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057화
팔을 배고서 아예 현수 쪽으로 돌아누운 채 현수를 올려다보고 있는 예린의 얼굴에는 섹스 이전과는 달리 애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현수는 이쯤 됐으면 그녀에게 질문을 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현수는 예린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너 근데 김종억이라고 알아?”
현수의 질문에 예린이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어? 네가 걔를 어떻게 알아?”
“사연이 좀 있는데, 혹시 얘랑 친해?”
“어…. 친한 건 아닌데 그냥 친분은 좀 있어. 근데 나랑 아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인별에서 너 봤을 때 너무 예뻐서 친구들도 한 번 둘러보다가 팔로잉 돼 있는 거 보고 물어보는거야.”
“그래? 그래서 무슨 사연인데?”
예린의 궁금증을 충분히 유발한 뒤 현수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근데 친분이 좀 있으면 말하기 좀 그런데….”
“엥? 안 좋은 일인가 보네? 상관없어. 되게 가벼운 사이라.”
‘섹파인가보네.’
현수는 예린의 말에서 그들의 관계를 유추했고, 섹스를 하며 쌓은 유대감으로 그녀에게 호소했다.
“아 그래? 그럼 말해도 되겠다. 사실 얘가 여자관계도 복잡하고 이리저리 몸 막 굴리고 다니는 애로 알고있거든.”
“응, 맞아. 걔 고추 걸레로 유명했는데, 요즘엔 안 한다고 그러던데?”
“아니야. 얘가 내 친구한테 작업걸더라고. 근데 친구가 엄청 순진해서 지금 당하고 있거든….”
현수의 말에 예린은 똥씹은 표정을 하며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뭐? 이 새끼가….”
“왜? 넌 무슨 일 있어?”
“하…. 이 말까지 하긴 좀 그런데 사실 걔랑 사귀는 건 아닌데 그냥 좀 즐기는 사이거든. 근데 조건이 원나잇은 해도 다른 주머니 차는 건 안 된다고 했는데, 지금 시도 중인가 보네.”
‘그러는 너는 다른 주머니 차도 되고?’
누가 봐도 예린은 현수를 원나잇 이상으로 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뭐 그건내가 알 바 아니니까.’
현수는 술술 풀리는 이야기에 아까부터 스위트룸 가격이 아깝지 않다는 느낌이 들던 것이, 이제는 아예 아깝지 않다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아 정말? 그럼 혹시 좀 도와줄 수 있어?”
현수의 부탁에 예린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겠어. 어떻게 도와줄까?”
“네가 해줄 일은 되게 간단한데….”
현수는 예린에게 계획을 설명하자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음, 확실히 그 정도면 그 여자애도 바로 정신 차리겠다.”
“고마워. 얘가 너무 순진해서 말해도 못 알아듣거든.”
“아냐, 그럼 그때 보자.”
현수는 그렇게 예린과 약속을 잡은 뒤, 체크아웃을 하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 * * *
며칠 뒤.
현수는 연희와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하고 그녀의 집앞에 서 있었다.
“오빠!”
연희는 현수가서 있는 것을 보고 반갑게 달려와서는 그의 손을 잡고 눈을 반짝였다.
마지 연인을 대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현수는 웃음이 나왔다.
만약 다른 남자였다면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이렇게 나오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을 수준이었다.
‘이정도면 종억이 새끼한테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겠네.’
그러나 현수는 뭐든지 확실하게 처리해야 마음이 편했기에 예정대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오늘도 게임해?”
연희는 게임에 푹 빠져버렸는지 연락할때마다 게임 얘기를 주로 하며 피씨방을 가고싶다고 칭얼댔다.
“피씨방은 조금 이따 가고 밥 먼저 먹을까? 내가 알아둔 곳이 있거든.”
“알겠어. 빨리 먹으러 가자.”
현수는 자연스럽게 연희를 데리고 예린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밥집이 뭐 이런 곳에 있데?”
현수가 이끈 곳은 번화가에서 약간 떨어진 모텔촌이었다.
연희는 특유의 분위기에 민망함이 몰려왔는지 투덜대고 있었고, 현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예린을 찾고 있었다.
“아니~ 무슨 대낮부터 하자고 난리야?”
“네가 하고 싶다며, 이왕 온 거 그냥 들어가자.”
“아 싫다니까.”
그때 모텔 앞에서 서성이며 여자는 들어가기 싫다고 버티고 있고, 남자는 여자에게 치근덕대며 여자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다.
‘저기 있네.’
예상대로 그들은 예린과 김종억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다가갈수록 연희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갔다.
현수는 설마하는 표정을 지으며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야…. 혹시 쟤 너랑 연락하던 애 아니야?”
“그런 것 같아.”
정색하고 말하는 연희의 언행에서 냉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그들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고, 이내 예린과 현수가 눈을 마주쳤다.
예린은 과장된 행동으로 종억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아 진짜 왜 이래! 사람들 지나가는데 쪽팔리게.”
그제서야 종억이 주변을 둘러봤고 연희와 눈을 마주쳤다.
종억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종억은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어버버거리며 눈을 돌리며 예린을 쳐다봤다.
“뭐, 왜. 아는 사람이야?”
“아, 아니 그게….”
연희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무서운 표정으로 잠시 멈춰섰다.
“어이가 없네. 여자친구도 있으신 분이 저한테 연락은 왜 하신 거에요?”
“무슨 소리에요? 저 여자친구 아닌데요?”
“야!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니야. 너 나랑 그냥 심심하면 떡이나 칠려고 만나는 거잖아. 이 섹스에 미친새끼야. 애초에 우리 만날 때 이런 상황 없게 잘하라고 하지 않았나?”
‘오,연기 잘하는데? 진심으로하는 건가?’
현수는 자신이 꾸민 상황이지만 너무나도 리얼한 광경에 감탄하고 있었다.
“아…. 저랑도 그냥 그럴 생각으로 연락 하신 거네요? 제가 되게 쉬워 보였나 봐요?”
종억은 이제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아니야. 너한테는 정말 반해서 그랬던거야.”
그 소리에 옆에 있던 예린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친 새끼가 그럼 나랑은 떡만 칠려고 연락했니?”
종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식은땀만 줄줄 흘리며 어떻게든 해결 해보려했다.
“그런거 아닌거 너도 잘 알잖아. 왜 이래 진짜!”
“뭘 왜 이래야? 지금 네가 잘했다고 소리치는거니?”
“좀 닥쳐! 이 걸레같은 년아. 맛있어서 몇 번 잘해줬더니 존나 기어오르네?”
현수는 급전개 되는 상황에 흥미가 크게 동했다.
‘존나 재밌네.’
짜악-!
종억의 고개가 휙 돌아가며 시원한 소리가 들려왔고, 예린이 다시금 쏘아붙였다.
“좆도 작은 새끼가 지가 잘하는 줄 알고 허구한 날 섹스하자고 난리 피우더니 이제 와서 나보고 뭐?앞으로 연락하지마. 돈 많은 거 빼고는 볼 것도 없는 새끼가.”
“이, 이! 창년이!”
종억 또한 반격으로 팔을 휘두르려 했지만, 연희의 손에 가로막힐 만큼 나약했다.
“뭘 잘했다고 손찌검을 하세요?”
흥분한 상태의 종억이 크게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현수의 눈치를 보더니 숨을 크게 들이 내쉬며 말했다.
“하, 씨발 그래서 뭐? 어쩌자고?”
“뭐라고요?”
“아 진짜 짜증나네. 어 그래, 너 존나 쉬워 보였어. 딱 봐도 잘 대줄거 같아서 연락한거야. 어쩔건데?”
‘친구야…. 그거 아니야. 너 큰일 나.’
연희는 정말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너도 나랑 연락하면서 남자 만나고 있었네. 네가 나랑 다를 게 뭔데?아~ 너도 여기로 온 거 보니까 옆에 저 남자한테 대줄려고?”
퍼억-
현수는 연희에게 서슴없이 성희롱을 해대는 종억의 턱을 후려갈겼다.
예린에게 맞은 것과는 달리 파워면에서 차원이 다른 주먹에 종억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어이없다는 듯이 현수를 쳐다봤다.
심지어 예린과 연희마저도 당황한 눈빛으로 현수를 보고 있었다.
“이씨발놈이, 쳤어?”
종억은 광분한 채로 현수에게 달려들었지만, 마른 몸매의 종억은 현수에게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종억아, 최대한 안 아프게 때렸다, 임마. 너 계속 했으면 쥐도새도 모르게 뒤졌어.’
“씨발! 나한테 왜 이러는건데? 너 경찰에 신고할거야! 이거 폭행이야 알아?”
제압당한 채 추하게 발악을 하는 종억에게 현수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신고 해. 난 그럼 니 실체 싹 다 까발리고서, 사실적시 명예훼손까지 덮어쓸 준비 되있으니까.”
그리곤 귀에다가 작게 속삭였다.
“너 오늘 이정도로 끝난게 다행인줄 알아.”
“가자, 연희야.”
현수는 연희의 손을 잡고 그들을 지나쳐 가면서 예린에게 윙크를 했다.
예린은 연기하는 것이 즐거웠는지 얼굴에 미소가 완연했고, 연락하라는 듯이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며 흔들었다.
현수는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 종억을 바라봤는데 그는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차린 채 억울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너 얘 꼬셨으면 그대로 인생 조졌어. 내가 너 살린거니까 억울해하지마라.’
묘하게 전생의 젊었을 적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동질감에 안해도 될 행동까지 하며 종억을 구해준 현수는 이제 더는 그에게 관여하지 않기로했다.
‘목숨은 살려줬으니까, 연희는 내가 먹을게. 꼽으면 회귀하던가.’
모텔촌을 벗어나 현수가 원래 가려던 밥집으로 걸어가던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연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들은 참 왜 그럴까….”
현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연희에게 현수는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한 사람한테 집중하기도 힘든데 참 재주도 좋아.”
연희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쏘아댔다.
“재주가 좋아? 오빠도 저러고 싶어?”
“말했잖아. 한 사람한테 집중하기도 힘들다고.”
‘얘는 우리집은 절대 못 오겠네. 당장 가윤이랑 동거하고 있는거만 들켜도 암살당하겠지?’
현수는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결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현수의 말에 연희의 기분이 조금 풀린 듯 했지만, 맛집을 왔는데도 밥을 깨작깨작 먹는둥 마는둥 하는 모습을 보며 충격이 어지간히 커보였다.
“게임하러 갈까?”
연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반색했지만, 이내 곧 수그러들며 다시금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지금은 별로 안하고 싶어졌어.”
“알겠어. 그럼 카페나 가자.”
현수는 연희를 이곳 저곳 다 데리고 다니며 데이트를 했지만, 연희의 표정은 결국 풀어지지 않았다.
‘진짜 모쏠 특이점은 다 들고 있네. 연락 잠깐 주고 받은 애가 뭐라고 저렇게 정을 줬데?’
하루종일 텐션이 떨어져있는 연희를 보며 혀를 쯧쯧차던 현수.
사실 그도 미화가 되었을 뿐이지, 과거의 20대에는 한 달 만에 헤어진 여자친구를 세 달 동안 그리워한 전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어 할 것이 없어지자 현수는 연희에게 말했다.
‘이거 잘하면 오늘 집에 입성할 수 있겠는데?’
“집에 바래다 줄게. 가자.”
묘하게 낮은 음성에 연희가 반응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응.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게 좋을 것 같아.”
가는 내내 멍하니 기운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집앞에 도착한 연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현수에게 말했다.
“바래다줘서 고마워.”
‘뭐래, 바래다 주긴. 내가 들어갈려고 온거야.’
그때 연희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굉장히 서운해 보이는 현수의 표정이었다.
드디어 분위기를 파악하고 뜨끔한 그녀가 현수에게 말했다.
“아…. 미안. 내가 너무 쳐져있었지?”
“응. 솔직히 너무 서운하다. 왜 나랑 같이 있는데 다른 남자 생각하면서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은 건지 모르겠어.”
연희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지며 안절부절해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미, 미안해…. 그럴려고 그런게 아닌데….”
“아니야. 괜찮으니까 올라가.”
현수는 굳은 표정으로 연희에게 올라가라고 했지만, 그의 서운해하는 표정을 본다면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다.
“아, 아니. 오빠…. 우리 근처카페에 가서 잠시 얘기 좀 할까?”
“아니야. 뭣하러 그래. 나 신경 쓰지말고 올라가.”
연희는 발을 동동 구르며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었지만, 현수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먼저 가볼게.”
현수는 정말로 등을 돌려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고, 연희는 우물쭈물하며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때, 현수가 다시 뒤돌아 서서 약간의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씁쓸하다는 듯이 말했다.
“연희야. 이럴 땐, 달려와서 잡아주는 게 정석이야. 나 진짜 보낼려고?”
현수의 말에 연희가 뭔가 깨달은 듯 달려가 현수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니. 미안해. 가지마. 나 오빠랑 더 있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