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100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현수는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여기서 괜히 진도 더 뺐다가 현타라도 오면 어떡해.’
집에돌아가면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질 터였다.
만약 그러다가 부정적인 생각에 빠진다면?
그러다가 혹시라도 친구들에게 상담이라도 요청하게 된다면?
그리고 또 혹시라도 그 친구들이 혜정과 주영이라면?
스스로에게 의문을 남길수록 점점 더 골치아파지는 결과만 초래되었다.
‘뭐 이번만 참으면 다음번에는 얘가 먼저 달려들수도 있을 거 같으니까.’
현수는 소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소연은 현수가 그렇게 스킨십 진도를 나가는 걸 멈춰버리자 순간적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현수는 웃으며 소연의 어깨를 감싼 뒤 끌어당겼다. 그러자 소연은 못 이기는 척 현수의 어깨에 자신의 몸을 슬쩍 기댔다.
‘대신 오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거리는 던져줘야지.’
현수는 아직도 바짝 긴장하고 있는 소연에게 말을 걸었다.
“소연아.”
“네?”
소연이 살짝 놀란 채로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현수는 마치 미어캣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귀엽다니까.’
“너 저번에 남자친구 생기면 하고 싶다는 거 나랑 다 했는데, 어땠어?”
현수가 마치 남자친구인 양 이야기를 하자 소연은 더욱 얼어서는 어색한 톤으로 대답을 시작했다.
“저, 저는 좋았어요.”
그리고 아주 잠시 후, 소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는요?”
소연은 제 딴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고 노력중이었지만, 현수는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질문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어지간히 얼어있네.’
현수는 모솔이 썩 매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또 나쁘지 않았다.
그는 소연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도, 너무 설렜어.”
현수의 그렇게 말하는 순간, 무조건 반사에 가까운 속도로 소연은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소연이 고개를 돌려서 현수를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는 ‘이제 이 남자는 내꺼다’라는 확신이 엿보였다.
‘얘 봐라?’
현수는 그 감정이 읽히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 미소를 소연은 완전히 다르게 해석을 했다.
소연이 마주 웃으면서 현수를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세 번째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완전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꽁냥거리는 대화를 나누며 틈만 나면 뽀뽀를 하고, 키스를 나눴다.
그렇게 시간을 한 시간 여 보낸 뒤.
현수는 어느새 소연이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완전하게 기대고 있는 것을 보며 그녀가 충분히 자신을 받아들였음을 깨달았다.
‘됐다.’
현수는 소연에게 한 가지 생각을 더 주입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는 현수의 목소리에 소연이 현수를 바라봤다.
“뭔데요?”
소연은 현수가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은 듯 했다.
그녀는 뭐든 물어보기만 하면 당장 다 대답해주겠다는 기세였다.
그러나 현수는 굳이 그런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물어봐도 돼?”
그러자 현수를 바라보고 있는 소연의 표정에 의구심이 담기기 시작했다.
“네. 말해요.”
현수는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연을 보며 살짝 뜸을 들였다.
그렇게 현수는 자신이 지금부터 꺼낼 말이 충분한 고민과 망설임 끝에 나오는 것이라는 밑밥이 깔리고 나서야 준비한질문을 던졌다.
“혹시 혼전순결... 이런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소연의 표정이 또다시 굳었다.
그러나그녀의 표정은 아까 전 현수가 길 위에서 쉬다가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을 때의 반응과는 또 사뭇 달랐다.
그때는 현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긴장이 올라오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긴장일 뿐 현수에 대한 반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수는 순간 자신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주 그냥 감정 읽는 게임 하는 기분이네.’
순간 픽업아티스트 행세를 하며 눈먼 돈을쓸어담는 것도 돈 모으는 방법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우스운 생각을 하며 현수가 소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이내 소연이 입을 열었다.
“아뇨. 꼭 그렇지는않아요.”
‘대답 들었으니 이젠 긴장 쫙 풀어줘야지.’
현수는 굉장히 안심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행이다.”
“뭐가요?”
“나 되게 참을성 없어서, 사실 지금도 되게 참기 어렵거든.”
“아...”
그러자 소연은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어쩔 줄 몰라했다.
현수는 그 표정을 보더니 소연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서 능글맞게 주제를 스윽 돌렸다.
당연하게도, 혼자서 계속 곱씹어 보라는 현수의 의도였다.
현수의 생각대로 소연은 줄곧 머릿속 한 켠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현수는 그녀가 충분히 생각을 했겠다 싶은 시점에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소연아.”
“네?”
“미안. 내가 너무 신경쓰이는 말을했나보다.”
“아, 아니에요...”
“내가 아까 말한 건 너무 신경쓰지 마,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거지, 오늘 너를 뭐 어떻게 하겠다는 의도로 말한 건 아니니까.”
현수는 어쩔 줄 몰라하는 소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장소에서 너랑 아무것도 할 생각 없고, 오늘같은 날 애매하게 거절 못 할 분위기 만들어서 밤 같이 보낼 마음도 없어. 처음이라는 게 평생 남는 기억일텐데, 나도 신경써주고 싶거든.”
현수는 능숙하게 오그라드는 멘트를 주욱 뱉었다.
“만약에 내가 정말 못 참겠다 싶으면 네 처음에 걸맞는 장소로 데리고 갈게.”
현수의 멘트는 굉장히 느끼했지만, 그렇기에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에게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소연이 감동받은 표정을 짓자 현수는 그 표정을 보며 역시 개소리는 찰지게 해야 제 맛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게 먹히는 게 너무 신기하다니까.’
어찌보면 되게 뻔한 말에 불과했고, 은근슬쩍 섹스까지 트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멘트였는데 포장만 그럴싸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포장이 그럴싸해지자 노골적인 말이 자연스럽게 로맨틱한 분위기 속의 고백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좋아요.”
소연은 그렇게 말하며 현수에게 다시 안겨왔다.
그때 현수는 그녀의 몸이 완전히 자신에게 감기는 것을 느꼈다.그것은 소연이 현수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음을 의미했다.
현수는 소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는 도대체 언제 하는거냐는 생각이 들게끔 애를 태워볼까나.’
. . .
이틀 뒤.
현수는 연희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수는 연희가은근히 신경 쓰이고 있었다.
‘뭐지?’
얼핏 보기에 연희는 평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현수는 이상하게 연희가 걸렸다. 애매하게 찝찝했다.
리액션에서, 태도에서, 무엇보다 그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현수는 연희가 자신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생각을 품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심이 짙어지자, 그날 데이트가 끝날무렵 현수는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연희야.”
“응?”
“나한테 할 말 있으면 참지 말고 해.”
“...그런 거 없는데.”
현수는 웃으면서 연희의 손을 잡았다.
“머뭇거리는 거에서 티가 다 나는데.”
연희는 현수가 자신의 손을 잡자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현수는 그 맑은 눈망울을 보고 있자 본능적으로 찔렸지만 아무렇지도않다는 표정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본 연희가 잠시 후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꺼냈다.
“사실 나 궁금한 거 있어.”
“응. 말해봐.”
“내가 그날 꽃을 두고 갔거든.”
연희가 운을 띄우는 순간 현수는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래서 다시 가게로 돌아갔는데 없는 거야.”
현수는 설마에 자신이 잡혀버리자 곧바로 머릿속에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대답 잘 해야 한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 현수의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갔다.
“뭐야. 잃어버린 거야 설마?”
현수는 최대한 놀람과 서운함을 실어서 연희에게 말했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연희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찾은 거면 됐어. 그래서 어디에 있었는데?”
살짝 어색한 멘트였지만, 당장 당황한 당사자인 연희 입장에선 그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연희는 당혹감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됐다.’
현수는 연희가 자신의 페이스에 말리기 시작하자 긴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오빠. 그러니까.”
“응?”
“그러니까 잃어버리긴 했는데.”
“응. 그래서?”
현수는 살짝 서운한 티를 내면서 그녀를 바라봤다.
연희는 그런 현수의 표정을 보면서 안절부절 못해 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잃어버렸어... 미안해...”
“아냐. 괜찮아.”
현수는 웃으면서 잡고 있던 연희의 손에 깍지를 꼈다.
어느새 분위기는 연희의 잘못을 현수가 용서해주는 흐름으로 넘어왔다.
“미안. 잃어버린 게 속상해서 혹시 오빠가 챙겨갔는지 궁금했어.”
“그걸 내가 왜 가져가? 너한테 준 선물이잖아.”
“그게... 사장님이 오빠가 가져간 걸 본 것 같다고 하셔서...”
현수는 연희가 어디에 꽂혀서 자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세웠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와 세상에, 진짜 세상 사람들 눈 다 조심하면서 살아야겠네.’
현수는 상황파악까지 끝났으니 이제 마무리만 지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연희야, 생각해봐. 내가 그걸 챙겼으면 너한테 줬을 텐데?”
“...응.”
“그렇지? 그런데 네가 그걸 모를 리는 없고, ...혹시 말야.”
현수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은 톤으로 변했다.
“...응?”
연희가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현수를 올려다봤다.
현수는 살짝씁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조금 안좋은 생각이 들긴 하는데, 너 혹시 나 의심하는 건 아니지?”
“아...”
연희는 정곡을 찔리자 어쩔 줄 몰라했다.
현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럴 땐 연기라도 해서 얼버무려라...”
“...미안.”
“연희야. 벌써 이게 두 번째야. 내가 저번에도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 된다고 했잖아? 그런데 또 이렇게 날 의심하면...”
현수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는 듯, 끝말을 흐렸다.
그러자 본격적으로 연희가 안절부절 못 해 하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오빠. 내가 착각했나봐. 잃어버려서 정말 미안해. 그리고 오빠 의심도 다시는 안 할게.”
연희는 당혹감에 젖은 채 빠르게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다.
“그래. 고마워. 그럼 우리 이만 집 들어갈까?”
현수의 씁쓸한 표정을 본 연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대로 들어가면 오빠 속상하잖아...”
“괜찮아. 아니라고 말하면 너무 속 보이는 거짓말일 거 같고. 음, 자고 일어나면 금방 풀릴 거 같아. 들어가자.”
현수가 연희의 손을 붙잡은 채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연희가 현수를 한 번 더 붙잡았다.
“그럼 오늘 같이 있으면 안돼...?”
“응?”
“이럴 때는 붙잡는 거라며. 자고 일어나서 기분 풀거면 오늘 나랑 같이 자자.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 오빠. 응?”
연희의 말에 현수는 입고리가 올라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와. 진짜 위기가 기회라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