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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화 〉두번째 대회, 메이즈(2) (12/109)



〈 12화 〉두번째 대회, 메이즈(2)

“안녕하세요, 앨리스 선수군요.”
“아, 이 분이!? 저, 저기, 잘 부탁드립니다.”


라비는 나를 껴안은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내 인삼 바디가 라비의 가슴에 짓눌려 잠시 시야가 가려졌다. 따뜻하고 포근하다. 하지만 무겁다.

“응, 내가 앨리스야. 나도 너 알아. 니가 라비지.”
“와와, 저를 아세요?”

라비가 눈을 빛내며 기뻐했다. 그도 그럴게, TV에서 자주 나오는 씨엔나의 유명인인 앨리스가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지금까지 무명 선수였던 라비로서는 감격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뭘 헤벌레하고 있어. 칠칠치 못하게.”
“예? 끄응…”


앨리스는 차가운 표정으로 라비를 나무랐다. 그래, 얘의 성격은 이랬지. TV에서나 현실에서나 한결같은 모양이다.

일단은 능력치 확인.


[감식안 사용]

[이름: 앨리스
나이: 20
종족: 인간
성별: 여
칭호: ‘고귀한 천재 아가씨’

체력: 14
근력: 12
지혜: 13
기교: 12
의지: 14
속도: 14

특이사항: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강한 에고에서 나오는 자신감으로 인해 타인보다 스트레스가 덜 쌓입니다.

불의 마법에 소질이 있습니다. 더위를 덜 탑니다. 화상에 내성이 있습니다.


보유스킬: ‘마이페이스B’, ‘침착함C’, ‘위기감지B’, ‘불의 마법B’, ‘화염저항C’


종합능력: A
잠재성: SS ]

“......!!”


순간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 능력치는 뭐냐!?
라비와 거의 동등한 수준, 그것도 잠재성 SS!
훗날 라비와 비슷한 레벨까지 도달할 여자애다.
인삼 바디가 아니라 원래 내 몸이었다면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근거 있는 자신감이군 그래.’

“이봐, 뭐 문제 있어?”
“아, 아닙니다. 앨리스 선수. 그냥 바뀐 몸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래? 원래 당신 몸은 본 적 없지만 안봐도 시원찮겠지. 지금이 귀여우니까 그 상태로 계속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걸, 아하하.”

앨리스가 고압적인 태도로 웃었다. 그러나 앨리스조차도 이 괴상한 인삼 바디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알 수 없는 취향이다.


“별 일 아니야. 그냥 누군가 하고 얼굴  보러 왔어. 마하가 당신들 얘기를 하길래.”
“마하 선수가…”
“그래. 이번 대회에 자기 경쟁자는 나, 라비 이렇게 둘 뿐이라더군.
주제도 모르고, 누가 누굴 경쟁자라고 생각한다는건지.”
“하지만 마하 선수는 디펜딩 챔피언이잖아요. 앨리스 선수도 상대하기 쉽지 않을텐데...”
“그래서 뭐? 어차피 과거의 일이야. 오늘 이후로 챔피언은 바뀔걸.”

재미있는 친구군. 보고 있자니, 저 자신만만한 얼굴을 울상으로 바꿔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아니 내가 지다니… 말도 안돼…! 이건 거짓말이야. 난 인정 못해!

이렇게 말이다.

-그 더러운 흉물 치워…! 감히 고귀한 귀족의 몸에 손을…! 아아, 아버지, 죄송해요! 이런 곳에서 난… 기분이 이상해...

아, 이건 아닌가. 상상이 조금 멀리 나아갔다.

어쨌든, 태어나서 자기 능력을 한번도 의심한  없었던 귀족 아가씨가 처음 겪는 패배에 멘탈이 나간 모습을 보게 된다면 엄청 기분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수고해. 들러리 제군들.”
“아, 예....”

앨리스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발이 불편하지는 않을라나.  경기 중엔 알아서 운동화로 바꿔 신겠지.


“이야~ 코치님, 저 앨리스 선수 뭔가 대단한 사람이네요.”
“그러게 말야.”
“제가 이길 수 있을런지 조금 자신이 없는데요.”
“괜찮아. 전략대로만 하자고.”

라비, 마하, 앨리스 셋은 서로를 충분히 인지했다. 이 셋 중에 한 명이 우승자가 될거라고 모두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그 우승자가 자기이길 바란다.

크큭… 재미있게 됐다. 이 경쟁 구도, 아주 좋아.

생각보다 앨리스의 능력치가 월등히 높은 것은 요주의다. 저 정도면 라비가 피지컬로 쉽사리 압도할 수가 없을 터.

그래도, 전략의 큰 줄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 드디어 본 게임이군.’


***


“아하, 그  앨리스를 만나셨군요. 어때요, 감상이?”


햄스터가 공중에 둥둥 떠서 히죽거리며 웃었다. 라이스, 이 녀석.

“어떻긴요. 그냥 소문대로네요.”
“무지 짜증나죠? 진짜 앨리스만큼은  이겨야 합니다.”
“뭐, 그래도 저희 라비랑 마하가 손을 잡는다던지 그런 일은 없어요. 이미 아시겠지만.”
“물론이죠. 더이상 그런 수작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정정당당히 하자구요.”

라이스는 몽실몽실한 햄스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짧막한 인삼 손(혹은 줄기)를 내밀었다.

“서로 우승을 노리고 최선을 다해봅시다.”
“예.”


훈훈하고 뜨거운 분위기가 생겨났다. 손을 꼭 마주잡았다.

뒤에서 라비와 마하가 저거 보라는 둥, 너무 앙증맞다는 둥 호들갑떠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이건 잠시 무시하기로 하자.

라비의 뒤를 따라 경기장에 들어갔다. 선수들이 출발선에서 제각각 편한대로 몸을 풀며 대기중이다. 멀리서 마하가 자기 코치와 뭐라뭐라 얘기를 하고 있다.
앨리스는 벽에 등을 기댄  가만히 팔짱만 끼고 있다.  없이 혼자 활동해 앨리스에겐 플레잉 코치가 없다.


“그러면 코치님만 믿겠습니다.”

라비도 쪼그려 앉아 한쪽 다리를 쭉 펴며 말했다.

“뭔소리야, 경기는 니가 뛰는건데. 나는 작전타임 빼고는 뒤에서 구경만  뿐이지.”
“그래도요. 코치님이 뒤에서 지켜본다는게 안심이 돼요.”
“뭐, 니가 편하면 좋은거지.”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선수들 2/3정도는 플레잉 코치를 대동하고 있다. 역시 모습은 어색해도 나 역시 따라오는 쪽이 맞았나보다.

“자, 이제 10초 후 부턴 난 아무 말도 하면 안돼.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해줄게.”
“예.”

나는 짤막한 손으로 라비의 등을 토닥였다.


“무조건 니가 이길거야.”


***


경기가 시작됐다.

신호와 동시에 백 명 가까운 선수들이 총알같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 맨 앞을 질주하는  바로 우리의 라비.

당연하다.  대회에 라비의 대쉬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하는 물론이고 앨리스도 속도에선  수 아래다.

지형지물을 무시하고 날  있는 나 정도나 겨우 그 뒤를 아슬아슬하게 따라다닐 수 있을 정도다.

뭐 육상대회가 아니니 이것만으로 승부가 정해지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빨라서 나쁠  없지.

역시, 경기가 시작하니 라비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평소와 확연히 달라졌다.
칠칠맞은 분위기에서 프로 선수의 팽팽하게 조율된 긴장감으로.

직선구간을 지나 지하 계단을 5개, 6개씩 가볍게 뛰어 내려간다.
이제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은 자취를 감추고 지하 경기장 내부의 인공 조명만이 안을 밝히고 있다.



첫번째 선택의 구간.

지하 1층, 돌입 코스 선택!

넓고 지하 2층으로  통해 있는 ‘정문 코스’
약간 돌아가지만 좁은 ‘옆문 코스’
그리고 가장 빠르고 지하 3층까지 단번에 이어지는 ‘환풍구 코스’

세 루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각각의 코스마다 장단점은 있지만, 우리는 이미 사전에 어디를 택할 지 미리 정해뒀다.

“옆문 코스 가겠습니다!”

라비가 힘차게 외쳤다. 딱히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뭐 혼자서라도 씩씩하게 목소리를 내면 그래도 힘이 날테지.

‘그래, 라비야. 이게 최선이야.’


정문은 넓은만큼 여러 선수들이 많이 택하는 코스다. 당연히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발생하는 변수가 있다.

더군다나, 중간 중간에 은근히 대기구간이 많기 때문에 맵이 잘못 만들어지면 중간중간 횡단보도 신호 기다렸다 건너는 것마냥 일일이  선수들에게 따라잡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환풍구 코스를 택하는 것도 현명한 건 아니다.

일발역전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건 약간 피지컬이 떨어지는 선수들이 극히 낮은 확률로 날먹을 노리고 시도할 경우.

일반적인 경우 지나치게 함정이 많아 입구컷 당하기 십상이다. 이쪽도 불필요한 변수가 많은 셈이다.

결국 실력자들은 ‘옆문 코스’로 갈 수밖에 없다. 여기까진 정석대로.

약간 돌아가야 하지만 정문을 택한 선수들이 교통정체 현상을 일으킬  생각해보면 피지컬이 받쳐준다는 전제 하에 오히려 이쪽이 더 빠르다.


‘지하 1층은 계획대로.’

나는 뒤를 살짝 돌아봤다. 역시 앨리스와 마하도 옆문 코스. 라비가 앞서긴 하지만 지금까진 큰 차이는 안난다.

‘이제부턴 임기응변의 영역이군. 그렇다면…’


경험이 풍부한 마하가 단연 유리하다. 여기서도 우리는 나름의 전략을 세워뒀다.

작전명 ‘카피캣’.


‘마하를 따라 가라!’


지금까지 라비가 빠른 속도를 살려 1등으로 치고 나왔기 때문에 좀 아까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차피 승부는 지하 5층에서 난다.

지하 5층에 놓여 있는 목표물 ‘황금의 완드’를 가지고 다시 출발점까지 복귀하는 선수가 우승.

그러면 여기선 무리하게 독주하려고 시도하기보다, 안정적으로 위험을 피하면서 가는게 제일이다.

그러면 디펜딩챔피언 마하가 가는 대로 따라가는게 최선!

“라비, 생각보다 꽤 침착하네요.”
“헤헤… 같이 가자구요.”


마하가 싱긋 웃었다. 아직까진 저쪽도 여유가 있는 모양이다. 뭐, 챔피언이니까.

지하 2층은 수많은 트랩이 깔린 복잡한 방들의 미로다.

한번 잘못 길을 잡으면 오랜 시간 이 방과 방의 미궁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방의 패턴을 분석하고 정답으로 향하는 길을 유추하는 추리력이 필요한 만큼, 라비가 취약한 부분이다.

‘절대로 마하를 놓치면 안돼!’


나는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전교 1등이 쓰는 답지대로 똑같이 베껴쓴다! 그게 지하 2층에서의 우리 작전.

전략은 ‘1등이 하는대로 따라간다’라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따라가는 것도 피지컬이 받쳐줘야 가능!

마하가 순식간에 돌파한 트랩에서 이쪽은 버벅거리며 시간 지체라도 한다면 금세 뒤를 놓치는  뻔할 뻔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미궁 플로어에서 한번 놓친 누군가를 다시 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잘 따라와봐요. 라비 양.”


마하가 뒤를 슬쩍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쩐지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앨리스는 이쪽은 신경도 안쓰고 자기만의 독자 루트를 개척해 사라졌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지하 2층 미궁을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결과가 어떨지는 미지수지만. 지금은 앨리스를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멀리서 웅- 하는 진동음이 들린다.

파직- 파직- 하는 반복적인 타격음도.

점점 가까워진다. 붉은 섬광이 저 앞에서 규칙적으로 번쩍거린다.

올 게 왔다.

‘오우 쉣, 레이저 석상 트랩이군.’


지하 2층 미궁의 하이라이트, 환상의 레이저 쇼!

가고일 모양의 석상 수십개가 복도  옆에 늘어서 있다.
석상의 눈에서 몇 초 간격으로 붉은 레이저가 발사되어, 맞은편 벽에 내리꽂힌다.
벽에는 미세한 연기를 내며 계속해서 레이저에 지져진  자국이 새겨지고 있다.


라비는 순간 멈췄다. 마하도 멈췄다.
그녀들의  앞엔 거미줄처럼 전개되는 레이저의 탄막이 몇 초를 주기로 펼쳐졌다.

“이런 이런. 하필 저희 코스에 레이저 석상 트랩이 당첨이네요. 까다롭겠어요.”
“...”

마하가 여유롭게 웃었다.
전혀 안 까다로워하는 기만자의 표정으로.
 복잡한 레이저 패턴은 처음 본 사람이 쉽게 돌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마하라면 통과할 수 있겠지.’

매 대회마다 바뀌는 랜덤 패턴이라지만 아예 선수가 못지나가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통과할 수 있도록 미세한 패턴과 틈을 두었기 마련.

그리고 마하는 지역대회 <메이즈> 챔피언답게 그 모든 무작위 패턴의 조합을 암기하고 있다.

입가에 씨익 미소를 띄우는 마하. 섬광이 얼굴에 비쳐 붉은 빛을 띄운다.

따라올테면 따라와 봐, 라는 옛날 광고문구같은 제스쳐같기도.

그녀가 달려나갔다.

마하는 정확한 박자와 움직임으로 레이저 패턴을 하나하나 회피하며 돌파했다.
전진하고, 순간 정지, 다시 전진.
타이밍은 완벽에 가깝다.

흩날리는 포니테일이 그야말로 한 끝 차이로 레이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다.

‘씨...씨발 쌉고인물이다.  정도면  감고도 지나가겠어.’

“먼저 갈게요.”


5초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레이저 석상 트랩을 전부 지나갔다. 아마 여기서 확실히 라비를 따돌렸다고 생각했겠지.


“후, 후우… 으아아~ 갑니다!”

 쪽도 가만히 있을 수야 없다.
라비도 제자리에서 발을 통통 몇 번 구르더니, 대쉬!


이 쪽은 마하같은 고인물의 퍼포먼스는 무리다. 그저 앞으로 최대한의 속도를  달릴뿐.

1방, 2방 쯤 피격은 각오한 무빙!

레이저라지만 실제 타격력은 복싱선수의 강펀치 정도에 가깝다.
SF영화에서 흔히 묘사되는 관통력과 절삭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도 이런 무모한 작전을 주문하진 않았을 터.

물론 이정도 충격이라도 한번 얻어맞으면 두개골이 흔들릴 정도로 괴로울 것이다.

“끄아앙…!”

놀라운 속도로 레이저가 발사된  잠시 멈춘 그  공간을 달려가던 라비,
하지만 결국 옆구리에  줄기 레이저가 사정없이 꽂혔다.

내가 막아줄수도 없다. 반칙이거니와, 애초에 내 인형 바디는 레이저를 통과하기 때문.

‘어쩔 수 없나…! 하지만 라비야, 지금은 멈춰있으면 안돼! 멈추면 더 쳐맞는다!’

연습할  입이 닳도록 했던 말이다.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더 맞는다.
그러나 어지간한 선수들은 알아도 딱히 어쩔 수 없다.
대부분 충격으로 쓰러진  레이저 찜질을 당하고 리타이어.

이 ‘레이저 석상 트랩’이 악명 높은 이유기도 하다.
중간에 멈추면 거기서 끝이다. 극악의 다단히트!

물론 몇 분간 쓰러진  레이저를 두들겨 맞고 있으면 선수가 죽어버리므로,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트랩은 곧 정지한다.

그래서 불운한 선수 한 명이 제물이 되길 기다린 후 레이저가 멈춘 틈에 지나가는 전략도 있다만…
그건 지금 우리와는 상관없는 얘기.


“흐아… 진짜 아프네요! 힝…”


라비는 표정을 잔뜩 찌푸렸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순간대쉬!”

하얀 화살처럼 라비는 돌진했다. 다음 레이저의 세례가 내리꽂힐때, 라비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헤헤, 아이구 아파라… 마하 씨,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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