가슴까지 계속해서 나아갔다.
꾸준히 올라가던 손이 마침내 가슴에 살포시 얹어졌다.
현수는 다시 한번 실눈을 떠보자 효주가 조금씩 상황 파악을 끝내려 하는 눈치가 보였다.
현수는 그대로 목 뒤를 잡고 있던 손을 떼며 효주를 나무쪽으로 천천히 밀쳐냈다.
그리고 나무에 약하게 부딪히는 충격에 효주의 양손이 다시 현수의 허리에서 떨어졌고, 현수는 한 손은 가슴에 둔 채 한 손으로 효주의 손을 잡아 그의 왼쪽 가슴에 올려두고 심장이 뛰는 걸 느끼게 했다.
효주의 손이 현수의 심장고동을 느꼈는지 움찔하는 게 느껴졌고, 이내 현수의 손이 조금씩 천천히 꾸물댔다.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할 때마다 분위기는 점점 야릇해져갔고 효주가 어쩔줄을 몰라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브래지어를 살짝 밀어내자 이제 효주의 옷 위로 현수의 손에 딱딱하게 서 있는 유두가 느껴졌다.
그녀의 젖꼭지를 살짝살짝 쓰다듬자 현수의 가슴에 올라가있던 효주의 손이 절로 꽈악 쥐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만, 현수야….”
말과는 달리 저항감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눈을 뜨고 보고 있던 현수는 효주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뜬 채 한 손은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 갈 곳을 잃은 상태였다.
등 뒤는 나무고 앞은 현수가 가슴은 쥔 채로 있어서 강한 저항이 아니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황.
효주는 이내 다시 눈을 천천히 감고 손에 힘을 천천히 풀었다.
효주가 약간의 안정을 되찾자 이제 현수의 손이 옷 속으로들어가려 했다.
“여, 여긴….”
효주가 그렇게 말하며 현수의 손을 잡아 왔지만,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형식적으로 잡아 오는 듯했다.
‘거의 다 끝났다.’
효주는 계속되는 당황 속에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분위기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이제야 키스를 멈추고 현수는 한 손으로 효주의 눈을 가린 채 그녀의 목덜미를 간질이듯 애무했다.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누군지 모를 여러명의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아! 섹스하고 싶다!”
목소리를 보아하니 동아리 선배들이 멀리까지 바람 쐬러 온 듯했다.
효주를 공략하고 있던 현수는 그들이 설마 여기까지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크게 당황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딱 한 마디만이 터져나왔다.
‘아 X됐다!’
현수의 머릿속에 곧바로 경보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