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뒷풀이(1) (15/109)



〈 15화 〉뒷풀이(1)

“...그래서 얘는 왜 여기 있는 거랍니까?”


내가 물었다. 레이지 아재가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다.

“잉? 경기장에서 다 얘기가 된 거 아니었어? 난 그런 줄 알았지.”
“허, 참… 약간 당황스럽네요.”



라비와 나는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의 훈련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단장님에게 승리소식을 보고하고, 간단히 쫑파티라도  겸.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인물은…


“이런 다 쓰러져가는 폐가에서 그동안 훈련한거야? 믿기지가 않는걸.”

앨리스 로잘레스.
낡고 형편없는 훈련장과 가장 안 어울리는 아가씨가 있었다.
 더플백을 두 개나 발 밑에 두고 품평하듯 주변 시설을 살펴보는 그녀.


“앨리스 선수, 혹시 길 잘못 찾아오신  아니죠?”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러면 여긴 왜…?”
“왜긴 왜겠어.”

앨리스는 가소롭다는 듯 날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 팀에 가입하려고 왔지.”
“예?”
“허, 뭐어?”
“와아~!”


나, 레이지 아재, 라비 셋은 모두 제각각 다른 느낌으로 놀랐다.

“저기, 앨리스 선수는 팀 가입 안하고 혼자 활동하시지 않나요?”
“나야 괜찮지만, 우리 팀은 보다시피 사정이 아가씨 맘에 차지 않을텐데. 괜찮겠나?”
“신난다~ 그럼 이제부터 저랑 같이 운동하는 거예요?”

앨리스는 가늘고 고운 검지손가락을 우아하게 치켜들었다. 그리고 우리의 눈 앞에 강의하는 선생님처럼 들이민다.

“아이 참, 시끄러워. 셋이서 동시에 말하니까 뭐라 그러는지 하나도 모르겠잖아. 하나씩 물어봐.”


“그러면…”
“그래, 당신 트래쉬 코치라고 하는 사람이었지. 내가 왜 여기 가입하고 싶냐고?”
“예.”
“이 팀에 졌으니까.”


앨리스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잠깐 그 페이스에 말려 나도 ‘아, 그렇군요. 그러면 어쩔 수 없죠.’하고 납득해버릴 뻔 했다.


“...아니, 아니, 그게 이유예요? 저기 좀 설명을 더.”
“이거보다  친절한 설명이 있을 수 있나? 날 꺾은 팀은 살면서 여기가 처음이야. 분해서 못 견디겠어. 그러니까 가입하는 거야. 내가  졌는지 알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는 지지 않기 위해 이 팀의 모든 전략을 흡수하려고.”

그런 이유로 괜찮은 것인가.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레이지 아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아하, 그래. 아가씨. 아까 소개했지만 내가  팀의 단장이라네. 뭐 가입하고 싶은 동기는 그거면 됐다치고.”
“아가씨라고 부르지마. 엄연히 이름이 있어. 앨리스라고.”
“미안미안, 앨리스 양. 여튼 우리  사정이 엄청 넉넉하지가 않아요. 앨리스 양이 원하는만큼 지원을 못해줄 가능성이 높은데, 괜찮겠나?”
“응. 어차피 기대도 안했으니까.”
“그러면 나야 환영이네.”

레이지 아재는 만족했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뭐 유명하고 재능있는 선수가 공짜에 가까운 조건으로 들어온다는데 단장 입장에서 거부할 이유도 없겠지.


“앨리스 선수! 그럼 이제 저랑 맨날 같이 운동하는 거예요?”


라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쟤는 그냥 마냥 좋은가보다.


“맨날은 아니야. 바보니? 늙어죽을 때까지 운동만 하게? ...당분간은 여기서 훈련해야겠지. 그리고 너 나랑 동갑인 것 같은데, 말 놔. 번거로워.”
“그래도…”
“명령이야. 놓으라고 했어.”
“그럼 그럴게. 헤헷,  부탁해, 앨리스.”

타고난 귀족의 카리스마로 호칭을 정리하는 앨리스였다.


“그러면 일단 이 서류부터 작성해주세요, 앨리스 선수. 간단한 가입서류입니다.”
“내놔.”


앨리스는 서류와 펜을 받아 테이블에 고개를 숙이고 적어나갔다.
그녀가 펜을 움직이며 무심히 말했다.

“아, 그리고 우리 로잘레스 가문은  결정과 상관이 없어. 그런  알아.”
“...예?”

솔직히 기대를 안했다면 거짓말이다.  유명한 귀족 가문 로잘레스 가의 막대한 지원!

훈련장을 새로 지어줄지도 모른다. 빠방한 시설에, 인력 충원.
어쩌면 내 빚도 갚아줄지도 모른다.

커피전문점의 카운터 점원이 살짝 지은 미소에, 머릿속으로 결혼식장에 손자 이름까지 상상하듯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장춘몽이 박살나고 현실로 돌아왔다.


“상관이 없다고 하면 표현이 틀린거려나. 엄밀히 말하면, 가문은 내 결정을 반대해. 그래서 난 맨몸에 짐만 조금 챙겨서 나왔어.”
“그런가요…”
“응. 그러니까 당장 오늘 밤에 잘 곳도 없거든.  선수 케어로서  부분도 방법을 알아봐줘.”

지원은 커녕, 식충이다. 기생충이 붙었다…! 이 년은 이름만 귀족이지 지금 그저 우리 팀에 기생할뿐…!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도, 안 받을 수는 없어…’


잠재성 SS의 괴물!
라비급의 성장 기대치를 지닌 선수다.
감독의 입장에선, 얘가 인성이 개차반이더라도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가졌다.

결국 프로는 성적으로 말한다.


‘그래,  비위  맞춰주면 어떠냐. 운동 선수는 그저 잘하는 놈이 왕이야.’

게다가…


“뭐야, 왜 히죽대? 기분나쁘게. 코치, 앞으로 그 웃음 금지야.”
“...알겠습니다.”


결국  팀의 선수라면 어떻게든 LOVE파워를 써먹을 여지가 생긴다.

라비와는 또 다른 느낌의 미인. 라비가 활기넘치고 상쾌한 타입이라면, 이쪽은 귀족 영애 특유의 우아하고 고귀한 매력이 있다.

가슴은 라비보다 조금 작다. 일일이 비교하자니 미안하지만. 하지만 슬렌더한 느낌으로  보기 좋은 체형이다.
체구가 전체적으로  작긴 하지만.
원래 세계라면 운동 선수보다 아이돌에 가까운 몸매가 아닐까.

‘그것도 아이돌 중에서도 비주얼&단신&귀여움 담당이지. 크큭…’

아, 웃지 말랬지. 나는 앨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밀한 기대감에 잠겼다.


***


대회 우승 파티는 기묘하게도 대회 복기  축하 겸 해서 진행되었다.
사무실에 과자와 음료수를 잔뜩 차려놓고 웃고 떠드는 조촐한 파티.


“하, 참나. 그랬구나. 그래서 일부러 맞아준 거였어.”
“일부러는 아니지만. 그거 못피하겠더라. 뭐야? 마법?”
“응. ‘화염폭풍’.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불의 마법.”

음료수를 마시며 앨리스와 라비는 서로 대화를 나눴다.
라비도 오랜만에 또래 선수가 들어와 기쁜 모양이다. 연신 앨리스 옆에 달라붙어 쫑알거리며 말을 건넸다.

귀찮은 듯 하지만 그런 라비를  내치지 않는 앨리스.
나한테는 약간 차갑지만 한번 인정한 선수한테는 나름의 리스펙을 보여주는듯하다.

“<헌팅>? 그거 3명이서 하는거 아냐. 선수 더 없어?”
“미리아하고 안젤라가 나가서 지금까진  혼자밖에 없었어. 그래두 너 들어와서 이제 두 명이다. 히히.”
“좋아하기는. 난 널 도와주려고 여기 입단한게 아냐. 경쟁자지.”
“그래두.”


그렇군. 앨리스가 들어왔으니 이제 우리 팀의 선수는 두 명이다.
그것도 종합능력 A급, 잠재성 SS의 특급 에이스로 둘.
양보다 질이다. 아마 겉보기엔 안그래보이겠지만 우리 팀의 전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뛰어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앨리스 선수도 내일부터 같이 훈련하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라비한테는 그럭저럭 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앨리스가 갑자기 뒤에서 쥐가 건드린 고양이마냥 날카로운 태도를 취했다.
 나한테만 그러는거야…


“그러셔. 다만 내 훈련 루틴은 따로 있어. 그러니까 일일이 참견하지 않아도 돼.”
“...뭐 저야 상관없어요. 근데 그럴거면 굳이 우리팀에 들어오지 않아도…”
“뭘 중얼거려? 가서 과자  더 가져와.”
“예.”


파티는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당장 갈 곳이 없는 앨리스는 단장이 아는 숙소에 데려다준다고 했다.

순간 원래 세계에서 자주 보던 AV영상의 한 장면을 떠올렸으나 레이지 아재는 물론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앨리스가 음료수 마시고 취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불의 마법’도 있다.
어디가서 누구한테 함부로 당하고  여자애는 아니다.


“여자들만 거주하는 숙소야. 좀 시설이 고급이라 비싸긴 한데, 거기 집주인을 내가 알아서 하룻밤 정도는 어떻게 머물  있을 걸세.”
“그래, 거기면 됐어. 빨리 데려다 줘. 좀 피곤하니까.”


단장과 앨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뒷 정리좀 부탁하겠네.”
“걱정 마세요.”
“너무 깔끔히 청소하고 그럴 필요 없어. 대충 치우고, 일찍 들어가서 쉬어, 트래쉬 군. 라비도.”
“예~ 들어가세요.”

라비와 나, 둘만 남았다.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 저희도 그만 치우고 갈까요?”
“음.”


우리는 조용히 쓰레기를 모았다.


“앨리스, 대단하죠?”
“뭐가?”
“항상 자신에  있고, 신분도 고귀하고, 마법도 쓰고.”
“그래도 이번 대회는 너가 이겼잖아.”
“근데 실력으로 이긴 느낌은 아니에요. 코치님 전략이 통해서 겨우 이긴거지.”


다시 침묵.
솔직히, 정면승부로 붙었으면 못 이겼으리란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난 일이다. 결국 어떻게 이기든 남는 건 결과다.
라비가 이겼고, 앨리스는 졌다.

역시 지금은 응원해줘야겠지. 대회에 우승해놓고 자신감이 떨어져서야 말도 안되니까.

“너니까 전략도 쓴거야. 라비야, 99% 네가 잘해서 이긴거지. 난 한 1%정도 도와줬을라나.”
“코치님은 항상 제 편 들어줘서 참 좋아요.”
“안 그런 코치도 있어?”
“하기야 그것도 그런가.”


테이블 위도, 바닥도 깨끗이 치웠다. 레이지 아재는 대충 치우고 가라 했지만 청소란 것도 하다보면 끝까지 꼼꼼히 해버리고 싶은 묘한 중독성이 있다.

차이는 뭘까?
남이 시켜서 하는   하기 싫다. 근데 내가 맘먹고 청소하면  이상하게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두, 이제 앨리스가 들어왔으니까 앞으로는 또 바뀔라나.”
“응? 뭔말이야.”
“저만 신경써달라고 말하면, 못된 거지요. 신경쓰지 마세요. 헤헤. 나도 참.”
“라비야.”
“...”
“...에이 뭐야, 질투하는거야? 앨리스 들어왔다고?”


라비는 내 얼굴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는 그렇게 둘이  맞아보였는데, 역시 라비도 속으로는 신경쓰고 있었던 건가.

어쩌면 자기보다  뛰어날지도 모르는 선수가 새로 들어왔으니  관심이 앨리스에게로 쏠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귀엽기는. 뭔 걱정을 하나 했더니. 이쪽 봐봐 라비야.”
“...”
“이쪽 한번만 보래두.”

라비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살짝 시무룩한 표정이다.
난 그런 라비와 눈을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려고 하길래 양 손으로 라비의 얼굴을 마주 잡았다.

“코치님?”
“걱정하지마. 나한텐 언제나 네가 최고야.”
“...”
“...아까 못 다한 얘기 마저 하자.”
“...”

나는 그대로 라비의 얼굴에 고개를 기울였다.

“웃…!”

라비가 숨을 삼킨다.
하지만 이번엔, 요전처럼 애들 장난 수준으로 끝낼 생각이 없다.

라비의 윗입술을 내 입술로 살며시 덮었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살며시 그 위에 내 혀를 스쳤다.
라비는 내 행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저 입을  닫고 석상처럼 굳어 있을 뿐이었다.

몇번 노크하듯 혀로 라비의 입술을 간질였다. 이제서야 눈치챈 모양이다.
살포시 입을 열고 내 혀를 받아들인다.
분홍빛 물고기처럼 라비의 혀가 날 맞이했다.

하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지, 라비는 애태우듯 내 혀를 피해다녔다. 미묘하게 새콤달콤한 맛이 난다.
라비의 입안에 아까 마신 음료수의 향이 배어있다.

그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말하지 않아도 이 시그널은 명백하다. 라비는 더이상  혀로부터 도망다니지않았다.
능숙한 키스는 아니지만, 남자경험이 없어 보이는 라비가 키스 고수마냥 후루룩 짭짭거렸으면 오히려 좀 깼을 노릇.
지금이 딱 좋다.


[LOVE파워 사용]

[스킨십: 딥키스

몸은 허락하더라도, 키스는 안된다고 거부하던 영화 속 여인이 있습니다. 남자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마주치고 그 안에서 혀가 엉키는 교감.
혹자는 섹스와 다를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또 누군가는 거기에 영혼없는 섹스보다  마음이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이 하얀 머리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라비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애정 4단계 보너스.
트루러브 보너스.

체력: 17 (+1)
근력: 16 (+1)
지혜: 8 (+1)
기교: 17 (+2)
의지: 12 (+2)
속도: 20 (+2)
]

[라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비는 당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길 바랍니다.]
[라비는 당신의 애정을 확인해 안심하고 있습니다.]



‘꺼져.’


나는 메세지가 뜨자마자 바로 꺼버렸다.
분위기 깨게.


[당분간 LOVE파워에 관련된 메세지는 뜨지 않습니다. 이후 원하실 때 일괄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


몇분 동안 라비와 키스를 즐겼다. 서투르면 서투른대로  맛이 있다.

시작했던 것처럼 천천히 입을 뗐다. 라비가 꿈에서 깬듯한 표정으로 살짝 눈을 떴다.

“흐읍.”

역시 침이 문제라고 생각했어. 점점 애가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던 참이었다.
라비는 민망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라비야.”
“코치님…”
“이 정도면  마음이 표현될까?
내가 너 참 많이 좋아해.”
“...저두요.”
“아까 다친  좀 어때?”


대회 중에 앨리스 고 년이 불의 마법으로 인정사정 없이 지져서 라비는 장작구이 통닭이 될 뻔 했었다.
라비는 슬쩍 팔뚝을 들어보였다.
언제 화상을 입기라도 했었냐는듯 말끔하다.

미친 회복력이다. 거의 마인부우가 따로 없다.

“이제 멀쩡해요. 괜찮아요. 헤헤.”
“그래도 걱정되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라비는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쾌활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어깨나  좀 살짝만 봐도 되지? 코치니까 선수 몸관리는 빼먹을 수 없잖아.”
“진짜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라비는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한편으론 오히려 얘도 그 이상을 바라고 있던 것처럼 보이는데,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저 제대로 못 씻어서 땀냄새 무지 날 거예요.”
“상관없어.”
“속옷도… 스포츠용이고.”
“...그것도 상관없지.”

라비는 천천히 점퍼를 벗었다. 안에는 따로 셔츠를 입지 않아 바로 회색의 색기없는 언더웨어가 드러난다.
하지만 속옷같은게 뭐가 대수랴.
이미 라비의 육체 자체가 색기로 가득하다.

기대감으로 살짝 상기된 하얀 피부가 은은한 핑크빛으로 물들어있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조금 전부터 서서히 힘이 들어가던 내 자지가 콧김을 내뿜으며 치솟아오르는게 느껴진다.

드디어 때가 왔군.
나는 내 마음속의 성욕 센서에 해제명령을 내렸다.


‘제군들, 오래 기다렸다. 모두 출격준비하도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