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세번째 대회, 이스케이프(8)
-3일차, 06:10 지하실
바깥에 연신 폭발음이 들린다.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 쉘터에 숨은 기분이다.
“흠…’날아간다’라는 게 뭘 뜻하는 걸까요.”
오팔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영민한 그녀도 이것만큼은 영 감이 안오는 모양이다.
“같이 알아볼까요?”
“아니, 니 할 거 하라고. 우리도 모르겠으니까.”
앨리스가 되바라지게 쏘아붙였다. 오팔라는 태연하게 읆조렸다.
“먼저, 두 분이 혹시 제가 모르는 ‘비행능력’이 있으신걸까요?
...아니네요.
그러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기서 두 분을 데리러 온 헬리콥터라도 도착할 예정?
...죄송해요. 그런 건 좀 너무 터무니없죠.
그러면 뭘까…”
“...”
가만가만 말하는 오팔라를 눈앞에두고 앨리스는 점점 초조해지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 앨리스 양. 옥상이요? 아하, 지하실의 굳이 이 지점을 판 이유는 옥상으로 통하는 외부 계단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일거라고요.
과연.
그러면 옥상에 뭐가 있을까요?”
앨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고문이다.
정신적 고문.
사람을 눈 앞에 세워놓고 할 짓이 아니다.
...너무 치트야.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잖아!
내 똥줄이 바싹바싹 타기 시작했다.
“아! 라비 양, 그거네요. 그 생각 좋았어요.”
“...라비, 뭔 생각 했어.”
앨리스가 체념한듯 중얼거렸다.
“라비 양이 참 감이 좋으신데요.
옥상에 <블루 윙 스포츠>의 세이린 양이 남기고 간 행글라이더가 있다는 군요.”
“...앗!”
“과연. 마하 양은 실패했지만, 지금같이 감시가 흐트러진 상황이라면 남은 행글라이더로 날아갈 수 있다라…
음. 맞아요. 그거 같아요.”
큭.
라비, 너는 바보냐 아니면 천재냐.
나는 내심 크게 놀랐다.
앨리스보다 라비가 먼저 눈치채다니…
“쿠미, 골렘을 조종해서 그 행글라이더를 회수해 오렴.”
“예, 선배님.”
쿠미가 팔목에서 홀로그램 메뉴를 띄워 몇 번 터치했다.
잠시 후 간수 골렘 하나가 지하실로 들어왔다.
순간 라비와 앨리스는 바짝 긴장했지만 골렘은 둘을 지나쳐 우리가 파놓은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행글라이더, 열심히 만든거지요.
모두가 힘을 합쳐서..
부순다던지 난폭한 행동은 안하겠습니다.
대신 잠깐만 보관하고 있을게요.”
모든 게 끝났다.
앨리스의 생각을 읽었는지 오팔라는 순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역시 이런 승리방법은… 씁쓸한 맛을 남기는군요.
…흠.”
“됐고, 더이상 얼굴 보기 싫으니까 좀 꺼져.
탈출하던지 말던지 알아서 해.”
골렘이 카트를 질질 끌고 내려왔다. 안에는 세이린이 타고 날 예정이었던 그 행글라이더가 들어있다.
“아, 이건 돌려드릴게요.”
오팔라가 라비에게 쪽지를 돌려줬다.
이걸로 우리의 작전이 완전히 분쇄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오팔라는 더이상 가혹하게 굴 생각이 없어보였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했어요. ...원망하셔도, 저로서는 항변할 수가 없겠군요…
그러면 실례했습니다. 가자, 쿠미야.”
갑옷과 헬멧을 입고 감옥 관리관으로 변장한 <로즈 엔젤스>의 2인조는 지하실을 걸어나갔다.
간수 골렘이 행글라이더가 들어있는 카트를 끌고 뒤를 따라간다.
“이걸로 끝인가.”
앨리스가 중얼거렸다.
***
-3일차, 06:15 지하실
“미안해, 앨리스… 내가 갑자기 이럴 때만 그런 생각을 떠올려버려서…”
“아니야. 니 잘못 아니니까 탓하지마.”
볼일이 끝난 지하실엔 쓸쓸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모든게 끝났다는 허무함.
나는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길을 걸어갈까.
오팔라처럼 마음을 읽지 못하니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코치로서는 이럴 때 그저 한 가지 행동밖에 할 수 없다.
믿어줄 뿐.
그녀들이 나를 믿었듯이, 나도 그녀들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고 탈락한다 하더라도.
“하지만 코치치고는 꽤 재기발랄한 생각이네. 남은 행글라이더를 활용할 생각을 하다니 말야.”
“응. 우리는 행글라이더 타는 법도 모르는데 말야.”
라비가 의아한 듯 말했다.
“그러게. 생각해보니 행글라이더, 나름대로 훈련받아야 탈 수 있는 거 아닌가?
코치, 무모하기는. 사람 잡으려고 그래?”
앨리스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억울하다.
아프진 않아도 기분은 영 그렇다.
아니, 플레잉 코치는 선수들을 건드리면 안되는데, 왜 선수는 맘대로 코치를 건드려도 되는거야?
불공평하군. 협회에 정식으로 항의해야겠다. 이거 규칙에 문제가 있어.
“어라라.”
라비가 곰곰이 메모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설마…?
내 마음속에 기대감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왜, 라비야?”
“아니, 그냥. 코치님은 왜 ‘날아간다’라고만 쓰셨을까?”
“응?”
“‘행글라이더를 이용해 옥상에서 날아간다.’라고 쓰는게 더 이해하기 쉽지 않나?”
“그렇게 쓰면 오팔라한테 바로 들키잖아.”
“그도 그런가.”
오오오….!!
그래, 그거야. 의심하고 또 의심해.
“근데 지금도 결과적으론 들킨 건 마찬가지니까.
대놓고 쓰든, 우회해서 쓰든 오팔라 씨는 우리 생각을 읽을 수 있으니.”
“그래서? 그러면 코치는 이 메세지를 오팔라가 읽을 걸 염두에 두고 썼다 이 말이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라비는 메모를 들어 눈 가까이에 대고 신중하게 들여다봤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날아간다>에는 또다른 메세지가 숨겨져있는건 아닐까…
뭔가 암호처럼…”
“너무 코치를 과대평가하는 거 아냐? 라비야.”
“그런가…”
크으으…!
아니야, 라비야.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다. 이제 다 왔다.
“또 암호가 있다고 생각하고 보면, 이 종이의 테두리도 뭔가 이상한 것 같기도…”
“테두리?”
“응. 노트에서 찢었는데 그 테두리 자국이 삐뚤빼뚤 한 듯도 하고, 고른 듯도 하고… 묘해.”
“잠깐만 줘봐.”
앨리스가 라비의 손에서 메모를 낚아챘다.
그녀도 메모를 들여다봤다.
“그러네. 그냥 손으로 쭉 찢으면 이런 자국은 안나와. 일부러 미세하게 간격을 두고, 구멍을 짜잘하게 낸 듯한 테두리야.
긴 틈과 작은 틈이 피아노 건반처럼 나열된 모양이... ”
“....”
“....”
둘이 갑자기 눈을 마주봤다.
“아?”
“그래! 라비, 모스 부호. 이건 모스 부호야!.”
“어,어, 그러면… 앨리스, 빨리!”
“알았어!”
앨리스가 한 글자 한 글자, 메모지 밑 패턴을 해독하기 시작했다.
“W...I….T...H… T….H...E….D….O...O…..R….
‘WITH THE DOOR.’
문과 함께. 무슨 말이지? 문과 함께 날아간다?”
“앨리스, 분명 뭔가 뜻이 있어. 코치님이 암호를 남겨둔거라고.”
“문과 함께… 문과 함께… 날아간다…
…
…
아.”
앨리스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 그래도 바보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코치가 생각한게 뭔지 알거 같긴 해.”
“응?”
오오오!!
말을 하지 못하는게 이토록 답답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환호성을 지르고 싶다.
내 등허리를 타고 전율이 흐른다.
그래, 처음부터 믿고 있었어.
내 뜻을 눈치채줄거라고.
“라비, 도와줘. 내가 해석한 그 의미가 맞다면 나 혼자선 절대 못해.”
***
-3일차, 06:25 옥상
라비와 앨리스는 땀을 뚝뚝 흘리며 옥상 위에 섰다.
그녀들의 뒤에는 둘이 낑낑거리며 옮긴 문 한 짝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옥상에서 보니 감옥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사방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불길이 휘몰아친다.
유우와 라이카는 지금 쯤 어디까지 갔을까?
이미 본격적인 터렛골렘의 반격을 받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오팔라와 쿠미는? 이쪽은 전혀 방해를 받지 않고 감옥을 돌아다닐 수 있으니 지금이라도 탈출에 성공해도 이상하지 않다.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말할게. 일단, ‘화염폭풍’.”
앨리스는 들고 온 문에 그녀의 불의 마법을 작렬시켰다.
한 번, 다시 또 한 번. 망설임없이 계속해서 ‘화염폭풍’을 시전하는 앨리스.
“어, 앨리스, 왜?”
“말 그대로야. ‘문과 함께 날아간다.’ 우리는 이 문 위에 타서 날아갈거야.”
화염폭풍은 벌써 열 방 이상 문에 축적되었다.
그녀의 ‘불의마법’스킬이 A랭크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마력소모는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서서히 한계가 다가왔겠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핵심 포인트는 두 개였어.
첫째는 행글라이더. 하늘을 통해 날아간다는 전략은 참신하고 효과적이야.
하지만 행글라이더는 지나치게 느리지.
감옥 방어시설, 터렛골렘의 요격을 피할 수 없어.
둘째는 ‘마력 흡수석’. 전에도 말했듯이 이 감옥시설의 문은 전부 마력흡수석으로 만들어졌어.
가해지는 모든 마법을 차곡차곡 흡수한 후, 건드린 사람에게 일거에 방출하는 거야.
마법 사용자에 대한 반격용으로 만들어졌겠지.
하지만 이걸 우리가 이용할 수 있어.
코치가 왜이렇게 지하실 문에 집착하나 했더니...”
벌써 스무 방의 ‘화염폭풍’이 축적된 지하실 문.
이젠 거의 작은 미사일에 가까운 화력이 내재되었을 것이다.
“앨리스… 설마…”
“후우… 하아...응. 우리는 이 위에 타서 해변까지 날아갈거야. 하아아...”
스물 두 방, 스물 세 방.
앨리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여기까지가 그녀의 마력 한계다.
“문 위로 점프함과 동시에 문 뒤쪽에 돌멩이를 던져서 맞혀. 그러면 이 문에 축적된 모든 화력이 일시에 후면으로 방출되겠지.
로켓처럼 날아갈거야… 하아아...
나는 ‘불의 보호’ 마법으로 화염으로부터 너를 지켜줄게. 라비 넌 ‘시간 가속’ 능력으로 우리가 날아가는 속도를 증폭시켜.
이해했지?”
“와… 좀 무서운데…? 그래도 재밌을 거 같아.”
앨리스가 팀에 있어서 다행이다.
정확히 내 의도 그대로를 읽어줬다.
“앨리스, 내 등에 업혀.”
“우우… 괜찮아…”
“아냐, 같은 팀이니 서로 도와야지. 얼렁! 시간없다며.”
“...알았어.”
‘화염폭풍’을 연속으로 스물 세방이나 사용하느라 온 진력이 다 빠진 앨리스는 자기 힘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문 위에 타이밍 맞춰 점프하는 것도 힘들겠지.
“꽉 잡아. 그럼 간다.”
라비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살짝 긴장한 표정이지만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다.
“하나, 둘… GO!”
‘시간 가속’의 능력으로 순간 초월적인 속도를 얻은 라비가 대쉬했다.
눈앞이 홱홱 바뀌는 속도다.
돌멩이를 문의 뒷방향에 정확히 던지고, 즉시 문 위로 점프해 붙잡았다.
앨리스의 ‘불의 보호’마법이 그녀를 둘러싼다. 이제 둘은 화염으로부터 잠시 면역이 된다.
이 장면은…?
<드래곤볼>에서 본 적 있다.
타오파이파이가 기둥을 던지고 그 위에 올라타 먼 거리를 비행해 날아가던 유명한 장면.
그걸 실제로 체험하게 될 줄이야.
“우아아아아아-!”
“꺄아악!”
문의 뒤에서 스물 세 방의 ‘화염폭풍’의 불길이 방출되며 로켓트처럼 앞으로 분사되었다.
쿠구구우웅-
롤러코스터에 탄 것처럼 라비가 비명을 지른다.
문을 꽉 붙잡은 그녀의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놓치면 끝장이다.
행글라이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폭발적인 속도로 우리는 하늘을 날아갔다.
거기다 ‘시간 가속’으로 2.5배 부스터되어 한층 더 빠르다.
푸슈우우웅-
찰나의 순간 전장 한복판에서 유우가 고개를 들고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는 광경이 스쳐 지나간 듯 하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니 개미같이 작아 보이는 터렛 골렘들이 그 와중에 냉정하게 사격을 가하지만 벌써 우리가 한참 전에 지나간 빈 하늘을 수놓을 뿐이다.
예측 사격을 하라고, 이 깡통들아.
뭐 이 속도면 예측이건 뭐건 안맞겠지만.
감옥이 멀어지고, 섬이 멀어진다.
생각보다 너무 화력이 센 모양인지 바다가 눈 앞에 가까워졌다.
이대로면 수면 밑으로 쳐박힌다!
라비가 문을 잡던 손을 놓았다.
저 멀리 앞으로 날아간 문이 폭발을 일으키며 바다에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는 게 보였다.
비키니 제도의 핵실험 장면같은 장관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있는 힘껏 물수제비로 던진 돌멩이들처럼 제멋대로 바다에 내팽겨쳐진다.
하늘에서 바다로, 급격한 시점 전환에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아, 이건 좀 위험한데…
괜찮을까…
***
“무모하기 짝이 없군요.”
바다 밑으로 천천히 가라앉던 날 누군가가 끄집어냈다.
배 갑판 위다.
이 몸은 플레잉 코치 바디일뿐이니 사실 굳이 구해주지 않아도 상관은 없건만.
친절하군.
바라보니 대회 운영 관계자다.
“...”
할 말이 없군. 실제로 무모하기 짝이 없었으니.
“저기… 저희 선수들은?”
이제 대회는 끝났다. 나는 바로 관계자에게 물어봤다.
“둘 다 무사합니다. 해수면에 충돌하며 조금 충격을 크게 받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요.
저희가 긴급히 대응해서 바다에 빠지자마자 바로 구할 수 있었어요.
대신 라비 선수는 어느정도 골절은 각오해야 할 거예요.”
“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판타지 세계라서 이보다 다행일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죽어도 이상할게 없었겠지.
“저기, 그러면 결과는…”
“예.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팀이 우승입니다.”
“크으…!”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겼다.
내가, 우리가 이겼다.
<블랙 이글>의 유우&라이카를 이겼다.
<로즈 엔젤스>의 그 오팔라를 이겼다.
꿈이 아니다.
관계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저는 이 대회 운영에 5년 넘게 참가했지만 이런 해괴한 전략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뭐랄까… 놀랍네요.”
“하하…”
“이건 뭐, 사실 이 방법을 본다 해도 따라할 선수들이 있을까 의문일 정도입니다.”
“뭐 그렇죠.”
나는 적당히 대응하고 갑판에 드러누웠다.
이제 끝인가. 3일이지만 참 길게 느껴졌다.
라비와 앨리스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