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네번째 대회, 헌팅(1)
드디어 결전의 날, 대회 당일.
우리는 황송하게도 <블루 윙>의 단장 블라우가 직접 모는 고급 세단을 타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선글라스 멋있네요.”
조수석에서 가만히 경치를 구경하다, 문득 블라우가 낀 근사한 선글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애용하는 남성적인 보잉 선글라스.
이 세계에도 레이벤 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멋진 물건을 만드는 회사가 있나보다.
“팔천 골드 주고 샀습니다.”
“...? 부럽네요. 잘 사신 것 같아요.”
뭐지. 자랑하는 건가?
비싼거라고?
“<홍삼 스포츠>가 우승하면, 코치 님에게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예? ...그럴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순수한 칭찬이었습니다.
별 생각없이…”
“그래도 받아주세요. 꼭 이겨서요.”
“크흠…”
본의 아니게 깡패처럼 그거 내놔, 하고 요구한 꼴이 됐다.
저녀석 상당히 절박한 모양이군.
“레이지 단장님께도, 우승하면 제 사비로 홍삼 500박스 사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거 참… 무지 좋아하시겠네요.”
아마도 지금 블라우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이리라.
우리가 이겨서 카이아나를 다시 되찾아줬으면 하고 바라는 생각밖에 없는 모양.
자칫하면 타고 있는 차에 집까지 상품으로 걸 판국이라 난 말을 아끼기로 했다.
뜯어내는 것도 정도란 게 있지. 이쪽이 미안해질 지경이야.
***
이번 <헌팅>대회의 전장, 콜드란 구 시가지.
역사적 고증대로 충실히 재현해 둔 폐허는 잿더미와 잔해로 가득하다.
이곳에서 수없이 죽어나간 인류 연합군, 그리고 그 적인 ‘유사인류’들의 단말마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 하다.
자욱한 연기로 가리워진, 불그죽죽 하면서 어두운 하늘 풍경까지 충실히 묘사한 디테일은 감탄이 나올 정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잿가루가 그대로 폐 속으로 밀려들어올 듯한, 미세먼지 농도 999㎍/m의 황량한 폐허.
대회의 첫 공식 일정으로 우선 스타팅 포인트 뽑기부터 했다.
시가지 외곽의 원주를 따라 20개의 스타팅포인트가 배치되어있는데, 참가하는 팀들은 그 중 하나를 뽑아야 한다.
당연히 우리가 뽑고 싶은 특별한 포인트도 있기 마련인데…
“으흐흐, 이걸 어쩌나~? 우리가 뽑아버렸네.”
<퍼플 캣츠>의 단장 어노잉이 능글거리며 웃었다.
얼마나 크게 웃는지 입 안 깊숙히 박힌 금니까지 보인다.
‘가장 유리한 곳을 하필 저놈들이 뽑아버렸군.’
팀의 전략에 따라 선호하는 시작지점은 다르겠지만, 놈들의 생각은 나와 비슷한 모양이다.
D-2 포인트. 시가지 서부 언덕 뒷편의 스타팅 포인트.
싸이커, 붕괴장 발생 장치, 이지스, 일명 ‘삼신기’를 전부 노리기 쉬운 위치다.
물론 그만큼 위험 요소도 많다.
한 마디로 상급자용 코스.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헤치며 전진하다 보면, 삼신기 중 적어도 하나는 매우 높은 확률로 가져갈 수 있을 테지.
나도 저기 뽑았으면 했는데…
저 놈들에게 운이 따라주는 건가?
‘천만에! 첫 끗발이 개끗발이다.’
<퍼플 캣츠>의 운은 이번 뽑기에서 다 써버렸을 거다. 그렇고 말고.
난 저주를 퍼부으며 제비를 뽑았다.
우리는 H-1. 의사당 남부 시내의 스타팅 포인트.
‘오 씨발, 우리도 나쁘지 않아. 아니, 상당히 좋은 편이야.’
운에 맡긴 것치고는 제법 괜찮은 포인트를 뽑았다.
일단 다른 스타팅 포인트들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경쟁이 적다. 특히 <퍼플 캣츠>의 D-2와는 정 반대의 위치.
다른 팀과의 쓸데없는 충돌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프리 파밍 코스다.
게다가 의사당 쪽으로 진입하면 삼신기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 개쯤은 기대해볼만 할 터.
나는 뽑기를 마치고 다시 우리팀에게 돌아갔다.
“코치님 어떻게 됐어요?”
“좋아. 잘 뽑은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줬다.
안심하는 우리 선수들.
“휴~ 다행이네요, 코치님.”
“이상한 데 뽑았으면 손가락 부러트릴 뻔 했어, 코치.”
“...”
다들 경기를 앞둔 흥분과 긴장감이 섞인 좋은 표정을 하고 있다.
괜찮은 예감이 든다.
“다같이 화이팅 한 번 하고 들어갑시다.”
우리는 둥글게 모여 가운데로 손을 모았다.
진부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경기 전에 기 살리는덴 이게 최고지.
“하던 대로 하면 우리가 이길 겁니다! 쫄지 마세요. 자, 하나, 둘, 셋…”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스이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다들 다치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해요.”
***
마침내 입장.
구 시가지엔 적막한 전운이 감돈다.
이제부턴 모두 본격적인 대회 모드로 기어를 바꿀 차례.
최전방에서 라비가 주변을 경계하며 침착하게 전진.
뒤에선 앨리스가 언제든지 화력을 퍼부을 수 있도록 보조.
최후방에선 스이나가 플레잉 코치 바디로 변신한 나를 품에 꼭 안고 종종거리며 따라간다.
다들 말이 없다.
어쩐지 전쟁터 한복판에 진입한 용병 부대같은 분위기.
내가 분위기를 조금 풀어줄 요량으로 말했다.
“대회 끝나고 뭐 먹을까요?”
“뭐어?”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돌아봤다.
“...이 와중에 그런 게 중요해?”
“일주일 넘게 <블루 윙>에서 주는 밥만 먹으니까 좀 지겨운 감이 있어서요.”
“참 나....”
맨 앞에서 라비가 말했다.
“고기 먹어요!”
“그거 좋겠다. 라비야. 상금으로 배터지게 소고기나 구워 먹자.”
스이나가 또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그치만… 지면… 라비는… 같이 못 먹을텐데....”
“헉.”
“에이 설마. 아무리 <퍼플 캣츠>라도 석별의 정을 나눌 시간 정도는 주겠지.
설마 그 자리에서 바로 끌고 가겠어.”
“저기~~ 그런 불길한 말 하지 말아줄래? 난 <홍삼> 말고 다른 팀은 안 갈거거든!?”
시덥잖은 대화라도 한 번 물꼬를 트니 조금은 다들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우리는 저 멀리 의사당의 둥그런 모스크형 지붕이 보이는 시가지 골목길을 걸어갔다.
“어, 이거.”
앞장서던 라비가 허리를 숙이고 길가의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저격용 조준경이 부착된 스나이퍼 라이플이다. 탄약도 있다.
[구식 저격총
등급:☆☆
공격력:중상
시대에 뒤쳐진 장거리 저격용 소총.
재장전도 불편하고, 능숙하게 다루려면 오랜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 한 방의 위력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쓸 사람 있어요?”
라비와 앨리스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 중에 딱히 사격술을 훈련한 사람은 없다.
그것도 저격총이라니...
“...저,저요.”
스이나가 의외로 손을 들었다
“스이나 이거 쓸 줄 알아요?”
내가 물으니 “게임에서 자주 쏴봤어요.”라며 눈을 빛내는 스이나.
게임과 현실은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일단 본인이 선호하는 것 같고, 소지 장비에도 여유가 있으니 챙겨두기로 했다.
골목길을 굽이굽이 따라가자 의사당 앞 6차선 도로와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로 통과하면 순식간에 의사당으로 진입할 수 있지만, 개활지는 위험하다.
자칫 수십 명의 적에게 둘러 싸일 수도 있으니.
“미리 정한 대로 옆으로 돌아서 갑시다.”
우리는 광장을 그대로 통과하지 않고, 집과 집을 거쳐 최대한 모습을 숨긴 채 이동했다.
“주택들은 조금 신중히 수색해 보죠. 아직 초반 지역이고, 적도 별로 없으니.
시간 여유도 있고...
여기서 장비를 어느정도 구해 둡시다.”
우리는 작은 집들을 뒤져서 꽤 쓸만한 것들을 몇 개 구했다.
[방탄 조끼
등급:☆☆☆
방어력:중
화기류에 대해 높은 방호력을 제공하는 케뷸라 소재 방탄 조끼.
하지만 충격을 분산시켜 치명적인 피해를 막아줄 뿐 완벽히 무효화하는 건 아니다.]
[공사장 안전모
등급:☆
방어력:하
주로 위에서 떨어지는 작은 공구의 낙하 피해를 막기 위한 헬멧.
없는 것보단 낫지만 본격적인 공격을 막아 줄 정도는 아니다.]
[렉가드
등급:☆☆
방어력:중하
무릎, 정강이, 발등을 보호해주는 하체 방어용 장비.
경량화된 강화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겉보기에 비해 크게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다.]
“어 이거.”
“왜요, 코치님?”
“야구 할 때 쓰는건데.”
“야구가 뭔데요?”
“...아니야. 그런 게 있어. 일단 다 챙기자.”
다음 집에선 드디어 라비의 무기로 쓸만한 걸 발견했다.
[평범한 참격도
등급:☆☆
공격력: 중
기본적인 한손검.
손에 잘 감기는 쓸만한 검이다.
부실한 방어구가 상대라면 방어구 채로 같이 베어버릴 수도 있다.
특수능력:반월 참격]
“검은 라비 쓰고, 방어구는 어떻게 할까요?”
“코치가 정해.
그런거에서 일일이 우리끼리 토론하고 있으면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그러면, 제가 일괄적으로 분배할게요.”
참격도와 렉가드를 라비에게,
방탄조끼는 앨리스에게,
안전모는 스이나에게 장비시켰다.
통일성 없는 방어구 탓에 어째 폭동을 벌이러 뛰쳐나온 과격한 시위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거다.
스이나의 안전모 턱끈을 얼굴에 맞게 조여주고 있는데 가까이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바로 앞인데.”
앨리스가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할까, 코치?”
“...”
난 잠시 생각했다.
분명 괴물이 아닌 인간의 비명소리…
다른 팀이 당한 모양이다.
아직 적들이 우릴 발견한 건 아니다. 피하려면 피해서 갈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 시가지의 중심부와는 한참 먼 초반 지역.
강한 적이 등장하기엔 이른 타이밍이다.
오히려 지금 너무 강하지 않은 적을 쓰러트리며 포인트도 챙기고, 실전감각을 끌어올려두는 편이 좋을지도.
“교전하죠. 한 놈 한 놈이 다 포인트니까.”
“오케이.”
우리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스이나가 날 내려놓고 등에 둘러 멘 저격총에 총알을 한 발 장전했다.
철컥.
그 소리를 신호로 라비가 앞장서 최대한 모습을 숨긴 채 전방을 살폈다.
소곤소곤거리며 우리에게 말하는 라비.
“선수들 한 팀이 쓰러져있어요… 벌써 당했나봐요. 그리고 잡졸 두 명과… 오, 용인 한 명이 있어요.
분명 쟤는 하급 간부… 빛나는 모레노.”
“빛나는 모레노라… 다들 어떻게 상대해야하는지 알죠?”
내가 묻자 라비와 앨리스가 즉각 대답했다.
“괴광선 주의. 직접 마주보면 일시적 시력 손상에 정신 혼란 걸려요.”
“주 무기는 촉수 채찍. 별 거 아냐.”
“좋습니다. 너무 큰 소음을 내고 싶지 않으니 앨리스는 화염폭풍보다 화염창으로 공격하세요.”
“알았어.”
내가 수신호를 보냈다.
손가락 세 개를 들고 하나씩 접어나간다.
내 손가락이 다 접혔을 때 라비가 벼락같이 대쉬하며 튀어나갔다.
최우선 목표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추한 잡졸 하나.
서겅-!
놈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타이밍에 가해지는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참격도의 제물이 된다.
오른 쪽 어깨부터 대각선으로 옆구리까지 상쾌하게 베어버리는 라비.
이러면 이제 앨리스와 ‘빛나는 모레노’ 사이 일직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사라진다.
흡사 장기에서 포包의 공격 조건이 충족된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기습에 힘입은 일방적인 노마크 공격 찬스.
“이거나 먹어.”
앨리스의 손 위에서 이글거리며 대기중인 화염의 창이 그대로 쏜살같이 날아가 모레노의 어깨죽지를 꿰뚫었다.
작은 촉수가 쉴새없이 벌름거리는 기괴한 안면을 한 용인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용들의 언어를 알아듣는 재주는 없지만 녀석이 미친듯이 질러대는 괴성은 아마 욕이 아닐까.
분위기상 그래보인다.
모레노가 우리를 돌아보며 분노에 찬 시선을 번뜩인다.
놈의 괴광선은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풀컨디션 상태에서만 쓸 수 있다.
지금처럼 고통과 분노로 정신이 흐트러진 상황에선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면 모레노가 반격으로 가할 공격은 하나.
“촉수 조심!”
가시가 빼곡히 도드라진 여섯 개의 촉수가 앨리스가 방금까지 서 있던 지면을 피아노 건반 두드리듯 난타했다.
바닥의 보도블록이 박살나고,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치만, 너무 예상대로라 감흥이 없는걸.
앨리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뒤로 두 발짝 물러나 가볍게 회피.
탕-!
그 사이 스이나가 침착하게 남은 잡졸 한 놈에게 사격을 가했다.
...빗나갔다.
맞췄으면 굉장히 멋있었을텐데. 아쉽다.
스이나는 투덜거리며 총을 내려놓고 즉시 ‘염동력’을 사용했다.
“쟤는 아마, 뇌...정도면 될 것 같아요.”
스이나의 눈이 초록색 안광을 발하며 빛나자 잡졸이 눈을 허옇게 뒤집고 경련했다. 입에서 거품이 뽀글뽀글 흘러나온다.
그러다가 버둥대던 손발이 천천히 멈추고 그대로 행동 정지.
개사기인데?
시뮬레이션에서도 느꼈지만 스이나의 염동력은 양민학살에 최적화된 기술이다.
저런 피래미들은 저항할 방법이 없다.
촉수가 앨리스를 쫓아가는 동안 라비는 시야의 사각을 노려 빛나는 모레노의 품 안 깊숙이 접근했다.
써걱-!
참격도가 모레노의 배를 꿰뚫고 척추뼈를 부수며 등으로 튀어나온다.
이번엔 베기가 아니라 찌르기.
라비가 즉시 검을 뽑자 피보라와 함께 내장 육편이 줄줄 흘러나온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크샤아아…!!”
용인이 걸레짝이 된 배를 움켜쥐고 한 팔과 다리, 심지어 머리까지 전부 촉수로 변형시켰다.
도합 24개, 아니 25개인가. 정확히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촉수줄기.
라비의 퇴로를 차단하며 먼지 털듯 마구 내리칠 생각이다.
이것도 이미 사전에 알고 있었다.
놈의 발악 패턴.
아는 것이 힘이라고, 처음 보면 당황했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겐 답을 아는 기출문제에 불과하다.
“학습능력이 없구나. 용인.”
그 촉수들이 채 공격 자세로 들어가기도 전에, 앨리스의 두번째 화염창이 용인의 배에 날아와 꽂혔다.
라비가 방금 전 헤집어 놓은 그 부위에 핀포인트로.
빛나는 모레노의 입에서 불꽃의 숨결이 토해졌다.
벌려진 입으로 불길이 훅훅 새어나왔다.
브레스일까?
아니다. 놈에겐 브레스를 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저 뱃속에 뻥 뚫린 구멍을 통해 화염창의 불길이 목구멍까지 역류한 것뿐이다.
용인은 더이상의 저항을 멈추고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후우… 나이스, 앨리스, 나이스, 스이나.”
“별 거 아니네. 쉽다 쉬워.”
첫 전투가 성공리에 끝났다.
하급 간부 한마리에, 부하 두 마리 처치. 총 120포인트나 획득했다.
이쪽은 피해도 전혀 안 받았다.
출발이 아주 좋다.
현재 상황판을 띄워 확인해보니 벌써 3등까지 치고 올라간 우리 <홍삼 스포츠>.
‘그런데 세 팀이나 탈락했네.’
한 팀은 모레노에게 당한, 우리 앞에 쓰러져있는 선수들이겠지.
30분도 채 안지났는데 벌써 세 팀이 탈락하다니.
생각보다 경기의 페이스가 꽤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