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9화 〉앨리스의 결심(1) (59/109)



〈 59화 〉앨리스의 결심(1)


훈련 일주일 차.

대회를 3일 앞둔 오늘은 굉장히 중요한 날이다.

바로 우리가 참가할 제47회 동부 <헌팅> 대회의 스테이지와 미션의 공개일.

도시, 실험실, 콜로세움, 숲, 던전, 정글, 사막, 폐허…

25개를 넘는 스테이지 중 한 곳,

그리고 220개도 넘는 미션  하나가 <헌팅>의 전장이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모든 조합을 전부 사전에 대비하긴 불가능에 가깝다.

이골이 난 <헌팅> 프로들이라 할지라도 매 대회 전 공개된 미션 조합에 따라 맞춤 전략을 그때그때 새로이 준비하기 마련.

<블루 윙>의 라이스 수석 코치와 <헌팅> 전략 자문단, 그리고 우리 <홍삼 스포츠>는 한 자리에 모여 초조한 기분으로 대회 측의 발표를 기다렸다.


“저희 측에 유리한 미션은 뭐가 있나요?”

내가 물었다.
<블루 윙>의 자문단은 미리 상세하게 준비한 듯 즉시 답했다.


“일단 <홍삼 스포츠>측은 <헌팅> 대회 전적이 아예 없다보니, 선호하거나 비선호하는 미션의 데이터 자체가 없긴 합니다. 승률 분석도 무리입니다.

그래서 분석 결과는 조금 미흡해요.

하지만 저희 측 예상으로는 아마, ‘리니스트와 지하 납골당’, ‘기가스의 움직이는 숲’ 두 개가 가장 승률이 높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다 뭔지  모르겠는데.
나도 일단 <헌팅> 종목의 데이터를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읽어두긴 했는데 너무 자료가 많아서 다 기억에 남진 않았다.

라이스가 내 눈치를 보고 센스있게 바로 보충설명해줬다.


“트래쉬 코치님, 두 미션의 공통점은 미션에 출현하는 적들이 화염 공격에 극히 취약하다는 겁니다.

‘지하 납골당’은 언데드 계통의 적들이 주로 나오고, ‘움직이는 숲’은 귀신들린 나무들이 나오거든요.

게다가 전반적으로 크고 둔한 녀석들이 태반이라 속도가 빠른 라비 선수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도 좋죠.”
“아하, 그거 좋네요.”


우리 팀의 메인딜러는 누가 뭐라해도 앨리스다.
앨리스의 ‘불의마법’.
따로 무기를 루팅할 필요도 없이 시작부터 바로 쓸 수 있으며,
광범위, 좁은 범위 가리지 않고 고화력의 투사가 가능하다.

한 마디로 앨리스에게 유리한 전장이 곧 <홍삼 스포츠>에게 유리한 전장이며,  반대도 성립한다.

“이제 시작하려나 봐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한가하게 발표 전 TV방송을 보고 있던 라비가 말했다.

으레 이런 발표 방송이 그렇듯 본 내용 전의 광고나 잡설이 길어 조금 지루해지던 차였다.

-예, 그러면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던 47회 동부 <헌팅>대회의 미션, 공개하겠습니다.

-이번 미션은…

-스테이지는 콜드란 구 시가지,
미션은 ‘크라고스의 용군단’ 토벌입니다!

화면에 거대한 검은 용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하늘을 날아가는 자료화면이 흘러나왔다.

그 뒤로 날고 뛰고 하며 쫓아가는 온갖 추잡한 용, 유사 아룡, 용인 등의 무리가 보인다. RPG 게임의 전형적인 레이드 보스같은 풍경.

“오호라, 저거 자료에서 봤었는데. 어때요? 좀 할만한가?”

나는 라이스와 자문단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대답을 듣기 전부터 그들의 표정만 보고 분위기를 깨달아버렸다.

어… 좆된건가, 혹시?

라이스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문단은 서로 긴급히 의견을 나누며 대책 회의에 들어간 모습.


“이거 참… 하필이면, 이네요. 진짜 하필이면. 크라고스, 미치겠다 정말.”


라이스가 웃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요?”
“저 녀석, 난이도 드럽게 높거든요. 3인 <헌팅> 대회에서 참가자 전원 미션 실패율이 85%도 넘어요.
그래서 난이도 조절을 위해 4인 대회용 미션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죠.

좀 논란이 분분한 미션이라 지금은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어떤 점이 어려운데요?”

자문단 중 한 명이 재빠르게 추출한 ‘크라고스’의 데이터를 라이스에게 건넸다.
라이스가 그걸 훌훌 넘기며 요약해줬다.

“일단 크라고스는 흉폭한 검은 용인데, 이 녀석 웃긴게 용 답지 않게 자기 둥지랄 게 따로 없어요.
가출한 여고생처럼 이곳저곳 쉬지않고 싸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 보이는 대로 사람 족치고 다니는 거예요.

미션 전에 미리 최적화한 루트를 짜두는게 힘들다는 얘기죠.”


과연. 너무 무작위성이 짙으면 상대하는 입장에서 피곤하기 짝이 없지.

“게다가 별명에 걸맞게 성격이 몹시 치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비열한 크라고스’.

기만전술을 즐기고, 잔인하고 교활합니다.

미션 참가 플레이어들을 가지고 놀다 쓰러트리는 걸 무척 즐기죠.

독특한 행동 패턴때문에 대회에서 크라고스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별 거지같은 게 다 있네요.”
“그쵸… 그리고 이게, 사실 가장 큰 문제인데…”

라이스가 슬쩍 앨리스를 바라봤다.
 시선에 팔짱을 끼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앨리스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응? 나, 왜?”
“후우… 이거 참…

크라고스를 포함해 그녀의 용군단 모두는 화염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앗…

전문가가 아닌 나도 즉시 사태의 심각함을 눈치챘다.

진짜 좇됐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앨리스는 의외로 태연하게 말했다.
모두가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화염 내성이 있다고 해도 전혀 데미지를 안 받진 않을  아냐.
그건 화염면역의 레벨이지. 안그래?”
“아… 그건 그래요. 맞습니다.
불에 데미지를 덜 받을 뿐 완전히 안 받진 않아요.”

라이스가 억지로 침통해진 분위기를 살려보려는 듯 밝게 말했다.
자문단  선임으로 보이는 아저씨도 동참했다.

“그리고 생물인 이상 체내, 즉 뱃속 내장까지 불에 내성이 있는 건 아닙니다.
용들이라도 그 목구멍 속으로 화력을 투사할 수 있다면 충분히 태워 죽일 수 있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그래, 그럼 됐어. 제깟 도마뱀들이 태초의 에너지인 불에 저항해봤자 얼마나 버티겠어.
걱정하지마, 내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까.”

앨리스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모두가 약간은 다시 용기를 찾은 모양이다.
나도 한 마디 얹었다.

“난이도가 아주 높다는 것도, 오히려 초심자인 우리한테는 좋을 수도 있지.

경험자들도 그냥 당해버린다는 얘기잖아.
우리보다 경험자들이 먼저 미션을 클리어할 가능성이 낮다는 거니까.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럭키펀치를 노릴거라면  편이 더 좋아.”


하지만 스스로 말하면서도 조금 억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고 치면 크라고스를 고를 일은 절대 없을 터.

어쩐지 <퍼플 캣츠>가 이 시간 방송을 보며 박수치며 깔깔거리고 웃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

예고 없이 우리 팀에 방문객이 도착했다.

스이나를 찾아 온 사람이 있다고.

누군가 해서 나도 따라가봤다.

검은 가죽자켓, 다리의 각선미를 그대로 드러내는 스키니 진.
그리고 저 길고 검은 머리…


“.....언니!!”

스이나가 먼 발치에서 알아보고 오도도 달려가 유우의 품에 폭 안겼다.

유우가 다른 사람한텐 보이지 않는 따뜻한 얼굴로 그녀의 볼을 잡아당기며 웃었다.

“스이나, 대단한데? 며칠 안 보인 사이에 엄청 건강해졌어. 혈색도 좋고.
...50m도 더 되는 거리를 달려오고… 너가 뛰는  초등학생  이후로 10년 만에 처음 본  같아. ”
“....헤헤.”


유우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부비하며 잔뜩 어리광을 부리는 스이나였다.
나이 차이도 그리 많이 안나는데, 꽤나 애틋한 사이다.

무뚝뚝한 스이나도 언니 앞에선 완전 애교쟁이가 되는구먼.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아, 트래쉬 코치님.”

유우가 스이나를 안은 채로 날 의식하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나도 인사했다.

“<블랙 이글>쪽 활동은 어떻게, 안 바쁘신가봐요?
응원도 와주시고 너무 고맙네요. 스이나 선수가 언니 많이 찾던데.”
“아, 그래요?”


유우가 품에 안은 스이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진짜 그랬어?”라며.

“...아니야, 코치… ….있는거야.”
“아니라는데요? 코치님이 뻥치는 거라는데.”
“하하.”


내가 웃자 스이나가 긴 속눈썹을 기울이며 살짝 나를 째려봤다.


“TV 봤어요. ‘크라고스’라면서요? 그거 쉽지 않은데.”
“유우 선수도 방송 보셨나 보네요.”
“예. 저희 <블랙 이글>도, 저는 아니지만 팀에서   상대한 적 있는데 우승 실패했었어요.

고생 좀 하시겠네요, <홍삼 스포츠>.”

특유의 여자 사무라이 같은 복장 대신 평상복을 입고, 긴 칼도 안 찬 유우는 그냥  나이대 또래의 세련된 아가씨처럼으로만 보인다.


“얘가 잘   있을까…”
“언니, ...거든.”
“그래, 의외로, 정말 의외로 너가 포기하지 않고 운동 열심히 하는건 알겠어.
근데 아직 너 정도로는 좀…”


영 못미더워하는 유우.
그도 그럴만하다.
나도 스이나의 지금 폼이 썩 믿음직스럽진 않으니까.
원래라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키워야할 유망주를 조기투입한 느낌이다.


“제가 이틀 휴가를 받았거든요.
괜찮으시면… 훈련을 조금 봐드려도 될까요?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면 거절하셔도 괜찮지만요.”
“아뇨, 그럴리가요! 그래주면 저는 정말 고맙죠. 유우 선수, 감사합니다.”


오?
<블랙 이글>의 주력인 유우가 우리를 도와준다면야, 잠깐이라도 엄청 도움되겠지.

스이나가 걱정되는 유우는 아무래도 이번 대회에서 우리 <홍삼 스포츠>쪽으로 마음이 쏠리나 보다.
가족이란게 다 그런거니까.


“저도 아직 일개 선수라 여러가지는 못하고… 비행술, 맨손격투, 서바이벌, 검술… 이정도일까요.
필요한  있으시면 코치님이 고르세요.”
“흠…”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  활용해봐야지.
난 차분히 생각한 후 말했다.


“검술, 검술을 봐주실  있나요?
저희 라비가 이번 <헌팅>에서 검을 쓰기로 했거든요.
현장에서 뛰는 같은 선수가 봐주면 도움 많이 될 것 같은데.”
“그럼 그럴게요.”

둘은 아마 잠시 시내에 나가 휴식을 즐길 예정인 것 같다.
나는 눈치빠르게 자리를 피해주기로 했다.

이럴 땐 유우가 오팔라처럼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다는게  다행이다.

만약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자기 동생하고 (본의아니게) 낯뜨거운 짓을 벌인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맨손으로  찢어 죽일지도 모르지.

나는 몸을  번 부르르 떨고 발걸음을 돌렸다.

***

스이나는 열심히 했으니 오후에 잠깐 쉬게 두고, 그럼 난 이제 또  일을 해야지.

그놈의 크라고스에 대한 맞춤 전략을 짜야 하는데…

다시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돌아가는데, 훈련장 앞 벤치에 앉아있는 앨리스가 보였다.


“어, 이런 곳에서 뭐해요?”
“뭘하긴. <이스케이프>도 아닌데 좀 나와서 쉴 수도 있는 거잖아.”
“하긴 그렇네요.”


난 자연스럽게 앨리스 옆에 앉았다.
딱히 피하지 않는 앨리스.

요즘 내게 은근히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는데, 뭔지 모르겠지만 이제 다 해결된건가?

최근 마늘이나 양파같이 입냄새 날만한 건 안 먹으려고 주의하고 있는데.
나름 소득이 있는 모양이군.

“앨리스 덕분에 살았어요. 거기서 앨리스도 약한 모습 보였으면 다 같이 우울한 분위기로 축 쳐졌을텐데.”
“그런가.”
“앨리스라면 허세가 아니라 정말 자신이 있다는 거니까. 그래서 너무 마음이 놓이네요.”
“아니, 별로. 허세였어.”
“예에~~?”


앨리스는 항상 그렇듯 별 망설임없이 즉답했다.

“지금 내 ‘불의마법’으로는 무리일걸. 자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현재 수준을 냉정히 보지 못하면 그냥 만용이지.”
“앗… 그러면…”
“지금으로선 무리라고 했지, 앞으로도 무리일거라고는 안했어. 방법은 하나 있긴 해. 눈앞의 난관을 돌파할 딱 하나의 방법이.”

하지만 대회를 3일 남은 시점에서 극적인 파워업이 가능할까?
앨리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오래오래 생각해봤는데 말야.”
“...”
“눈 앞에 황금램프가 있다고 쳐.
그 램프에 소원을 빌면 날 훨씬, 훨씬 더 강하게 해주는거지.

대신에 램프에 대가를 치러야 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걸 고민했거든.”
“...갑자기 왜...”
“들어봐.
처음엔 굳이 소원을 빌어야 할 정도로 절박하지 않으니 크게 신경쓰지 말자고 생각했지.
그냥 모른척 하면서 지금처럼 지내자고.


하지만 상황이 좀 달라졌어.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괜한 자존심 때문에 계속 모른 척만 할 순 없잖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앨리스.”


앨리스는 먼 산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더이상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결심을 내린 결연한 표정이다.


“이제 와서 코치를 책망하고 뭐하고 하는 것도 시간낭비니까, 뭐라 하지 않을게.”
“저기…”
“뭔 말이냐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알아버렸다는 거야.”

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그건가.
하지만 어디서… 언제… 어떻게...

크라고스같은 새끼도마뱀 따위하곤 비교도 되지 않는 생각의 폭풍이 내 머릿속을 휩쓸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아니, 변명? 그게 맞아?
솔직하게 얘기해야…
하지만 이미 앨리스는 다 눈치챈 것 같은데…
이제와서 솔직해봤자...

그러면 어디서 눈치챈거지? 아, 이건 아까 …

나의 번민에 상관없이 앨리스는 말을 이었다.
사실 더이상 내가 뭐라고 말하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겨우 결심을 내렸어. 그래, 나는 램프에 소원을 빌어보기로 했다는거지, 코치.”
“...”


“날 더욱 더 강하게 해줘.”
“...”
“...라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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