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5화 〉대회가 끝나고(1) (35/109)



〈 35화 〉대회가 끝나고(1)

멋있는 말도 좀 하려고 그랬다.

미리 간지나는 대사를 생각해두자고 마음먹었다.

이참에 코치의 위엄을 한껏 세워두자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라비와 앨리스를 다시 보니, 그냥 나도 모르게 웃음만 배시시 비어져나온다.

“크크크...”
“헤헷.”


붕대로  이곳저곳을 싸맨 라비도  보고 헤실헤실 웃는다.

“라비, 전신 골절이라던데… 괜찮아?”
“누가 그래요? 전 끄떡없어요.”


라비는 팔로 알통을 만들어보이는 자세를 취하며 건강을 어필했다.
하지만 웃음 속에 미세한 고통의 찡그림이 섞여있는 걸 난 놓치지않았다.

듣자하니 제대로 거동이 어려운 앨리스를 대신해 본인이 충격의 대부분을 받았다고 한다.
멀쩡한  해도 지금 몸 상태가 작살난건 사실이리라.

“일로 와봐, 라비야.”
“에?”
“코치 힐링.”

이걸로 약간이지만 통증은 경감될거다.
라비의 몸에 초록색 빛이 감돌더니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와! ...사랑해요, 코치님.”

라비는 내 품으로 폭 안겼다.
하지만 쪼끄만 인삼모양의 마스코트같은 바디를 한  몸과의 비례를 생각해보면 내가 안아준게 아니라 오히려 안겼다고 봐도 좋을 풍경일 터.

근처에서 앨리스가 진이 다 빠진 얼굴을 하고 우리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진심으로 화난 느낌은 아니다.


“코치, 바보야? 머리 이상한 거 아냐. 진짜 엉터리 작전이었어.”
“그래도 우승했잖아요.”
“내가 겨우 알아채서 망정이지, 그렇게 전달하면 누가 알아봐?”
“앨리스가 알아봐줬네요.”
“...우웃.”


말문이 막힌 앨리스가 입을  다물고 부들부들거렸다.
놀리는 맛이 있는 여자애다.


“어쩌면 앨리스하고   마음이 통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 진짜. 됐으니까 조용히 해.”
“...이리 와요, 앨리스.”
“?”
“그래! 앨리스도 어서 와.”

나와 라비는 앨리스에게 손짓을 했다. 성취를 이뤘을때 팀원과 함께 나누는 뜨거운 포옹.
스포츠의 로망이지. 포기할  없다.

하지만 앨리스는 즉시 거절했다.


“에이, 됐어. 난 그런거 안좋아해.”
“팀이잖아요.”
“...으…”


앨리스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비척비척 다가왔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라비가 앨리스를 끌어당겨 같이  안았다.
나와 라비, 앨리스는 격전을 헤치고 살아남아 다시만난 이산가족처럼 상봉의 기쁨을 나눴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라비도, 앨리스도요.”

해맑게 웃는 라비.
어색한 듯, 조금 부끄러운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앨리스.
그리고 나.

마음 속에 뭔가 뜨거운 것이 뭉실뭉실 차오른다.

얼마만에 느끼는 건가.
이 감격, 이 기쁨.


[당신의 선수들이 성취를 이뤘습니다.
‘지역대회 우승’, ‘종합능력 S+급 경쟁자 상대로 승리’‘]

[처음으로 자신들보다 높은 수준의 선수들을 꺾고 대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라비, 앨리스의 모든 능력치가 +1 오릅니다.
앨리스는 경쟁 선호 특성으로 인해 2배 보너스를 받습니다.

라비

체력: 24 (+1)
근력: 21 (+1)
지혜: 10 (+1)
기교: 23 (+1)
의지: 19 (+1)
속도: 29 (+1)

앨리스

체력: 18 (+2)
근력: 17 (+2)
지혜: 19 (+2)
기교: 17 (+2)
의지: 18 (+2)
속도: 19 (+2) ]


***



“정말로 죄송해요. 기분이 나쁘셨겠죠.”

오팔라는 보고 있는  쪽이 도리어 미안해질만큼 연신 사과를 했다.

“됐어. 왜 니가 사과하는거야. 내가 너라도 그렇게 했을걸.”


앨리스는 승자의 입장이라 여유로워진건지  대범하게 말했다.
하기야 어차피 이건 건 우리다. 기분이 나쁠리가 없다.

“그래도… 이건 제 업보입니다. 스포츠라지만 마음을 읽히고 이용당한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니까요.
부디 제 사죄를 받아주세요.”
“아이~ 오팔라 씨! 아무렇지도 않아요. 당당하게 있으셔도 돼요.”
“그래도…”

대회 내내 여유롭고 차분했던 오팔라는 경기가 끝나자 그동안 참아왔던 미안함을 어쩔  몰라했다.
이 쪽이 그녀의 원래 모습이었을까.
대회 중엔 승리를 위해 평소와 다른 얼굴을 억지로 내보인 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그쪽이 본심이었고 지금이 억지로 예의바른  가장한 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하면 너무 꼬아서 보는 거겠지.

“라비 양, 앨리스  두  다 너무 대단했습니다. 완패예요.”
“그러고 보니, 마지막엔 어떻게 끝난거예요?”
“아, 그거요. <블랙 이글>의 라이카 양은 간수골렘에게 제압되었고, 유우 양은 홀로 감옥 외벽을 넘었어요.

그 와중에 감옥관리관으로 위장해 외벽을 통과한 저희와 마주쳤죠. 교전이 벌어졌고…

도중에 하늘을 날아가는 정체 불명의 무언가가 보였죠.
그게 라비 양과 앨리스 양이었네요.
거기서 대회가 끝났다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히야… 아슬아슬했네요.”
“정말 그런 식으로 탈출할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날아간다'... 완전히 속았어요.”

오팔라는 잿빛 머리를 쓸어올리며 웃어보였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블루  스포츠>의 세이린과 마하 양은 저희보다 먼저 배를 타고 떠났어요.
저한테 혹시 <홍삼 스포츠>팀을 만나면 얘기 좀 전해달라더군요.”
“뭔데요?”
“덕분에 준우승했다고, 고맙다고 하더군요.”


오, 결국 준우승은 <블루 윙 스포츠>였구나.

하긴 그럴만도 하다.
종합적으로 대회 중 우리를 가장 많이 도와준 건 걔들이었으니.
그 정도면 나름대로 선수단내에서 위신은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겠지.
내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헤헤… 잘됐다.”
“운도 좋네, 걔들은. 완전 버스탔잖아.”

앨리스가 비아냥거렸다.

“라비 양, 앨리스 양. 다음엔 저희와 같이 뛰어보지 않겠어요?”
“예?”


뭐냐. 갑자기 <로즈 엔젤스>로의 스카우트?

지금까지  이걸 위한 빌드업이었나.
감히 누구 선수를 빼가려고?
이 도둑고양이같은 년.
나는 표정이 딱딱해지는걸 숨기지 못했다.


“아, 물론 <홍삼 스포츠>와 <로즈 엔젤스>의 연합 대회 참가 얘기입니다.
스포츠 팀끼리 연합을 맺으면 대회에서 같은 팀으로 참가할 수 있거든요.”
“아아~ 난 또. <로즈 엔젤스> 들어오라는 줄 알았어요.”

라비가 안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로즈 엔젤스>는 이 오팔라만 해도 상당히 강력한 전력이고, 같은 팀을 맺어서 우승할 수 있다면야 우리 쪽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지.
나에겐 좋은 이야기다.


“그렇게 된다면야 정말 좋죠. 코치로서 대환영입니다.”
“트래쉬 코치님, 그러면 후에 좋은 계기가 있으면 정식으로 문의드릴게요.
그러면 이만…”


오팔라와 쿠미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후 서로 얘기를 나누며 배 갑판으로 멀어졌다.
쿠미가 가만가만히 오팔라에게 뭐라 말하는 모습이 보인다.
오팔라는 다정하게 웃었다.
졌는데도 저팀의 분위기는 그닥 나빠보이지않는다.

‘저쪽은 유망주에게 경험치를 듬뿍 먹인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모양이군.’

자, 이제 <이스케이프>는 끝났다.

돌아가면 뭐부터 할까?
일단 얌전히 뻗어있을 내 몸부터 다시 되찾아야겠지.

예상보다 일찍 대회가 끝나 3일만에 원래 몸으로 돌아가게 됐다.
또 사람 마음이 이상한게,  인삼 모양의 인형 속에서 3일을 보내니 나름 적응이 돼서 이젠 내 몸처럼 자연스럽다.

그리고 또… 상금, 크크… 십 오만 골드를 획득했군.

빚 팔만 골드 갚고, 나머지 칠만 골드는 어디다 쓸까?

팀 운영비로 삼만 골드 정도 킵해둔다 해도 사만 골드나 팀 발전에 쓸  있다.

당분간 즐거운 일만 남았다.

깨닫고 보니 라비도, 앨리스도 말이 없었다.
엄청 피곤한 모양인지 눈을 꿈벅꿈벅 하더니 곯아 떨어진 모양이다.

그래, 돌아갈때까지 푹 자라 얘들아.
수고했어.

‘지옥섬 펠리칸’이 멀어져간다.


나는 그 풍경을 기억에 새기려는 것처럼 하염없이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3일차, 08:42  안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
라비&앨리스 듀오 우승.

<이스케이프>  32차 대회 종료.

***

[이름: 트래쉬
나이: 25세
종족: 인간
성별: 남
칭호: ‘떠오르는 역전의 코치’


체력: 6
근력: 6
지혜: 4
기교: 8
의지: 10
속도: 4 ]

특이사항: 성기가 비정상적으로 길고 굵습니다. (남성들 중 상위 0.1%에 해당합니다.)

지역대회에서 팀을 3연속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세간에서 서서히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씨엔나 한정으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종합능력: E
잠재성: D ]



드디어 ‘무능한 코치’라는 칭호에서 벗어났다.

지금까지의 트래쉬와 다르다.

역시 난 결코 무능한 놈이 아니다.
이게 내 진짜 실력인걸.

크큭…

떠오르는 핫한 팀의 감독답게, 언론사의 본격적인 인터뷰 요청도 들어왔다.

나름대로 알아본 후,  발언을 왜곡하지 않고 성실하게 실어준다며 평판이 좋은 한 지역일간지 인터뷰에 응했다.


기자와 카메라맨이 우리의 열악한 훈련장을 방문했다.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는 ‘이러니까 성적이 그 모양이지’ 싶은 초라한 훈련장이었지만,

이제는 ‘아니 이런 환경에서 이런 성과를?’ 하는 평을 자아낸다.


젊은 카메라맨은 진지하게 감동받은 모양인지, 녹슨 컨테이너,  지워져가는 러닝트랙 등을 열정적으로 찍었다.

초라한 시설을 비범한 헝그리정신의 상징이라고 멋대로 오해하는 모양이다.

우리 팀에겐 딱히 나쁠게 없으니 좋을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기자가 내게 물었다.

“코치님, 올해 하반기 씨엔나 스포츠계에 가장 화제가 되는 팀이라면 역시 3번 연속으로 우승을 거머쥔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입니다.

심지어 그 유명한 오팔라 선수의 <로즈 엔젤스>와 <블랙 이글>까지 격파했는데요.

갑자기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내신 계기가 뭔가요?”
“역시 저희 재능 있는 선수들이 노력해준 덕택이겠죠.”

사실 라비와 앨리스가 다 한게 맞긴 하다.
나는 그 재능에 불을 조금 지폈을뿐.

원래 코치란게 그런 거 아니겠나.

“코치님을 두고 기발한 전략의 달인이라는 평이 자자합니다.
작전에 대한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으십니까?”
“음....”


딱히 별 생각은 없는데.
나는 적당히 답하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마침 레이지 아재의 사업도 좀 도와줘야지.


“그건 바로 홍삼에서 옵니다.”
“홍삼이요?”
“그렇습니다. 혈액 순환 개선, 항피로, 항스트레스, 면역 증진…
몸에 좋은 온갖 성분들이 함유된 홍삼이 제 창의력을 증폭시키거든요.”
“오호, 그렇군요…”
“특히 6년산 홍삼이 가장 몸에 좋습니다. 드실때는 뿌리에 영양이 70%나 함유되어 있으니, 꼭 뿌리까지 다 씹어드셔야 합니다.”

묘하게 지역 방송의 촌스러운 광고처럼 흘러가는 인터뷰였다.
기자가 안경을 고쳐쓰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면 나름 홍삼판매에 효과가 있겠지.

이렇게 기특한 코치가 또 어디있냐 말이다.


“혹시 팀의 좌우명, 모토Motto가 따로 있으십니까?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 물론…”

전생의 진수현은 항상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외쳤다.

얘들아, 이겨야 돈번다.
 벌어야 한강 보이는 아파트 산다.
집 사고 싶으면 죽어라 뛰어!

...하지만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하자니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말을 주구장창 하던 나도 한강은 커녕 서울에서 전세 이상의 집에 살아본 일이 없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좌우명이다.

그럴듯한 거 없나?
항상 그렇듯 갑자기 생각하려니 머릿속이 텅 비고 아무 생각도 안떠오른다.

모처럼 기자가 왔다. 후까시좀 잡아야하는데…


“JUST DO IT.”
“오?”
“그냥 하면 돼. 이게 저희의 좌우명입니다.”

여기엔  회사도 없으니 좀 빌려써도 괜찮겠지.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이것 저것 재고 따지고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전력이 불리해? 상관없습니다. 그냥 하면 돼요.
상대가 너무 강해? 그러면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할겁니까? 그래도 그냥 해버려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기껏해야 지기밖에 더하나요.
일단 해보십시오. 그게 저희 팀의 좌우명입니다.”
“와아아… 멋지네요.”


조금 전 인터뷰를 빙자한 홍삼 PR엔 약간 아리송해했던 기자가 이번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수밖에.
 원래 세계에서 초대형 글로벌 스포츠 용품회사가, 초유능한 광고전문가들을 우르르 기용해 만든 광고 표어니까.

여기까지 쫓아와서  고소할 것도 아니고, 뭐 어쩌겠어.

“이야… 저스트…  잇… 정말 좋네요. 뭔가 날렵하고 느낌있는 로고랑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요.”
“예?”

이번엔 내가 놀랐다.

“너무 좋은 좌우명인데 약간 홍삼의 고리타분한 느낌이랑은 조금 미스매칭이 아닌가… 아 죄송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가볍고,  하고 긋고 지나가는 그런 로고가 어울리진 않을까요.”
“기자님.”


이새끼 뭐야?
뭐 알고 하는 말이야?
나는 등골에 식은 땀이 흘렀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원래 내 세계나 여기나 보편적인 감성은 같은건가.

“저희 팀과 좌우명이 서로  맞는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니겠죠?”
“아! 죄송합니다! 주제넘게 제가 무슨 말을…!
아닙니다. 제가 뭐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뭣도 모르는 사람이 헛소리했다 쳐주세요.”
“...”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다.

 적당히 좋은 기사가 나가겠지.
이 정도면 만족이다.


기자와 카메라맨은 장비를 정리했다.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던 아저씨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아까부터 계속 저러고 구경하고 있었는데, 일간지쪽 사람이 아닌가?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건넸다.

“야~~~ 대단하오. 멋있소! 내 아주 반해버렸어.”
“저기, 누구신지?”
“아차차, 내 소개를 안했네. 나 이런 사람이오.”

그가 명함을 한 장 줬다.


<드림☆리얼리티
입체증강현실 개발 회사>

대표 로렐로


...뭐하는 회사야?
명함만 보곤 감이 오지 않는다.


“허허. 요즘 <홍삼 스포츠>팀 경기를 몇 번 봤는데 말이오.  맘에 들었어.
스폰서, 관심없소?”
“스...스폰서요?”
“그래. 내가 이 팀을 지원해주고 싶다 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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