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089화
도환은 눈앞에 놓인 오만원권 지폐 두 장을 보며 의아한 눈빛을 띄었다.
“도환아, 지금 돈 없으면 일단 이걸로 2차 계산해. 주는 거 아니니까 꼭 갚아야된다? 2차 가야지 너도 주영이랑 따로 놀지.”
현수는 그들이 글러먹었다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실패하더라도 경험이라도 쌓아야지.’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은 실패했지만,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라도 몸소 체험하길 바랐다.
도환은 감동스러운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혀, 현수야…. 무조건 갚을게. 돈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되나 했거든.”
“그럴거 같더라. 이왕 노는건데 없어 보이면 안되잖아.”
그리고 현수는 눈을 돌려 종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1차를 사기로 했던 종우가 생각보다 많이 나온 술값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종우야, 너는 일단 이걸로 계산해. 1차는 그냥 내가 살테니까. 만약에 너네 오늘 잘되면 이거 두 배로 갚아야 된다?”
종우는 카드를 건네주는 현수를 보며 구원자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현수는 그들을 보면서 진짜 이 둘이 꼭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챙겨주고 싶어지네.’
쓸데없는 오지랖이었지만 이 모쏠아다찐따들과 친해질 일이없던 이번 생에서는 알아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현수가 건네준 카드를 받아들고 화장실을 빠져나온 종우는 곧장 그녀들에게 말했다.
“1차는 그냥 내가 살게.”
카드를 꺼내들고 종우는 치명적인 척 표정을 지었다.
‘저런 씹...’
현수는 기껏 준 카드를 들고 열받는 행동을 하는 종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워낙에 종우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않았는지 그녀들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종우를 보고있었다.
‘이게 또 먹히긴 하네….’
그러나 혜정만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현수와 종우를 번갈아 보곤 했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는 않았다.
1차를 종우가 계산하자 자연스럽게 2차를 떠나게 되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얼타고 있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 현수가 말했다.
“2차는 어디로 갈까?”
“우리끼리 가끔 가던 술집 있는데 거기 괜찮아.”
혜정도 현수를 거들며 의견을 냈다.
“너네 괜찮지? 그럼 거기로 가자.”
혜정이 추천한 곳은 꽤 괜찮은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현수는 내내 자신은 낮추고 나머지 둘을 띄워주며 종우와 도환이 날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하, 지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현수는 체력이 달림을 느꼈다.
노력에 비해 진전이 너무 없었고, 텐션은 점점 떨어져갔다.
‘바람이나 쐬러 가야겠다.’
현수는 티나지 않게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바람 쐬러 나왔어?”
티나지 않게 나왔다 생각했지만 현수의 존재감이 워낙 강했기에 혜정이 현수를 따라 나와서 말을 걸었다.
“응. 넌 왜 나왔어.”
“나? 음…. 너 보러?”
혜정이 장난기 어린 눈으로 현수에게 은근하게 말했다.
“현수야, 너 진짜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응? 갑자기?”
“뭘 모른척 해. 내가 종우랑 몇 년 친군데 그 녀석안 그런거 내가 다 아는데 네가 자꾸 띄워주니까 진짜로 괜찮은 애처럼 느껴지잖아.”
종우와 오랜 시간 친구로 지냈던만큼 혜정은 현수가 그들을 띄워주고 잘해주는 것을 눈치챘다.
현수는 피식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보다 난 네가 제일 괜찮은 애같은데.”
“아냐. 종우 진짜 괜찮은 애야.”
혜정은 끝까지 종우를 칭찬해주는 현수를 보며 더욱 그에게 호감을 느겼다.
“현수야, 우리 그냥 쟤네들끼리 알아서 잘하게 두고 우리 둘이서 먼저 나갈래?”
‘이것봐라?’
종우와 도환을 케어하느라 지쳐있던 현수는 혜정의 제안에 잠시 혹했지만, 당연하게도 그 둘을 두고 갈 수 없었다.
‘내가 가는 순간 그냥 게임 끝일건데 어떻게 두고 가냐.’
“미안. 그래도 마무리는 하고 가야지.”
“칫, 거봐. 다 띄워주는 거면서. 아 춥다. 나 먼저 들어갈게.”
은근히 현수를 떠본 혜정은 거절당한 것이 민망했는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던 현수는 금세 방해를 받았다.
“오빠. 뭐하고 계세요?”
소연과 주영이 현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있었어. 너네는?”
“아, 네. 바람도 쐬고, 담배도 좀 필려구요.”
주영이 대답을 하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오빠는 담배 안 펴요?”
“응. 난 안 펴. 이왕 내려온 거 나랑 얘기 좀 하다가 올라가.”
“네. 그럴게요. 근데 오빠 조금 이따가 한국대 축제 있다면서요?”
“응, 있지. 왜?”
“그때 저희랑 같이 보러 안가실래요?”
‘하…. 그렇게 광대 노릇을 했는데도….’
현수는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도 자신을 보자마자 들이대는 주영을 보며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야 상관없지. 도환이랑 같이 가는거지?”
그와중에 현수는 도환을 챙겨주려고 했지만, 주영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는 것을 목격했다.
“아…. 뭐 상관은 없는데, 괜찮으면 같이 가요.”
“그래, 쟤네들도 좋아하겠다.”
주영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현수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그럼 일단 오빠 번호 좀 주실래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현수는 주영의 휴대폰을 받아서 번호를 찍어 줬다.
현수는 주영의 스마트폰에 번호를 찍어준 뒤 돌려주고 있는데, 소연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스마트폰도 내밀었다.
‘너도냐?’
주영뿐만아니라 소연까지도 현수에게 관심을 내비치는 것을 보고 현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살짝 조심스러워 하는 듯 한 그 기색 때문에소연은 굉장히 귀여웠다.
‘역시 얘가 제일 낫긴하네.’
현수는 소연의 스마트폰을 건네받고서 그녀의 스마트폰에도 번호를 찍어줬다.
“자. 좀 춥네. 먼저 올라가 있을게.”
흡연을 하고 있는 그녀들을 두고 현수는 먼저 가게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가장 먼저 보인 광경은 종우와 도환이 뭐가 좋다고 둘이서 시시덕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혜정은 어디를 갔는지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둘은 오늘은 느낌이 너무 좋다면서 각이 섰다느니 서로 김칫국물을 먹여주고 있었다.
‘뭐가 좋아서 저렇게 쳐 웃고 놀고 있지?’
현수는 그 모습을 보자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판을 깔아줘도 받아먹지도 못하는 놈들이 무슨 느낌이 좋아…. 너네 지금 망했어.’
현수는 판을 아주 잘 깔아줬음에도 받아먹지 못한 그들을 보며 한숨이 올라왔다.
그러나 둘은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었다.
“현수야! 진짜 고맙다. 야. 네 덕에 잘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잘 풀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지만, 둘이 너무 당당하게 말하기에 무슨 근거로 저런 자신감을가진 것인지 들어는 보고 싶어졌다.
“무슨 일 있었어?”
‘뭐 번호라도 땄냐.’
현수의 말에 종우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내가 번호 물어봤거든? 바로 알려주더라.”
‘딱 수준을 벗어나질 못하네.’
예상이 정확히 맞아 떨어지자 현수는 한숨이 아닌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러나 이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선 안됐다. 그랬다간 학과에서의 이미지가 개판이 된다.
현수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그래? 잘되면 알지 너?”
“야. 당연하지. 여기까지 온 거 전부 다 네 덕인 거 우리는 모르겠냐? 잘 안돼도 뭐든지 다 사줄게!”
‘허풍은.’
현수는 그래도 해맑은 둘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것도 다 경험이야. 좋게 생각해라.’
잠시 후, 혜정과 주영 소연이 다 함께 자리에 돌아왔다.
곧이어 술자리가 다시금 시작되었고, 현수는 종우와 소연의 대화를 듣고선 더는 이 자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과에서 인기 많으면 나중에 나 친구들 소개 좀 해줘. 의대생들이라니까 뭔가 신기하다 진짜.”
“당연하지 오빠만 믿어.”
‘하, 야 인마, 저건 너랑 둘이 볼 일은 없다고 선 긋는 거잖아.’
도저히 붙을 가능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선을 긋는 소연과 심지어 그것을 알아 듣지도 못하는 종우.
현수는 더 이상 이 자리를 유지했다가는 견딜 수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적당히 자리를 파해야겠다고 결심이 선 순간 바로 말을 꺼냈다.
“아 그런데 나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
“어? 왜?”
갑자기 현수가 집에 가겠다는 말을 꺼내자 사람들이 다들 당황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 나 과제도 오늘 쳐내야 하는 게 하나 남아있었거든.”
종우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봤다.
현수는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눈빛은 현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네가 이렇게 가버리면 우리 둘이서 이 자리를 어떻게 감당하냐는 뜻.
‘어차피 너네끝났어. 나도 이제 너네 감당하기 힘들고.’
심지어 이 자리를 감당할 새도 없었다.
“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맞아요. 저희도 내일 오전수업이라서...”
여자들도 다들 발을 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였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파해지는 흐름으로 변해버리자 종우와 도환은 당황과 실망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둘은 현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현수가 지금까지 두 사람에게 해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술자리를 파하고 난 뒤 현수는 집으로 향했다.
‘진이 다 빠지네….’
“후….”
자리를 벗어나 찬 공기를 쐬며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머리가 상쾌해진현수는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 근데 뭔가 꼴릿한데.’
여자들과 놀아서 그런지, 그 여자들이 현수에게 관심을 선명하게 보여서 그런지, 그런 상황에서 몇 시간이나 술을 마시니 그들 중 한 명을 데리고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특히 혜정의 둘만 먼저 가지 않겠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괜히 거절했네.’
남자에겐 항상 처음 자보는 여자가 제일인 법이었다. 지금 이 순간 현수에게 혜정은 굉장히 매력적인 이성일 수 밖에 없었다.
‘연락 해볼까.’
그러나 현수는 이내 생각을 접었다.
‘됐어. 종우 친구니까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과에서 소문 더럽게 난다.’
현수가 마음을 접은 순간,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연희]
늦은 시간까지 현수가 연락이 없어서 그런지 연희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요?”
-오빠. 어디야?
“나 지금 잠시 밖에 나왔어.”
‘잘됐다. 연희랑이라도 해야겠어.’
-아 그래? 나도 지금 부모님이랑 잠시 밖에 나와있는데.
그러나연희와 밤을 보내려던 계획은 생각과 동시에 망가졌다.
‘쩝, 아쉽네. 아까 혜정이랑 그냥 있었어야 됐는데.’
현수는 다시 한 번혜정을 거절한 것에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리곤 연희와 통화를 하며 막 지하철을 타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스마트폰이 다시 한 번 진동했다.
현수가 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혜정 - 잘 들어가고 있어?]
[혜정 - 어디야?]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혜정을 생각하는 순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현수 - 응. 잘 들어가고 있지. 너는?]
[혜정 - 난 애들 불쌍해서 2대2로 시간 조금만 더 보내라고 노래방 보내주고 지금 막 슬쩍 나온 참이야 ㅋㅋ]
‘와 이런 악마가?’
사실상 자기 친구를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셈이었다.
그 이유는딱 하나였을 터였다.
‘단 둘이 볼 수 있게 여자애들 거기에 밀어넣겠다 이거지?’
속셈이 빤히 보였기에 현수는 다시금 아랫도리가 뻐근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