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비 오는 날(1) (40/109)



〈 40화 〉비 오는 날(1)

“응, 보고서 잘 봤네.  꼼꼼하게 잘 썼더구만.”
“그런가요?”
“코치 말고 우리 홍삼 회사 회계도 한번 볼 생각 없나? 허허.”

아침부터 썰렁한 농담을.
소 잡는 칼로 닭이나 잡을 셈이오, 아재.
나처럼 유능한 인재는 그런 조그만 회사에 있을 그릇이 아니라오.

우리 팀의 단장, 레이지 아재는 내가 야근까지 해가며 작성한 상반기 팀 운영 결산 보고서와, 앞으로의 발전방향을 정리한 서류를 읽었다.

어깨 너머로 예전에 프런트 직원들이 작업하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대로 흉내내봤는데,

썩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뭐 보고서 내용도 한없이 희망적이고 장밋빛 꽃밭이기도 하다.
이 팀이 워낙 이전까지의 사정이 시궁창이었기때문에.
모든 지표는 쭉쭉 우상향을 그리고 있다.


“대회도 우승하고, 스폰서도 들어오고…
라비에 앨리스까지.
트래쉬 군, 정말 대단해. 진심으로 하는 말이네.”
“과찬이십니다.”
“나야  스포츠 팀에 대해선  아는 것도 없고 하니 앞으로도 팀은 전적으로 자네에게 맡길게. 괜찮지?”
“아, 그러고 보니 그거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원하는게 있으면 지금처럼 분위기가 좋을 때 밀어붙여야 한다.
이참에 수락을 받아두자.


“응? 어떤거?”
“다름이 아니라, 프런트 쪽으로 인력 충원을 한 명쯤 해서, 업무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분담하고 싶은데요.”
“아하~ 그럼, 거 좋지. 뭐 괜찮은 사람 있나?”
“일단은  명 생각해 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 그것도 트래쉬 군 한테 맡길게. 스폰서덕분에 운영비도 조금 여유가 생겼으니 사람 한 명 늘려도 크게 지장은 없을거야.”
“어이구, 감사합니다.”


야호!

드디어 내 직속 쫄따구… 아니 동료가 한 명 늘게 되었다.
앨리스처럼 담당 선수가 추가되는 것과는 느낌이 완전 다르다.
선수는 내가 챙겨줘야  대상이지만,
팀 직원은 내가 부려먹어도 되는 대상이다.

크큭…아주 좋아.


“아, 사람을 새로 뽑는다 하니 하는 말이네만.”
“예?”
“우리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가 지역일간지에 실렸잖아, 이번에.”
“그쵸.”
“그게 입단신청서가 몇 장 들어왔더라고. 우리 팀을 지망하는 선수들이 생겼어.”
“진짜요?”

오, 나름 지역 내에서 팀의 명성이 높아지니 우리가 모집하지 않아도 이렇게 신인 선수들이  찾아오는구나.

뜻밖의 희소식이다.


“그런데 지금 라비하고 앨리스 둘만으로도 우리 팀이 잘하고 있긴 하잖아. 그치.”
“예.”
“그래서 선수들을 더 받을지 어째야할지 솔직히   모르겠어.
이것도…”
“제가 살펴보고 단장님께 보고드리죠.”
“허허, 그래줄래?”


레이지 아재는 담배를 맛있게 피우며 웃었다.


“트래쉬 군이 참 복덩이야. 우리 팀에 안왔으면 어쩔뻔했나 몰라.”
“에이~뭘요.”
“사실 처음엔 쪼끔 불안하기도 했는데 말이지. 월급도 잔뜩 가불하고… 허허.”
“...”
“뭐, 과거가 뭐가 중요하겠나? 맞지?”


아재는 입단 신청서를 내게 건네주고, 트리플린 시에 사업 건수가 있어 가봐야 한다며 일찍 떠났다.

영 하는  없어보이지만 사실 이런 스타일의 '방치형','너가 알아서 해줘' 단장은 꽤 좋은 점도 있다.

팀에 쓸데없이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크게 도움을 얻을 여지는 없지만 반대로 팀을 방해하지도 않는 거니까.

그런 점에선 코치인 내 역할이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맘만 잘못 먹으면 이 팀은 나락으로 빠질 것이다.
운영비고 뭐고 건드리려고 하면 얼마든지 삥땅칠  있고,  외에 내게 주어진 권한이 워낙 많으니…

결국 신뢰의 문제다.


‘운 좋은 줄 아시오. 아재. 나같이 선량하고 성실하고 유능한 인재가 이 팀에 들어왔다는 거에 감사하시고.’

아재가 나가자  바로 아재가 앉아있던 사무실에서 가장 좋은 소파, 즉 1인자의 상징에 앉아 거만하게 웃었다.
아재가 떠나면 내가  팀의 왕이니까.

레이지 아재의 엉덩이로  데워져 소파가 따끈따끈하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군.
...어쩐지 기분이 미묘해 그냥 다시 원래 내 의자로 돌아왔다.

오늘도 하루 종일 훈련장엔 공사가 예정되어있어 훈련스케쥴은 없다.

적당히 공사 진행되는거나 조금 보다 퇴근하면 되겠지. 퇴근하는 길에, 내가 생각해둔 비서 후보한테 제안도 하고.

서두를 것 없는 느긋한 하루다.

나는 입단 신청서를 살펴봤다.

5장이라.

아무리 그래도 지금 팀에 5명이나 선수를 늘릴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다.

많아야 1, 2명이려나.

일단 한 명 한 명 만나서 면접을… 특히, ‘감식안’을 써서 알아봐야겠지만,

지금 딱 보기에 눈에 띄는 선수는 없는 것 같다.

경력도 다들 일천하고, 별로 눈에 띄는 아우라가 없달까…

팔랑 팔랑 넘기다 마지막 입단 신청서를 들었다.
...뭐지? 이상하게 눈길이 간다.


‘스이나…? 아는 사람도 아니고. 들어본 적도 없고… 근데 이상하게…’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이름: 스이나
나이: 20
성별: 여
출신: 하이 네스트

…]


검은 머리의 여자애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증명사진.

왜  이 여자애가 신경쓰이는걸까?

약간 차가운 듯도 하면서 무신경한 얼굴이, 미인인데 묘한 인상을 자아낸다.

[자기소개: 게임을 잘합니다. 낮잠을 잘 잡니다. 다른 사람들과 말을 잘 안합니다.

특이사항:  뽑지 마세요. 언니가 시켜서 억지로 지원한 겁니다.]


‘뭐여, 이런 쓰레기같은 신청서는.
얘는 볼 것도 없이 탈락인데?’

이따위로 장난같은 입단 신청서를 내놓고 면접까지 봐주는 건 말도 안된다.
서로 시간낭비할  없지.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 스이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걸린다.
왜일까?
귀엽고 예뻐서 그런건가?
그런거겠지?
일단 오라고는 해보자. 얼굴이나 한 번 보게.

 입단 신청서를 낸 지원자 모두에게 다음 이벤트 대회 바로 직후로 면접날짜를 잡았다.
‘스이나’도 포함해서.


***


‘어제부터 꾸물꾸물하더니 비가 쏟아지겠는걸.’

퇴근길, 나는 <24시간 큰손 그랜드파더 순대국>으로 향했다.

한  든든하게 때울 생각은 없다.

순대국, 매일같이 너무 많이 먹어서 사실 조금 질렸다.

목표는 너다!

어깨까지 오는 갈색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묶고, 옆머리만 살짝 내린 참하고 귀여운 아가씨.
야무지면서 선한 인상이  매력적이다.

“메리 양, 안녕하세요.”
“아, 또 오셨네요, 코치 님! 어서오세요.”


순대국집 딸내미 메리가 붙임성 있게 인사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라 가게 테이블에 계산기와 장부를 꺼내놓고 뭔가를 적고 있었다.

“특으로 한 그릇 말아드릴까요?”
“아니오, 먹고 왔어요.”
“예? 그러면 어떤 거로 드릴까요…”
“저는 메리 양을 원해요.”
“예에~~~~~?”

메리가 깜짝 놀랐다.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똑 떨어트렸다.

“저희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에 유능한 비서가 필요합니다. 전부터 봐왔는데 메리 양이 딱일거 같아요.
저희  열성팬이 새로운 식구가 되면 그림도 너무 예쁘고요. 어떠세요?”
“아, 아. 깜짝이야… 놀래라. 그런 얘기였구나. “

메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니 조금 오해할만하게 얘기하긴 했군.
반성하자.


“어휴, 저 같은 사람이 그런 중요한 일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코치님.”
“저는 알아요. 이 순대국 가게의 메인 코어, 핵심 엔진이 메리 양이라는거.”
“...”
“가게 매상 관리, 재고 관리, 청결 관리, 손님 판촉, 신메뉴 개발…
전부 메리 양이 도맡아서 하고 계시잖아요. 맞죠?”
“앗…”

내 사람 보는 눈은 제법 쓸만하다.
그간 지켜봐온 결과 순대국집 딸내미는 생각보다 훨씬 유능한 사람이었다.
재야의 인재!


“거기다가, 아날로그와 디지털 둘 다 능통하시죠. 전통적인 장부 작성도 잘하고, 컴퓨터로 프로그램까지 만들어서 재료 관리에 활용하고.
전국 순대국 가게 온라인 네트워크에도 가입해 적극 활동하고 계시다면서요.
듣자니까 우수회원이라던데.”
“그걸 어떻게…”
“앨리스 선수가 얘기해줬어요.”

메리는 내게 인정받았다는 것이 기쁜지 설렘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안될  같아요. 코치님, 말씀하신대로 제가 이 가게에서 하는 일이 많아요.
<홍삼 스포츠>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저희 부모님 도와드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크크크…”
“왜 웃으시죠?”

메리가 이해가 안간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사장님! 마침 메리 양이 부모님 얘기를 꺼냈군요. 나와서 한 말씀 해주시죠.”
“그래요. 크흠, 메리야, 까불지마.”
“뭐? 아빠 지금 뭐라고 했어?”

순대국 가게 사장, 우리 팀의 2호 팬이 주방에서 걸어나왔다.
메리가 어이없다는  제 아빠를 노려봤다.

“니가 뭐라고. 무슨 우리 가게의 주인공인양 말을 하냐, 하길.”
“아니…”
“너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자리에서 계속 장사했던 가게야.
그냥 순대국 우직허니 맛있게 끓여서 손님들이 자주 오시고, 그래서 지금까지 하는 가게라고.
뭔 지 없으면 망하는 것처럼 얘기를 허고…”
“와, 웃긴다. 아빠 진심이야? 내가 그럼 도움 하나도 안됐다고?”

가족싸움인가.
하지만 예상했던 바다.
때로는 살아가면서 성장통도 필요한 법이지.


“누가 도움 안됐대? 됐는데, 니가 없으면 안될 정도는 아니라고.
가서 코치님도 도와드리고, <홍삼 스포츠>도 키워봐.
 하던 일은 인수인계만 잘 해놓고 가면 문제없으니까.”
“아빠…”
“코치님 말도 들고있자니 그건 좀 그렇수. 이 가게의 핵심 코어는 얘가 아니라 나요. 내 푹 끓인 돼지뼈 육수라 이 말씀.”


사장이 든든하게 가슴을  치며 웃었다.

“저기, 이 점은 미리 말씀드려야겠지만 저희  이제 막 날아오르려는 신흥 팀입니다.
아직은 일도 많고, 월급도 박봉일거예요.
괜찮으시죠.”
“그럼. 전에도 말했잖아요.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거야. 나도 그랬어.
우리 딸내미도 고생 억시게 하면서 어른되고 하는거지.”


하지만 사실 모두가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메리는 지금의 능력을 잘 살리면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조금 더 편한 일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난 굳이 이 사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야 우리  사정이 더 중요하니까…

“메리 양,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   식구가 되어주세요, 같이 사고 한  쳐봅시다.”
“코치님…”
“만약에 저희 팀에 들어올거라면, 이제  ‘선배’라고 불러도 돼요. 알겠죠?”
“...알겠어요, 선배. 아, 기분 이상해요. 후훗.”
“좋아, 메리야.
이제 서로 말 편하게 하자. 첫 출근은 내일 모레다. 준비 잘하고 9시까지 와.
오면 본격적으로 일 가르쳐줄게.”

좋았어.

이걸로 적은 월급에, 열정을 연료로 오래 일해줄, 우리 팀 사정에도 빠삭하고 팀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젊고 유능한 인재를 프런트로 들여왔다.


이보다 좋을 수가 없군.


***


비서 스카우트를 마무리 짓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우리 팀의 앞날을 축하하듯 자욱한 장대비가 10m 앞도 안 보일정도로 세차게 쏟아내린다.

쏴아아아…

‘멋진 날씨야. 얼마나 팀이 잘되려고 하늘도 이렇게 격려해주는지.’

우산을 미리 가져오길 잘했다.
출근길에 전봇대 앞에 장우산이 하나 떨어져있어서 ‘쓸만한데 이런걸 누가 버렸을까’하며 주워봤는데, 역시 사람은 준비성이 철저해야 한다.

머리가 잘 굴러가야 몸이 고생을 안하는 거지.

...근데 뭔가 손이 허전하다.
왜 난 우산만 들고 있지?

‘내 가방. 가게 안에 놓고 왔나?’

돌아서 다시 들어가려다 멈췄다.
아니다.  기억상으로는 처음부터 가게에 가방을 가지고 들어간 적이 없다.

그냥 사무실에 두고 왔다.

거기에 내방 열쇠도 들어있는데. 이런 쉬벌.

이 빗속을 뚫고 다시 훈련장까지 돌아가야 한다니.

사람은 준비성이 철저해야 한다.
머리가 잘 굴러가야 몸이 고생을 안한다는 걸 또 이렇게 뼈저리게 배운다.


‘하지만 괴로운 일을 곱씹고 있으면 더 괴로워지는 법이지.
이럴 땐 그냥 아무생각없이 하다 보면 또 그냥저냥 하게 되어있어.’

JUST DO IT이다.

나는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훈련장으로 돌아갔다.

하필 또 통풍이 잘되는 메시 소재의 런닝화를 신고 와서 빗물이 신발 속으로 다 들어간다.
양말이 축축해지고 불쾌감이 직빵으로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아니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그럴수록 더 괴로워져.



운동화 빨래 안해도 되고 좋잖아?

걷기만 하는데 알아서 세탁이 되다니.
이렇게 편한 일이 어딨어.


...미친놈인가?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다. 이런 건 긍정적인 생각도 뭣도 아니다. 그냥 정신병자다.
중국 고전소설 중에 ‘아Q’라는 정신승리의 대가가 있는데, 그 녀석이나 할 짓이겠지.


...

나는 혼자 머릿속으로  생쇼를 해가며 훈련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문 앞에 누군가가 있다.
빗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작은 그림자가 하나.

설마  토토에 꼴아박은 분노한 영혼인가.
갈길 없는 원한을 나에게 풀러 온 것인가.

나는 경계하며 그 혹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 코치네. 뭐야, 여기  왜 잠겨있어.”
“...앨리스? 여기서 뭐해요?”

비에 젖은 생쥐처럼  젖은 앨리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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