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세번째 대회, 이스케이프(5)
-23:00 감방 안
1일차 밤이다.
“코치님, 뭐라 말 좀 해보세요!”
라비가 날 꼭 안고 재촉했다.
하루 종일 묵언수행을 계속한 끝에 드디어 작전타임.
이제부터 코치들은 한 시간 가량 선수들과 작전 토론이 가능하다.
“여러분.”
라비와 앨리스가 날 바라봤다. 거의 15시간 가까이 말을 안했더니 내 입에서 나오는 내 목소리가 낯설다.
“오늘 하루 수고했어요. 다들 잘했습니다.”
“흥, 뭔 말부터 하나 했더니 갑자기 훈훈한 분위기 뭐야, 코치.”
앨리스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다들 고생 많았고, 내 기대보다 잘해주었다.
“특히 앨리스, 판단에 확실한 근거가 없어 망설여질 순간이 많았을텐데 전부 좋았어요. 제가 지시를 내릴 수 있었어도 그렇게 시켰겠죠. 든든합니다.”
“코치하고 내 판단이 같다고…? 그거 좋아할 일이 아니잖아.”
괜히 투덜대지만 앨리스는 내심 싫지만은 않은 기색.
“코치님, 저는요? 저는요?”
“라비도… 잘 자고, 잘 먹고, 하여튼 잘 했어.”
“헤헤.”
난 내 짜리몽땅한 손으로 박수를 짝 쳤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작전 수립에 들어간다.
“자. 그럼 여러분께 방침을 내리겠습니다.”
모두 집중한다.
“저희는 ‘땅굴 파기’ 루트로 가겠습니다.”
“어? 코치님, 그건…”
“아니지. 오팔라가 시키는 대로 하자는거야?”
조금 전 <로즈 엔젤스>의 오팔라와 조우했을 때 그녀가 앨리스에게 한 말.
...
-좋은 정보를 드릴게요. 휴게실에서 탈락했던 <핑크 엘리펀트>는 지하실에서 땅굴을 파려고 했었어요.
-땅굴…?
-이 감옥의 지상층은 단단해서 어떤 도구나 마법으로도 흠집을 낼 수 없다죠.
하지만 지하는 아닙니다.
대회측에서 의도적으로 지하의 건축자재는 무르게 만들어 놓았어요. 체력과 끈기가 있다면 충분히 파내려갈 수 있죠.
-그걸 우리한테 왜 말하는 거지?
-<핑크 엘리펀트>가 탈락해서 땅굴 루트를 개척할 팀이 사라졌거든요.
-그래서 우리보고 대신 파라는거야, 웃기고 있네.
...
“굳이 시켜서 하자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유용한 정보잖아요? 공구도 있겠다...”
영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앨리스.
“코치, 그건 좀 아니지. 걔들 손 안에서 놀아나는거라고.
아까 못 들었어? 걔들은 그저 자기들이 취할 선택지를 하나라도 더 늘리고 싶은 것뿐이야.
땅굴 쪽에 배정된 일꾼이 비었으니까 우리를 거기다 채워넣고 싶은 거라고.”
“그것도 맞는 말이에요.”
“아니 알면서 왜?”
그렇기 때문에 내 결심이 선 거다. 우리가 얌전히 지하에서 땅굴이나 파고 있으면,
오팔라는 우리를 더이상 경계대상으로 삼지 않을 터.
철저히 오팔라의 예상 안에서 움직임으로써 위협적이지 않은 변수인 척 위장할 수 있는 거다.
“저기, 코치님. 그런데 3일 동안 감옥 밖까지 땅굴을 팔 수 있나요?”
“그래 말 잘했어 라비야. 아니 애초에 땅굴로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둔한 라비조차 대번에 의아함을 느낀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감옥 울타리 밖까지 통하는 땅굴을 파려면 적어도 500m는 파야 한다.
중간 중간 마주치는 암반이나 방해물이 없어 일직선 최단코스로 판다 쳐도.
건설사에서 중장비를 가져와도 남은 3일 안에 밖까지 땅굴을 판다는 건 불가능하다.
성공하면 펠리칸 섬의 기적이요, 이 세계의 정주영이지.
“예. 기껏해야 이 감옥 본관 건물 밖까지 밖에 못파겠죠. 한 3m 정도 팔 수 있으려나.”
“...뭔가 생각이 있는거야?”
“글쎄요, 어떨까요. 건물 밖으로만 나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지금은 애매하게 말할 수 밖에 없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팔라와 마주칠지 모르니, 아직 얘들에게 내 마음속 전략을 말할 타이밍이 아니기 때문.
그저 믿어주길 바랄 뿐…!
얘들은 모르겠지만, 내 원래 세계에선 널리 추앙받는 4대 성인 중 나사렛에서 태어난 이가 이런 말을 했었다.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지니.’
사실 종교를 믿지 않는 내 입장에선 근거도 없이 그냥 닥치고 믿으라는 건가, 싶어서 조금 어이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만 지금 어쩐지 그 말이 떠오른다.
그냥 믿어라!
믿으면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여러분. 처음에 저희가 뭐라고 했었죠?”
“...?”
“모든 전략은 제가 짠 대로 진행하기로 약속했죠. 그냥 하세요. 절 믿고.”
“하아… 진짜.”
앨리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코치님, 그럼 어디를 어떻게 파야 해요?”
라비가 물었다. 옳지, 좋은 질문이다.
그 부분이 전략의 핵심이니까.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냐 못하냐는 거기에 달려있다.
“지하실 도구함 옆에 작은 문이 하나 있습니다. 보셨겠죠.”
내 기억이 맞다면, 감옥 본관 건물에 들어올 때 오른쪽 외벽에 비상계단이 있는 걸 봤다.
화재나 기타 재난시 바깥으로 탈출하도록 만들어놓은 외부 계단.
건물의 방향으로 미루어봤을때, 지하실 도구함 옆 문이 그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일터.
“그 문을 파내버릴겁니다. 열쇠는 필요 없어요. 문 채로 벽을 뜯어내버리면 되니까요.”
이제 태클을 걸 마음도 시들해졌는지 앨리스는 그래, 니 하고 싶은대로 해라, 라는 표정이다.
“코치, 하나만 확실히 하자. 그 문을 코치 말대로 뜯어버린다해도, 그게 탈출에 성공한 건 아냐.
그냥 이 본관 건물 밖으로 나온 것 뿐이지.
그 다음부터 500m 가까이 간수골렘, 방어시설을 돌파해야 감옥 외벽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본관 밖으로 나온 후의 전략도 있는거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앨리스.”
“...난 모르겠다.”
그래, 앨리스. 그거면 됐다. 넌 당분간 스스로 하는 행동의 의미조차 몰라야 해.
그래야 내 작전이 오팔라에게 넘어가지 않으니.
지하실 으슥한 곳에 있는 ‘문’.
옥상으로 통하는 외벽 비상계단.
과연 앨리스가 눈치챌 수 있을지…
“여러분, 오늘 하루 정말 수고많았어요. 그러면 내일도 잘해봅시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라비, 앨리스. 여러분도 절 믿어주세요. 이상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되려나.
솔직히 상황을 보건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이 작전이 안 통하면 답이 없는거고, 뭐.
***
-2일차, 08:10 지하실
두 팀이 더 탈락했다.
한 팀은 간밤에 탈출 시도 중 적발.
다른 한 팀은 인적이 드문 곳에서 기절한 채 발견.
안봐도 유우와 라이카가 저지른 거겠지.
교묘하게 간수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다른 팀들을 공격하고 있다.
이 어둑한 지하실에서 우리와 마주치는 일이 없기만 바랄 뿐이다.
솔직히 앨리스도 라이카와 어느정도 상대는 가능하지만 압도하진 못하고, 거기에 유우까지 더해진다면 전투에 익숙한 저쪽에 개발릴 게 뻔하니까.
쾅, 쾅.
두터운 벽이지만 분명히 곡괭이가 조금씩 박힌다.
오팔라가 전한 정보는 사실이었다.
마치 땅굴 파려면 여기로 파라~ 라고 감옥에서 유도하듯이 지하만 벽이 무르다.
라비가 땀을 훔쳤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한참 두들겨야 되겠어."
앨리스는 복도에서 망을 보고 있다. 간수골렘이나 다른 선수들도 조심해야 하니.
"라비, 교대해줘?"
"으응… 내가 좀만 더 하고. 나 아직 쌩쌩해."
라비는 다시 곡괭이를 집어들었다. 앨리스보다 라비가 벽을 더 잘 부순다는 점은 명백했다.
내가 자주 즐겼던 '마인크래프트'라는 게임으로 비교하면 둘은 나무 곡괭이와 다이아몬드 곡괭이로 땅을 파는 것만큼 차이가 난다.
타고난 능력치의 차이. 라비도 아마 그 사실을 눈치챈 것 같지만 앨리스가 괜히 자존심 상해할까봐 티내지 않고 자기가 은근슬쩍 일을 더 하려고 하는 듯하다.
착한 녀석이다.
"근데 앨리스, 파면서 느낀건데… 굳이 문을 뜯어내는게 아니라 아무 벽이나 파도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나?
우리 몸만 나갈 정도의 구멍만 내면 되잖아."
"그래. 이제야 눈치챘구나. 난 어제 코치에게 들으면서 그 생각부터 했는데 말야.”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가 날 흘겨봤다.
뜨끔.
뭐 그거야 그렇지.
“이 문을 포함해서 벽을 뜯어내는게 특별히 중요한걸까?”
“그런지도. 아니면, 다른 곳이 아니라 이 지점에 구멍을 내는게 중요한지도 모르고.”
둘은 영 답답한지 작업을 계속하며 가만가만히 얘기를 나눴다.
라비는 몰라도 영리한 앨리스라면 혼자서 가만히 생각하다보면 내가 생각한 진짜 전략에 도달할 수도 있다.
굉장히 후달린다.
탁탁탁.
그 때 다급히 누군가가 달려왔다.
세이린이다.
“응, 세이린…?”
“라비, 앨리스, 숨어요!”
미처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세이린의 긴박한 분위기에서 뭔지 몰라도 상황이 위험하다는 걸 느꼈는지 라비와 앨리스는 배관실 구석 잡동사니 틈 사이에 몸을 숨겼다.
“후… <블랙 이글>을 감시하던 중에 유우&라이카가 정확히 이쪽으로 오길래 먼저 알려주려고 달려왔어요.”
“뭐지? 우리를 찾는 건가?”
“모르겠어요. 여튼 둘의 기세가 심상치않아요.”
땅굴을 파고 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그닥 가망있는 작전은 아니고, <블랙 이글>이 우리를 일부러 견제할만한 이유는 없을텐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불안감 속에 대기하고 있자 지하의 배관실 문이 덜그럭거렸다.
“...!!”
우리 모두는 숨을 삼킨 채 기다렸다.
배관실 문이 안쪽에서 열리고, 거기서 데이지와 안나가 걸어 나온다.
한 손에 지도를 들고 읽는 데이지, 문에서 열쇠를 빼 챙기는 안나.
배관실 밖이 아니라 안에서 걸어나왔다.
일반 죄수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탐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역시 생각대로 이 길은 여기로 통하는구나.”
“그러면 사실상 끝난 거 아닌가? 선택지 중 하나가 지하로 통해있다면, 다른 하나가 정답이겠네.”
“응. 탈출 루트 확정한 것 같아.”
둘은 여유로운 태도로 학술토론하듯 조용히 속삭였다.
분명히 오팔라가 그랬었지. 쟤들은 이미 감옥의 마스터 키를 찾았다고.
지금 보니까 지도도 들고 있다.
감옥 탈출의 필수템들을 전부 챙겼다는 뜻이다.
미친듯이 빠른 페이스다…!
앨리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는건가?
기습으로 둘을 쓰러트리고 지도와 열쇠를 뺏는데 성공하면 우리가 더 유리해진다.
“저기, 앨리스님.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지금 여기로…”
세이린이 식은 땀을 흘리며 말하던 찰나,
이 지하에 또다시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등장했다.
오늘은 무슨 파티인가.
아침부터 지하에 우승후보들이 줄줄이 모이고 있다.
“이야~~~~ 진짜네. 오팔라 그 년이 말한 게.”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저 신디 로퍼같이 귀에 꽂히는 쨍하고 날카로운 목소리. 라이카다.
뒤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시선의 유우.
항상 침착하던 데이지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겠지.
“여기서 뭐하셔, <버팔로스> 어르신들?”
“원하는 게 뭐죠?”
데이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괜히 빙빙 돌려가며 떠보지 않는다. 흉폭한 짐승을 상대로 할 땐 최대한 자기의 의사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야하니까.
“지도하고 열쇠, 갖고 있다고 들었어. 내놔.”
안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거의 다왔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목표 직전에서 미친년들한테 걸려버렸다.
“남 좋은 일만 해주는 거예요. 오팔라는 당신들의 마음도 읽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요.”
“확실히 그건 거슬리긴 해.”
나른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유우.
“우리가 여기서 너희를 제압하는게 오팔라에게 유리하긴 하겠지.
근데 딱히 우리한테도 불이익은 없어.
너희가 현 시점에서 탈옥에 가장 가까운 요주의 팀이라는 것도 사실이고.”
“읏…”
“어차피 우리의 계획은 오팔라가 읽든 말든 저지할 수 없거든. 결국 실질적인 무력이 없으면 말이야.
<시계태엽 듀오>가 머리를 아무리 잘 굴려도 힘이 부족하니 이렇게 되는 것처럼.”
“자, 뭐해? 내놔.”
라이카가 재촉했다. 데이지는 체념했는지 품에서 지도와 열쇠를 꺼냈다.
지도를 받아 들여다보는 라이카.
“장난쳐, 뭐야 이게? 하나도 못 알아보겠잖아.”
“처음부터 암호로 되어 있었어요. 해독하려면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죠.”
그랬었나. 이러면 <블랙 이글>이 지도를 입수한다 쳐도 그것만 가지고 탈출하긴 힘들 것이다.
데이지&안나처럼 빠르게 지도를 해석해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
“내줄 수 있는 건 다 줬어요. 저흰 가볼게요.”
<버팔로스>의 두 명은 유우와 라이카를 확연히 경계하는 태도로 조심스럽게 뒷걸음질했다.
그 때 유우가 낮게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누가 가도 좋다고 했지.”
“...!”
“왜 말이 안 끝났는데 멋대로 가려는거야?”
“저흰 지도도, 열쇠도 없잖아요. 이제 아무것도 못해요.”
“너무 나를 무시하는군.”
듣고 있는 나까지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곧 이 자리에서 유혈극이 벌어진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래! 지도, 해석하고 가! 어딜.”
“그게 아니야.”
라이카가 쏘아붙이자 유우가 말을 막았다.
“어차피 저쪽에서 해석한 지도의 길이 진짜인지 아닌지 우리는 지금 알 길이 없어.
저 말만 믿고 돌아다니며 시간만 낭비해도 곤란하지.
어차피, 처음부터 우리한텐 지도는 별 필요도 없고.
그보다… 데이지, 사람을 너무 기만하는거 아냐?”
“...예?”
“이미 지도의 해석본은 다 네 머릿속에 들어있을거 아냐.
열쇠도 미리 틀을 떠두었으면 플라스틱 칫솔을 녹여서 틀 모양대로 다시 굳혀 얼마든지 복제본을 만들수 있고.
모를 줄 알았어?”
데이지와 안나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건 기분탓일까.
처음부터 유우의 목적은 지도가 아니었다.
<시계태엽 듀오>를 처치하러 온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그만 퇴장해주셔야… 끄억!”
“핫!”
이제 방법이 없다고 직감한걸까.
데이지가 유우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 가슴에 있는 힘껏 킥을 먹였다.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유우는 벽까지 날아가 부딪혔다.
방금 전 대화 사이에 둘의 은밀한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는지, 망설임 없이 안나가 점프해 유우에게 무언가를 던진다.
암기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뾰족한 표창같은 것들을 꺼내 날리는 안나.
쓰러진 유우가 있던 자리에 열 개도 넘는 수제표창이 후두둑 박힌다.
감옥 안에서 저런 것도 만들어두었구나.
“조심해, 안나!”
“이것들이…!”
라이카의 양 팔에서 전광이 번쩍이며 어두운 지하실을 밝혔다.
채찍을 갈기듯 라이카가 왼팔을 휘둘러 벼락줄기를 안나에게 내리꽂았다.
치지직!
공중에 점프한 상태인 안나는 피할 도리가 없다.
쇄도하는 벼락의 채찍이 안나를 후려갈기기 직전 지하실에서 굴러다니던 나무 상자가 던져진다.
데이지다.
콰직!
상자는 일격에 수많은 파편으로 쪼개졌지만 그 충돌로 벼락 채찍의 진로는 어지러이 흐트러졌다.
공격 일변도의 자세인 라이카에게 다시 데이지가 대쉬했다.
지금 이 대 일의 상황에서 남은 라이카를 빨리 제압할 수 만 있다면 <시계태엽 듀오>에게도 승산은 있을 터.
그때였다.
푸욱.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유우가 순식간에 데이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유우의 손이 데이지 품 안 깊숙이 박혀있다.
천천히 유우가 팔을 거두자, 데이지의 입가에 한 줄기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흐..흐윽.”
데이지를 내려다보며 어깨에 박힌 표창을 무심히 빼내 바닥에 떨어트리는 유우.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하다.
“너네, 기습은 괜찮았어. 근데 화력이 너무 부족한게 문제였네.”
“유우? 쟤들 죽이면 안된다?”
“걱정마. 급소는 피했으니까.”
데이지가 유우의 옷자락을 쥔채 스르르 무너진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유우가 보이지 않는 검을 휘두른 듯 보였는데.
“혼자 남았네.”
바닥에 떨어진 데이지의 안경을 다시 그녀의 얼굴에 씌워주는 유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안나를 바라본다.
안나는 동료가 쓰러지자 이미 전의를 상실한 표정이다.
유우가 뚜벅뚜벅 걸어가, 인사라도 하듯 가차없이 배빵을 날린다.
<버팔로스>의 두 명은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 다리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가는 유우와 라이카.
간수가 발견할 수 있는 지점에 던져놓아 탈락시키겠지.
<시계태엽 듀오>는 분전했지만 여기까지였다.
저 둘을 상대로 우리가 정면으로 이길 수 있을까?
답은 이미 라비와 앨리스의 얼굴에 드러나있었다.
‘절대 불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