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92화
[연희]
‘아, 맞다.’
현수는 어젯밤 일이 끝나면 연희에게 연락을 주기로 했던 것이 생각났다.
“여보세요?”
-응.
연희가 단 한마디를 꺼냈지만 현수는 싸한 기분이 들었다.
“연희야, 딱 연락하려고 했는데.”
-아 그래? 오늘 만난다더니, 이제 연락하려고 했어?
‘제대로 삐쳤네.’
서운함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
현수는 이런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제는 도저히 연락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니까 어제 어떻게 된거냐면….”
지이잉.
이제라도 연희를 달래려고 막말을 꺼내려던 참에 귀에 대고있던 휴대폰이 울려왔다.
현수는 무심코 휴대폰을 바로 확인했다.
‘이건 또 뭐야.’
[주영 –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오빠? 왜 말을 하다 말아?
현수는 고민에 빠졌다.
연희와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킬 것인지, 지금 연락이온 주영과 만남을 가질 것인지.
‘오늘도 안 만나주면 풀기 힘들거 같긴한데…. 아, 모르겠다.’
“아, 미안해. 또 연락이 와서. 연희야 정말 미안해. 사정이 너무 급박해서 내가 연락할 틈이 없었어.”
-대체 무슨 일인데?
“만나서 얘기해주면 안될까? 지금 가봐야 될 것 같은데.”
-응…. 알겠어.
뚝.
연희는 마음이 상했는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안하다, 연희야. 내일은 진짜 풀어줄게. 넌 어차피 잡힌 물고기잖아.’
현수는 오늘 연희를 만나지 않으면 삐친 그녀를 풀어주기 힘들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로운먹잇감이 더 먹음직스러웠다.
어찌됐건 연희를 뒤로하고 현수는 주영에게 연락을 보냈다.
[현수 – 응, 너는 잘 들어갔어?]
[주영 – 네! ㅋㅋ 그날 노래방 갔다가 바로 집에 들어 갔어요.]
“….”
현수는 그 얼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눈에 선하게 비쳐졌다.
‘불쌍한 자식들. 너네가 못 이룬 꿈은 내가 대신 꿔줄게.’
주영을 마음에 들어하던 도환이그녀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지만, 그렇다고 꼬셔서 도환에게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셋이 친할텐데 혜정이한테 나랑 만난거 들으면 어쩌려나.’
현수는 벌써 두 명과 자신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생각했다.
‘조금 곤란하긴 하겠네.’
그래도 혜정이 소연과 주영에게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것을 자랑할 것 같지도 않았고, 주영은 자신이 구워삶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라는 결론이 나왔다.
‘굴러 들어온 떡이 있는데 이걸 안 먹을 수는 없잖아?’
[현수 – 어제 내가 좀 급하게 들어가서 미안해. 분위기 확 깨버렸지?]
[주영 – 음…. 텐션이 확 떨어지긴 했죠. 어쨌든 미안하면 저 소원 하나 들어줘요 ㅋㅋㅋ]
[현수 – 소원? 들어줄 수 있는거면 들어줘야지.]
[주영 – 저 한국대 한 번 구경 시켜주세요! 엄청 넓다는 것만 알지 한 번도 가본적은 없었거든요.]
‘나랑 만날 거리 찾는 건 알겠는데….’
한국대를 구경시켜달라는주영의 부탁은 현수가 절대 들어줄 수 없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도중에 혹시라도 종우나 도환, 혹은 주변 다른 사람들의 눈에띄면 여간 귀찮고 곤란한게 아니다.
‘생각보다 많이 개념이 없구나.’
주영이 현수를 맥이려고 일부러 말을 꺼낸 것은 아닌 것 같았기에, 그녀는 그저 생각이 별로 없어보였다.
‘이정도로 멍청하면 대충 둘러대도 안 들키고 심심할 때마다 불러도되겠는데?’
[현수 – 무슨 한국대야 ㅋㅋ 여기만큼 재미없는 곳이 없어. 차라리 여기보다 훨씬 더 즐거운 구경거리나 보러 가자.]
[주영 – 와! 어디로 가시게요?]
주영은 애초에 현수와 만날 거리를 찾을 뿐이었는지 현수의 말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현수 – 드라이브 갈까?]
[주영 – 드라이브요? 오빠 운전 할 줄 알아요?]
[현수 – 당연하지. 갈거야?]
[주영 – 네! 그럼 내일 몇 시에 볼까요?]
‘무슨 소리야. 지금 당장 보려고 연희도 거절했는데.’
현수는 천천히 해가 떨어져가는 시간이었지만, 주영이와 데이트를 끝내고도 밤일을 치루기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현수 – 차도 있는데 지금 만나도 되지 않아?]
[주영 – 지금 바로요?]
[현수 – 응. 너희 집 앞으로 바로 갈게 주소 불러줘.]
현수는 주영이 바로 거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곧장 출발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주영은 고민할 틈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현수에게 말려서 주소를 메시지로 찍어 보냈다.
[현수 – 오키. 금방 갈게. 준비하고 있어.]
그리곤 현수는 주영이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집에 도착해 딱 1시간 뒤에 출발했다.
[주영 – 저 준비 다 됐어요.언제 도착해요?]
마침 주영에게서도 준비가 다 되었다는 연락이 왔고, 현수는 두 번째로 여자를 태울 준비를 하고차를 끌고 그녀에게 향했다.
빵.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영은 현수가 타고 있던 차가 정말로 그의 차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경적을 울리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수는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말했다.
“주영아, 타.”
놀란 표정의 그녀가 얼떨떨한 말투로 현수에게 물었다.
“이거 오빠 차야?”
“응, 완전 새차야. 뽑은지 며칠 안 됐거든.”
“지, 진짜? 그럼 내가 처음 타보는 거야?”
혜정은 자신이 처음으로 타는 여자라고 착각을 하고있었다.
‘연희가 먼저 탔긴했는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응. 영광이네 네가 제일 먼저 탈 수 있어서.”
현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내뱉으며 주영이 먼저 타는 것을 영광이라고 했다.
“그치? 옆자리 이제청소하면 안된다?”
주영은 자신의 차도 아닌데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차에 올라탔다.
‘지 차도 아닌데 왜 지가 허영심이 가득 차지?’
물론 현수가 띄워주긴 했지만, 마치 자기가 이 차의 주인인 것마냥 행동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구워삶을지는 대충 알겠네.’
혹시나주영이 혜정이에게 말을 꺼내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입을 닫게 만들 생각이었다.
“주영아, 넌 근데 도환이랑 어제 어떻게 됐어?”
도환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안색이 굳어지며 말해도 될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오빠 친구라서 말하긴 좀 그런데….”
“괜찮아. 편하게 말해. 나도 걔랑 너랑 잘 될거같지는 않더라.”
“음…. 일단 미안하긴 한데, 내 스타일은 아니었어서…. 정중하게 거절하고 나왔어.”
예상은 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니 현수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웃어? 오빠는 그럼 혜정이 언니랑 뭔가 있어보이던데 잘 안됐어?”
“잘 됐으면 이렇게 너랑 있으면 안되지.”
“그건 그렇지. 근데 혜정이 언니 엄청 예쁜데 왜?”
“애초에 나야 뭐 그냥 친구들 잘해보라고 분위기 띄우러 갔었던거지. 여자를 만나려고 간건 아니었으니까.”
현수의 말을 듣자마자 혜정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잔뜩 차올랐다.
그녀는 꼭 현수에게 듣고싶은 말이 있어보였다.
“그런 사람이 왜 지금 나랑 만나고 있어?”
‘하여간 여자들이란….’
이정도로 말했으면 스스로 깨달았을텐데도 주영은 현수에게서 말로 듣고싶어하는 눈치였다.
“그야, 네가 내 마음에 들줄은 몰랐으니까.”
주영은 꼭 듣고싶었던 말을 듣자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현수의 말에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주영아, 우리 이렇게 만나는거 서로 곤란해 질수도 있으니까 혜정이나 소연이한테는 비밀로 하는게 좋을거같아.”
주영은 현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정도만 해도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현수는 확실하게 선을 긋기로 마음 먹었다.
“뭐, 말을 해도 되긴 하는데 난 입싼애 정말 싫어해.”
농담처럼 말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현수의 싸한 분위기에 주영도 이것이 농담이 아닌 경고의 말처럼 들은 듯 했다.
“나도 입 싼거 싫어해. 뭐가 좋다고 이런걸 말하고 다니겠어. 걱정하지마.”
약간 긴장한 표정의 주영.
‘이정도면 됐겠지?’
현수는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이즈음하면 됐겠다고 생각했다.
“밥은 아직 안 먹었지?”
“네, 아직 안 먹었죠. 오빠는요?”
“나도 아직 안 먹었지. 그럼 내가 아는 곳으로 먹으러 가자.”
그리곤 곧장 서울 근교의 꽤 가격대가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허영심 많은 애니까….’
주영은 20살이었지만, 웬만한 어른들보다 허영심이 많아보였다.
하지만 고작 20살이었기에, 현수는 어느정도 있어보이는 외제차와 고급진 레스토랑을 데려간다면 주영의 허영심을 가득 채워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전생에도 몇 번 와보지 못한 레스토랑으로 향한 현수는 나름 익숙해보이는 태도로 주문을 마쳤다.
“와…. 오빠 이런데도 자주 와요?”
“자주는 아니고 가끔 오는 편이지.”
현수를 바라보는 주영의 눈빛은 남자를 아주잘 물었다는 눈빛이었다.
‘진짜 쉽네, 얘는.’
아마 허영심때문이라도 현수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디 소문내고 다니지는 않을 듯 보였다.
“이거 다 먹고 우리 어디 가요?”
“여기 근처에 야경 엄청 좋은 곳이 있어. 거기가자.”
“네!”
그리곤 현수는 주영의 어설픈 나이프질을 보며 가볍게 웃으며 간단하게 먹는 방법을 알려주며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마친 뒤에는 야경의 명소로 알려진곳으로 향하는 동안 현수와 주영은 편한 승차감과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와! 진짜 장난 아니네요.”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빛나는 공원에 도착한 뒤 주영은 이제 완전히 사랑에 빠진 눈으로 현수를 대했다.
식사를 마치고 드라이브를 하며 야경이 멋진 곳까지 돌아다니는 데이트.
아직은 고등학생에 가까운 주영으로써는 처음 해보는 데이트였다.
‘네가 이런걸 어디서 느껴봤겠냐.’
경제력이 부족한 학생들로서는 해볼 수 없는 데이트를 경험시켜준 현수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주영을 보며 아마 오늘 밤은 쉽게 끝낼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들어갈까?”
아직은 쌀쌀한 4월의 추위에 체온이 떨어진 주영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차로 향했다.
“생각보다 춥네요.”
그녀의 말에 현수가 옷을 벗어 다리를 덮어주며 말했다.
“또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있어?”
“잘 모르겠어요. 일단 몸 좀 녹일까요?”
현수는 시동을 걸어 히터를 틀어서 차 안을 훈훈하게 데웠다.
점점 녹아가는 몸과 함께 주영은 마치 사주경계를 하듯 주변을 샅샅히 둘러보았다.
“뭐해?”
“아, 여기 근처에는 진짜 사람이 한 명도 없네요?”
“그러네. 평소에도 조용한 곳이긴한데.”
그리고 주영과 눈을 마주쳤을 때, 그녀가 은근한눈빛으로 현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년 봐라?’
오늘 데이트가 워낙 마음에 들었는지 현수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영이 천천히 눈을 감고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주영이 현수와 사귄다고 착각을 하든가 말든가 현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딱히 지금 상황을 거절할이유도 없었기에 현수도 그녀와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곤 주영이 현수의허벅지를 간지럽히듯 쓸어왔다.
‘하.’
현수는 속으로 코웃음을쳤다.
‘이런건 별론데.’
뭔가 주영이주도적으로 하려는 느낌에 현수는 속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뽑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에바지.’
하지만 더 큰 이유로는 새로 뽑은 차에서 섹스를 하다가 시트가 더러워지는 게 걱정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