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순애루트(2)
“며칠 전엔 정말 어떻게 되나 했는데, 다행히 눈빛이 좀 돌아왔구먼 그래.”
자취방의 맥켄지 할배가 말했다. 이 세계에 온 첫 날 깽판 쳐놓은 내 방을 깨끗이 치워준 고마운 할아버지다. 집주인이기도 하고.
“그런가요.”
“응, 눈에 총기가 생겼어. 그래 사람이 이래야지.”
나는 잘 모르겠다. 뭐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내가 빙의하기 전의 트래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나는 녀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어떤 말투를 썼고, 취미는 뭐고,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른다.
헌데 이렇게 트래쉬 안에 든 내용물이 완전 바뀌었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레이지 단장, 라비, 맥켄지 할아버지는 전보다 나아졌다고 은연중에 말하는 것이다.
어쩐지 쓸쓸한 생각이 든다. 녀석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삶을 살았던 걸까.
과연 원래 세계의 진수현은 어떨까? 진수현이 없어져도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을까?
...그리고 더욱 쓸쓸해지는 건, 지금 내 방에 먹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돈도 없다.
‘씨발… 아까 고기 좀 더 먹고 올 걸. 괜히 가오 잡는다고…’
엄지 손가락 한 마디의 고깃조각 세 덩어리 얻어먹은 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
나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맥켄지 할아버지의 방을 노크했다.
똑똑.
“응, 무슨 일인가?”
“혹시 저녁식사 하셨어요? 아직이면 저도 좀 같이… 헤헤...”
***
훈련 3일 째. 대회는 앞으로 4일 남았다.
그래도 여러 스포츠 감독 하면서 먹고 살던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나는 꽤 <메이즈>라는 스포츠에 대해 빨리 배워나가고 있었다.
이 스포츠는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점이 많다.
‘트레져 헌트는 어떻게 된다 쳐도 이건 지금 지구 기술론 절대 불가능하겠구만.’
지하시설에 이뤄지는 경기라고 하니 좀 이해가 안 갔는데, 실제 경기 영상을 보고 나니 실감이 났다.
나의 원래 세계에 <큐브>라는 영화가 있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정사각형의 입방체 모양 방이 수없이 있는데 이 방들에는 각각 살인 함정들이 깔려 있다. 사람들이 이 방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시설에서 탈출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그 영화와 비슷했다. 지하에 사각형 모양의 방, 그리고 복잡한 통로가 얼기설기 얽혀있고 선수들은 계속 전진하며 지하 최하층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신기한 건 지하 경기장 구조가 매 경기마다 통째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정말 장관이다.
퍼즐 맞추듯 방과 방이 굉음을 내며 섞인다.
셔플이 끝나니 경기장은 바로 전과 완벽히 다른 구조로 바뀌어있다.
실로 외계 기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경기장 구조가 고정되어 있으면 경기 양상이 매번 비슷해지고, 노잼이 되어버리니 그런걸까.
‘결국 이 스포츠는 임기응변이 중요하단 거군.’
방 구조는 바뀌지만 나오는 트랩들은 항상 비슷하다.
전기 트랩. 발 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발을 디디거나, 함부로 벽에 손을 대면 즉시 고압의 전류가 흘러 기절하게 된다.
적어도 십 분은 못 움직일 것이다.
...스포츠 맞습니까?
고무탄 트랩. 정면에서 수십발을 난사하는 타입, 핀포인트로 배나 옆구리를 저격하는 타입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뭐든 간에 두들겨 맞기 시작하면 죽을 만큼 아프겠지.
...정말 스포츠 맞습니까, 확실해요?
가스 트랩.
요주의의 트랩이다. 무색 무취, 일단 분사되기 시작하면 회피할 방법이 거의 없다. 눈치채기도 힘들다. 다행히 사람 죽일만한 독성은 없지만 들이마시면 그대로 잠에 빠져들거나,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바닥에서 굴러야 한다.
…..이 세계의 사람들의 상식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지구 기준이라면 지나치게 가혹하다. 굳이 인권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건 좀… 싶은 함정들이 많다.
완전 19금 버전의 하드코어 <출발드림팀>이다.
지난 경기 영상을 보던 중, 한 선수가 고무탄을 잘못 맞아 앞니 한 줄이 시원하게 날아가 버리는 것도 본 적 있다.
바닥에 강냉이가 우수수 쏟아지고, 결국 리타이어.
피범벅이 된 입을 훔치며 분해하더라. 주최측이 아니라, 뻔한 함정에 걸린 자기 자신에게.
‘뭐 자기가 알고 참가한거면 남탓할것도 없지. 복싱도 그렇잖아.
한 선수가 다른 선수를 주먹으로 패죽여도 엄연히 합의된 경기니 살인죄로 체포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
나는 라비와 함께 이런 트랩들에 대해 이미지트레이닝을 했다.
실제 모형 시설에서 훈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우리같이 영세한 팀에겐 어림도 없다.
일단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숙지시키자.
아는 게 힘이니.
“그러니까, 통로 모퉁이에선 어떻게 해야 한다고?”
“일단 정지!”
“왜 그래야 하지?”
“모퉁이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발사하는 식의 트랩이 엄청 많으니까요.”
“굿.”
<메이즈>라는 스포츠는 서두를수록 더 빨리 리타이어하는 게임이다. 침착하고 빠르게. 그리고 임기응변을 잘 살려서.
능력치 상승도 중요하지만 피지컬로는 한계가 올 수도 있다. 저번 대회에서 느낀 점이었다.
***
“<인삼&홍삼 파워 스포츠>맞나요?”
운동장에서 한참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데 입구에 차 한대가 멈췄다. 한 사내가 내려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바람에 나부끼는 낡은 깃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입니다. 순서가 중요해요. 어감을 신경써가면서 지은 네이밍이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이거 죄송.”
양복차림의 사내는 어쩐지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말했다.
하, 요 놈 봐라. 비싼 차네. 얼씨구, 양복도 때깔 장난 아닌데?
기분 나쁜 녀석이다. 나는 첫인상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지.
“혹시 스폰서 제의하러 오셨나요? 어서 오시죠! 일단 사무실에서 얘기할까요.”
나는 만면에 영업용 미소를 가득 띄운채 상냥하게 말했다.
“이런, 아닙니다.”
“...”
순간 ‘그럼 꺼져’라고 말할 뻔 했다.
“제 소개를 안드렸네요. <블루 윙 스포츠>의 씨엔나 지부 수석 코치, 라이스입니다.”
“...”
나는 퉁명스럽게 명함을 받았다. 명함 속 사진하고 눈 앞의 얼굴이 똑같다. 명함을 자주 바꾸는 타입이라는 거겠지. 빠릿빠릿하고 겉치레에 환장한 타입.
근데 이딴 자지새끼 명함 받아서 어디다 쓰냐. 빳빳해서 코도 못푼다.
“이번에 <메이즈> 대회 참가하시는 라비 선수 코치님 맞으시죠?”
“예. 처음부터 알고 오신 거 같은데, 본론부터 좀… 저희도 바빠서요.”
“아하.”
뭔가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우리 시설이 너무 구려서 그럴지도 모른다. 돼지 키우는 축사보다 못한 곳에서 운동이랍시고 하고 있으니, 잘난 <블루 윙 스포츠>의 코치가 보기엔 그저 웃기리라.
“아시는가 모르겠지만, 저번 <트레져 헌트> 대회 우승하신 걸로 라비 선수, 트래쉬 씨 둘 다 저희 팀 내부에서 상당히 유명해졌습니다.”
“그런가요.”
“분명히 말씀드려서, 저희는 라비 선수를 상당한 전력이라고 평가하고 있어요.”
듣기야 그럴듯하지만 기분 좋아할 일이 아니다. 명문팀의 경계대상에 들어갔다는 얘기니까.
심지어 <메이즈>는 이전에 해본 적도 없는데!
근데 이 녀석은 이런 말을 나한테 해서 뭐 어쩌자는건가.
경고? 협박? 선전포고? 의도를 모르겠다.
“아까도 얘기드렸지만 본론부터 좀.”
“아이쿠, 실례. 그러죠. 그러면 앨리스 선수 아시죠?”
“모를리가 있나요.”
소속팀 없이 혼자 참가하는 귀족가의 ‘앨리스 로잘레스’. 마하와 마찬가지로 우승후보 중 한 명이다.
사실 어제 정보지(이젠 좀 욕구가 가라앉아서 괜찮다.)보고 안 거지만 난 닳고 닳은 척 허세를 떨었다.
무시당하기 싫으니까.
“앨리스 선수, 저희 마하가 꼭 이기게 하고 싶어요.”
“...? 저도 그래요. 다 이기고 싶으니까 참가하는거 아닐까요?”
“아니오, 라비 선수도 저희 마하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이새끼가.
뭐하자는거야, 지금.
“제가 잘못 들었나요? 굉장히 오해를 살만한 말씀을 하시네요. 이거 잘못 들으면 꼭 승부조작하자고 권하는 것 같잖아요.”
“조작? 전략입니다.”
“말장난 하지마시고.”
라이스 코치는 생각보다 간절한 얼굴을 했다. 명함의 사진에선 상상하기 힘든 표정이다.
“앨리스가 언론에 발표한 것도 들으셨죠. <블루 윙 스포츠>는 아무 것도 아니다, 거품이다, 하고요.”
“...”
난 그것까진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저희가 앨리스를 영입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의견이 안 맞아서 무산되었긴 하지만요. 사실 앨리스는 어떤 팀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더군요.”
“...”
“저희의 위신이 달려있어요. 팀도 없는 개인 선수에게 지면 팀의 이름이 나락으로 쳐박힙니다.”
과연, 그런 사정이 있었나. 꼭 이기고 싶다는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마하가 앨리스를 이기도록 도우면, 저희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요?”
“5만 골드. 대회 상금과 같은 금액입니다.”
“와우.”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군. 하기야 <블루 윙 스포츠>같은 명문 구단은 그깟 5만 골드 아무 것도 아니겠지.
그렇지만…
“아까 조작이 아니라 전략이라고 하셨죠. 근데 이렇게까지 명백히 대가를 거론했으면 발뺌하기 힘들잖아요.”
“무슨 말씀이시죠.”
“지금까지 한 대화 다 녹음했습니다.”
라이스의 눈이 개구리처럼 커졌다. 표정 변화가 다양한 인간이다.
“구라예요. 표정 푸세요.”
“아니… 난… 저….”
녹음기 같은거, 나한테 살 돈이 있겠냐. 하지만 고작 이정도 블러핑에 멘탈이 나가다니. 녀석, 참.
“그래서, <블루 윙 스포츠>는 지금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이겨왔어요?”
“절대 아닙니다! ...내 개인적인 독단이예요, 오직 이번만…아, 내가 미쳤지… 뭔 생각으로...”
알기 쉬운 표정의 라이스는 이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끝을 흐렸다. 거짓말 같진 않다. 뭣보다 승부조작에 익숙한 놈이라면 이렇게 어색하고 서투르게 일을 꾸밀리가 없는 노릇이다.
도둑질도 해본 놈이 잘하는 법.
녀석이 그만큼 초조하고 핀치에 몰렸던 것이리라.
팀 상층부에서도 거세게 압박을 줬겠지.
꼭 이겨야 한다, 지면 끝장이다, 하고.
나는 그런 압박 쯤 익숙한 일이지만, 녀석은 어떠려나.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일게요. 전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아, 아…”
“이기고 싶으면 마하랑 훈련 더 빡세게 하세요.”
달콤한 제안이지만, 결국 설탕 바른 쥐약이다.
이런 제의에 한 번 넘어가기 시작하면 곧 두번이 되고 열 번이 된다.
열 번까지 가면 운 좋은 거지. 보통 그 전에 다 걸리니까.
공익광고같은 얘기를 하려고 하는게 아니다. 현실이 그렇다.
그 때 차 뒷문을 열고 한 여자애가 나왔다.
아는 얼굴이다.
‘얘는… 분명 마하.’
[감식안 사용]
[이름: 마하
나이: 23
종족: 인간
성별: 여
칭호: ‘숙련된 미로 탐험가’
체력: 14
근력: 15
지혜: 10
기교: 12
의지: 9
속도: 13
특이사항: <메이즈> 종목의 프로 경기를 100회 이상 경험했습니다. 지역 급의 대회에서 적지 않은 우승 경험이 있습니다.
이 선수는 성장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더이상의 큰 발전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보유스킬: ‘위기감지B’, ‘침착함B’, ‘후각강화A’,
종합능력: B
잠재성: B ]
“트래쉬 코치님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어, 안녕하세요. 마하 선수.”
포니테일을 한 마하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자기 코치와 달리 첫인상이 훨씬 낫다. 물론 귀여우니 가산점도 있고.
“먼저 무례에 사과드릴게요. 저희 코치님, 지금 사리판단이 제대로 안되세요. 저희 <블루 윙 스포츠>에서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뭐 없던 일로 하기로 했고.”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런 제안 거절해주셔서.”
마하는 자기 코치와 달리 정정당당한 성격인 모양이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지역대회에서 8번이나 우승하진 못했겠지.
“후우… 정말 면목이 없어요. 제가 그렇게 안된다고 말했는데.”
“마하 양… 저는…”
“라이스 코치님, 돌아가자마자 찬물로 머리좀 식혀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당신.”
잠시 나를 앞에 세워두고 마하와 라이스가 옥신각신한다.
나는 이제 가봐도 되지?
“그러면 대회때 다시 뵙겠습니다, 트래쉬 코치님. 그리고 저 그렇다고 앨리스한테도, 라비한테도, 다른 선수들한테도 질 생각 없어요.
이래봬도 저 디펜딩챔피언이니까요.”
“하하. 응원하겠습니다. 힘내세요, 마하 선수.”
“그럼.”
그들은 차를 타고 다시 사라졌다. 뒷맛이 씁쓸하다. 결국 다른 세계로 와도 승부조작은 여전히 자행하고 있는 건가.
당장 눈 앞의 <블루 윙 스포츠>는 그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실제론 어떨까…
“무슨 일이었어요, 코치님?”
“음, 아무것도 아니야. <블루 윙 스포츠>에서 인사 한번 하러 왔어.”
“와! ...그러면 마하 선수도?”
“응.”
“저 좀 부르지!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경기장에서 보면 돼. 우리는 우리 할거 계속 하자.”
뭐, 그래도 나름 수확은 있다. 친절하게도 디펜딩 챔피언 마하가 일부러 여기까지 왕림해주신 덕에, 우승 후보의 능력치가 어느정도인지 똑똑히 확인했다.
예상보다 꽤 높다. 지금의 라비와 비슷한 정도군. 그리고 저 쪽은 그에 더해 압도적인 실전 경험이 있다.
‘까다롭겠어.’
재미있어졌다. 거기다가, 생각지도 못한 정보까지 얻었다.
‘마하와 앨리스는 강렬한 경쟁의식이 있어. 이번 대회에서 서로를 의식하고, 플레이에서도 드러내겠지.
이 점을 내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