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082화
효주는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계속 이런 관계를 이어나가자는 거지...?”
조금 발을 빼는 듯한 효주의 말에 현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 정도 내숭은 떨게 해줄게.’
현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가 좋아서 이렇게 너에게 다가갔지만, 한석이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
현수가 갑작스럽게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 거론하자 효주가 뜨끔했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현수는 말을 계속 이었다.
“하지만 난 한석이에게서 너를 빼앗고싶었던 게 아냐. 안되는 걸 알면서도, 참으려고 했는데도, 도저히 안될만큼 네가 좋았던 거지. 그래서 난 오늘이 마냥 나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아.”
현수가 한석을 힐끔 보더니, 다시 효주를 바라봤다.
“한석이 뿐만이 아니라, 효주 너한테도, 그리고 나한테도. 이건 좋은 일 아닌가...?”
그런 현수의 말에 효주는 아무런 반박도하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 세 사람의 관계가 남들 눈에는 일반적이지 않을지 몰라. 그래도, 그래도 만약 우리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데에서 오는 그 거북함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굉장히 안정적이고 좋은 관계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현수가 그렇게 말하자 효주는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물론 마음은 진즉에 결정난 사안이었고, 노골적으로 ‘하겠다’라는 대답을 내놓는 것에 대해서 흔들리는 것이었다.
현수는 그것을 캐치하고서 곧바로 한석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사실 여기서 한석까지 동의를 하게 되면 효주는 떠밀리듯이 마지몫해 동의하는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석은 현수의 의도를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효주는 한참을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흠... 쉽지 않네.’
현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머리를 굴린 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효주야. 어렵겠지만, 우리가이전으로 돌아가려면 이전과는 다르다는 걸 받아들여야 해.”
효주는 가만히 그 말을 곱씹는 듯 했다.
잠시 후.
효주는 갑자기 자신의 잔을 붙잡더니 벌컥벌컥들이켰다.
그 후 그녀는 잔을 테이블에 조신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렇게 효주의 대답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효주의 대답을 들은 한석의 표정에서 들뜬 감정이 감춰지지 않았다.
‘새끼, 단순하기는.’
현수는 헛웃음을 참으며 효주에게 말했다.
“그래. 고마워.”
그러자 효주도 한석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대답했다.
“나도 고마워...”
현수는 그녀가 한석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 맛이지.’
남자친구의 눈치를 보면서 그에게 애정표현을 하는 이 아슬아슬함.
현수가 효주에게 원하는 진짜 즐거움은 바로 이 맛이었다.
‘어차피 너는 선 넘었어.’
마음 속에 그어놓은 선이라는 것은 한 번 넘는 것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점점 더 쉬워지는 법이었다.
그리고 현수는 그때마다 효주가 어떤 여자로 변해갈지, 정확히는 자신이 효주를 어떤 여자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지 기대되었다.
. . .
다음날, 현수는 강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어, 연희야. 수업 들어가?”
그때, 현수의 곁으로 연희가 다가오고 있었고 현수는 그녀에게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연희의 표정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삐쭉 튀어나온 입술에는 심술이 잔뜩 나보였고,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현수를 째려보듯이 쳐다보며 대꾸했다.
“아, 네.”
그녀의 삐친듯한 말투와 태도에 현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큰일났다. 요즘 너무 소홀했어.’
최근 들어서 효주와 있었던 일들이 너무나도 즐거웠기 때문에 연희에게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 못했기에 현수는 연희가 어느정도 서운할 줄은 알고 있었다.
‘저 정도로 삐쳐있을 줄은 몰랐는데?’
현수는 연희의 상태가 심각해보여 여기서 더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판단이 섰다.
그리곤 곧장 그를 지나쳐가는 연희의 어깨를 붙잡았다.
“여, 연희야 잠깐만.”
“왜요? 저 수업 늦어서 들어가 봐야 해요.”
아직 수업이 시작하려면 10분 이상 남았기 때문에 명백하게 지금은 말하고 싶지않다는 의미였다.
현수는 지금 당장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강의가 끝나고 그녀를 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아, 미안해…. 그럼 나중에….”
“약속이 있어서요.”
연희는 나중에 만나려고 하는 현수의 말도 끊으며 차갑게 뒤돌아서서 떠났다.
‘어떻게 풀어주지?’
현수는 강의를 듣는 내내 연희를 어떻게 풀어줄지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고, 강의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이 났다.
‘아 씨, 어떻게든 되겠지.’
현수는 오늘도 그냥 보내면 더욱 풀어주기 힘든 것을 알기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연희야,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할래?”
“무슨 얘기요?”
연희는 여전히 존댓말과 함께 뾰루퉁한 표정으로 현수에게 대꾸했다.
현수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야,정말 미안해. 한 번만 내 이야기좀 들어주면 안될까?”
현수의 진지하고 심각한 태도에 연희도 약간 표정이 풀리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알겠어. 가자.”
그렇게 둘은 강의동을 벗어나 근처에 있던 벤치로 향했다.
현수는 벤치에 앉기 전까지도 머리를 굴리며 연희를 어떻게 구워삶을지 생각했다.
그리곤 벤치에 앉아 곧장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야, 사실대로 말할게…. 너랑 꼭 하고 싶은게 있어서 그걸 준비하느라 너무 바쁘게 움직였어. 너한테 잘하려고 했던 일인데, 이게 너한테 소홀해질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 미안해.”
현수의 진심어린 사과를 들으면 들을수록 연희의 표정이 환해지며 끝을 맺었을 땐, 입가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무슨 준, 아, 아니.”
크흠.
연희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제거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현수에게 말했다.
“다음부터 그러면 안돼, 오빠. 요 며칠 정말 서운했단 말야.”
“응, 미안해. 내가 너무 멍청했어. 앞으로 정말 이런 일 없을 거야.”
현수가 다시금 사과하자 연희의 표정이 완전히 풀리면서 웃음기가 돌아왔다.
‘후, 다행이다. 큰일날 뻔 했네.’
현수는 등 뒤에 약간의 땀이 시원한 바람에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무슨 준비를 했길래 그렇게 바빴어?”
그러나 현수는 또 다시 머리를 굴릴 수 밖에없었다.
“아, 그니까. 음…. 강릉에 펜션 빌려서 같이 보내고 싶었거든. 그래서 이것저것 일하면서 용돈 좀 벌었어. 사실 이것도 너랑 상의하고 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급박하게 나온 핑계치고는 그럴 듯 했고, 연희는 펜션이라는 말에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뭐야~. 못 가면 어쩌려고 그렇게 계획까지 다 세워놨어?”
연희는 말과는 다르게 이미 머릿속으로 그날 갈 옷과 뭘 먹을지부터 떠올리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못 가?”
현수는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음…. 상관없긴 한데…. 다음부턴 나한테 말은 해줬으면 좋겠어.”
연희의 말에 현수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응, 알겠어. 고마워. 그럼 예약 다 해둘게.”
“아, 아무튼. 내가 못 가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렇게 말하는 연희의 얼굴에는 설레고 신나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어 보였다.
이렇게 위기를 넘긴 현수는 집에 도착해서 곧장 강릉의 펜션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왕 가는거 풀빌라가 낫겠지?’
그러나 시간이 촉박해서 그런지 현수가 원하는 좋은 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남은 방이…. 거의 없네. 어쩔 수 없이 일요일에 가야되나?’
그래도 비수기였기 때문에 그나마 일요일에는 몇 개의 방이 있었고, 현수는 운이 좋게 꽤 좋아 보이는 방을 찾아서 그곳을 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곤 연희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연희야, 지금 예약하려니까 일요일에 1박을 하고 와야될 것 같은데 상관없지?]
[1박? 음…. 월요일에 오후 수업이긴 한데, 알겠어.]
[그럼 그날 아침에 데리러 갈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현수는 연희와 약속을 잡은 뒤, 이왕 가는 김에 제대로 놀기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
출발 당일, 현수는 주차장에 서서 한 차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수는 차 전면에 박혀있는 커다란 삼각별을 보고 있자 감회가 새로웠다.
변호수에게 4억을 받은 뒤, 현수는 다른 데에 돈 한 푼 쓰지 않았으나 딱 하나, 이 차를 구매하는 데에는 돈을 과감하게써버렸다.
전생에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나면 꼭 사겠다고 다짐했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그걸 십 년을 넘는 시간을 돌아서 왔네...’
현수는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막상 사고 나서는 한 번도 타보지를 않았었는데.’
차에 탄 현수는 핸들 한가운데의 엠블럼을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승차감 좋네.’
현수는 승차감을 느끼며 연희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연희는못해도 100m가 떨어져있는데도 눈에 띄었다.
‘진짜 이쁘긴 정말 이뻐.’
그녀는 20살 특유의 어색한 꾸밈이 새내기 특유의 파릇함 덕분에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으며 주변을 화사하게 만들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평소보다 힘을 실어 꾸민 그녀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수는 연희의 바로 앞에 차를 대고서 클락션을 짧게 누르고 창문을 내렸다.
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숙이고 차 안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어? 뭐야? 이 차 오빠 차야?”
연희는 현수를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현수는 그 반응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 정도 급의 차는 엄청 익숙해 보이는데?’
“응, 아버지가 물려주셨어.”
현수의 말에 연희는 수긍하는 듯 보였지만,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 그래? 근데 그런거 치고는 거의 새차인데?”
그러면서 운전석쪽의 계기판을 바라보더니 현수를 빤히 쳐다 보았다.
“키로수가….”
연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현수는 잠깐 당황했지만,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맞아. 그냥 새찬데, 아버지가 차를 좋아하셔서 이것저것 모이시는데, 그중에 하나 내가 대학 입학 기념으로 하나 달라고 했지.”
현수의 입은 뇌를거치지않고 입이 절로 거짓말을 내뱉으며 능숙하게 위기를 모면했다.
“와, 그럼 오빠 집 좀 잘 사나보다? 다행인데?”
현수가 듣기엔 연희의 말은 아무리 들어도 그가 잘 살아서 남자를 잘 잡은 것 같다는 느낌은 절대 아니였다.
‘뭐지?’
현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사는건 아니고, 그냥 부족함 없는정도야.”
실제로 현수는 평범한 가정에서 부족함없게 자랐지만, 연희는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었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빠, 근데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오빠는 집안 환경이 엄청 차이가 많이 나도 만날 자신 있어?”
‘이건 어떻게 들어도 자기가 엄청 잘 사는데 괜찮냐는 말 아니냐?’
현수는 표정관리를 하며 짐짓 모르는 척 연희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집안이 뭐가 중요해.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됐지.”
연희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운전대를 잡고있는 현수의 팔에 살포시 기대며 말했다.
“그렇지? 다행이다, 정말.”
‘진짜 대체 얼마나 잘 사는거야?’
현수는 연희의 집안이 너무 궁금했다.
자동차 컬렉션이 있다는 집안을 상대로도 집안 환경 차이가 엄청나도 괜찮냐는 말을 꺼내는 연희를 보며 현수는 반드시 이 여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