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051화
며칠 뒤.
의예과 엠티 당일.
현수는 집합 장소로 가는 도중, 몇 미터 앞서 걸어가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오연희?’
곁에 아무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녀에게 재빨리 달려가 옆에 서서 발걸음을 맞췄다.
연희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고, 반가운 듯 미소를 짓고있는 현수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인사했다.
“안녕?”
연희는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현수 때문에 얼굴을 붉혔다기보다 낯가림 때문에 얼굴을 붉힌 것 같았다.
’뭐지? 저번에 낯을 심하게 가리지는 않았던거 같은데.‘
의외로숫기가 없는 그녀의 모습에 현수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처음 가는 엠틴데 설레지 않아?”
연희는 현수의 얼굴을 쳐다보지않고 고개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뭐….”
현수는 여전히 의문이 들었다.
‘그때는 술이 들어가서 그랬나?’
“이제 개강한지 좀 됐는데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좀 있어?”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아싸라서….”
그녀는 어딜가든 인기가 많을 법한 외모와 첫 만남때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현수는 어찌됐건 그에게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잘됐다. 나도 친한 사람이 없는데, 그럼 옆자리에 같이 앉아서 가도돼?”
현수는 집합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달려들 수많은 날파리들이 귀찮기도 했고, 옆자리에 같이 앉아 가는 내내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녀와 친해질 계기도 마련할 계획이었다.
현수의 물음에 연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현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자신이 다가오는 것을 꽤나 기뻐하는 것을 알수있었다.
‘딱 보니까 전형적으로 친구 없을 성격이네.’
현수의 느낌상 그녀는 자기는 다가가기 힘들어하면서 누군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성격처럼 보였다.
“전 상관없어요.”
“근데 왜 아싸야? 전에 보니까 친한 남자애들 많던데.”
“아….”
말을 슬쩍 줄이며 머쓱하게 웃기만 하는 그녀를 보고 현수는 생각했다.
‘알 거 같네.’
그녀는 심지어 누군가가 다가와도 대하는 방법을 몰라서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밀쳐내는 듯했다.
“2박 3일 간다던데 챙길 건 다 잘 챙겼어? 가방이 많이 가벼워 보이는데.”
“네….”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난 이것저것 많이 챙겨왔어.”
“네.”
‘이런 씨바….’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 대화를 보며 현수는 추측대로 그녀의 화법이 주변 사람들을 떠나게 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귀찮아 하는 게 아닌 건 확실해. 계속 말을 걸면서 호감을 쌓으면 무조건 넘어온다.’
현수는 끊임없이 호감이 가득한 미소를지으며 그녀를 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단답과 할 말 없게 만드는 화법으로 현수의 대화 주제를 소모시켰고, 이제 더는 할 말이 없다고 생각될 때쯤 그들은 집합 장소에도착했다.
“요~ 현수 왔어? 너 누구랑 앉아?”
“현수야 나랑 같이 앉을래?”
현수의 우려대로 집합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현수에게 말을 걸어오며 서로 같이 앉자고 달라 붙어왔다.
“아, 미안. 나 같이앉을 사람 따로 있어서 숙소 도착해서 같이 놀자.”
그때마다 현수는 하나하나 이미지 관리까지 해가며 거절했다.
연희는 그런 현수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가끔 남자 동기들이 같이 앉지 않겠냐는 제안을 현수처럼 거절했다.
현수와 연희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몰려드는 동기들에 의해 딱 붙은 채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묘하게 얼굴이 붉어진 채 현수의 팔 자락을 붙잡고 버스에 탑승한 둘은 중간자리쯤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하 이제 무슨 말 꺼내야 되냐.’
평소엔 이런 고민을 할 시간에 그냥 그 여자와 인연을 끊어버렸기에 현수에게도 이런 상황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수가 잠시 고민하는 동안 그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연희가 이어폰을 꼽고 잠을 청했다.
기분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현수에게도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었기에 일단은 지켜보기로 결정하고 현수도 잠시 눈을 붙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 버스가 멈추는 느낌에 눈을 뜬 현수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연희와 눈을 마주쳤다.
“혹시…. 뭐 좀 먹으러 갈래요?”
의외로 먼저 말을 걸어오는 그녀를 보며 현수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나도 좀 출출했는데 잘됐다. 가자.”
연희는 휴게소 매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묘하게 가벼워 보였고, 들떠 보이는 기분도 들었다.
‘약간 그런 느낌인데? 부잣집 자제들이 서민들 음식 궁금해하는.’
매점에 도착하자마자들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이것저것 시키다가 순간 연희는 현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혹시 다 드실 수 있나요?”
“응. 난 상관없어. 아 근데 오징어도 하나 사도 될까?”
“그럼요. 맥반석 오징어도 하나 주세요!”
그녀는 순식간에 계산까지 끝마치고 신나는 표정으로 음식들을 들고 버스에 탑승했다.
그리곤 여태껏 보지 못한 환한 미소와 함께음식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잘 먹네….’
현수는 무심코 자신이 먹던 오징어를 뜯어 연희에게 건넸다.
“이것도먹어봐. 맛있어.”
그러나 순간적으로 연희의 표정이 굳으면서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써 웃으면서 오징어를 받아먹었다.
“음, 맛있네요.”
말과는 다르게 그녀의 표정은 약간 일그러졌지만 짧은 순간이었기에 연희 스스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얘도 어지간한 성격이네. 이런 애들이 떡 치자고 달라 들면 거절 못 하는 성격인데. 기대되는데?’
음식을 다 처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희의 안색이 변하며 끙끙대는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체했나 보네.’
현수는 음식을 꽤나 많이 사가는 모습에 소화제를 몇 개 챙겨뒀었는데, 그중 하나를 꺼내 연희에게 건네며 말했다.
“괜찮아? 아까 뭐 먹고 멀미해서 그런가 보다.”
“아, 감사합니다….”
현수는 가방을 뒤져 혹시 몰라 챙겨두었던 멀미약도 꺼내 주었다.
‘역시 뭐든 챙기면 쓸데가 많네.’
“이것도 받아 멀미약이야.”
“네….”
말은 짧았지만, 그녀의 얼굴엔 고마운 표정이 역력했다.
소화도 되고 멀미도 어느 정도 가라앉자 마음이 편해졌는지 그녀는 머리를 꾸벅대기 시작했고, 이내 현수의 어깨에 부딪혔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생긴 것과는 다르게 하는 짓이 별나다고 생각하며 연희에게 말했다.
“그냥 기대고 자. 괜찮으니까.”
비몽사몽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하며 현수의 어깨에 기대 자더니 곧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 씨발 진짜….’
약간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녀의 외모와 혹시 모르는 집안 내력에 일단은 그녀를 꼬셔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기에 참기로마음먹었다.
어깨에 기댄 그녀를 잠깐 쳐다보자 현수의 눈에 적나라하게 그녀의 가슴골이 드러나 보였다.
의외로 거대한 그녀의 가슴에 이왕 감상하는 김에 연희의 몸매를 전반적으로 훔쳐보았다.
얼굴은 살이 거의 없어 말라보였지만, 거대한 가슴과 약간 나온 뱃살, 튼실한 허벅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존나 육덕지네. 진짜 생긴거랑 너무 다르게 노는데?’
현수는 이런 몸매를 가지고 있는 연희를 보며 고작 침 따위에 짜증이 났던 자신을 반성하며 그녀를 어떻게 따먹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희가 눈을 떴고, 그녀는 자신이 침을 흘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쩔 바를 몰라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현수는 그 모습을 보고 약간 고민을 한 뒤 생수통을 집어들었다.
뚜껑을 따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순간 생수통을 놓치며 그녀가 침을 흘린 부위에 물을 쏟아냈다.
“아이고,다 젖었네.”
현수는 자연스럽게 물을 털며 침을 닦아내며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연희는 현수가 일부러 그런 건지 실수로 그런 건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감동하고 있었다.
“일단 이걸로 닦으세요.”
휴지를 꺼내 현수에게 건네며 같이 물을 털고 닦아내는 그녀의 표정은 분명 확실하게 설레는 모습이었다.
버스에서 있었던 시간은 분명 짧았지만, 현수의 세심함과 배려 깊은 모습을 보여주기엔 충분했고, 금사빠 기질을 가진 그녀는 금세 현수에게 호감 가득한 눈을 가지게 되었다.
숙소에 도착해 간단하게 짐을 풀고 일정을 설명하더니 곧장 단체 게임을 시작했다.
팀을 나눠 여러 가지의 게임을 했는데, 연희와 현수는 역시 같은 팀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실제 나이로 따지면 40대 수준인 현수에게 게임은 지겨울 따름이었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여자들의 출렁이는 가슴이나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이후의 게임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현수는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 모든 게임이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술자리가 벌어졌다.
역시나 연희와 짝으로 앉은 현수는 주변으로부터 한 소리를 듣기 이르렀다.
“너네 사겨? 왜 이렇게 붙어 다녀?”
“무슨 소리야. 몰아가지 마 그런 사이 아니야.”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흘겨보는 동기들을 현수는 침착하게 받아치며 넘어갔다.
술자리는 점점 무르익어 갔고, 술이 들어간 연희는 현수가 맨 처음기억하던 약간의 인싸 기질을 가지고 있던 그녀로 돌아왔다.
그러나 저번처럼 남자로 둘러싸인 상태는 아니었다.
‘들이 댈 애들은 들이댔다가 성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떨어져 나갔고,나머지는 들이댈 용기도 없는 병신들이지.’
덕분에 현수는 연희를 독점한 채로 그녀와 꿀이 떨어지는 달달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빠, 오늘 저 챙겨줘서 진짜 고마워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나도 좋아서 한 거야.”
좋아서 했다는 현수의 중의적인 표현에 연희의 얼굴이 금세 붉어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조, 좋아서 했다고요?”
“현수야, 선배들이 잠깐 와보라는데?”
그러나 연희를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지 여전히 현수의 인기는식지 않았고, 자꾸 그를 찾는 사람들에 의해 현수의 짜증이 솟구쳤다.
‘아 진짜 좆같이 구네.’
“나 속이 안 좋아서 거기 가면 큰일 날 거 같은데 알아서 말 좀 잘해주면 안 될까?”
“어, 알겠어.”
방금까지 달달했던 분위기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무산되었고, 다시 분위기를 잡아야 했던 현수는 이래서는 끝이 없겠다고 느끼고 연희에게 말했다.
“취기 좀 오르는데 같이 바람 좀 쐬러 갈까?”
“아, 네 좋아요.”
그렇게 선배들의 눈을 피해 몰래 밖을 빠져나온 그들은 어두운 곳만 골라 다니며 숙소를 벗어났다.
일련의 행동이 마치 어디선가 탈출하는 느낌이었기에 연희는 즐거워하며 현수를 곧잘 따라왔다.
“진짜 탈옥하는 기분이었어요. 내일도 이렇게 나올까요?”
“그럴까? 우리 얘기 잘 나누고 있는데 다른사람들이 자꾸달라붙어서 귀찮아 죽겠어.”
“에이, 그래도 그게 좋은 거 같아요. 저는 아무도 말 안 걸어주는걸요?”
연희는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보니까 너 되게 인기 많던데?”
“그쵸? 근데 술이 들어가야 그렇더라구요. 평소에 술 안 마셨을 때는 사람 대하는데 너무 힘들어요.”
어색한 미소와 함께 한탄하는 연희.
현수는 지금이 그녀의 마음에 완벽하게 자리 잡을 기회가 되었다고 느꼈다.
“저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이더라구요.”
“뭔지 알지. 의도랑 다르게 상대방은 기분 나빠하는 그런 거.”
“오빠도 그런 적 있어요?”
“당연하지. 나도 학창 시절에 친구가많이 없었거든. 근데 진짜 좋은 친구 한 명이 나한테계속 다가와 줘서 고칠 수 있었어.”
“와…. 좋겠네요. 저도 그런 친구 있었으면 좋겠어요.”
현수는 분위기를 잡으며 연희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현수가 입을 열었다.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 네가 좋은 사람이라서 누구 한 명쯤은 알아보고 다가오지 않을까?”
연희도 흘러가는 묘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현수의 눈을 피하며 말을 더듬었다.
“마, 말이라도 고마워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글쎄, 조금만 주변을 둘러봐. 가까이에 있지 않을까?”
연희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네….”
그 모습에 현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애가 영 눈치가 없지는 않네. 이런 애는 이런 뻔한 전개가 직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