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화 〉에이스 듀오(2) (18/109)



〈 18화 〉에이스 듀오(2)

이 주일에 팔만 골드.
물론 상금 전액을 내 빚 갚는데만 부으면 팀 운영비가 거덜난다.

적어도 대회 상금으로 십만 골드 이상은 노려야 한다.

아침에 앨리스와 순대국을 먹으며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둬.  수준 낮은 대회만 전전하다 커리어 마감하는 선수로 남을 생각 없어.
-왜요?
-왜긴,당연한거 아냐? 결국 향상심이 없으면 말야, 사람은 익숙한 곳에서만 머무르다 안주하기 마련이잖아.
-...
-이번엔 졌지만, 지더라도 더 높은 대회에 도전하고 싶거든. 수준이 높은 대회에서 더 많은  배울 수 있으니까.


‘맞는 말이야.’

트래쉬가 아니라, 내 진수현으로서의 감독 생활이 떠올라서 속이 쓰리다.


‘나 진수현은 어떤 감독이었는가. 위를 노리는 감독이었나, 현실에 안주하던 감독이었나.’

답은 뻔하다.


둘 다 아니었다.
위를 노리긴 커녕,
현실에 안주하지도 못한, 나락과 패배로 점철된 감독이었다.

이 세계에서 트래쉬라는 이름으로 두번째 삶을 얻었다. 여기서 똑같은 과오를 반복할 것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짜잘한 대회를 여러개 돌아봐야 성장은 정체될테지.
지금까지만 해도 그래. 스텔라, 그 년때문에 억지로라도 무리한 스케쥴로 밀고나갔더니 결과적으론 지금처럼 팀의 레벨이 높아졌잖아.’

대회 정보지를 구겨버렸다.
좋아, 결심했다.

큰 물에서 놀자.


***



“진짜 미치겠다. 이게 최선이야?”
“왜왜, 좋잖아.”


밖에서 라비와 앨리스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종목도 정했고,   겸 어울리기로 했다.

“잘돼가요?”
“네, 코치님. 한번 와서 봐보세요. 깜짝 놀라실걸요.”
“...그래, 코치. 놀랄거다. 어이가 없어서.”

그녀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어떻게 꾸몄나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컨테이너 문을 열며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따라따라따~ 따따 따라~”
“뭐야, 코치, 아재같아. 이상한 노래나 부르고.”


<러브하우스>. 십 년도 전에 종영된 추억의 프로그램이 있다.
나도 어린시절에나 가끔 봤었지만, 어째선지  멜로디만은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헌 집을 새 집으로 단장하고 처음 구경하러 들어갈때 흐르던 BGM.

오오!

내눈에 처음 들어온 건 침대였다.

존나 큰 침대.
퀸사이즈에, 결이 고운 나무 기둥과 골재로 받쳐져있다. 약간 공주님스러운 취향이다.

컨테이너의 외관과 어울리지 않게 고급 침대가 떡하니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와, 침대네요. 생각보다  많이 큰데요.”
“그쵸? 보세요. 위에서 막 굴러다닐수도 있어요.”


라비는 말만으로 그치지 않고 침대 위로 점프했다.
날씬한 몸이 침대에  파묻힌다.
좋은 호텔에 처음 들어간 소녀처럼 그 위에서 굴러다니며 즐거워 한다.
...신발은 벗고 올라가야지.


“비싸보이는데 중고야. 가구점에서 팔천 이백 오십 골드에 내놨더라고. 나는 침대만 사서 어쩔거냐고 말렸는데 얘가 워낙 고집이 세서.”


앨리스가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 방에 딱 침대만 있네요.”
“여기 옷장도 있어요.”
“옷장이라기보단 서랍장에 가깝지만… 음, 컨셉은 잠만 자는 방인가요? 좋습니다.”


앨리스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뭐야, 감상이 그게 다야? 아니, 침대가 두개인 것도 아니고 2층 침대인 것도 아니고, 퀸사이즈 하나잖아. 라비가 여기서 잘 일 있으면 나랑 같은 침대에서 자야 한다고.”
“난 괜찮아, 앨리스.”
“내가 안 괜찮아.”
“왜에? 나 잠버릇 없어. 코도 안골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니, 바보야. 여자끼리라도 같은 침대에서...”


티격태격하는 둘을 두고 난 상념에 잠겼다.


‘여기서 섹스하면 기분 죽이겠다.’

아마 둘은 신경도 안썼겠지만,  방은 사랑을 나누기에 최적화된 방이다. 티슈곽만 하나 갖다놓으면 정말 딱이야.
벌써부터 내 눈앞에 즐거운 시간들이 그려지는 듯 했다.

라비와도, 그리고 앨리스와도.


“아, 잠깐, 코치 또 음흉하게 웃는다. 아주 버릇이구만?”

앨리스가 내 등을 철썩 때렸다.


“주위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그런 웃음은 금지!”
“...네.”



***

일단  구경을 마무리하고, 우리는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면, 저희가 다음에 참가할 종목을 발표하겠습니다. 바로 <이스케이프>.”
“오?”
“헤에~”

앨리스는 <이스케이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꽤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1년마다 개최되는거 아니었어? 이번에 열리는구나.”
“예. 딱 준비할 시간도 2주 정도 되니 적당하더라구요.”


정확히 말하면 13일 남았다. 당연히 철저히  빚 변제 스케쥴에 맞춘 계획이지만 이건 말하지 않는다.

“<지옥섬> 펠리칸 아일랜드에서 개최되는, 탈옥 스포츠입니다. 2명이 듀오로 참가해야 하고, 상금은 무려  오만 골드.”
“와!”


라비가 감탄했다.
이전 대회가 기껏해야 상금 오만 골드였는데, 그것도 많아보였으니.
상금 십 오만 골드면 내 빚 팔만 골드를 갚고도 팀 운영에 칠만 골드나 쓸  있다.

이번 대회를 우승하면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팀 다운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아마 두 분 다 <이스케이프>의 자세한 룰은 모르실 거예요. 제가 간략히 설명해드리죠.”

난 사무실 구석에서 화이트보드를 끌어왔다.
초롱초롱한 눈빛의 두 아가씨들이 내 설명에 집중하고 있다.


***

<이스케이프>는  그대로 특정 공간에서 탈출하는 스포츠다.

여러가지 테마가 있지만 이번 대회는 ‘지옥섬 펠리칸 아일랜드’의 무간지옥, 펠리칸 감옥에서 탈출한다는 컨셉.

경기 시간은 총 4일이다.

4일 안에, 누구라도 먼저 탈출한다면 그 팀원이 소속된 팀이 승리한다.

수상은 단 두 팀.

가장 먼저 탈옥에 성공한 팀이 우승 상금 십 오만 골드를 먹고, 심사위원들의 평가로 탈옥에 가장 많이 기여했다고 여겨진 팀이 준우승 상금 팔만 골드를 먹는다.

나로서는 준우승만 해도 일단 억지로 내 빚은 갚을  있으니 이점도 꽤 포인트가 높다.


4일동안이나 주구장창 진행되는 스포츠인만큼 내 기준에선 스포츠라기보다 하드코어한 버라이어티 쇼에 가깝게 느껴진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 화장실만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선수들의 일상은 24시간 중계된다.

실제 감옥살이나 마찬가지다.

감옥 컨셉이니 당연히 간수들도 있다. 뛰어난 신체능력을 지닌 선수들을 저지하기 위해 간수들도 무지막지한 스펙으로 무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언제든지 선수들을 두들겨팰 준비도 되어 있다.

듣기론 뛰어난 마법사가 만들고 조종하는 ‘마법 골렘’ 간수들이라 여차하면 간수들 몇 쯤은 희생시킬 각오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



“정말이지, 코치인 제가 이렇게 말하기도 뭐하지만, 범죄를 조장하는 반사회적 스포츠네요.  보는 입장에선 재밌겠지만요.”

라비가 손을 들었다.

“응, 물어봐.”
“코치님, 이번 대회에서도 플레잉 코치로 참가하시나요?”


...알기 쉬운 녀석. 그렇게 너무 노골적으로 러브러브한 감정을 드러내면 앨리스가 눈치채잖아.
라비는 경기의 어려움보다도 설마 4일 동안 나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지 그 걱정만 가득한 모양이다.


“응. 그렇게 됐다. 4일동안 매일 23시부터 00시까지 작전타임이 있어. 나는 하루 종일 경기를 지켜보다  시간에 이런저런 코칭을 해줄  있겠지.”
“휴우, 다행이다.”

라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이야?”
“아, 헤헤. 그런가.”
“나는 오히려  꺼림칙한걸. 4일 동안이나 이 음흉한 코치랑 같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너무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제 몸이 아니라 저번에 봤던 그 마스코트 같은 몸이라 불미스런 일은 아무것도 못할겁니다.”

그러고보니 이번엔 플레잉 코치용의 바디를 제대로 준비해두는게 좋겠다.
또 가서 허둥거리면서 빌리지 말고 미리 챙겨야지.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니가 의식하는 것부터가 기분 나빠.”
“이거 뭐 가불기네요. 그래도 다른 팀도 다 할테니까, 이기려면 어쩔 수 없어요.”
“흥…”

앨리스는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며 다시 내 주의를 끌었다.

“예, 앨리스 선수.”
“일단 듣고 바로 생각나는건데,  능력이면 어지간한 것들은 태워버리고 나갈 수 있을텐데? 시작하자마자 끝나는 거 아냐?”


나도 안해본 생각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나야 정말 좋지.

“그런데 또 모르겠더라고요.
대회 등록할때 선수들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능력은 전부 등록해야해요. 미등록된 스킬을 사용하면 실격입니다.”
“아하. 그말인즉슨…”
“예. 대회 측에서 아마 앨리스 선수의 화염능력에 대해 뭔가 대응책을 마련해두겠죠.”

운영측에서 1년만에 열리는 대회를 노잼으로 시시하게 끝나도록 만들진 않을 것이다. 경기가 열리자마자 미친 방화범이 다 태워버리고 나가는 걸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기다린 건 아닐테니까.

...아닌가? 그것도  재밌을 것 같기도...

“흥, 건물엔 방화 대책, 간수들은 화염 내성… 일단 생각해보면 그정도려나… 귀찮은 짓을 해두겠네.”
“그래도 앨리스 선수의 불의마법이 전혀 쓸모없게 되진 않을 거예요. 써먹을 수 있는 구석이 있으면 철저히 써보자고요.”


라비는 항상 그렇듯 내 선택에 아무 불만이 없다. 지금이라면 내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라고 해도 따를지도 모른다.
코치님이 그렇게 말했으니 절벽 밑에 뭔가 좋은게 있을거야~ 하며.

“그러면 <이스케이프> 참가 둘 다 동의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오케이예요 코치님~”
“까다롭네. 하지만 그럴수록 시시하지 않으니, 뭐 괜찮아.”

***

레이지 아재에게 전화로 결정된 내용을 보고했다. 대회 참가 접수는 아재가 맡아서 해줄 것이다.

하지만 본업도 따로 있고, 나이도 든 아재한테 이런 일을 자꾸 떠맡기려니 영 미안하다.

역시 제대로 된 프런트도 빨리 갖췄으면 좋겠다.
일단 여차하면 비서라도.
뭐, 그건 됐고.


“그러면 오늘은 오전에 간단하게 한번 <이스케이프> 시뮬레이션 훈련 해보도록 합시다. 개인훈련은 오후에 하고요.”

라비와 앨리스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모였다.

이렇게 둘이 서있으니 또 경치가 괜찮다.

사슴처럼 늘씬하고 쭉쭉 뻗은 스타일의 라비.
나올 곳은 제대로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 있다.
선수로 치자면 육상에 가까운 체형이랄까.
단거리에서 가속과 방향전환에 능한 속도 특화의 이상적인 육체다.

반대로 앨리스는 운동선수라기엔 약간 가냘퍼보인다.
성인이지만 소녀에 가까운 체형.
저 체구에서 라비와 비슷한 수준의 능력치를 가진게 쉽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선수로 치자면, 실제 몸을 격하게 쓰는 스포츠보단 두뇌를 더 사용하는 게 어울려 보인다. 차분하고 정적인 계열의, 당구, 다트 등.
화사한 금발이 햇볕을 받아 반짝거린다. 뮤직비디오 촬영이라도 나온 아이돌 같은 이미지다.

‘양 손의 꽃이구만. 난 행복한 감독이야.’


전생에 진수현으로 살때도 이런 특급 에이스&미인을 두  동시에 데리고 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훈련이라고 해도, 뭘 하는데?”

앨리스가 물었다.
러닝트랙 하나, 철봉 하나. 컨테이너 박스 세개가 전부인 황량한 훈련장.

여기서 무슨 훈련을 할지 감이 안오는 모양이다.


“뭐 대단한건 아니에요. 간단히, 여기가 감옥이라고 생각하고 두 분이 밖으로 빠져나가보세요. 제가 간수역할을 맡을게요.”
“와, 재밌겠다.”
“...노는  아니야, 라비야. 진지하게 하자고.”

나는 라비에게 주의를 줬다. 살짝 시무룩해진 라비.

“간수? 코치가?  어떻게 막을건데. 지금 당장이라도 태워버리면 그만인걸.”
“뭐 그건 그렇지만… 그러면 훈련이 안되니까 일단 저에겐 불의마법이 안통한다는 설정으로 해둡시다.”


내친김에 추가했다.


“그리고 불의 마법이 아니더라도 제가 달려가서 둘을 잡거나, 저지하지 못한다는  너무 뻔하니까요.
제 시야에 들어오면 거기서 탈옥은 실패한걸로 할게요.”
“...알았어. 일일이 따지면 끝이 없으니.”
“그러면 둘은 마침 새로 들어온  안락한 컨테이너가 감방이라고 치고, 저기서 시작해보세요. 저는 훈련장 안을 이곳저곳 순찰하면서 두 분을 막아보겠습니다.”

라비한텐 노는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당장 나부터가 ‘술래잡기’, ‘얼음땡’같은 추억의 놀이들을 떠올리는건 어쩔수 없었다.

‘훈련이야, 훈련.’


둘이 숙소 컨테이너에 들어가는  확인하고 난 운동장 가운데에 섰다.

작은 강아지 놀이터 크기의 훈련장이니만큼 사실 운동장에서 컨테이너 세 개가 한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맘만 먹으면 장승처럼 지키고 서서 절대 못나가게 감시할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까진 하지 않기로 했다.

‘실제 간수라면 좀 이곳저곳 순찰하며 돌아다니겠지.’

뒷짐을 지고 철봉도 한번 쓱 만져보고, 운동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발에 안채이게 멀리 차버린다.

일부러 둘이 탈출을 노릴만한 틈을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차피 입구는 하나. 북쪽에 세 개에 컨테이너가 모여있고, 가운데에 운동장, 그리고 운동장 남쪽에 유일한 입구가 있다.

 입구가 둘의 목표라는  뻔하다.


‘이왕 하는 김에 좀 재밌게 날 놀래켜주면 좋을텐데 말이야.’

어슬렁거리며 마음속으로 숫자를 삼백까지 셌다.

슬슬 뭔가 행동을 시작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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