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0화 〉스이나와 게임(2) (80/109)



〈 80화 〉스이나와 게임(2)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시공간과 정체성의 혼란이 몰려오는 순간이다.

스이나의 방 가운데 앉아,
스이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빼빼로 하나를 사이좋게 물고 있는  상황은 무엇인가.

“히학이오.”


스이나는 과자를 문 채 웅얼거렸다.
아마, ‘시작이요.’라고 말한 거겠지.

오독오독.


스이나가 조금씩 과자를 갉아먹으며 내게 가까워졌다.

...이걸 진지하게 해야 하나?
내가 어떻게 받아줘야하지?

생각해보면 환상적인 시츄에이션이긴 하다.
스이나같은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미인과 이런 발칙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게…

과자는 집어치우고 바로 껴안고 찐한 키스를 나누고 싶다.


‘가까이서 보니 속눈썹이 더 길어보이는구나.
눈망울이 완전 사슴같네.

눈에 별박았나? 써클렌즈낀 것도 아닌데 왜이렇게 반짝거려…?’

모공까지 들여다보일 가까운 거리인데, 잡티 하나 찾아보기 힘든 맑은 피부.

내가 알기론 얘는 화장 따위 귀찮아서 절대로 할리가 없다.
썬크림도 메리가 재촉하지 않으면 가끔 까먹는 애다.

근데도 화장기는 조금도 없는데, 민낯의 피부가 연예인들 풀메이크업 뺨치게 곱다.

맨날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햇빛을 거의 안받고 살아서 그런가…


위험해.

얘는 본인이 뿜어내는 매력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타고난 얼굴 자체에서 남자를 사로잡는 마력이 팡팡 흘러나온다는걸.


큭… 왜이렇게 무방비한거지?  기집애는?
마음 한구석에서 이중 삼중의 브레이크가 제동을 건다.

라비와 앨리스 때도 이런 기분은 안들었는데.
죄짓는 심정…
건드리면 안될 애를 건드리는 느낌…

멍하니 스이나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데…

츄~♥

뭐, 뭐야.
입에 물고 있던 빼빼로 조각이 송두리째 쏘옥 사라졌다.

것보다 방금 스이나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던 기분이 드는데.
...입술, 부딪히지 않았나?


“...저, 저기요?”
“끝…쉽네요....”
“방금, 그냥 끝까지 다 드신 거 같은데…”
“...그렇게 하는 게임 아닌가요…”


스이나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과자를 오물거렸다.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입술을 가볍게 쏙 닦는다.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니예욧…!!!

빼빼로 게임이 언제부터 키스하기 게임이 되버렸나구요…!!

키스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긴장감을 즐기면서,
입술이 닿기 직전까지만 빼빼로를 먹은 다음에,
남은 조각이 얼마나 짧은지 겨루는 게임이라구요….”
“남은 조각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럼 저희 지금 엄청 잘한 거 아닌 가요…?”


맙소사.
얘는 뭔가 게임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게… 그냥… 둘이 키스를 해버리면 안된다는 겁니다… 정말.”


왜 내가 수줍어하는거지?
상대가 전혀 의식을 못하니 이쪽만 안달났다.
강적이다.

마이페이스가 너무 확고해.

“괜찮아요.... 저, 언니도 가끔 뽀뽀해줘요…  의미는 두지 말아요… 친하면 할 수도 있는 거니까...”
“아니, 그...금지!

스이나 이제 다시는 누구랑도 빼빼로게임 하지 마세요!!
그리고 뽀뽀는… 언니랑만 하세요!!
다른 사람이랑은 아무도 하면 안됩니다, 아시겠죠?”
“...알았어요…”

무신경한 것도 정도가 있지, 가볍게라곤 하지만 방금 남자와 입을 맞춰놓고 아무렇지도 않아 하다니…

안되겠어.
얘는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안된다.
스이나 손을 잡고 세상으로 이끌고 나온 장본인으로서 그럴 의무가 있다.

벌써부터 두려운 상상이 든다.
얘가 음흉한 놈팽이들한테 잘못 걸리면 얼마나 가벼이 희롱당할지…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그건 못본다.

“...그리고 별로 재미도 없어요!
딴거 알아봅시다, 딴거.”
“...이거면 될 줄 알았는데…”

스이나가  시무룩해졌다.
들고 있는 게임 타이틀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격투게임, SF배경의 FPS. 레이싱, 2인용 호러게임…


호러…?
어, 이건 괜찮지 않나?


“스이나, 무서운 거 좋아해요?”
“좋아하진 않아요… 싫어하지도 않지만… 가끔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단합대회때, 담력테스트 하면 어떨까요?”
“...담력테스트?”

가만히 호러게임 타이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스이나.

게임 겉표지엔 붉은 달을 배경으로 피보라에 휩싸인 요사스러운 저택, 그리고  개성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기괴한 요괴들이 그려져있다.

“테스트할 필요, 있나요…?  현실에선 무서움을 안타는데…”
“아니, 스이나가 담력테스트를 준비하면 어떻겠냐구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마침 단합대회 장소도 딱 적당한데.”

 속이니까, 우리말고 다른 사람도 없을테고, 해가 지면 분위기도 딱 좋게 잡힐 터다.


“음… 코치가 도와준다면, 할게요.”
“그거야 당연히.”

스이나는 크게 내키지 않는  했지만, 뭐가 됐건 빨리 정하고 끝내야 게임을   있으니 별 상관없어보였다.

“그러면 자세한 내용은…”
“코치, 한 판 하구 해요.”

스이나는 멋대로 게임기 콘솔의 전원을 눌렀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TV도 조작해 순식간에 게임 선택 대기화면을 띄워놓는다.

“부탁이에요…”


이런 귀여운 여자애가 애원하는 눈길로 바라보며 부탁하는데, 거부하는 남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에이 씨팔, 거 게임 한  해주는게 어렵나.
알았다 알았어.
좀 놀고 마저 정하자.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이기면 바로  얘기로 돌아가는 겁니다.”
“...와~ 좋아요.”

얘가 이렇게 밝은 얼굴로 기뻐하는 건 보기 드문데.
스이나가 잔뜩 신나하며 패드를 내밀었다.

“산  얼마 안된  패드… 빠릿빠릿하게 잘 먹혀요. ...코치가 이거 써요.”
“고맙습니다.”

처음 보는 콘솔인데, 패드는 엑박 패드와 거의 유사하다.
게임기 컨트롤러라는  결국 계속 발전하다보면 모두 비슷한 모양으로 수렴하기 때문일까.

손가락 열 개 쓰는 영장류의 신체구조엔 이런 모양의 패드가 제일 편해서일지도.

스이나가 고른 게임은 의외로 꽤 성인취향의 격투게임이었다.

해변가, 정글, 운동장, 경기장 등 다양한 무대에서 두 쭉쭉빵빵한 미녀가 캣파이트를 벌인다는 내용.

단, 싸움에 진 쪽은 무조건 옷을 1파츠 탈의해야 한다는 저속한 설정이 딸려있다.


‘취향 참…’

스이나는 야한 걸 좋아하는 걸까?
그렇다기보다 그냥 별 생각이 없어보인다.

“재밌어요, 이거… 모두 바보같아서… 키킥.”
“...”


스이나의 캐릭터는 긴 검은 머리의 여리여리한 아가씨 풍 소녀.
어쩐지 본인을 많이 닮았다.

그렇지만...
정말 믿어지지 않게도, 게임 속 미소녀보다 걔를 조종하는 현실의 플레이어가 더 예쁘다는 아이러니.

말도 안되는 광경이다.

나는 개쎄보이는 멕시코풍 근육질 마초녀를 골랐다.
제대로 한 번 잡기만 하면 가냘픈 스이나(처럼 생긴 캐릭터)의 허리를 우지끈 부러뜨릴 수 있을 터.

다음은 커스터마이징을 할 차례.

말했듯이 이 게임은 진 쪽을 사정없이 벗기는 게임이라 많이 둘둘 싸맬수록 유리한 것이다.

스이나는 고수니까 핸디캡을 주겠다며, 간단하게 비키니 수영복만 착용했다.

“봐주시는 건가요? ...이거 열받는데…”
“실력 차이… 명백하니까요. 쿡쿡…”

아까부터 소악마처럼 킥킥거리는 스이나다.
같이 나란히 앉아서 게임이나 하고 있으니 그렇게 세상 즐거운가보다.

“저는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양말, 어그부츠, 속옷, 셔츠, 히트텍 내복, 조끼, 가죽 장갑, 점퍼에 모피코트와 털이 잔뜩달린 방한용 털모까지 입혔다.

폭설이 몰아치는 스탈린그라드로 진군하는 정예 소련군같은 풍모.

게임 속 무대인, 햇볕이 내리쬐는 야자수 우거진 해변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이것이 나의 ‘진심’이다.

나도 일평생 게이머로 살아온 남자다.
패배의 괴로움은 뼈저리게 알고 있다.

설령 게임이라 해도… 아니, 게임이니까 더 지기 싫다.


“메뉴얼 있나요? 기술표 좀 보고 싶은데.”
“아,  게임은 그런거 없어요…”

보니 그냥 약 펀치,  킥, 강 펀치, 강 킥  종류만 있고, 특이한 기술은 없는 심플한 게임이라고 한다.

미리 복잡한 커맨드를 암기할 필요 없이,
오로지 타이밍과 반사신경, 심리전을 겨룬다.

가족끼리 즐기기 좋은 음란한 게임.

‘승부다…!’

***

10분 후,

“아니…  캐릭터가, 좀 이상해요. 왜 이렇게 둔하지?”
“조금씩 스탯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차이는 없어요…”
“진짜요? 그럼 왜 동시에 펀치를 내밀었는데 스이나가 먼저 때리는 거죠?”


내 멕시코 근육녀는 구릿빛 건강한 알몸을 드러낸 채 처참히 모래사장에 나동그라졌다.

단 한 세트도 따내지 못했다.
압도적인 패배.

“동시… 처럼 보이지만, 사실 동시...가 아니니까요.
코치보다 제가 매번 6프레임 정도… 빨랐어요. 그래서 먼저 때린 거예요… 킥킥.”


스이나는 승자의 여유를 한껏 즐기며 설명했다.

“개열받네. 한  더해요.”
“얼마든지요…”


하지만 나는 다음 판도, 다다음 판도 이기지 못했다.

굴욕의 3연패.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아드레날린이 쭉쭉 분비되는게 느껴진다.

‘대체 내가 왜 지는거야? 별 기술도 없는 게임인데.
뭔가 타이밍이 자꾸 존나 말리네.’

“코치, 뻔해요…”
“뻔하다구요?”
“...생각하는 게 다... 들여다보여요… 언제 펀치를 날릴지, 언제 점프 할지 , 언제 하단 킥을 쓸지, 언제 구를지…

 손으로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이나가 쿡쿡 웃었다.
몹시 열받는다.

“이번엔 진짜 무조건 이길겁니다. 완전 감잡았어요.
저 지금 제 캐릭터하고 일심동체가  기분이예요.”
“일심동체요…?”

탄산을 꿀꺽꿀꺽 마시는 스이나.
끅, 하고 작게 트림을 한다.
분명 드럽게 보여야  그림인데 얘는 트림하는 것도 귀여우니 정말 불공평하다.

내게 페트병을 쓱 내밀길래 나도 내친김에 마셨다.
간접키스...지만 지금 머리에 피가 올라 신경도 안쓰인다.


“일심동체면… 코치도 벗어야 해요… 쿠쿡…”
“스이나, 후회하지 마세요. 제가 못할 것 같아요?”
“그런 말은 아닌데…”
“저 그럼 진짜  때마다 하나씩 벗습니다.
무조건 이길거예요. 괜찮아요?”
“...”

자꾸 깐족거리며 스이나가 도발을 해서일까,
순간 나는 처음의 결심과 달리 선을 약간 넘는 발언을 해버렸다.

하지만 승부의 열기로 달아오른 지금 분위기에선 변태같은 내 발언조차 자신감과 호기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다고 이길  없어요… 이기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아우 진짜.”
“저도 지면 벗을게요, 그러면. ...어차피 저는 절대 안 지니까.”
“...네? 에이씨, 그러면 그래요. 경고했습니다. 무르기 없어요?”
“저도 경고할게요, ...저는 일부러 져주지 않아요… 코치가 설령 알몸이 된다 해도…”

음란한 게임을 하며 자극에 둔감해져서일까,

우리는 평소와 달리 약간 텐션이 업되어 있었다.

게임하다 지면 한 꺼풀씩 벗기 내기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무모한 내기조차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갑시다.”
“어서 와요… 코치.”


다음 판.
나는 플레이 하나하나에 그야말로 영혼을 담았다.

몇 판 연속 지다보니, 내게도 보인다.
스이나가 선호하는 플레이 패턴.

내 실수를 받아치고 즉각 응징하는 ‘카운터 플레이’, 소위 ‘니가와’형.

탁월한 반사신경으로 내 노림수를 먼저 읽은 후 나보다 좋은 피지컬을 이용해 카운터를 날린다.

하지만 알고 나면 당해줄 이유가 없다.

‘나도  가 이년아.’

그러면 굳이 내쪽에서 먼저 접근하지 않는다!
나도 가드를 굳히고 백무빙, 횡이동을 연발하며 시간을 끌었다.

스이나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신중해지셨네요…”
“게임을 이해한 거죠.”

 라운드의 제한 시간 60초가 거의 다 지나간다.
이대로 끝나면 무승부.

계속 무승부만 계속되면 어떻게 되는거지?

게임 중에 딴생각을 해서였을까, 내 집중력이 순간 흐트러졌다.


도도도─ 툭!

스이나가 잰걸음으로 달려와 톡, 하단 킥을 날렸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내 멕시코 근육녀는 그대로 발목을 걷어차이며 몸을 움츠렸다.

기껏해야 콤보도 아닌 하단 약  단타.
개미눈물만큼 쪼끔 체력이 닳았지만,

문제는 서로가 팽팽한 균형을 유지한 상황에서 나만 데미지를 입었다는 것.


“어….어!? 거, 거기서요! 도망가지마! 맞서싸워요…!!”

스이나는 주저없이 빤스런을 했다.
맵 반대편 끝으로 달려가는 스이나의 캐릭터.
쫓아가는 내 멕시코 근육녀.

잠시 몇 초동안 우스꽝스러운 술래잡기가 이어진다.


-타임 오버. 1P WIN.

“이런 젠장…!!”


시간종료에 의한 판정패.
순간 패드를 던질 뻔 했다.
나도 모르게 머리 위까지 들어올렸다.
내 돈 주고 산 패드였으면 정말 던졌을 거다.

“아하하, 킥킥… 하하…”

스이나가 배를 잡고 웃었다.
내가 본 것중에 가장 해맑게 웃는 모습이다.

열이 머리 끝까지 올랐다가, 스이나가 너무 좋아해서 조금 가라앉았다.

너라도 즐거우면 됐다…


“코치, 제가 이겼네요?”
“...그러네요.”
“벗으셔야죠.”

진심인가?
장난으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게이머는… 게임에 대해선 항상 진지해야 해요… 자기가 한 말은 지켜야 해요…
코치, 얼른 벗으세요…”
“진심입니까?”
“그럼요…”


그래, 너도 진짜 게이머구나.
게임은 장난이 아니지.

나는 셔츠를 벗어던졌다. 꾸준히 단련한 넓직한 가슴팍과, 조금씩 선명해져가는 복근이 그대로 드러난다.


“성별은 다르지만… 코치, 정말 캐릭터와 꽤 닮으셨네요… 근육질이신게…”


스이나는 별로 야하다고 생각도 안하는지 그냥 순수하게 내 근육질 갑빠를 천연히 구경했다.
자기 방에서 남자가 웃통을 깠는데도 저렇게 태연할수가.

이제부터 어떻게 돼도 모른다.
스이나, 너가 자초한 일이야.

탄산을 쭉 들이킨 후, 나는 말했다.

“다음 판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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