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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화 〉이벤트 대회, 머더러스 하우스(2) (43/109)



〈 43화 〉이벤트 대회, 머더러스 하우스(2)

우리 셋은 나란히 캡슐 속에 몸을 뉘었다.
여차하면 침대 대용으로 써도 좋을만큼 푹신하다.
게다가 안에 들어가니 내 체형에 맞도록  적절하게 자동으로 사이즈 조절이 되면서 기분좋은 안락함을 제공했다.

고양이가 몸에 맞는 박스를 찾아 안에  틀어박히는 기분을 알 것도 같다.


“자, 라비, 앨리스. 안에서 봐요.”
“오케이~”
“응.”

눈을 감자 캡슐 안은 광고 끝나고 영화 시작할 때의 극장처럼 어두워졌다.
내 의식도 서서히 멀어져간다.
마취제를 주사한 것도 아닌데 신기한 노릇.

의식이 끊기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잔뜩 집중해봤지만 언제나 그렇듯 헛수고일 뿐이다.


“...”


***


두둥.

눈 앞에 거대한 선과 기둥의 나열이 나타났다.
순간 이게 뭔가 하고 어리둥절해하며 쳐다보는 나.

자세히 읽어보니 글자다.

<머더러스 하우스>.

어렸을 때 추리소설을 좋아해 가끔 읽었는데, ‘해문출판사’라는 곳에서 발행된 추리소설 전집 표지가 딱 이런 느낌이었다.

시뻘건 배경에 인정사정없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제목.
임팩트 하나는 확실하다.


‘살인자의 집이라… B급 영화같기도 하네. 노골적이고 좋군.’

 시선을 가로막던 거대한 글자들이 서서히 페이드아웃되며 사라진다.
문득 내 팔과 다리의 존재를 의식했다.

당연히도 1인칭 시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몸 그자체다.

‘오오오… 신기한데?’

게임판타지 소설의 도입부같은 신선한 자극을 느끼며 난 감탄했다.
박수도 치고, 펄쩍펄쩍 뛰어본다.
평소 내 몸 감각 그대로다.

플레잉 코치의 바디로 의식이 옮겨질 때와는  다른 감각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애들은 어딨지.’

정처없이 돌아다니며 찾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주변 풍경이 홱홱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어두운 하늘, 고급 이층 주택들이 늘어선 부유한 주택가,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길거리가 나타났다.

“코치님!”


라비가  멀리서 뛰어온다. 라비도 평소 그녀의  그대로다.


“진짜 신기해요. 와~ 조금 부끄러울 정도로  몸을 잘 구현했어요. 허벅지 안 쪽의 점까지… 헤헤.”
“그래? 혹시, 스킬같은 것도 쓸  있니?”
“아, 그건 안해봤는데. 한번 시험해볼게요.”

라비는 응아하듯 잔뜩 미간에 힘을 주었다.
...원래 저렇게 스킬을 써야 하던가?

“음, 안돼요. 전혀 반응이 없어요.”
“아하. 따로 특별한 능력은 반영하지 않고 신체의 외형만 복사한 건가 봐.”
“아, 그렇네요. 그러고 보니 아까 뛰어올때도 몸은 똑같은데 맘처럼 잘 안달려진다 싶긴 했어요.”


그렇다면…
나는 슬쩍 내 사타구니를 톡톡 두들겨봤다.
오, 자지는 그대로군. 사이즈도 충실히 재현했다.
뭐 나는 이거면 만족이다.

대회 중에 모두의 앞에서 내 자랑스러운 천자총통을 과시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달려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내가 느끼는 안정감이 달라진다.

무게추처럼 몸의 중심이 딱 잡힌다고나 할까.


그 때 우리들의 눈앞에 메세지가 나타났다.


[아름답고 영리한 탐정 라비와 그녀의 조수 트래쉬는 대부호 비트코이스 씨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저택으로 향합니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붉은 이층집이 바로 그 유명한 대부호의 저택입니다.]


“이거 완전 그거같네.”
“그거요?”

난 LOVE파워...라고 말하려다 멈췄다.

“어드벤쳐 게임 같다고.”
“아아~”
“일단 시키는대로 가보자.”
“예.”

앨리스는 어딨는걸까?
분명 저 멀리 보이는 새빨간 지붕의 저택이 하나 있긴 하다.

우리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완전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인데요. 너무 리얼해서 가짜라는게 믿겨지지가 않아요.”
“그래? 순진해서 좋겠다, 라비야.”
“에에… 뭔가 그 태도, 거슬리는데요 코치님. 되게 진짜같지 않아요 여기?”
“주변에 봐봐.”

라비는 주택들이 늘어선 거리를 돌아보았다.

“어떤데요?”
“이상하지 않아? 사람이 아무도 안 돌아다니잖아. 한밤중도 아니고 대낮에.
사람은 물론, 날아다니는 새나 길가에 고양이 한 마리도 없어.”
“흐음… 그건 그렇네요.”

내친김에 나는 잠시 옆길로 빠져 길가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라비가 놀라며 나를 만류했다.


“어어! 코치님, 안돼요! 주거침입은 범죄라구요~”
“그런   용케 알고 있네. 하지만 괜찮아. 이거 봐.”

나는 집의 문을 열었다. 안은 텅비어있다.
아니, 비어있는게 아니라 구현이 안되어있다.
처음 거리의 배경이 나타나기 전처럼 그저 회색빛 무의 공간이 펼쳐져있을 뿐.

“우아…이게 무어에요?”
“보는 대로야. 이 안의 공간은 시나리오에 별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생략한거지.”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요.”
“그치?”


대부호 비트코이스의 저택 앞에 도착하니 앨리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
“처음에 우리를 이상하게 멀리 떨어진데에다가 구현시켜놨어요.”
“어쨌든 들어가자.”

다시 메세지가 뜬다.

[새침하고 귀여운 앨리스는 라비의 라이벌입니다.
정직한 탐정 라비와 달리 그녀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다소 불법적인 방법도 가리지 않습니다.]


“뭐야 이건.”
“앨리스의 설정이에요.”
“시시하기는.”


앨리스는  몰입이 안되는 모양이다.



“어차피 다 진짜도 아니잖아, 이 모든게? 과연 재밌을까.”
“뭐… 진짜, 가짜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은 그렇지만요.
그래도, 어찌보면 영화, 드라마도 다 가짜인 건 똑같잖아요?
촬영장에서 배우들이 대본에 따라 찍은 것 뿐인데 보다보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죠.
이것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음… 그래, 알았어. 듣고보니 또 그런것 같기도 하다.”


앨리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내 말에 수긍했다.
한번 진탕 열을 앓고  후로 묘하게 약간 모서리의 날카로움이 다소 무뎌졌다고 할까, 나에 대해서 공격성이  3%정도 떨어진 느낌의 앨리스다.


들어가니 고급스런 옷차림을  일가족이 우리를 환영했다.

“아, 이제왔나, 아가씨들.”


어째 분위기가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감독이 “큐!”하고 신호를 준 것 같은 어색한 느낌이다.

콧수염을 기른 중후한 인상의 신사가 대부호 비트코이스 씨.

그의 머리 위에 짧은 소개 메세지가 떠있다.

[‘대부호’ 비트코이스 씨. 52세.

직업은 전문 투자가. 수상한 투자로 기회를 잘 살려 천문학적인 거금을 손에 넣었다.]


‘이거 편하군.’

가끔 소설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맨 앞에 등장인물 소개가 써있는 페이지로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며 얘는 누구지, 쟤는 누구였지 할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 <머더러스 하우스>는  편리하다.

“안녕하세요, 비트코이스 씨.”


라비가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비트코이스는 의외로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 라비 양. 오랜만이에요. 내 52 번째 생일을 축하하러 이렇게 시간을 따로 내줘서  고마워요.”
“뭘요.”

이 아저씨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았다는 설정이구나.
앨리스가 묘한 표정을 짓다가 대뜸 말을 꺼냈다.

“그런데 초대받은 손님은 저희가 다인가요?”
“그렇습니다…”

비트코이스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앗…
친구가 별로 없는 아저씨인가 보다.

“그래도, 주치의 에이다 씨도 그의 조수와 같이 와주기로 했어요. 참 고마운 일이지.”
“제 친구들도 불러와도 될까요?”
“앨리스 양의 친구들?”
“예. 사람이 많으면 떠들썩하고 좋잖아요.”
“저야 좋긴 해요, 하지만 그 친구분들도 예정에 없는 초대를 받으면 조금 난처하지 않을까.
나로서는 실례라는 생각이 드는데.”


앨리스는 약간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 귀에 대고 속닥속닥 속삭인다.

“인공지능을 테스트해보려고 적당히 말해봤어. 대응이 제법 그럴듯한데. 진짜 사람같아.”

그러게.
내가 아는 게임의 NPC들은 대부분  쪽에서 무슨 말을 걸든 프로그래밍된 대로 특정 패턴의 대답만 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진짜 살아있다는 느낌은 별로 안들었는데, 여기의 비트코이스는 아주 자연스럽다.

“자자, 어서 들어와요. 맛있는 음식도 많이 차려놨어요.”


중년의 우아한 여성이 말했다.


[‘귀부인’ 이더리아. 47세.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장에서 나물 한 바구니의 가격을 흥정하던 알뜰 주부였지만 남편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아름다운 귀부인으로 변신했다.
과거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모조리 손절했다.]

우리들은 어색하게 부부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케이크, 와인, 칠면조구이, 샐러드, 파이, 새우튀김, 장어구이…

맛있는 것들이 넓은 식탁 가득 놓여있다.
하지만 뭔가 위화감이 든다.
 앨리스가 내게 속닥거린다.

“맛은 있어보여… 근데 대부호의 파티인데 이정도면 조금 검소한 느낌이지않아?
뭐랄까 서민이 상상한 사치스러운 파티의 느낌인걸.”

진짜 귀족인 앨리스가 보기엔 파티라고 차려놓은 품이 영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다.
나도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마  시나리오를 담당한 프로그래머가 생각한 푸짐한 잔칫상의 이미지가 아닐까요. 그 사람은 대부호가 아니라 그냥 서민일테니까.”
“그런것 같아.”


대부호의 아들, 딸들도 들어왔다.


[‘아들’ 모네로. 22세.

재능은 없지만 아버지의 재력을 이용해 유명한 미술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했다.
라비를 진지하게 연모하고 있다. 조만간 마음을 고백하려 한다.]

[‘딸’ 리플. 21세

하루에 만 골드씩 쇼핑을 하는데도 아버지의 돈이 바닥나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중.
라비를 진지하게 연모하고 있다. 조만간 마음을 고백하려 한다. ]


“에엑~~~~!?”

충격받은 라비가 입을 떡 벌렸다.
‘왜 다 나를…?’이라는 생각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인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프로그래머의 악취미일 것이다.
누군지 모를 그(혹은 그녀)의 해석에 따르면 라비는 이 시나리오에서 귀엽고 유능한, 남녀 가리지 않고 매혹시키는 마성의 여인일 터.

“왜 그래, 라비?”


아들이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라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라비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아니에요.”


슬쩍 몸을 돌려 빠져나오니 이번엔 딸이 다가온다.


“어서 앉아. 음식 다 식겠다.”


라비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이끈다. 라비의 얼굴이 울상이 된다.
별  없어, 라비야. 적당히 맞춰줘야지.

우리가 식탁에 앉자 집사가 다가왔다.

“주인님, 에이다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응, 어서 오라고 전해드려. 마침 타이밍 좋네.”


[‘집사’ 시빅. 62세.

세상에 대한 증오로 가득찬 노인.
과연 그는 진짜 집사가 맞을까?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어두운 비밀을 숨기고 있다.
그가 내오는 커피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소개메세지가 가차없이 스포하고 있는데요?
이 사람이 범인 아냐?

“코치, 근데 의외로 이렇게 대놓고 수상한 타입이  범인이 아닌 경우가 많거든.”
“그런가요.”

집사가 앨리스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 건넸다.


“먼저 한  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앨리스는 잔을 받아들었지만  모금도 마시지 않고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와인잔 안 내용물이 몹시 신경쓰이는 눈치다.

“범인이 아닐 것 같다면서요. 그거 마셔봐요.”
“...뭐 100%는 아니니까.”


대부호 비트코이스 씨, 아내, 아들, 딸, 그리고 나와 라비, 앨리스가 식탁에 둘러 앉았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 테이블 위에서 알몸으로 트월킹을 추면 이 NPC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몹시 궁금하다.
인공지능이 꽤 좋아서 더 그렇다.
반사회적인 충동이 내 마음 속에 어두운 불꽃을 일으켰다.

...아니야. 지금 이건 이벤트지만 엄연히 대회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처신 잘하자.


“어쩐지 친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도 그럭저럭 정이 드는걸. 그치, 앨리스.”
“전혀?  사람들, 어차피 곧 다 죽어나갈텐데 뭘.”
“뭐어~~~?”


내 생각에도 앨리스 말이 맞다.
안타깝지만 우리 눈앞의 이 가족은 모두의 즐거움을 위해 희생이 예정된 제물들이나 다름없다.
언제 어디서 누가 죽어도 이상할  없는.


“그러면, 여러분 조심해요! 이제  다 죽을지도 몰라요! 하고 경고하면 어떨까?”
“너만 정신이상자 취급받겠지 뭐.”
“...”

라비가 슬픈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하, 여러분. 다 모이셨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금 일이 있어서.”


안경을  젠틀한 인상의 사내가 들어왔다.
의사다운 느낌이다.
하얀 가운도 입고 있다. 청진기도 목에 걸고 있다. 주사기와 메스도 주머니에 꽂고 있다.

…?

굳이 저렇게까지 의사라는 어필을 해야 하나?
의사지만, 너무 의사스러워서 도리어 의사 코스프레한 일반인으로 보일 지경이다.


[‘주치의’ 에이다. 38세.

비트코이스  가족의 전속 주치의다.
하지만 감기 한  걸리지 않는 강골체질인 가족덕분에, 3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월급만 타가고 있다.
라비를 진지하게 연모하고 있다. 조만간 마음을 고백하려 한다.]


“의사님도….인가요…”

라비가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예, 라비 양? 왜 그러시나요.”

의사가 안경 너머로 눈빛을 반짝이며 부담스럽게 라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 아니에요.”
“컨디션이 안좋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고로쇠 수액주사   기운나게 놔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비트코이스가 의사에게 물었다.

“에이다 선생님, 그 몸 좋은 조수는 오늘  오나요?”
“그 학생이라면 오늘 일이 있어 법원에 가야한다고 먼저 갔습니다.
프로포폴을 빼돌려서 병원에 고소당했거든요.”
“어이쿠, 저런…”

의사가 의자를 꺼내 앉아 빈자리를 마저 채웠다.

드디어 <머더러스 하우스>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모였다.

시작인가.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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