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088화
그래도 혜정의 의도대로 어색함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소연과 주영의표정을 보면 남자들만 어색함을 지우고 있어보였다.
‘언니…. 저 분들 벌써 취한 거 아니에요?’
주영이 귓속말로 혜정에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혜정은 저 둘이 취하는 것보다 더욱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늦게 온다고?’
이런 어색한 분위기라도 현수같은 사람이 끼이면 분명 분위기는 반전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애초에 저 둘과는 친구 사이였기에 혜정의 짝이 될만한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혹시나 그와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설레고 있었다.
‘감히 구라를 쳐?’
혜정은 이렇게까지 안 오는 것을 보고 종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 점점 확신을 가졌다.
심지어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현수가 안나오게 되었으면 성비라도 맞춰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종우가 괘씸해졌다.
‘차라리 다른 애를 한명 더 데리고라도 오던가.’
혜정은 앞에 놓은 소주잔을 한 번에 들이키고울컥하는 감정을 내뱉었다.
“야. 너 이게 맞다고 생각해?”
“어, 어?”
종우는 갑자기 화가나 보이는 혜정의 태도에 당황했다.
“하여간 너를 믿은 내가 병신이다. 온다고 해놓고 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안오는데?”
“뭔가 착오가 있나 봐. 정말 오기로 했단 말이야.”
“그럼 이쯤 됐으면 연락이라도 한 통 와야되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안오는거면 그냥 안오는거 아니냐고.”
쏘아붙이는 혜정을 보자 종우가 식은땀을 흘리며 다리를 덜덜 떨면서 말했다.
“야. 진짜 좀 믿어라. 진짜 곧 올거야. 걔가 거짓말 칠 애는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는 종우부터가 정말 올지 안올지 모르겠다는 불신의 표정이었다.
‘말하는 놈이 믿음이 없는데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혜정은 더는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종우를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분위기가 점점 싸하게 변하는 그때, 옆에서 종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편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그 목소리에 자리에 모여있던 다섯 명의 시선이 쏠렸다.
‘세상에….’
혜정은 절로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존나 잘생겼어.’
. . .
“어디가세요?”
외출준비를 하는 현수를 향해 가윤이 물었다.
“응. 우리 과 애들이 과팅 나가자고 하더라고.”
“과팅...이요?”
과팅이라는 소리에 가윤의 표정이 굳었다.
“아, 오해는 하지마. 부탁한 애들이 워낙 여자 경험이 없어서 도와주러 가는거야.”
가윤의 표정을 보고 현수가 핑계를 댔지만, 가윤은 여전히 서운한 얼굴이었다.
“싫어?”
현수가 가윤에게 물었다.
그러자 가윤은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수는 가만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억지로 대답시켜서 뭐해. 스스로 답을 내리게 해야지.’
그리고 잠시 후, 가윤은 순순히 대답했다.
“아니에요. 다녀오세요.”
“응.”
현수는 가윤에게 가볍게 뽀뽀를 해준 뒤 집을 나섰다.
. ..
‘별 것 아닌데 생각보다 설레네.’
현수는 집을 나서면서 은근히 설레여오는 자신을 느꼈다.
지금처럼 욕망에 충실하게 삶을 살고있는 현수와는 180도 달랐던 전생의 현수는 종우같은 친구들과 나름 재밌었던 과 생활을 즐겼던 기억이 났다.
‘근데 그때도 과팅은 한 번쯤 나갔던 적이 있던 것 같은데.’
그때는 현수는 여자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그때도 종우가 가자고 사정을 해서 갔었던 것이 스쳐지나가듯 떠올랐다.
경험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던 현수는 어리숙한 태도로 소개팅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좋지 못한 기억만 아련하게 떠올랐다.
‘지금생각하면 꽤 재밌는데.’
과거를 추억하면서 골목주점 앞에 도착한 현수는 약간 당황했다.
이미 술자리를 시작되어있었고 시간도 꽤 흘러있었다.
‘뭐야? 8시까지 아니었나?’
테이블 위에는 비어있는 소주 두 병과 건더기는 거의 남지않은 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여간 저 병신….’
현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종우가 약속시간을 잘못 알려준 것을 알아챘다.
의도치않게 약속을 엄청 늦게 온 사람이 되었지만, 현수는오히려 안좋은 이미지를 심어줬으니까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을 하며 일부러 늦은 척을 했다.
“아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종우에게 아무런 탓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깍아내리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더 현수의 외모는 뛰어났다.
삽시간에 여자들의 시선이 반짝이며 현수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또이렇게 되네.’
현수는 진심으로 종우와 도환이 이번 소개팅을 성공적으로 끝내기를 바라는 중이었다.
의도치않게 받은 주목 때문에 자리에 앉은 뒤 최대한 조용히 있으며 관심을 종우와 도환에게 돌리려고 했다.
그 와중에 모델과 삼인방의 몸매와 얼굴을 관찰하기는 했지만.
다들 스타일 자체는 비슷했고 20대 초반의 풋풋함이 느껴졌다.
‘쟤가 제일 낫긴하네.’
그 와중에도 제일 현수의 스타일이었던 사람은 소연이었다.
비슷한 스타일임에도, 확실히 태가 나고, 분위기 있게 예뻤다.
하지만 현수는 이내 아쉬움을 달래며 기대를 버려야 했다.
‘내가 쟤를 찍으면 상대가 안맞아지는데. 아쉽네.’
대충 상황파악이 끝난 현수는 오늘 자신의 파트너가 될 상대가 누구인지 각이 섰다.
‘혜정이네.’
종우의 친구. 혜정이었다.
‘그럼 판 깔아야지.’
“소영씨랑 주영씨는 집이 어디세요?”
“형제는 있으세요?”
현수가 잠시 상황파악을 하는 틈에도 종우는 거침없이 호구조사를 하며 여학생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멘트의 수준을 보는 순간 현수는 직감했다.
‘꼬였다..’
밑도 끝도 없이 부담을 팍팍 주는 태도에 상대 여자들은 어색하게 대답을 했고, 대화가 끊기지 않기 위해 종우는 또다시 무리한 질문을 던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이 미친놈은 이 사단을 낼 거 같으면 시간이라도 제대로 알려주던가.’
현수는 살짝 술기운도 올라왔겠다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도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 종우를 보며 한숨이 나올 뻔 했다.
‘이럼 어려운데, 어떻게든 떠먹여줄 생각이었는데.’
상대방들과 이어질 수 있게 최대한 판을 깔아줄 생각이었고, 자신도 있었다.
현수는 스스로의 언변이라면 스무살 짜리들은 얼마든지 쥐락펴락할 자신이 있었고, 종우네가 찐따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하드 난이도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우의 사소한 실수 덕분에 상황 난이도는 현수에게도 헬 난이도가 되어버렸다.
‘모르겠다. 일단 최선을 다 해봐야지.’
현수는 일단 얼다 못 해 가시방석 수준인 자리의 분위기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상대가 될 것이 유력한 혜정에게 본격적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종우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아. 동네 친구였어요. 꽤 오래된 사이에요.”
“그럼 저랑도 친구겠네요. 말 편하게 하세요.”
“그래! 그런데 너 진짜 종우랑 친해?”
“당연하지, 나 미팅 처음이야.”
“아 진짜? 왜?”
“그냥 재미있을 거 같기도한데, 괜히 불편할 거 같기도 해서. 그런데 종우가 오자고 해서 그냥 맘 편하게 왔지.”
현수가 자연스럽게 종우를 띄워주자 여자들은 종우를 새삼 다시 봤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혜정 또한 웃으면서 종우에게 말했다.
“오. 박종우! 많이 컸다?”
종우는 갑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자 크게 기쁜 기색이었다.
“그래. 이제 알았냐? 이 오빠는 원래 좀 컸어.”
그 대사를 뱉는 순간 여자들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본 현수는 순간 종우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어졌다.
‘자신감은 좋은데 지금은 겸손 좀 해라...’
띄워주기가 무섭게 그걸 거침없이 깎아먹는 종우의 발언에 현수는 새삼 지금 순간이 헬 난이도라는 것이 자각됐다.
“하여튼, 현수야. 얘는 칭찬 해주지 마.”
“뭐야. 살짝 분위기가 이상한데, 박종우. 설마 너 갑분싸 만들었냐?”
현수의 말에 종우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여자들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을 뻔 했다가 급하게 표정관리를 했다.
그런데 종우가 당황한 기색으로 어버버 거리는 대답을 하기 직전이었다.
“와. 네가?”
현수가 그렇게 말하면서 웃긴다는 듯 살짝 터트리자 여자들의 표정에 순식간에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말이야?”
“아니. 얘 우리끼리 있을 때에는 다 죽은 분위기도 살려놓고 못 끼는 애 챙기고 장난 없거든. 그런데 분위기가 살짝 어색하길래 이상했지 나는.”
“그래?”
혜정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현수의 질문에 반문했다.
‘너도 네 동생들 이어주려고 왔으면 좀 모른 척 좀 하지?’
현수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생각해보면 얘가 오티때에는 살짝 어색해 했던 거 같기도 하다. 야. 너 하던대로 해. 왜 여기와서 낯을 가리고 있어.”
여자들은 종우에 대해서 살짝 의외라는 듯 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됐다.’
가장 묵직한 똥 하나를 치우자 현수는 마음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그 후로도 현수는 집중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종우와는 다르게현수는 말을 꺼내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그러자 여자들은 조금씩 이 자리에 대한 어색함을 덜 느끼기 시작했고, 한 마디씩 자기들도 입을 열어갔다.
그 상황에서 현수는 자신에게 쏠릴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 계속해서 친구들을 띄워주는 와중에도 혜정에게 시선을 주로 고정시켜놓은 채, 자신이 혜정에게 관심이 있음을 어필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지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나머지 여자 둘도 현수가 누구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눈치를 챘다.
그때부터 그녀들은 이 자리를 즐기자는 마음으로 바뀌었는지 종우와 도환에게도 조금씩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때마침 종우와 도환도현수가 자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풀어놓자 조금씩 바보같은 면을 내려놓고 있었다.
‘진짜 더럽게 힘드네.’
그 와중에도 현수는 지금 이 순간이 완전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안주가 다 떨어져가고 테이블 위에 술병들이 늘어나 있을 즈음이 되자 현수는 분위기가 쳐지지 전에 미리 선수를 쳤다.
“우리 이제 2차 갈까?”
현수의 말에 종우와 도환은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여자들을 바라봤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현수는 또다시 두 사람의뒤통수를 한 대씩 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여자들의 대답은 오케이였다.
“언니 괜찮아요?”
“응 나는. 너는?”
“저도요. 소연아 넌?”
“나도 좋아.”
곧바로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자 종우와 도환이 좋아하는티를 숨기지 못했다.
현수는 그것을 못 본 척 하며 말했다.
“그럼 가자. 우리 화장실만 잠깐 다녀올게.”
그렇게 말하며 현수는 종우와 도환에게 슬쩍 눈치를 줬다.
‘이거까지 못 알아보면 진짜 니들은 답 없다.’
“아 그럼 나도.”
“어, 그럼나도 잠시만.”
다행히도 두 사람 다 눈치를 채고서 따라와주었다.
자리에서 잠시 벗어난 종우와 도환이 현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지금부터 니들 교통정리 확실히 해. 도환이 너 주영이지? 종우 너는 소연이지?”
두 사람은 현수가 자신들이 눈여겨 본 사람을 정확하게 짚어내자 뜨금한 표정이 되었다.
현수는 무시하고서 두 사람이 실수한 지점을 대놓고 짚어주었다.
“쓸데없이 여기서 엄한 애한테 매너 챙겨준다거나 말 더건다거나 하는 모습 보이지 마. 갑자기 다른 애가 더 마음에 들어도 그냥 포기해. 그래야 너희 둘 다 건지든, 한 명이라도 건질 수 있어.”
현수의 유창한 말에 두 사람은 마치 어린 시절 영웅을 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두 쌍의 눈을 바라보며 여전히 현수는 저 둘이 오늘 역사를 쓰기는 글러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휴 이 찐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