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네번째 대회, 헌팅(3)
성공적인 첫 전투로 몸이 풀린 우리는 몇 번의 교전을 반복하며 의사당으로 서서히 전진했다.
하급 간부를 가뿐히 처치한 덕에 자신감을 얻어서일까, 평범한 잡졸들 상대로는 굳이 전력을 다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만 토벌 난이도는 별 거 아니지만 도륙하는 과정이 굉장히 불쾌하다는 것이 조금 흠이다.
마약 중독자의 환각 속에서 비집고 나온 듯한 기괴한 괴물들의 핏물과 육편을 계속해서 마주하니 어쩐지 현실 감각이 흐려지는 기분.
정신 건강에 안좋은 스포츠다.
“일반 부하 7명 처치. 이걸로 45포인트 또 얻었네요. 총 252포인트… 좋습니다.”
“코치, 지금 1등이 누구야?”
“흠… <퍼플 캣츠>요. 그치만 저희하고 크게 차이는 안나요. 그쪽은 275포인트.”
우리 <홍삼 스포츠>는 2등 <굿보이 댕댕스>에 10포인트 뒤진 3등을 유지하고 있다.
포인트 증가폭으로 미루어 볼 때 모두 크라고스는 커녕 최고간부조차 쓰러트리지 못한 모양이다.
“힘내서 팍팍 가자구요~~!”
라비가 주장답게 으쌰으쌰 힘을 북돋아줬다.
지도를 확인했다.
현재 우리가 위치한 곳은 시가지 내 제국 의사당 입구.
여기서부터는 또 어디로 가야 할 지 선택지가 갈린다.
최종 목표인 크라고스는 고정적인 출현 위치가 정해져있지 않지만, 그래도 시내 중심부 - 시청, 재판소, 상인 길드 근처에 높은 확률로 등장한다는 것이 중론.
적어도 그 근처에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확률이 높다.
우리 눈 앞에 있는 의사당을 지나가면 바로 위치한 지역이다.
이제부터 몸풀기는 끝났고 본 게임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지.
다만 이 의사당을 수색하고 가느냐, 아니면 무시하고 빠르게 지나치느냐 여기서 판단이 나뉜다.
“어떻게 할까요?”
내가 물었다.
코치지만 선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정하면 안되니.
“아직 남은 시간이 촉박한 건 아니지?”
앨리스가 말했다.
지금의 짜투리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눈을 감고 반가부좌를 틀고 있다.
마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명상 자세.
“예. 그건 괜찮아요.
문제는 의사당이 공략하기에 조금 난이도가 높은 지역이라는 거예요.
간부들 출현률도 높고...
대신 좋은 아이템 고정 스폰 장소가 세 개나 있지만... “
“그러면 최대한 찾아볼 수 있는 만큼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어?”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하는 앨리스.
호전적인 성격인 그녀에겐 당연한 판단이리라.
“애초에 도망치고, 또 도망쳐서 최후의 한 팀이 되면 우승하는 대회가 아니잖아.
적극적으로 적을 찾아다니고 처치해야 해. 그래야 포인트를 많이 쌓을 수 있으니까.”
“그건 그래요.”
“그리고 어차피 크라고스를 쓰러트리기 위해 참전한건데,
그보다 약한 녀석들에게 벌벌 떨며 피해다녀서야 우승은 엄두도 못내지.
내 말 틀린가?”
그것도 맞는 말이다.
앨리스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정론이다.
아무리 도망쳐봐야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하던가…
결국 어떤 대회건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면 승리를 노릴 수 없겠지.
“...그리고…”
“예, 스이나. 말씀하세요.”
스이나도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저희 장비, ...부실해요.”
“맞아! 코치님, 저는 검은 괜찮은데 방어구가 이 이상한 다리 보호대밖에 없다구요.”
라비가 발 끝으로 렉가드를 톡톡 차며 말했다.
어째 돈이 없어 보호 장비를 다 마련하지 못한 사회인 야구단의 포수같다.
그래, 기껏 다른 팀과의 경쟁을 피할 프리 파밍 루트를 골랐는데, 제대로 파밍해두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나는 마음을 정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당 수색하고 가는 걸로 합시다. 수색 포인트는 다 알고 계시죠?”
“응.”
“여기는 장비가 들어있는 박스가 눈에 잘 띄니까 꽤 찾기 쉽습니다.
대신에 넓은 의사당 내부엔 적들이 잠복할만한 기습장소가 엄청 많으니 그건 꼭 주의하면서 갑시다.
자, 움직이죠.”
우리는 짧은 휴식을 끝내고 다시 일어섰다.
폭격으로 반파된 의사당의 정문.
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부서진 잔해를 넘어 안으로 진입했다.
***
의사당 내부는 어둡고 조용하다.
황폐화된 건물에 아직도 전기가 들어온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지.
간간이 부서진 벽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깥의 빛을 조명으로 삼아, 우리는 내부를 수색했다.
“오옷!? 이거 좀 보세요!”
라비가 창고에서 장비를 찾아냈다.
[가보 갑주
등급:☆☆☆☆
방어력: 중하
이국의 민족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갑옷과 투구의 세트.
습한 기후에 대비하기 위해 빈틈없이 옻칠을 해뒀다.
방어력은 시원찮지만, 가문 대대로 이어져 온 이 갑옷엔 기이한 원념이 서려있다.
특수능력: ‘보복’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상대에 한해 공격력이 1.5배 상승합니다.]
마치 풍뎅이나 노린재의 껍데기같이 생긴 갑옷세트다.
투구에 달린 기다란 뿔, 그리고 어깨를 보호하기 위한 사각 판떼기가 인상적이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 자주 나오는 그거구만.’
“근데 영 입고 다니기 불편해보이는데요.”
“그러게. 난 안 입을래.”
앨리스는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는지 즉시 패스했다.
스이나도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아이템 분배 결정은 내가 전적으로 맡기로 했지.
“그러면 라비가 입어야겠네.”
“예? 저요?”
“안 입는 것보단 그래도 방어력이 오를 거 아냐. 게다가 우리 팀중에 적에게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맨 앞에 선 라비니까.
특수능력을 활용하려면 어쩔 수 없어.”
“힝…”
라비는 내키지 않아 했지만 군말은 하지 않았다.
이 갑옷은 또 골치아프게 혼자선 입고 벗기도 힘든 까다로운 구조다.
앨리스와 스이나가 무사의 시중처럼 갑주를 입혀주자 라비의 몰골은 몹시 괴상해졌다.
“어때요?”
“음… 어디서 주운 장비만 둘둘 착용한 초보자같아.”
“...”
실제로 미적인 센스는 고려하지 않고 주운 장비 그대로 갖다 입히고 있으니 별로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그래도 ☆4개급 장비니 분명 도움은 되겠지. 지금은 외관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의사당 안의 수많은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가끔 잡졸들이 우리를 기습하기도 했다.
유령의 집마냥, 튀어나올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는 그 때마다 일일이 놀랐다.
갑자기 구석에서 숨어있다가 깜짝깜짝 놀래키니 안 놀랄 수가 없는 노릇.
그래서 그 대가로 놈들을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처참한 변사체로 만들어주었다.
기습이니만큼 따로 떨어져서 행동하는 외톨이들의 산발적인 테러에 불과하다.
잘 갖춰진 조직적인 공격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생각보다 위협적이진 않다.
[수리검 - 20개 들이
등급: ☆☆☆
공격력: 중
들고 찌르든, 던지든 어떻게 써도 유용한 날카로운 암기입니다.
숙련자가 사용하면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패딩
등급:☆
방어력:하
오리털로 가득 채운 겨울용 옷.
보기에는 두툼해보이지만, 방어력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하지만 520 필파워를 자랑하는 방한성능은 탁월.]
[야간 투시경
등급:☆☆☆☆
보조장비
이걸 통해 주위를 보면 어둠을 뚫고 사물을 선명하게 관측할 수 있습니다.
건전지를 통해 전력을 공급받으며, 작동시간은 두시간 반이 한계입니다.]
“전부 다 스이나에게 주겠습니다.”
라비와 앨리스에겐 썩 어울리지 않는 장비들이다.
수리검은 스이나가 수련한 무기고, 패딩은… 그냥 입고 다니라고 하고,
야간 투시경은 쓸만하다.
괜찮은 장비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좋은 장비가 고정적으로 뜨는 스폰장소에서 ☆4개 짜리 아이템을 두 개나 얻은 것은 확실히 기분 좋군.
우리는 마지막 고정 스폰 장소로 향했다.
의사당 본회의장.
벨벳으로 고급스럽게 장식된 큰 문이 잠겨있다.
“좋지 않은데요.”
“왜요, 코치님?”
“...여기만 문이 잠겨있어요. 지금까지 의사당 안의 다른 방들은 전부 문이 열려 있었거든요. 안의 누군가가 일부러 잠가놓았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다.
안에서 불운한 침입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러면 굳이 들어가지 않고 지나가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에이, 코치.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까지 와놓고. 라비, 앞장서.”
앨리스는 언제든지 ‘불의마법’을 쓸 수 있도록 손에 이글거리는 마력을 응집시켰다.
라비가 문 손잡이를 잡았다.
덜컹 덜컹.
잠겨있어서 그냥은 열리지 않는다.
라비가 한 쪽 어깨를 빙빙 돌리며 몸을 풀었다.
“열쇠도 없으니 여기선 조금 거칠게 갈게요.
실례합니다~”
쾅!
라비가 달려가며 있는 힘껏 어깨로 들이박자 잠금장치가 박살난 문이 활짝 열렸다.
본회의장 안에 있던 용인과 기타 흉물들이 일제히 우리를 돌아봤다.
수가 제법 많다. 한 20명 정도는 될까.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들 증 가장 규모가 크군.
“여기서 다들 뭐하고 있었대? 올해 예산안이라도 정하고 있었나?
‘화염폭풍’... 불지옥!”
앨리스가 인사 겸 성대한 환영 축포를 터트렸다.
자칫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만큼 요란하게 흔들리는 본회의실.
라비와 스이나 모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섬광과 열기가 넓은 홀을 가득 채웠다.
‘불의마법S’로 강화된 화염폭풍의 최대 범위 공격은 화염내성이 있는 용인들이라 할지라도 무사하기 힘든 강렬한 데미지를 선사한다.
영문도 모르고 폭풍에 휘말려 이곳저곳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적들.
불길이 가라앉자 놈들이 일어나기 전 라비가 땅에 떨어진 이삭 줍듯 신속히 목을 베었다.
동시에 스이나는 한 명 한 명 신중히 ‘염동력’으로 확인사살을 가해 혹시라도 있을 불상사를 방지했다.
“저 안에, 황금 박스 맞지?”
앨리스가 먼저 눈치채고 본회의실 가장 안 쪽, 의장석에 위치한 박스를 가리켰다.
두 개의 장비 박스가 놓여있다. 그 중 하나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흐르는 황금빛 박스다.
“대박!!”
라비가 반짝이는 금붙이에 매료된 까마귀처럼 천천히 황금 박스로 다가갔다.
전투는 끝났으니 보상을 확인할 시간이라고 판단한 건가.
그렇지만…
‘근데 이 정도 규모의 무리에, 황금 박스까지 있는데, 하급간부조차 없다고?’
뭔가 이상하다.
강렬한 위화감이 든다.
모든 배우가 갖춰진 무대 위에 정작 주인공이 빠진 느낌.
스끼다시만 주워먹고 참돔회는 안 나온 느낌.
“라비, 잠깐만…”
“위!!!”
앨리스가 별안간 벼락같이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본회의실의 천장을 향했다.
언제부터 저기서 기다리고 있던 걸까.
거미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9개의 새빨갛고 요사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흉물.
용도 아니고, 용인도 아닌 불경한 존재.
되다만 용.
크라고스의 용군단 3인의 최고 간부 중 하나, ‘기어다니는 포이스’다!
“....조심해! 포이스야!!”
“라비, 이쪽으로 와요!”
거미와 용, 용인의 기괴한 융합체인 놈은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여러 개의 혀를 낼름거렸다.
끔찍하게도 놈의 입은 얼굴 뿐 아니라, 가슴, 배, 등, 어깨에도 있다.
신이 있다면 이런 생물을 창조한 신은 분명 지독한 악취미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심장이 격렬히 뛰기 시작한다.
라비, 앨리스, 스이나 모두 마찬가지리라.
“여기서 최고간부가…!”
“이미 늦었어. 맞서 싸울 수 밖에.”
우리의 전율을 전투개시 신호로 받아들인 건지 포이스가 여러 개의 입, 혹은 아가리 구멍들을 일제히 벌리고 끔찍한 포효를 부르짖었다.
크오오오오-!!
포효는 단지 위협용만이 아니다.
호랑이나 사자같은 고양잇과 최상위 포식자가 그러하듯 저 포효엔 가슴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초저주파가 섞여있다.
생물이라면 본능적으로 근육이 경직되고 사고가 둔해진다.
놈의 포효 탓에 우리의 대처가 늦은 사이 포이스 몸 이곳 저곳의 아가리 구멍에서 역겨운 초록색 분비물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라비야 피해!”
귀를 감싸쥐고 있던 라비가 내 외침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수액들을 피했다.
수액이 닿은 돌바닥이 연기를 내며 녹아내린다.
포이스의 특기, 산성 수액.
직접 닿는 것도 위험하지만 이 기술의 진면목은 따로 있다.
수액과 뒤범벅된 잔해가 뭉실뭉실 형태를 갖추더니 산성 슬라임이 되어 느릿느릿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래서 수액을 맞는 것도 문제지만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이거 자칫하면 끝도 없이 늘어나겠는걸.”
“장기전은 불리해.”
수액 한 방울이라도 튀면 치명상.
그렇다고 시간을 끌고 기회를 노리면 결국 수액에서 생겨난 슬라임들이 본회의장을 가득 메울 것이다.
결국 사방에서 몰려오는 슬라임에 둘러싸인채 게임오버.
더욱이 절망적인 건 슬라임들은 화염공격을 가하면 오히려 두 배로 분열한다는 것이다.
“작전을 내리죠.”
초조한 상황이지만 그럴수록 더 침착해야지.
내가 억지로나마 쥐어짜낸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라비와 앨리스가 나를 돌아봤다.
“오래 끌면 답이 없어요. 동시에 모든 화력을 집중합시다.
먼저 스이나, 염동력으로 포이스를 최대한 제압해보세요. 직접 몸에 안통하면 주변 지형을 이용해서라도요.”
끄덕.
스이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이스의 행동이 멈춘 틈에 라비와 앨리스가 공격합니다.
라비, 참격도의 ‘반월 참격’으로, 다가가지 말고 멀리서 놈의 몸을 노려.
앨리스도 ‘화염창’으로 마찬가지로.
두 방 동시에 가능해요, 앨리스?”
“해볼게.”
“좋습니다. 스이나, 바로 시작해요!”
그 잠시 동안 말하는 사이에도 슬라임이 몇 배나 더 증식해있다.
퇴로를 막고, 사방을 둘러싼 채 우리의 주변을 시시각각 조여오는 걸 보니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스이나가 배에 힘을 준 후 외쳤다.
“여….염동력!!”
순간 포이스가 온 몸을 비틀며 괴로워한다.
공격이 먹히고 있는 건가?
놈의 근육 이곳저곳이 걸레 짜는 것 마냥 무자비하게 멋대로 비틀렸다.
하지만 최고간부답게 이것만으론 끝나지 않을 모양이다.
곧 포이스가 온 몸을 부들거리며 천천히 스이나의 염동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게 보인다.
“곧… 곧 풀려나요…. 이제 무리…”
이번엔 스이나가 무릎을 후들거렸다.
흡, 하고 심호흡을 하며 마지막 힘을 짜내 다시 염동력을 가하는 스이나.
몸의 통제권을 되찾아가는 포이스가 별안간 양 팔을 쭉 벌리고 포옹이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로 변했다.
머리, 목, 가슴, 배, 어느 급소라도 골라서 때려줄 수 있는 절호의 오픈 찬스.
최고다, 스이나!
“지금이야!”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라비가 참격도를 크게 휘두른다.
참격도에서 뿜어져나가는 면도날같은 예리한 검기!
참격도의 특수능력, ‘반월 참격’이다.
이거라면 산성 수액이 튈 것을 걱정하지 않고 멀리서 한 방 먹일 수 있다.
거기에 앨리스의 ‘화염창’이 2발 연속으로 포이스에게 날아갔다.
크오오오….크그극!!!
반월 참격과 화염창이 동시에 작렬한 포이스의 거대한 육체는 그대로 천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초록색 수액에 섞여 피보라가 솟아오른다.
좀 뒈져…!
내 기원에도 불구하고 포이스는 죽지 않았다.
최고간부답게 맷집이 장난 아니다.
우리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을 총동원했는데 이걸로도 안죽다니.
하지만 분명히 큰 타격은 준 모양이다.
포이스의 몸 가득한 아가리에서 수액과 피의 역겨운 혼합액이 줄줄 흐른다.
놈이 두 주먹을 힘껏 쥐고 공중으로 치켜들었다.
“발악 패턴…! 바닥!!! 피해욧!!!!”
“어, 어, 어…?”
데미지를 심하게 입었을 때 시작되는 ‘기어다니는 포이스’의 발악 패턴, 지면 강타.
우리를 다 죽이거나, 아니면 지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수액범벅이 된 바닥을 두들기며 끝없이 난동을 부리겠지.
이것도 사전에 숙지한 패턴인데…
그런데…
“어, 바닥이, 저기, 코치님…!”
지금 바닥은 놈이 뿌려댄 산성 수액 탓에 온통 물렁물렁한 슬라임으로 변했거나, 변해가는 중이다.
이 바닥을 포이스가 있는 힘껏 내리치면 어떻게 되는거지?
포이스가 본회의장에서 나타날 줄 예상치 못한게 문제였다.
의사당은 지하에 거대한 지하수도가 흐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반이 얇다.
거기에 온통 수액으로 돌바닥을 액화시킨 탓에, 지금 본회의장은 저 ‘지면 강타’에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콰광-!!!
단 일격으로 바닥이 통째로 박살나며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버렸다.
“코치님…!”
라비도, 앨리스도, 스이나도, 나도 낙하한다.
벽에 들러붙은 포이스를 제외한 모두가 발을 디디고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라비야, 앨리스 데리고 다시 올라가!”
라비가 고개를 끄덕인 후 떨어지는 낙하물을 밟고 점프하며 위로 올라갔다.
게임의 한 장면 같군.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스이나에게 날아갔다.
“스이나, 염동력으로 낙하산…! 낙하산을 이미지하세요!
최대한 떨어지는 충격을 줄일 수 있도록…!”
“...”
어쩔 수 없이 난 스이나와 같이 밑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겠다.
나도 날아갈수야 있지만 이러면 지하 밑에 스이나 혼자 남겨지고 만다.
포이스는 위로 탈출한 라비와 앨리스에게 맡기자.
저쪽도 걱정이지만…
어두운 지하 밑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우리가 걱정해 줄 입장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