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세번째 대회, 이스케이프(3)
-12:21 다시 식당
“무… 무슨 일이야?”
라이카가 중얼거렸다. 뒤에 따라온 앨리스도 눈이 커다래졌다.
“보다시피, 식사에 누가 약을 탔어요.”
테이블 한 구석에서 동그란 안경을 낀 누님이 말했다.
우승후보 중 한 명이다. <버팔로스>의 데이지.
듀오인 안나가 뻗어버려서 조금 곤란한 눈치다.
“뭐라고?”
“아마 주방 보조 노역을 선택한 팀이 한 일이겠죠? 그쪽은 오전부터 바로 과업에 투입되었으니까요.”
데이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차분히 상황을 분석했다.
앨리스가 늘어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라비를 찾아냈다.
물먹은 솜마냥 제 몸을 못 가누고 헤롱거린다.
훈련 때 앨리스도 비슷한 짓을 하긴 했는데, 누군지 모를 선수들은 대회에서 스케일 크게도 저질러버렸다.
“유우, 일어나. 하~ 맛이 갔네 아주. 가오 상하게 이게 뭐야, 뭘 이렇게 많이 쳐먹었어.”
라이카도 자기 듀오인 유우의 뺨을 몇 번 치면서 깨우려다 아무리해도 안 일어나자 포기했다.
유우의 한 쪽 뺨만 잔뜩 두들겨 맞아서 벌개져있다. 맨정신일땐 잘 벼린 칼날같이 빈틈 없어보였지만 자고 있는 모습은 그냥 적당히 무방비한게 그 나이대 여자애같다.
대회 최강의 무투파답지 않은 귀여운 모습이다.
“제가 먼저 간단히 신체반응만 체크해봤는데 생명에 해를 끼치는 극약은 아니에요. 그냥 수면제 계통. 용케 잘 숨겨 들어왔네요.”
“당신, 데이지...였지?
나는 이런 생각도 들어.
사실 당신이 저지르고 시침 뚝 떼고 있는거 아닐까?”
라비에게 무릎베개를 한 채로 앨리스가 말했다.
그 말에 라이카도 홱 데이지를 노려봤다.
듣고보니 가능성은 있다.
“설마요. 전 화장실 먼저 갔다오느라 점심 식사를 못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뭣보다 제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태연히 식당에 남아서 어물댈리가 없잖아요.”
“음…”
“만약에 제가 범인이라면 이 절호의 노마크상태, 놓치지 않았겠죠.”
나는 현재 상황을 머릿속에 정리해봤다.
분명 식사에 약을 타 선수들을 모조리 재워버린 누군가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목적은 간단하다. 탈출시도를 하기 전에 다른 선수들의 견제를 받고 싶지 않다 이거겠지.
헌데 간수골렘들은 식사를 할 필요가 없다.
봉쇄한 건 같은 선수들뿐, 이 정도 시도로 감옥의 보안이 무너진 건 아니다.
따라서 어지간한 탈출시도는 금방 제압당할 뿐이다. ...뭔 생각일까?
“...한 팀만 안보여. 머리띠한 애하고 별 모양 귀걸이한 애.”
앨리스가 식당을 돌아다니며 한 명 한 명 얼굴을 확인한 후 말했다. 라이카가 감탄했다.
“오, 너 그거 어떻게 알았냐.”
“멍청하긴. 고작 선수 40명인데 이 정도 특징도 못 외워?”
“이 썅년이.”
앨리스와 라이카가 또 한바탕 붙을 기세로 으르렁댄다.
머리띠와 귀걸이라. 작은 캡슐형태의 알약이라면 충분히 그 안에 빈공간을 만들어 숨겨 들어올수도 있었겠다.
아니면 항문이나 어금니 안쪽 같은 곳에도 숨길 수 있고. 마약 밀수하듯.
“그 쪽 두 명이라면 그거네요. ...워프포탈의 능력.”
“응?”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잘 자고 있으니 가만히 냅둬도 별로 위험할 건 없어요. 그보다 구경 가실래요?”
데이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묘하게 즐거워 보인다. 앨리스와 라이카는 마지못해 그녀를 따라갔다.
“아, 저기다. 마법진 발견.”
안경을 반짝이며 데이지는 창문 밖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식재료를 보관하고, 급식을 조리하는 감옥 부속 건물.
“조리실?”
“예. 워프포탈의 능력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차원구멍을 만들어내는 신기한 스킬이에요.
근데 발동하려면 5m정도 되는 큰 마법진을 그려야 하죠. 일일이 한 획 한 획마다 마력을 쏟아부어서요.
시간도 오래 걸릴겁니다. 당연히 남들 눈 앞에서 하진 못했겠고, 요리 노역을 수행하며 몰래몰래 만들었겠죠.”
그러면 워프포탈의 마법진도 조리실 근처에 만들어진게 당연한 수순.
것보다 나도 나름대로 선수들의 능력에 대해 조사했는데, 정보를 잘 숨겼는지 그런 능력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얘의 정보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즉석에서 정보를 조합해 추론하는 추리력도 보통 이상.
‘시계태엽 듀오’의 데이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오, 시작하나 보네요.”
조리실 옆의 공터에서 무지개빛 오로라가 솟아오른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감옥과 다른 풍경의, 숲이 우거진 곳으로 연결된 거대한 구멍이 비집고 나왔다.
장관이다. 저런 능력이 또 있었구나.
“어,어…? 야! 그러면 위험한거 아냐? 쟤들 저기로 나가면 경기 끝이잖아!”
라이카가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와 창문 밖 조리실과의 거리는 200m도 넘는 터라 라이카의 번개 능력으로도 저 ‘워프포탈’팀을 저지하긴 힘들다.
“뭐 그렇죠. 자, 이제 어떻게 될까요.”
데이지는 여유있게 말했다. 아까부터 그리 위기감을 못느끼는 태도다.
앨리스는 턱에 손을 대고 아무말없이 워프포탈을 지켜보고 있다.
멀리서 워프포탈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2명의 모습이 보인다.
...진짜로 여기서 대회 끝?
한 4시간 만에?
기이잉-
드럼 탄창이 회전하며 예열되는 특유의 사운드.
투타타타타타타타-
타타타타
드르르르르륵
타타타타타타타
그리고 공사장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듯한 시끄러운 난타음이 감옥에 메아리쳤다.
장전된 기관총을 난사하는 소리가
워프포탈 건너편에서 공간을 넘어온다.
채 입구를 마저 건너지 못하고 2명이 처참히 쓰러졌다.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
해변가로 상륙하는 군인들을 맞이하는 나치 국방군의 토치카.
거기서 기관총이 불을 뿜으며 상륙군을 도륙하는 그 명장면을 지금 ‘워프포탈’팀의 두 명이 재현하고 있었다.
미리 워프포탈이 열릴 걸 예상한듯이 포탈 건너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치사한)간수골렘들이 무자비한 사격을 가했던 것.
“...역시 저렇게 되네요.”
데이지가 읊조렸다.
“뭐, 뭐야. 어떻게 된거야.”
불행히도 여기 셋 중 가장 지능이 떨어지는 바람에 질문 담당이 되어버린 라이카.
앨리스가 대답했다.
“마법진과 마법진을 연결하는 워프포탈이잖아? 입구의 마법진이 있으면 출구 쪽의 마법진도 있었겠지.
나름대로 꾀를 써서, 감옥 밖의 마법진은 대회 시작전에 미리 그려놓고 온 걸거야.
근데 처음부터 대회 운영측은 당연히 쟤들이 ‘워프 포탈’의 능력을 써서 탈출할걸 대비하고 있었어.
결국 간수골렘들이 출구쪽의 마법진을 찾은후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저렇게 포화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는 결과가 되는거야.”
“...”
라이카가 입을 떡 벌렸다.
-알립니다. 현시간 부로 감옥 내 탈출 시도가 적발되어 죄수 1팀이 탈락했습니다. 남은 죄수는 총 38명, 19팀입니다.
감옥 안 스피커에서 무감정한 기계 합성음이 안내 메세지를 읽었다.
***
-14:10 감옥 내 목공 작업장
모두가 예상치 못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대세에 큰 영향은 없었다.
일부 몇 명만 제외하면 다같이 점심먹고 낮잠 한번 잘 자고 일어난 그 뿐이다.
시에스타라고 하던가, 스페인에선 점심먹고 이렇게 모두 낮잠을 즐기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건강에도 좋겠지.
“와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라비가 여전히 졸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하품을 하며 말했다.
“하, 어쩐지 열받네. 너가 퍼질러 자는 동안 나는 라이카 그 싸가지없는 애랑 푸닥거리 한 판 하고, 별 희한한 구경까지 했는데 말야.”
“헤헤. 자칫하면 내가 자는 동안 대회 끝날 뻔했네.”
오후는 6시까지 죄수들이 각자 선택한 노역을 하도록 스케쥴이 짜여있다.
라비와 앨리스는 톱밥과 나무토막이 널려있는 목공 작업장에서 판자를 다듬는 일을 배정받았다.
평소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둘인만큼 영 폼이 어색하다.
여자애 둘이 감옥에서 죄수복을 입고 작업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어색하긴 하지만...
“이거 시간 안에 100개 작업량 다 채워야 해. 떠드는건 괜찮지만 부지런히 움직이자고, 라비.”
“못 채우면 어떻게 되지?”
“글쎄? 이 정도 가지고 쫓겨나진 않겠지만, 뭔가 불이익이 있기야 하겠지.”
앨리스가 지지대에 판자를 고정하고, 힘이 센 라비는 열심히 톱질을 했다.
처음엔 삐뚤빼뚤하게 썰어대 멀쩡한 판자를 폐품으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요령이 조금 쌓인 모양이다.
‘목공’을 선택한 팀은 우리 이외에도 네 팀이 더 있었다.
다들 생각은 비슷하리라.
탈옥에 유용하게 쓰일 도구를 챙겨보자는 심산이겠지.
그 중에는 <블루 윙 스포츠>의 마하&세이린도 있다.
“라비, 잘되어가요?”
“그럼요. 벌써 나무판 40개나 만들었어요. 헤헤… 해보니까 점점 재밌어지는데요.”
“아니, 그 쪽이 아니라…”
<트레져 헌트>대회의 전전 챔피언이었던 마하. 어쩐지 반갑다.
“아하, 탈옥! 글쎄요, 이건 아직…”
“쉿! 조용히! 대놓고 말하면 어떡해요.”
마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이린이 옆에서 피식 웃었다.
작업을 감시하는 감독관의 눈치를 살피며 마하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모든 죄수가 탈옥을 노릴 거야 감독관도 알고는 있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면 페널티 받을 수 있으니까.”
“아,네. 고마워요. 마하.”
“뭐 그건 그렇고.”
마하가 속닥속닥 얘기한다.
얼핏 보면 귀여운 여자애들이 모여서 쉬는 시간에 구석에서 연애토크라도 하는 것 같지만 내용은 탈옥, 도주 계획같은 살벌한 것들.
“목공을 선택한 거 보면 라비네 팀도 아마 저희와 생각은 비슷한거겠죠?
필요한 도구들이 있나봐요.”
“어…그런가?”
물론 라비는 별 생각없이 나와 앨리스가 시키는대로 따를 뿐이었다.
순수하게 그저 판자를 자르는 노동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던 라비.
답답한지 앨리스가 대신 답했다.
“어. 맞아. 근데 왜? 하고 싶은 말부터 해. 시간없으니까.”
“...앨리스. 솔직히 당신하고 전 그닥 편한 사이는 아니죠. 하지만 지금은 서로 견제할 때가 아니에요. 맞나요?”
“그거야 너 하기에 따라 달렸지.”
요즘 앨리스의 태도가 꽤 전보다 나아져서 몰랐는데, 얘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사실 이렇다.
새삼 라비와 내가 얼마나 앨리스와 친해졌는지 깨닫게 된다.
“그럼 본론부터 얘기해서. 어차피 여기서 도구를 챙길거라면, 2명이서 챙기기보다 4명이서 챙기죠. 그게 더 빠르고 효율적이에요.”
“오호라.”
논리는 맞다.
하지만 그건 두 팀이 서로 경쟁하고 있지 않을때, 다시말해 같이 탈옥하고자 할때 적용되는 논리다.
지금처럼 어느 한쪽이 먼저 탈옥해야 하는 지 경쟁하는 상황에선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근데 우리가 너희 남 좋은 일만 시켜줄 결과가 될 수도 있는걸. 왜 그래야 하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마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잘한다, 앨리스. 내가 실시간으로 지시를 못내리는 지금 상황에선 니가 팀의 브레인이 되어줘야 해.
“우리는 준비한 탈출계획이 있어요. 필요한 건 도구뿐. 헌데 두 명만으론 조달하기가 쉽지 않아요.
저희는 필요한 도구만 얻으면 됩니다.
대신, 라비 팀이 원하는 건 뭐든 제공해드릴게요.”
“뭐든?”
“예. 도구든, 정보든, 그쪽 탈출에 도움이 되는 특정 행동이든.”
세이린이 한마디 말을 거들었다.
“물론 저희가 걸려서 탈락할 정도의 무리한 부탁은 못들어드려요.”
앨리스는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는 거구나.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내 생각을 말하자면,
나도 잘 모르겠다.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미리 미래를 보는 것도 아니고.
근데 지금 마음이 내키는 쪽은 ‘콜’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하와 세이린은 별로 위협적이지 않으니까.
냉철하고 똑똑한 데이지&안나 조합이라면 듣자마자 거부감이 들었을 터.
뭔가 거기는 치밀한 계략을 꾸미고 우리에게 접근할 느낌이다.
유우&라이카라면? 마지막에 본색을 드러내고 배신할 분위기다.
하지만 마하&세이린은… 뭐랄까 너무 정직하다.
물론 실력이야 나름대로 있지만 이쪽은 순수하다고 할까, 고지식하다고 할까.
너무 자기들 전략 하나밖에 신경쓰지 않는 타입.
한 마디로 우리가 이용하기 좋은 듀오다.
“알았어. 뭐 니들이 해봤자 시덥잖은 작전이겠지. 교섭 성립.”
“야호~ 신난다!”
“...왜 라비 너가 좋아하는거야.”
“그러면 이제 세이린, 마하하고 우리가 같은 팀인거 아니야?”
“아니야. 바보.”
마하는 앨리스에게 무시당해 살짝 기분나쁜듯 했지만 바로 자기들의 요구를 늘어놓았다.
“좋아. 그러면 우리들이 필요한 재료부터 말할게요.
삼각형 모양으로 가공할 수 있는 가벼운 스테인리스 파이프. 그리고 카본 파이프 5개.
폴리에스테르 방수천막. 신축성이 적고 질긴 것이라야 해요.
재봉용 대바늘과 낚싯줄.
그리고…”
“잠깐, 잠깐. 장난해? 그게 감옥에 다 있다고?”
“응. 있어요. 미리 감옥에 사전에 구비해놓는 재료들 리스트를 확인해뒀거든요.
앨리스, 모르시나요? 이 감옥은 요리대회같은 거에요. 여기는 식재료를 충분히 다양하게 갖춰놓은 대회장이죠. 단 그걸로 무슨 요리를 할 지는 선수들이 정하는거고.”
저 재료들은…
한 가지 내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다.
혹시, 그건가.
‘그걸’ 여기서 만들 수 있다고?
만약 가능하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탈출 루트.
하지만 잘될까?
나는 좀 전에 앨리스와 함께 감옥 외곽의 방어 시스템을 두눈으로 확인했다.
쉽지않을텐데.
나라면 안한다. 너무 도박이야. 그것도 확률이 무지 낮은.
뭐 어차피 우리 팀도 아니고, 너무 신경쓸 것 없지.
“그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이쪽도 그 재료들 구해 볼게.
그러면 우리쪽 요구. 우리는 뭘 원하냐면…”
세이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앨리스가 말했다.
“너희들이 <로즈 엔젤스>와 <블랙 이글>을 감시해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