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세번째 대회, 이스케이프(6)
-2일차, 19:25 저녁 자유시간
<시계태엽 듀오> 데이지와 안나를 포함해, 벌써 5팀이 탈락했다.
감옥 안의 선수들은 우승후보 중 하나였던 <버팔로스>의 탈락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괜히 어그로 끌면 <블랙 이글>의 유우와 라이카에게 처단 당한다는 인식이 퍼져있어.’
그리고 실제로 사실이기도 하다.
지금 보면 간수가 아니라 유우&라이카 조가 더 철저히 감옥을 수호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걸 뒤에서 조장하고 있는 건 마음을 읽는 오팔라.
‘ <블랙 이글>을 일종의 행동대장처럼 부리고 있어. 모두의 탈출 계획을 살피면서 입맛에 맞게 너무 진도가 빠른 쪽은 탈락시키고, 진도가 느린 쪽은 부추기고.’
아주 골치아픈 상황.
나로서는 <로즈 엔젤스>의 오팔라&쿠미와 <블랙 이글>의 유우&라이카가 서로 붙어 한쪽을 탈락시켜주는 상황이 베스트일텐데.
이 감옥이란 늪에 서식하는 거대한 두 마리 악어들처럼, 두 팀은 은밀한 정전협정이라도 맺은 듯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둘 다 확신하고 있다. 지금 상황이 지속되면 끝에는 자기들이 이길거라고.
팽팽한 균형이 이어진다.
그 침묵을 깬 건 놀랍게도 <블루 윙 스포츠>의 마하와 세이린이었다.
***
전 날 세이린이 우리 팀의 목숨을 살려줬다는 건 명백했다.
비록 거래 조건이니까 <블랙 이글>을 감시했던거지만, 굳이 우리한테 위험을 무릅쓰고 알려주지않아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을텐데.
정직한 세이린.
그 신의의 대가로 우리는 감옥 본관 외곽으로 통하는 구멍의 통행권을 허락했다.
대신 마하와 세이린도 같이 구멍을 파는걸로 조건을 덧붙여서.
둘은 흔쾌히 수락했다.
‘뭐 내가 생각하는 얘들의 작전이 맞다면 얘들로서도 이 구멍은 꼭 필요하니까.’
4명이 같이 번갈아가며 공략하자 드디어 지하실 벽이 무너지고 문이 밖으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자유다!”
라비가 외쳤다.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다. 썰렁한 반응.
라비가 서운한 듯 주변을 돌아봤다.
세이린이 눈치를 보다 어색하게, “자..자유네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외쳐주었다.
“좋아요, 이제 그쪽은 뭐 어떻게 하시게요?”
마하가 묻는다.
“그것까지 알려줘야 하나?”
“흠, 그럴 의무는 없죠.”
앨리스는 허세를 부렸다. 실은 앨리스 본인도 우리의 진짜 계획이 뭔지 모른다.
사실 라비와 별 다를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어쩔건데?”
“저희도 알려드려야 할 의무는 없죠…
… 그런데 알려드릴게요. 어차피 이제 곧 이 대회는 끝나니까.”
잠시 모습을 감췄던 세이린이 돌아왔다. 카트 하나를 질질 끌고 온다.
그 안에 담겨있는 건 천막과 파이프, 프레임의 덩어리.
얼핏 보기엔 낙하산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이건...
“이게 너네가 만든거야?”
“예. 행글라이더입니다.”
역시나.
내가 예상한 그대로다.
우리가 그동안 조달한 재료의 조합으로 미루어 볼때 나오는 결과는 하나밖에 없었다.
무동력 유인 항공기, 행글라이더.
섬 최고도 정상에 있는 감옥과, 고저차가 심한 지형.
항상 불어오는 강한 바람.
이 감옥 본관 건물 옥상에서 행글라이더로 활공해 내려간다면 감옥 벽을 넘어 섬 해변가까지 충분히 날아갈 수 있을 터.
“될까, 이게?”
앨리스는 회의적인 듯 했다. 마하가 자신있게 가슴을 편다.
“그럼요. 미리 만드는 법도 철저히 준비했고, 조종하는 방법도 숙달했어요. 문제없어요.”
“흐음.”
“그것보다… 의외로 쿨하시네요. 어쩌면 마지막에 훼방놓을 수도 있겠다고 조금은 각오했는데.”
마하는 살짝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알아서 실패할텐데 방해해서 뭐해?”
“예?”
“해보면 알겠지. 뭐 열심히 해봐.”
앨리스는 관심없다는 듯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세이린, 마하 선수. 힘내요!”
라비가 감탄하며 응원했다.
“뭘 응원하고 있어.”
“그래도 앨리스, <블루 윙 스포츠>팀이 성공하면 우리가 준우승이잖아.”
“그야 그렇지만 별 기대하지마.”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굳이 우리까지 따라와서 구경할 필요는 없지만 어쩐지 잠깐 동안이나마 손을 잡은 동맹으로서 <블루 윙 스포츠>팀의 최후(?)를 끝까지 지켜봐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세이린과 마하는 카트에 담아 운반한 행글라이더를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삼각형 모양의 메인 프레임 위에 펼쳐진 탄력있는 거대한 천막.
감옥 안에서 잘도 만들었다 싶다.
‘하늘 루트인가. 발상은 꽤 참신했어.’
얘들의 전략이 내게 큰 영감을 불어넣은 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는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앨리스 말대로, 이 전략은…’
마하가 세이린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먼저 갈게. 보고 이상 없으면 바로 따라와.”
“예, 선배님.”
우리는 조금 옆으로 물러나 자리를 만들어줬다.
마하는 뒤로 10m 가량의 도약공간을 만든 후, 힘차게 달려나갔다.
옥상 점프!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자살 시도지만 지금 마하는 행글라이더에 탔다.
행글라이더의 파란 날개가 활짝 펴지고 바람을 받아 팽팽해진다.
삼각형 모양의 메인 프레임을 붙잡은 마하는 잠시 밑으로 떨어지나 싶더니 바람을 타고 죽 활강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공중에서 배를 깔고 누운 듯 일자로 쭉 펴졌다.
좋은 활강자세다.
자유를 향해 날아가는 마하. 말 그대로 파란 날개, 블루 윙이다.
“와와, 저거 봐! 진짜 마하 선수가 날고 있어! 날다람쥐 같아.”
“좋아, 선배님. 저도 갈게요!”
이건 성공했다고 생각했는지 세이린도 자기의 행글라이더를 준비했다.
앨리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만 기다려봐. 너는 위험해.”
“예?”
“쟤라면 추락해도 죽지는 않을 거야. 변변찮아도 나름 경험이 있는 선수라. 하지만 너, 기껏해야 유망주지?
너는 죽을 수도 있어.”
“무슨…”
“저길 봐.”
사실 유망주란 분류에선 앨리스도 마찬가지지만, 앨리스가 세이린을 신경써주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앨리스가 손가락으로 하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거대한 검은 날개의 새 같은 것이 행글라이더의 뒤를 바싹 쫓아온다.
“저게 무어야…?”
라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집중했다.
“이야~ 난 저거까지는 예상못했는데. 산 넘어 산이군.”
앨리스가 말했다.
“사람 같은데?”
라비 말이 맞았다. 사람이다. 날개가 달린 사람.
내가 알기로 감옥 안 선수 중에 비행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뿐이다.
오족烏族, ‘꽃잎 가르기’ 유우.
저런 식으로 나는구나.
유우는 검은 까마귀 날개를 펄럭이며 행글라이더 뒤를 바싹 쫓아갔다.
“선배님!”
세이린이 당장 달려나갈 듯 몸을 곧추세웠다.
앨리스가 그녀를 붙잡았다.
“기다려. 니가 가서 뭘 하겠다는거야. 말했듯이 마하 정도면 저기서 떨어져도 죽지는 않아.”
“우웃…”
정면만 보고 활공하는 마하의 시야엔 뒤쪽에서 날개짓하는 유우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둔한 폭격기를 따라잡은 최신형 전투기처럼 유우가 마하의 행글라이더에 바싹 접근했다.
그녀가 손날을 바짝 세워 행글라이더의 날개를 갈랐다.
‘칼이 없어도 온몸이 흉기구만, 저 여자애.’
유우의 손날에 담긴 검기가 행글라이더의 날개에 일자로 긴 흉터를 남겼다.
즉시 마하를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엉망진창으로 폭주한다.
양력을 잃은 행글라이더는 위아래로 미친듯이 펄럭이더니 줄 떨어진 연 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목적을 완수한 유우.
망설임없이 공중을 선회해 감옥으로 돌아갔다.
감옥 외벽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지 않음으로써 탈옥시도로 취급받지 않으려는 심산이겠지.
아니, 그녀는 오히려 탈옥시도를 막은 모범수(?)다.
감옥 측에서는 표창을 줘야 마땅할지도.
추락하는 행글라이더는 어찌어찌 외벽 밖으로 떨어졌다.
숲이 우거진 곳이니 크게 다치지는 않을 터.
“선배님…”
세이린이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쿠야. 와, 마하 선수, 괜찮을까? 너무 아깝다. 유우만 없었어도 탈출했을텐데.”
“아냐. 결과만 보면 오히려 유우가 더 다치지 않게 도와준거나 다름없어.”
“응, 앨리스, 왜? 방금 탈출 못하게 막은 거 아니었어?”
볼 것도 없다는 듯 앨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감옥 외벽 너머엔 간수 골렘들이 진을 치고 있거든.
그것도 철저히 요격용으로 개조된 녀석들.
일종의 터렛처럼 감옥을 넘어서는 모든 걸 쏴갈길 준비가 되어 있지.
나하고 코치는 이미 그 위력을 봤어.
저 행글라이더 정도의 속도로는, 무리야. 회피기동을 하며 날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요격을 무시할 정도로 빠른 것도 아니니까.”
“헤에…”
세이린은 망연히 바닥에 퍼질러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앨리스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어쩔래? 네 행글라이더는 남았으니, 너도 한번 감옥 밖의 터렛 성능을 시험해볼래?”
“...소용 없을 것 같아요.”
“후우… 뭐 그래도 열심히 한 편이야. 그 정도면.”
나름 위로라고 해주는 것 같지만 앨리스가 하는 말이라 오히려 비꼬는 것처럼 들린다.
라비가 상냥하게 세이린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한 것도 멋지고, 실제로 행동에 옮긴 것도 너무 근사했어요.
아마 지켜보는 관중분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거예요.”
“...”
“그리고 마하 선수는 엄청 튼튼해요. 앨리스 쟤가 불로 지져도 끄덕없을만큼.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세이린이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계속 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혼자 남았으니 <블루 윙 스포츠>도 여기까지겠지.
햄스터의 바디를 빌린 라이스가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린다.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저 녀석, 뭔 말을 했으려나.
아마 마찬가지겠지. 노력한 선수들을 탓하기보단, 위로해줬을거다.
***
-2일차, 20:10 감옥 홀
“그것참, 아쉬웠네요.”
오팔라가 싱긋 미소지었다.
저 모든 걸 자기 머릿속에서 조율한다는 태도, 정말 짜증나는군.
지금까지 대회에서 오팔라를 상대했던 선수와 코치들이 느낀 기분을 알 것 같다.
“아쉽긴. 니가 시킨거잖아.”
“시키다니요. 저에게 <블랙 이글>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은 없어요.
단지 <블루 윙 스포츠>가 아마 이 쯤에 탈출시도를 하지 않을까...하고 넌지시 정보를 흘린 것 뿐입니다.”
“하아… 너 같은 스타일, 진짜 질색이야.
니가 유우한테 고자질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블루 윙 스포츠>의 행글라이더로는 나갈 수도 없었는데. 잔인하기는.”
앨리스가 경멸하는 얼굴로 오팔라를 노려봤다.
“하지만 전 앨리스 양이 마음에 들어요.”
“뭐어?”
경악하는 앨리스. 오팔라는 따뜻하게 웃었다.
“앨리스 양에게는 위선도, 위악도 없거든요. 겉과 속이 한결 같은 사람은 사실 꽤나 희귀하답니다.”
“웃기는 사람이네. 그렇게 욕먹는게 좋아? 겉으로도 욕먹고 속으로도 욕먹는게?”
“그건 좀 그렇지만요. 후후.”
오팔라는 라비를 돌아봤다.
“예. 라비 양도 좋아요. 저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우와아아~ 또 읽었어. 헤헤. 이게 바로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건가.”
자기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는 라비같은 여자애에겐 마음을 읽혀도 큰 지장이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같이 머릿속에 더러운 생각만 가득한 놈은 몹시 곤란하지만…
“그래서, 우리한텐 뭘 바라고 오셨나?”
“글쎼요. 바라기보단… 알고 싶은 거죠.”
“...?”
“이번 대회 모든 팀의 전략은 이제 거의 다 파악했어요.
그런데 딱 한 팀 마음에 걸리는 팀이 있습니다. 그게 <인삼&홍삼 파워 스포츠>.”
호오. 그런가.
그렇다면 내 보안전략도 오팔라를 귀찮게 할만큼 나름 잘 먹혀들어다고 있다는 뜻이겠지.
“예, 라비 양.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 죄송해요, 순서가 중요하군요.”
“됐고,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실까, 우리 대단한 오팔라님이?”
앨리스가 팔짱을 끼고 오팔라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도 그럴게, 지금으로선 뭘 노리는지 감이 잘 안오니까요.
‘땅굴을 판다’면 이해가 가지만, ‘지하실 문을 중심으로 벽을 파서 바깥으로 통하는 구멍을 만든다.’ 뭘까요, 이 작전은?
앨리스 양,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나 참. 뭐하는 짓거리야.”
“그쵸? 이상하게 라비 양도, 앨리스 양도 본인들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으니 너무 신경이 쓰여요.”
그 때 라비가 크게 외쳤다.
“오팔라 씨,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저는 알아요, 저희 코치님의 진짜 의도를!”
“...예?”
뭐라고?
라비가 내 진짜 의도를 눈치챘다고?
나도 놀라버렸다.
아니, 그런 일이 가능…
을 떠나서 설령 그렇다해도 그걸 왜 말해주냐, 라비야!
“감옥은 안과 밖을 구분짓는 철저한 경계가 핵심이죠, 오팔라 씨?”
“그렇죠.”
“하지만 저희가 지하실에 구멍을 냄으로써, 그 경계는 허물어졌어요.”
“예.”
“따라서 저희는 사실상 탈옥에 성공한 거예요.”
“에엥?”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딴지를 걸었다.
“뭔 소리야, 라비야.”
“언제나 댐의 자그마한 균열, 기둥의 미묘한 비틀림, 모든 붕괴의 시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요.
그 시작을 저희가 낸 거죠.”
“그러면 왜 굳이 문에다가?”
“그건 상징적인 의미예요.”
라비가 자신만만하게 떠벌렸다.
“굳게 잠긴 문. 절대 열지 못할 거라고 감옥측에선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걸 조롱하듯이 저희는 열쇠도 없이 문 주변 벽을 파버림으로써 잠긴 문채로 뚫고 나가버렸어요.
그건 바로 체제에 대한 조롱! 어때요!”
라비답다고 해야 할까, 얘치고는 뭔가 열심히 말했지만 전부 헛소리다.
오팔라와 앨리스 둘 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지금이라면 마음을 읽지 못하는 나도 둘이 뭔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아이, 무슨 말 하는 걸까 지금.
옆에서 말을 아끼던 쿠미가 조용히 쿡쿡 웃었다.
“흐음… 그런가요, 라비 양. 괜찮은 해석이네요. 존중해드릴게요.”
“그쵸? 그럴듯하죠?”
“제 호기심을 해결… 음… 예. 맞아요. 해결해주셨어요. 그러니까 보답으로 저도 새로운 정보를 알려드릴게요.
내일 대회는 끝날겁니다.”
“네에?”
오팔라에겐 절대적인 확신이 담겨 있다.
“<블랙 이글>도, 저희 <로즈 엔젤스>도 내일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예요.
<블랙 이글>의 계획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홍삼&인삼 스포츠>팀에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면 너무 늦지 않도록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