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083화
경기도를 지나 강원도를 넘어오는 동안 현수는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운전이 이렇게 재밌는거였나.’
어마어마한 가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전생의 현수의 입장에선 드림카라고 부를 수 있는 차를 회귀한지 몇 달 만에 타고 다니자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그들은 강릉에 도착해 해변이 보이는 풀빌라멘션에 들어섰다.
“우와~! 여기 진짜 좋은데?”
“마음에 들어?”
현수는 말을 하면서도 고작 이런데에 만족을 할까 생각을 했지만, 연희는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응! 진짜 마음에 들어. 해외는 많이 나가 봤는데, 국내여행은 거의 안해봤거든.”
“좋다니까 다행이네. 내심 걱정했거든.”
“아냐, 진짜 좋은걸? 빨리 나가자. 여기서 바깥 풍경 보니까 나가고 싶어졌어.”
“그래, 짐만 풀고 나가자.”
“아, 맞다. 오빠 잠시만.”
연희는 짐을 풀고 나가려던 찰나, 현수를 불러세우며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상자를 챙겨 나왔다.
‘저, 저거?’
“오빠 여기 오려고 용돈 벌러다녔다며, 그러니까 나도 선물.”
연희가 건넨 것은 호그테이어 시계였다.
보통 직장인들 2달치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살 수 있는 제품을 용돈으로 샀다고 하니 현수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연, 연희야... 나야 용돈으로 사준 거고. 너는 이거 부모님 돈으로 산 거 같은데 받기 조금 그래.”
“걱정 마. 나도 용돈이야. 그동안 모은 용돈 다 털어야 했지만.”
‘미친. 이게 용돈이라고?’
용돈이라고 하자 현수는할 말이 없었다.
‘이건 거절하기도 애매하지.’
솔직히 이렇게 비싼 선물은 오히려 현수 입장에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현수는 표정관리를 하며 연희에게 물었다.
“...근데 왜 시계야?”
“오빠 다른건 다 있어보이던데 손목이 휑해보여서 한 번 골라봤는데 별로야…?”
“아니, 아니. 정말 좋아. 진심이야.”
현수는 시계를 착용해보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이걸 용돈으로 살 정도로 금수저라 이거지? 진짜미쳐버리겠네.’
물론 시계선물도 좋았지만, 연희가 금수저라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현수는 시계까지 착용하고 한껏 멋을 부리며 연희와 함께 해변을 거닐었다.
“해외여행은 어디어디 가봤어?”
“음…. 안가본 곳 찾는게 더 쉬울 것 같은데?”
연희는 웃는 얼굴로 맥이는 듯한 말을 아무렇지않게 내뱉었다.
‘오늘 내가 얘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저번과 다르게 연희의 정체에 대해 가닥을 잡을수록 데이트에서 그녀를 만족시킬 자신이 조금씩 떨어졌다.
‘백날 돈 지랄 해봐야 하찮아 보일 것 같은데.’
현수는 차라리 연희에게 피씨방 데이트처럼 그녀가 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시켜주며 시간을 보내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적당히 생각을 정리한 현수가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야, 저기 오락실 있던데 한 번 가볼래?”
“오락실이요!?”
연희는 두 눈을 빛내며 현수를 바라보았고, 현수는 자신의 생각이 어느정도 들어맞았다는 것을 느꼈다.
현수는 벌써부터 신나있는 연희를 데리고오락실로 향했다.
그리곤 만원짜리 지폐를 교환한 뒤, 연희에게 500원 주화를 몇 개 주며 말했다.
“하고싶은 거 있으면 500원 짜리 하나씩 넣고 게임 하면 돼. 해보고 싶은 거 있어?”
“난 저거해볼래.”
연희는 현수가 어린시절 즐겨했던 태권태그모드를 가르켰다.
“저거? 처음하면 좀 어려울텐데. 내가 알려줄게.”
현수는 피식 웃으며 연희의 곁에서 그가 알고있는 기술들을 알려주며 조작법을 설명했고, 연희는 그것을 곧잘 따라했다.
‘얘는…. 설마 이것도 잘하는 건 아니겠지?’
현수는 지난번 피시방 데이트에서 있었던 굴욕을 생각하며 수치스러워졌다.
‘어차피 컴퓨터랑만 할텐데, 뭐.’
어차피 오늘 처음 하는 애한테 질리도 없을뿐더러, 이제 겨우 인공지능과 겨루는 애가 사람과 할 생각을 할 것 같지도 않았기에 애써 불안감을 가라앉혔다.
LOSE.
“….”
몇 분 뒤, 현수는 나라잃은 표정으로 허탈하게 앉아있었다.
“에이, 뭐야. 컴퓨터는 너무 쉬워서 오빠랑 하는데 오빠도 다를게 없네?”
뼈를 때리다 못해 부숴버리는 연희는 한마디에 현수는 속에서 욱하고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 있는 게임은 다 처음할건데, 이 중에 내가 이길게 하나도 없겠어?’
현수는 대결이 가능한 게임들을 훝어보며 이를 갈며 말했다.
“연희야, 그럼 우리 이제 저거 해볼까?”
LOSE.
잠시 후, 현수의 눈앞에는 남자의 게임부심을 뭉개버리는 패배를 뜻하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 이게…. 말이 돼?’
현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초반에는 우세해도 결국에는 져버리는 기이한 현상.
연희는 말도 안되는 재능충이었다.
“뭐야, 오빠 맨날공부만 해서 그런가 게임은 영 못하네.”
연희의 실망한 표정을 보며 현수는 마지막이자 최후의 자존심.
비비탄으로 하는 사격게임을 바라보았다.
‘내가 암만 전역한지 오래됐어도, 이건이기겠지?’
“연희야, 우리 마지막으로 저거 한 번 해보자.”
“사격? 오빠 아직 군대도 안갔다왔는데 괜찮겠어?”
연희는 진심으로 현수가 또 져서 우울해하는 것을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좀 져주던가….’
현수는 양심이 찔렸지만, 이것만이라도 이겨야겠다는 마지막 자존심이 그것을 무마했다.
현수는 장난감 총을 손에 쥐고 쉼호흡을 한 뒤, 숨을 반절정도 내뱉고 두 눈을 부릅뜨고 무호흡상태로 모든 총알을 쏟아 냈다.
‘저것만 맞추면!’
현수는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작은 표적을 겨냥하고 쐈지만, 마지막에 약간의 흔들림에 빗나가고 말았다.
‘아, 아쉽다. 그래도 연희는 이겼겠지?’
현수는 뿌듯한 표정으로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을 때,연희는 이미 모든 총알을 다 쏘고 현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깝다. 저거만 맞췄으면 나랑 비겼을건데.”
연희의 말을 듣자마자 현수는 점수판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그곳에는 모든 표적을 다맞춰야 나올수 있는 점수가 올라와있었다.
“….”
“인형은 오빠가 가질래?”
현수는 말없이 연희가 건네는 인형을 받고서 조용히 발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오,오빠? 삐쳤어?”
“아니…. 그냥 좀 우울할 뿐이야.”
오락실에 있는 모든 게임을 진 현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의욕을 잃은 채였다.
밖으로 나와 한동안 걸어 다니자 현수는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하, 날씨 좋네.’
그녀는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현수에게 미소를 지었는데, 오늘따라 더욱 이뻐보였다.
‘이쁘긴 진짜 이쁘긴 하네.’
“사진 찍어 줄까?”
“응! 오빠도 같이 찍자.”
연희는 현수와 같이 찍자고 했지만, 현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찍어주는 건 좋아하는데 찍히는건 싫어해.”
현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어떤 흔적도 남기는 것을 경계하며, 사진은 극구 거부했다.
‘이거 어디 뿌려지기라도 하면 나 큰일나 임마….’
연희는 같이 사진을 찍어주지 않는 현수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듯 했지만, 현수가 찍어준 잘 나온 사진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도중이었다.
“오빠. 나 잠시만.”
연희는 잠시 화장실로 자리를 비웠다.
현수는그 근처를 서성이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현수는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꽂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들자, 두 명의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혹시 혼자 오셨어요?”
구릿빛 피부의 여자와 그 뒤에 하얀 피부의 고양이 상을 한 여자.
‘이런데서도 헌팅을 당해보네.’
그들은 현수가 마음에 들었는지 먼저 다가와 헌팅을 하기 시작했다.
현수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단 번호만 따놓고 나중에 불러서 따먹을까?’
그러나 왠지 모를 싸한 느낌에 현수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녀에게 말했다.
“저 일행 있어요.”
“잘 됐네요. 저희랑 같이 노실래요?”
현수는 돌려서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여자는 눈치가없어보였다.
“아뇨, 여자애예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번호라도 좀 알려주실래요?”
여자는 집요하게 현수에게 들이댔고, 현수는 여전히 드는 싸한 느낌에 그것마저 단호하게 거절하고 자리를 떠났다.
“뭐야?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연희는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있는 현수를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랑 떨어져 있기 싫어서?”
“아, 뭐야! 그런 말 하지마.”
연희는 현수의 능청맞고 느끼한 발언에 질색을 했지만, 내심 좋아보였다.
시간이 지나 날은 어둑해져갔고, 그들은 펜션으로 돌아왔다.
현수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뒤, 오기전에 준비해둔 재료들을 꺼내 요리를 시작했다.
“우와, 오빠는 못하는게 뭐야?”
“게임…?”
“….”
“….”
“연희야, 근데 이거 괜찮아?”
“응? 뭐가?”
현수는 자신이 준비한 요리들이 정말 괜찮을까 생각했다.
‘말하는 거 들어보면 이런 싸구려 음식은 입에도 안 댈 것 같은데.’
“고기랑 와인이 그렇게 좋은게 아니라서.”
“에이, 나도 이런건 없어서 못 먹어.”
연희는 정말 빈말이 아닌 듯 처음 본다는 듯이 현수가 준비한 음식들을 구경했다.
‘무슨 눈빛이 이런 티비에서 보는 음식들을 실제로 먹어보다니 하는 눈빛이냐….’
그래도 식사가 시작된 이후, 연희는 현수가 해준 음식들은 남김없이 잘 먹었다.
그 후 두 사람이 식탁에서 와인을 홀짝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던 도중이었다.
“오빠, 근데 나한테 할 얘기 없어?”
“응?”
연희는 갑작스럽게 표정이 어두워지며 현수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듯 쳐다보았다.
“나 사실 아까 어떤 여자가 오빠한테 말거는 거 봤어.”
‘와…. 어쩐지 싸하더라.’
현수는 역시 아까 여자들을 거절하기를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 그거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냥 나한테 길 좀 물어보는거였거든.”
현수는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기 싫어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연희의 표정은 더욱 안좋아지며 서운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내가 바보인줄 알아? 어떤 사람이 휴대폰을 건네면서 길을 물어봐?”
연희는 이미 가까운 곳에서 보고 있었는지, 휴대폰을 건네던 여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현수는 금방 거짓말이 들통나자 잠깐 당황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연희에게 돌려말했다.
“연희야, 그거 정말 네가 걱정할까봐 그랬어. 미안해. 바로 거절하고 돌려보냈었어.”
“그것도 다 봤어. 그래도 오빠가 다 사실대로 말해줬으면 했는데, 말을 안해준게 너무 서운해.”
“난 괜히 긁어부스럼 만들기 싫어서 그랬어. 말하면 혹시나 기분이 안좋아질까봐.”
“그래도 오빠…. 솔직히 난 좀 불안해, 우리 사이.”
이어지는 연희의 말에 현수는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얘는 아직 사귀자고 말도 안했는데 무슨 놈의 우리 사이냐…?’
연희는 이미 현수와 사귀고 있다고 확정적으로결론을 내리고 있는 상황인 듯 보였다.
알아서 착각하고 있는 상황은 좋았지만, 현수와의 사이를 불안해 하는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말 나온 김에 확실하게 다잡아 놔야겠네.’
현수는 확실하게 연희를 교육시켜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연희는 스무 살 연애 초보의 전형이었다.
이때 현수가 확실하게 자신의 철학을 제대로 녹여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앞으로 연희를 상대함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심지어 얘는 팔랑귀에 단순해서 진짜 지금 다잡아놓은 대로 쭉 갈 애야.’
현수는 곧장머리를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