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에이스 듀오(3)
먼저 나오는 건 라비다.
라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몰래 피씨방 가려다 거실에서 티비보던 엄마와 마주친 것 같은 표정이다.
“어, 라비야. 탈옥할거야?”
“아니요~헤헤.”
일단 탈옥 시도를 하지 않으면 잡힐 일도 없다, 이런 마인드인가.
뭐 그렇게 버티면 탈락할 일도 없겠지.
하지만 그건 그냥 모범수다.
감옥 안에서 평생을 보내기로 작정한 선량한 죄수의 생각이잖아.
게임 의도를 이해 못한거니?
“내가 시간제한을 두는 걸 깜박했네. 한 시간 안에 탈출 못하면 아무튼 둘 다 탈락.”
“예? 코치님 그걸 지금 정하는게 어딨어요!”
“근데 그렇게 안 정하면 훈련이 안 끝나잖아.”
라비가 볼을 부풀리며 항의했다.
여차하면 인내심 싸움으로 승부해보려고 작정했던걸까.
확실히, 인간의 집중력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극히 유리한 환경에서 감시하고 있는 나지만 5시간, 10시간 계속 감시하라고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니까.
똥오줌도 싸야 하고 물도 마셔야 한다.
빈틈이 조금은 생길 수 밖에.
“응~ 코치 맘이야~ 빨리 탈출해, 뭐해 라비야. 여기서 살게? 전입신고도 하지 그래 아주?”
“우이씨…”
라비는 뚜벅뚜벅 운동장을 가로질러 내게 걸어왔다.
이러다 갑자기 진심으로 속도를 내면 나야 막지 못하겠지만, 룰 때문에 지금은 그래도 탈락이다.
어쨌든 탈옥시도를 내눈으로 목격하기만 하면 끝이기 때문에.
일단 내 앞에 섰으니 귀엽기도 하고,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줬다.
강아지처럼 헤헤 웃는 라비. 당장 뭔가 시도 할 생각은 없어보인다.
“나가게?”
“아닌데요~”
문 앞에서 깝죽대는 라비. 신경이 쓰인다.
“야, 죄수가 무슨 감옥 정문 앞에서 맘대로 어슬렁거려? 그런게 어딨어. 할 일 없으면 다시 돌아가.”
“알았다구요.”
라비는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지에 똥 지린 것 마냥 미묘한 걸음걸이로...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한 발짝 한 발짝 느릿느릿하게…
...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이디어는 좋았다. 근데 어쩌나.”
난 라비의 손을 덥썩 잡았다. 라비가 펄쩍 뛰며 놀란다.
“엣? 코치님, 왜그러세요?”
“뭐가 능청스럽게 엣?이야. 다 눈치챘으니까 빨리 따라와.”
“아하하하, 무슨 말일까요… 전 잘 모르겠는데~”
손을 잡고 라비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컨테이너로 향했다.
난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앨리스를 찾았다.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컨테이너 뒤쪽.
앨리스가 훈련장 울타리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정문이 아니라면 내 시야에서 벗어나면서 밖으로 뺘져나갈 위치는 여기뿐이다.
그럼 그렇지.
“안녕하세요 앨리스 선수, 도와드릴까요?”
“...에이, 바로 들켰네.”
한쪽 다리만 애매하게 울타리에 걸쳐져있어 발레 선수가 발레바에 다리를 올리고 아크로바틱한 자세를 취한 것처럼 보기만 해도 불편해보인다.
2m에 가까운 높은 울타리다. 작은 체구의 앨리스로서는 쉽게 넘어가지 힘들었을 것이다.
앨리스는 낑낑거리며 다시 훈련장쪽으로 넘어오려다 몇 번이고 실패했다.
“뭘 보고만 있어, 코치. 이거 좀 빼줘.”
“생각보다 몸이 유연하지가 않네요. 저런.”
“키가 작아서 그래. 내가 10cm만 컸어도 그냥 넘어갔는데.”
나는 앨리스의 양 겨드랑이 밑에 손을 끼고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앨리스는 민망한지 먼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LOVE파워 사용]
[스킨십: 높이 높이.
거만한 귀족 아가씨는 누가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걸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인답게 대우해주길 바라지요.
하지만 울타리를 넘다 꼼짝 못하게 된 상황에선 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대로 된 정숙한 아가씨는 울타리를 넘지 않으니까요.
앨리스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기교: 13 (+1)
]
[앨리스는 당신의 손길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앨리스는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옴싹달싹 못하므로 이번만 스킨십을 받아들였습니다.]
“시간 좀 잘 끌었어야지, 바보 멍청이 라비야.”
“에엥? 난 최선을 다했다구. 우이씽, 내 탓을 하다니, 너무해.”
“최선은 무슨. 5분도 못 끌었잖아.”
“...그래도, 앨리스가 이정도 울타리를 못넘을줄은... 역시 역할 배정이 잘못된게…”
“말 다했지?”
둘이 싸울 기색을 보이길래 난 중재하기 위해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만그만. 처음이지만 뭐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꼭 정문으로 나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것도 좋았고.
실제 탈옥도 문이 아니라 벽을 넘어서 나가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결과는 실패지만, 흥.”
“뭐 훈련이니까요. 괜찮아요.”
라비가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근데 하면서 느낀게 있는데요. 지금은 코치님 혼자 간수역할을 맡아서 코치님의 주의만 끌면 그만이지만, 실제는 간수들이 더 많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좋은 지적이야.”
내가 라비를 칭찬하자 앨리스도 지지 않겠다는 듯 바로 얘기했다.
“그것도 그렇고, 애초에 ‘현실에서의 탈옥’과 ‘탈옥이 목표인 스포츠’는 좀 많이 다른 거 같아.”
“오, 어떤점에서요?”
“그도 그럴게, 현실의 감옥은 죄수들 대부분 탈옥할 생각이 없잖아. 그러니까 탈옥시도가 있다 해도 평소에 탈옥할 것 같지 않은 죄수가 예상을 깨고 도주… 이런 느낌이지.
근데 <이스케이프>의 경우 모든 참가 선수들은 반드시 탈옥을 시도하겠지. 그게 목표인 스포츠니.
한 마디로, 간수 입장에서 알기 쉽다는 얘기야. 경기 내내 무조건 모든 선수를 확실하게 감시해야 한다는 의무에 충실할테고.”
“아주아주 정확하고 중요한 포인트네요. 예리합니다.”
내가 찬사를 보내자 앨리스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맞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라비와 앨리스 선수가 뭔가 할거라는걸 이미 사전에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정문을 노리거나, 제 주의를 끌거나, 그동안 뒷쪽 울타리로 넘을 거라는 것도 예상했고요.”
“그래. 그래서 경기에서도 간수들은 방심하지 않고, 상시 경계상태를 유지할거야. 어설픈 시도는 소용없겠지…”
내가 앨리스를 칭찬하자 이번엔 라비가 안절부절 못한다. 묘한 경쟁이라도 붙은건가.
“아,저도요! 저도요 코치님.”
“음?”
“아마 실제 경기라면 다른 선수들도 같이 감옥에 있을 거잖아요. 그러면 서로 방해하지 않을까요? 나 말고 다른 팀은 못나가게.”
“굿. 베리 굿.”
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라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말인즉슨 간수에 더해 다른 선수들의 견제까지 방해요소가 될 거라는 거겠지.”
“오우, 까다롭네요…”
“어찌보면 실제 탈옥보다 더 어렵다고 볼 수도 있어.”
둘은 자발적으로 경쟁하듯 훈련 결과를 분석하면서 좋은 의미로 집중력이 올라가 있었다.
이상적이다.
“나는 또 이걸 둘한테 말하고 싶어. 2명 듀오로 참가하는 스포츠인데, 아직 둘의 호흡이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말야.”
앨리스는 약간 찔리는지 반론을 펴지 않았다.
“방금 전 훈련에서, 라비가 내 어그로를 끌지 못하고 의도를 간파당한 건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하지만 그걸로 라비는 너무 일찍 자기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해버렸지, 안 그래?”
“어...그런가요.”
“나한테 잡히고 앨리스의 위치로 향하는 시점에서, 큰 소리로 신호라도 보냈으면 어떨까?
작전 실패다, 일단 중지. 이런 의미를 담은.
그러면 적어도 거기서 앨리스의 탈락이 확정되진 않았겠지.”
“맞네요.”
그것봐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앨리스에게도 난 말을 이었다.
“앨리스 선수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라비가 시간을 덜 끌었다곤 하지만 울타리를 넘을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있었어요.
그냥 앨리스 선수가 작전 수행에 실패한 거. 그게 가장 큰 실패 원인이었습니다.”
“...”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건가. 앨리스는 입을 꾹 닫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기야 그정도 울타리도 못 넘은 게 자랑은 아니니.
“솔직하게 얘기했어야 해요. 라비야, 나 혼자 이 울타리 넘기 힘들다. 역할 바꾸자.
아니면 밑에 밟고 올라갈 뭐라도 먼저 찾아야겠다. 이렇게요. 제말이 틀린가요?”
“...쪽팔리잖아. 그래서 말 안했어.”
“팀원끼리는 서로 부끄러울 것도 뭣도 없어요. 같이 도와야해요.”
라비도, 앨리스도 숙연해졌다.
감독으로서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다.
성적도 좇박고, 감독의 권위도 시궁창인 팀은 감독이 뭔 말을 해도 너는 짖어라~ 나는 내 할 거 할란다 하는 태도로 일관하기 일쑤.
물론 내 경험담이다. 쉬벌...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의 두 선수는 어리고 성실하기 때문에 코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크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라비, 앨리스 둘 다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경쟁은 나중에.
저 따라해보세요. 일심동체.”
“일심… 뭐요?”
라비가 특유의 바보같은 얼굴로 되물었다.
얘는 다 좋은데 가끔 말귀를 잘 못알아들을 때가 있다.
“일심동체 바보야. 한 마음, 한 몸이라고.”
“아~ 일심동체!”
앨리스가 답답한지 옆에서 끼어들었다.
“앨리스 선수, 잘 아네요. 지금부터 대회 시작때까지 두 선수 다 같은 컨테이너에서 동고동락하며 호흡을 맞춥니다. 일단 그게 기본이예요.”
앨리스는 끄응, 하며 불만스러워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뭐라 불평을 늘어놓진 못했다.
이기고 싶으면 뭐 어쩌겠나, 내 말 들어야지.
***
오후는 개인 훈련으로 진행된다.
전략도 중요하지만 선수들의 개인 피지컬 향상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내게는 개꿀빠는 시간이기도 하다.
알아서들 잘 하니까 내가 별로 해줄 일이 없거든.
특히 앨리스가 팀에 추가되니 더 편해졌다.
앨리스는 운동 이론, 스포츠 신체 기능학에 생각보다 빠삭했다.
본인의 부족한 피지컬을 보완하기 위해 그런 이론 쪽에 더 신경썼을지도.
재미있는 일이다.
어쩌면 그녀는 타고 난 강한 마력에 많은 성장동력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체 발달에는 적게 투자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앨리스가 지금 라비와 비슷한 수준의 능력치를 갖춘 것도 기적적인 걸지도.
다리 길이도, 근육량도 다른데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차이는 점점 벌어질 것이다.
냉혹해도 운동 선수에게 있어 타고난 육체의 차이는 마음먹은대로 어쩔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앨리스는 라비의 우월한 신체 스펙을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너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으면 벌써 전국 대회도 수십개는 우승했을텐데.”
앨리스는 매트에 엎드린 채 상반신을 쭉 들어올리며 말했다.
나한테도 익숙한 스트레칭 코스다.
“지금 뭐해?”
“스핑크스 자세.”
“헤에~ 신기하다. 이건 뭐에 좋아?”
“몸이 유연해지고, 신체 가동 영역이 늘어나고, 그리고… 키가 조금 더 클 수도 있어.”
아마 앨리스는 100% 마지막 효과 때문에 하는 것일터.
“키가 큰다고? 세상에.”
“뭐 말이 그렇지, 실제론 그렇게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어. 키야 부모님에게 이어받은 유전이 99% 좌우하니까.”
“앨리스네 부모님들은 어떤데?”
“...다 그냥 평범해. 로잘레스 가의 사람들 중엔 키 큰 사람이 거의 없었어. 그래서 운동쪽으론 별 결과를 못 낸 걸지도 모르지.”
“...아니야, 그래도 앨리스는 만능 스포츠 잘하잖아.”
“하지만 나도 마법능력에만 의존하는 타입이고, 울타리 하나 제대로 못넘잖아.”
항상 자신감 넘치는 앨리스지만 또 묘하게 스스로의 한계를 항상 의식하고 있었나보다.
지금은 끼어들지않는게 좋겠다. 난 라비와 앨리스 둘이 친해지도록 두고 잠시 훈련장을 나왔다.
앞으로 팀의 규모가 커질때까지 우리 팀은 라비&앨리스 2인 에이스의 듀오에 많이 의지해야 한다.
둘의 사이가 좋아진다면 베스트일텐데…
생각보다 앨리스가 첫인상처럼 독불장군이라거나, 주변 사람에게 엄청 오만한 성격은 아니라 그건 꽤 다행이다.
나는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튀김, 순대를 좀 샀다.
여자애들은 이런거에 환장하기 마련이다.
먹으면서 쉬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겠지.
뭐 나도 엄청 좋아하지만.
걸어오며 곰곰히 생각했다.
두 명의 선수를 어떻게 성장시켜야 할까?
라비 쪽은 꽤 순조롭다.
내 지도도 충실히 잘 따르고, 본인의 의지도 확고하다.
더군다나 내 ‘LOVE파워’를 본격적으로 활용해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어지간한 스킨십정도가 아니라 마음껏 나와 섹스를 즐길 사이까지 진전되었으니 말이다.
‘라비는 새로 얻은 시간 가속 스킬을 집중적으로 숙련시켜야겠어.’
지금까지는 피지컬, 그중에서도 속도에 의존한 플레이를 주문했지만 저번 <메이즈>대회 때도 경험했듯이,
여기는 판타지 세계다.
판타지 세계의 스포츠에선 개개인이 가진 스킬이 가진 변수가 어마어마하단걸 깨달았다.
‘시간가속’이 정확히 어떤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상식에 따르면 분명 개사기스킬일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앨리스 쪽인데.’
앨리스도 능력치는 우수하고, 잠재성도 차고 넘친다. 게다가 ‘불의마법’은 그녀가 지역대회를 쓸어담게 해준 치트스킬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지금까지는 혼자서 어떻게든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앞으론 ‘불의마법’만으로 대처할 수 없는 순간이 오기 마련.
결국 앨리스도 내 ‘LOVE파워’를 사용해 다음단계로 나아가게 해줘야 한다.
‘하지만 스킨십도 쉽지가 않단 말이지.’
라비와 달리 앨리스는 알고 지낸 시간이 길지 않고, 게다가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손길을 쉬이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니다.
...그건 아주 바람직하긴 하다. 원래 그래야 하긴 해.
하지만 나는 예외여야 한다.
어떻게 앨리스에게 ‘LOVE파워’를 쓸 수 있을까…
차분히 지금까지 앨리스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된 정보를 종합했다.
‘역시 공략의 포인트는 그 쪽인가.’
자신감에 가득차 안하무인일 것 같았지만, 의외로 경쟁 선수들을 의식하는 성격이다.
특히 라비에 대해.
한번의 패배가 뼈아팠는지 우리 팀에 가입까지 해가며 라비를 뛰어넘고 싶어 한다.
이 경쟁의식, 미묘한 열등감.
이쪽을 공략할 수 밖에 없겠다.
‘크큭… 재밌겠구만, 앨리스를 공략하는 것도.’
웃다가 혹시 앨리스가 보고 또 한소리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퍼뜩 주위를 둘러봤다.
노이로제인가.
난 주변에 앨리스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마저 웃었다.
‘크크크… 눈치보면서 웃으려니까 힘들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