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대회 후(2)
신중히 고민한 후 다음 스폰서를 정했다.
피로 회복 드링크가 주력상품인 제약회사, <부스트 제약>.
일단 다른 기업들과 달리 우리 팀에 무리한 요구사항을 강요하지 않는 점이 좋았고,
지원 금액도 괜찮았다.
우리 팀 선수들의 급료 문제는 이제 이걸로 완벽히 해결된 셈이다.
적어도 스폰서와 계약 해지 하지 않는 이상 <굿보이 댕댕스>처럼 선수급료를 지불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터.
물론 그것만 보고 선택한 건 아니다.
제약회사답게 우리 훈련장에 체력 회복 시설, 부상 치료 시설을 설치해준다는 통큰 제안!
<블루 윙>의 회복시설을 보며 우리 팀에도 이런거 있었으면 하고 무지 부러웠는데, 이게 웬 떡이람.
프리저 군단의 외계인들이 이용할 법한 거대한 공 모양 캡슐이 훈련장 한 쪽에 설치되었다.
사이버펑크틱한 디자인. 들어가서 한 시간 정도 몸을 푹 담그고 있으면 어지간한 부상과 피로는 전부 회복된다고 한다.
<부스트 제약>의 제안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놀랄만한 마지막 제안.
“저희도 놀랐습니다. 회장님 친척 분이 소유한 임야 바로 앞에 <홍삼 스포츠>팀 훈련장이 있다니…”
“회장님 친척이요?”
“예. 그 분도 씨엔나에 사시는데, 보유하신 땅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훈련장 뒤, 저기 보이시죠, 저 산도 그 분 거라는 거죠.”
“세상에…”
매일 같이 훈련장을 이용하면서 본 뒷산이, 주인 있는 산이었구나.
새로운 발견이다.
<슈퍼 제약>의 담당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저런 산이 다 그렇지만, 막상 갖고 있어도 지금 당장 어떻게 쓸 일은 없지요.
그래서 말인데, <홍삼 스포츠>에서 편한대로 쓰셔도 됩니다.”
“예? 산을요?”
“그렇습니다. 이미 회장님 친척분과도 다 얘기가 된 일입니다.
<부스트 제약>에서 지원하는 팀에서 마음껏 활용해준다면 기쁘겠다고 전해달라시더군요.
거기서 개발을 하든, 훈련장을 만드시든, 아니면 가끔 휴양용으로 쓰시든… 수익을 내셔도 괜찮습니다. 마음대로 써주세요.”
“오… 그러면야, 마다할 이유가 없죠.”
산이라…
딱히 지금은 특별한 활용법이 떠오르진 않는다.
하지만 어찌됐건 우리 훈련장 부지보다 몇 배, 몇십 배 넓은 땅.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겠지.
***
“그렇게 됐습니다.”
정기적인 팀의 근황 보고.
훈련장 뒷산의 이용권을 얻었다는 말에 가장 기뻐한 건 레이지 아재였다.
“이야~~~ 기가 막히는구만. 트래쉬 군, 잘했어.
개인적으로는 <드림 리얼리티> 때보다 더 기쁜데?”
“그래요? 단장님 뭐 좋은 아이디어 있으세요?”
“인삼 키워야지.”
“흠…”
역시 개인 사업을 하는 아재답게 나와 달리 바로 돈 나올 구멍을 찾아낸다.
인삼이라. 그것도 괜찮겠다.
어찌됐든 팀의 수익으로 연결될 껀수가 생겼으니.
“인삼 뿐이겠어? 나무도 심어서 팔고, 휴양지도 만들고… “
아재는 벌써 대박의 예감에 젖은 눈으로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앨리스도 한 마디 얹었다.
“런닝 코스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아, 코치.”
“오, 좋네요 그거.”
“공기 좋은 산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만들면 꽤 기분좋게 달릴 수 있겠어.”
햇볕이 반짝이는 파란 하늘, 키 큰 나무 아래로 탱크탑을 입은 채 달려가는 앨리스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큼하고 무지 예쁘겠지.
스포츠 용품 CF의 한 장면같을 거다.
“뭐야, 코치. 또 음흉하게 혼자 웃고 있어.”
“아, 아닙니다… 라비는 뭐 좋은 생각 있어?”
침을 닦으며 라비한테 물었다.
“동물들 키우는 건 어때요? 양, 돼지, 닭…”
“아이디어는 좋지만…
동물을 키울거면 누가 지속적으로 관리해줘야 하잖아. 너가 할거야, 라비야?”
“아니요!”
너무 당당하게 얘기하길래 어이가 없었다.
“그럼 누구보고 키우라고.”
“음… 단장님이 인삼 키우면서 같이 돌봐주시지 않을까요?”
레이지 아재가 난처한듯 웃었다.
“굳이 우리가 더 데려다놓지 않아도 산에는 이미 동물들이 많이 살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네, 라비 양.”
“그런가요?”
이쯤에서 정리해볼까.
“좋습니다. 그러면 특별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훈련장 뒷산은 단장님의 인삼 재배지로 우선 쓰도록 할게요.
그리고 차후에 등산로를 정비해 최종적으로는 훈련 코스로 재개장하도록 합시다.
운동시설도 갖춰놓고요. 이상!”
모두 적당히 만족한 표정이다.
***
다음 대회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고, 지금은 간만에 꽤 여유있는 시기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빚 변제도 잊지 말아야지.
나는 커피숍에서 스텔라를 기다렸다. 평소엔 맨날 스텔라 쪽에서 빚을 받으러 왔지만, 이번엔 내가 먼저 갚기로 했다.
맨날 생각지도 못하게 돈을 뜯기는 기분이 싫어서.
딸랑~
문이 열리고 스텔라가 들어왔다.
아무리 악마같은 빚쟁이 여동생이라고 해도,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두리번거리면서 지인이 어디있나 찾는 건 똑같구만.
조금, 아주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내가 손을 들자 스텔라가 알아보고 다가왔다.
웨이브펌을 새로 한 모양이다.
은은한 에메랄드 빛 머리칼과 잘 어울린다.
“웬일이야…? 네 쪽에서 갚는다고 부르다니. 복권 당첨이라도 됐니?”
“저는 스텔라씨의 특별 우수채권이니까요. 일반 채무자들하곤 다릅니다.”
“후후… 자신감이 생긴 걸까, 아니면 조금 건방져진 걸까… 뭐, 좋아.”
“일단 앉으시죠.”
젠틀하게 의자를 꺼내줬다. 스텔라가 잠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 의자에 우아하게 앉았다.
“바쁘신가요?”
“별로?”
“그럼 커피 한 잔 정도는 괜찮으시죠?”
“...그래.”
“뭘로 하실래요?”
스텔라는 고개를 돌리고 카운터 위 손글씨로 적힌 메뉴판을 주시했다.
“블랙 커피.”
“알겠습니다.”
쓴 거 좋아하나? 딱 어울리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일어서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시나몬 돌체라떼. 연유랑 휘핑크림 많이 올려서. 아, 치즈케잌도 한 조각.”
“...블랙 커피는요?”
“그건 네 꺼야.”
“예?”
왜 내가 마실 걸 니가 정해?
어이없다는 마음이 내 얼굴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나보다.
스텔라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었다.
“...난 원래 남이 마실 음료까지 정해주는 걸 좋아하거든.
그것도 나라면 절대로 안 고를, 내 취향의 정반대를 골라주는 게 특히 좋아.”
“...”
악취미가 따로없군.
“싫으면 굳이 안 마셔도 돼, 트래쉬.”
“아닙니다. 일부러 골라주셨는데 한번 시도해볼게요.”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친 후 진동벨을 가지고 돌아왔다.
스텔라는 작은 다이어리를 꺼내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말고도 수많은 불쌍한 채무자들의 이름이 저기 적혀있겠지.
“그래, 우승 축하해. 이번 대회도 꽤 흥미롭게 지켜봤어.”
“감사합니다.”
“변제한다고 부른거지? 일단 일 부터 처리할까.”
나는 십만 골드가 담긴 자루를 내밀었다.
스텔라는 따로 세어보지 않고 백 안에 바로 넣었다.
“훌륭하네. 트래쉬가 내 고객 중에 제일 성실한 사람인 건 확실해.
나름대로 신뢰도 쌓였어.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스텔라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내 눈을 바라봤다.
“애초에 왜 이렇게 빚을 많이 진거야, 너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내 몸의 원 주인은 대체 뭔 수로 백만 골드도 넘는 빚을 진걸까.
나도 궁금하다.
“지금 보면 딱히 빚을 질만큼 무능한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정말 흥미롭네.”
“...”
“어쨌든, 빠른 페이스로 성실하게 잘 갚고 있으니… 다음 변제 기한은 알아서 정해.”
“...예?”
“더이상 재촉하지 않을거란 얘기야. 대신 내 신뢰를 배신하지만 마. 알겠지?”
뭐지?
얘가 늦더위를 먹었나? 왜 이래?
“혹시 이것도 제가 모르는 제3금융권의 테크닉인가요?”
“무슨 말이야?”
“안심하게 해놓고 두 배 세 배로 더 불려서 드시려는… 계약서에 숨겨진 이면 조항이...”
“참, 순수한 호의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니 유감이네.
그러면 됐어. 다다음 주까지 이십만 골드.”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싱겁기는.”
진동벨이 울렸다.
커피를 가지러 가며 머리를 굴렸다.
쟤, 전부터 느낀거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가 꽤 부드러워지지 않았나?
어쩌면 내게 호감이 생겼다고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마치 열혈 소년만화처럼… 개심한 악역?
뭐 그런거 일수도.
뜨거운 스포츠인들의 동료애에 감동받아, 자기도 그 일원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해진거지.
시나몬 돌체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스텔라는 만족한 눈치였다.
“역시 단 게 좋아. 그치, 트래쉬?”
“음… 예.”
‘단 게 좋아’는 개뿔.
내껀 쓰디 쓴 블랙커피지만…
농축한 한약을 마시는 느낌이다.
이런 걸 왜 내 돈주고 사 마셔야 하는거지?
죽기 전까지 다시는 블랙 커피를 마시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쓰디 쓴 커피를 마신 덕에 눈가에 힘을 준 진지한 표정이 자연스럽게 잡혔다.
“저기… 스텔라 씨.”
“응?”
“저희 팀에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
스텔라가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듯한 얼굴을 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스텔라 씨, 어쩌면...
스포츠에 관심이 생기신 거 아닌가요?
사실은 어둠의 세계에 질려버리신 거 아닌가요?
동료들과의 전우애, 가슴 뜨거운 노력과 결실… 사실 스텔라 씨의 마음이 이끌리는 건 이 쪽이 아닌지…”
“뭔소리야? 착각도 유분수지.”
냉정한 반응.
음, 잘못 짚었나.
혼자 오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건방져졌구나, 트래쉬.”
“...”
“난 네 콜렉션의 일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걸.”
“코...콜렉션이요?”
스텔라가 케이크의 끝 부분을 포크로 뭉개며 말했다.
“24시간까지는 아니지만, 난 꽤 많은 시간 널 지켜봤거든…
네가 너희 팀의 유능한 선수들과 놀아나는 거, 모를 거라고 생각해?
라비 선수와 재미있게 노는 것도…
앨리스 선수와 호텔에 드나든 것도…
그치?”
“...”
“영웅호색이라는 말도 있지. 뭐라 할 생각은 없어. 남자가 계집질 좀 하는 거, 한 두번 본 것도 아니니.
사람마다 즐겁게 사는 방법은 다양하니까.
헌데, 나까지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얘기가 다르지.
너와 같은 침대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말야...
거절할게, 네 히로인 4호가 되는 건.”
할 말이 없다.
내 속마음을 낱낱이 드러낸 것 같아 수치심에 얼굴이 벌개진다.
“아하하, 귀엽네.
트래쉬, 혹시 내가 널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한거야?”
“...”
“아니면… 네가 날 마음에 두고 있던건가?
저기,어느 쪽이야?”
“...”
수치플레이가 따로 없다.
그...그만!!
스텔라는 이 정도 놀린 걸로 충분히 만족했는지 더이상 말하지 않고 커피와 케이크를 음미했다.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불편한 시간이 잠시 흐른 후, 그녀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치만 스포츠에 관심이 생긴 건 맞아.”
“...그런가요.”
“응. 네가 말한 뜨거운 노력이니 그런 쪽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혹시 지하 스포츠라고 들어봤어?”
“지하...스포츠요?”
처음 듣는 얘기다.
“그래. 같은 스포츠지만… <홍삼 스포츠>가 활동하는 대회들과는 천지차이지.
말 그대로 하늘과, 지하…
일반 만능 스포츠가 선수들의 공정한 경쟁을 추구한다면,
지하 스포츠는 태생부터 도박과 폭력을 위해 만들어진 거야.
잔인하고, 자극적이고, 말초적이고… 거액의 돈이 하룻밤 사이에 몇번씩 주인을 바꾸지.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빠르려나.”
“그거 참…”
재밌겠네요, 라고 말하려다 나는 말을 삼켰다.
그래도 전생 포함 몇십 년을 양지의 건전한 체육인으로서 살아온 내가,
그런 지하 유희에 흥미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서다.
“우리 오빠, 알지?
메이슨.
요즘 잘 안풀리는 모양이더라고.
지하 스포츠 팀 하나에 돈줄을 댔는데… 연전연패, 밑 빠진 독처럼 자본을 아무리 부어도 흑자가 날 여지가 안 보인다더군.”
“...”
그거 쌤통이다.
망해라, 메이슨.
나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니 놈도 빈털털이 채무자가 되는거다.
그래서 지금까지 니놈에게 당한 희생자들의 심정을 느껴봐라.
스텔라는 접시에 남은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굴리며 장난쳤다.
곰곰이 생각에 빠진 눈치다.
“그런 오빠라도 일단은 내 가족이니까 남일은 아니잖아.
어쩌다보니 널 감시하느라 만능 스포츠 대회를 관전하면서,
어떻게 하면 지하 스포츠에서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좀 해본 거야.
뭐 그런 얘기야.”
“...”
“너, 그래도 제법 유능한 코치잖아?
혹시 너라면 지하 스포츠에서도 이기는 방법을 알까?”
음, 솔직히 자신은 없다.
애초에 무대가 전혀 다르니.
지하는 지하만의 룰이, 지하만의 생태계가 있기 마련.
지상의 만능 스포츠에서 반짝 성과를 냈다고 지하에서도 통하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스텔라 씨.”
“...?”
“그 지하 스포츠란거, 실력보단 운빨의 비중이 더 큰가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매번 상위권에 드는 팀은 정해져 있는 걸 보면.”
“그러면 분명히 거기에도 이기는 방법, 승리공식은 존재할 겁니다.
저는 지하 스포츠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거 하나 뿐이에요.”
“흠…역시 그렇겠지..”
스텔라가 남은 커피를 호로록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래쉬, 혹시 나중에 지하 스포츠에 관심 생기면 나한테 말해.
한 번 같이 관전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재미삼아.”
“아...예.”
스텔라가 별안간 손을 내밀었다.
뭐...뭐지?
내 머리를 호두처럼 부숴버리려는건가?
스텔라의 악력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단지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귀엽기는. 뭘 무서워하고 있어. 트래쉬, 커피 잘 마셨어.
나중에 또 보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정말이지, 미스테리한 여자애다.
무섭기도 하고, 가끔은 귀엽기도 하고…
뭣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지하 스포츠라…
나와 스텔라가 함께?
난 고개를 홰홰 저었다.
전혀 상상이 안가는 조합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