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단합 대회(1)
좋은 날씨다.
다행이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준비했는데, 날씨때문에 취소되기라도 했으면 좀 많이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단합대회라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미리 준비해야 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와 라비는 행사 전 날 훈련장과 산을 왔다갔다하며 끝도 없이 짐을 날랐다.
캠핑 용 텐트, 의자, 나무에 달아놓을 해먹과 그네, 캠프파이어용 장작과 설비, 비상용 소화기, …
차가 갈 수 있는 곳까지는 차에 싣고 날랐지만 산길은 별 방법이 없다.
들고 옮길 수밖에…
“허억… 허억… 라비야, 뒷산으로 장소 정한거… 좋은 선택이 맞을까?... 헉…”
“후...모르겠어요오…”
낮은 산이지만 어쨌든 산은 산. 길도 제대로 닦여있지 않고, 무엇보다 200m 가까이 되는 오르막길.
둘이서 무거운 짐들을 들고 하염없이 오르락내리락...
이 기분… 어쩐지 익숙하다.
“라비야… 군대 갔다왔어?”
“예? 제가요?”
라비가 어리둥절해 했다.
“...넌 모르겠지만, 난 지금 딱 그 기분이야. 약간 PTSD올라 그래.”
공기 좋고 물 맑은 연천의 수많은 산들을 오르내리며 노예처럼 굴렀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가 고생한만큼 다른 사람들은 편하게 즐길 수 있겠지.
좋아, 이번 한 번은 그걸로 만족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다짐을 하나 헀다.
‘다음엔 그냥 다 같이 준비하는 걸로 해야지… 괜히 한 명 한 명 역할 분담했다가 나만 개고생이네.’
***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훈련장에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홍삼 스포츠> 사람들을 모두 모아 다같이 산으로 향했다.
“와, 산이라 그래서 솔직히 별로 기대안했거든. 근데 괜찮네?”
앨리스는 녹음이 우거진 산 속 풍광이 꽤 맘에 드나보다.
하필 이전에 라비와 내가 야한 짓을 했던 냉이 스팟 위에 떡하니 서있다.
저놈의 냉이… 다 뽑아버리든가 해야지.
라비가 내 시선을 피하며 볼을 붉혔다.
강렬한 경험이었던만큼 생각이 안 떠오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앨리스가 내게 물었다.
“그럼 지금부터 뭐해?”
“저희가 먼저 할 건…”
1박 2일로 짜여진 이번 단합대회의 스케쥴은 전부 내가 정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취향대로.
“일단 그냥 맘 편히 쉬는 겁니다.
준비한 건 저녁 먹고 해지면 그 때부터 느긋하게 즐기자구요.”
다들 여기 산 정상까지 올라오느라 피곤이 쌓이기도 했을 것이고,
애초에 난 어디 놀러가서, 쉴 틈없이 빡빡하게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하고,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한다
단합대회라곤 하지만, 저녁 때 잠깐 친목도모의 시간을 가진 후 스이나가 준비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즐기면 그걸로 준비된 계획은 끝이다.
나머진 그냥 자기 하고싶은 대로 하면서 노는 게 전부.
돗자리, 해먹, 텐트.
내리쬐는 햇빛을 피해 편안히 누워있을 곳은 사방에 널려있다.
빈둥거리며 뒤적거릴 만화책과 잡지도 쌓아놨다.
물론 과자나 음료 등 간식도 넉넉하게 상비.
따사로운 햇볕에 미지근해질까봐 일부러 보냉제를 듬뿍 넣은 아이스박스까지 가져왔으니 음료도 시원하게 즐길 수 있을 터.
“오오~~ 좋아요.”
“그거 괜찮네. 난 주변 산책 좀 할래.”
활동적인 성격의 앨리스는 산의 경치를 돌아보고 싶은지 먼저 일어섰다.
라비는 스이나와 게임을 한다고 텐트 안에 쏙 들어갔다.
레이지 아재는 가져온 소형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틀어놓고 맥주 한 캔을 깠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멋들어지게 선글라스까지 척 걸쳤다.
다들 느긋하게 자기 할 거 하면서 즐기는 분위기.
난 이런 분위기가 좋다.
“메리야.”
“아, 예 선배.”
“여기까지 일거리를 들고 왔네. 열심이긴 한데 쉴 땐 쉬어야지.”
“...그러네요.”
내 기특한 후배는 단합대회까지도 서류 몇 개를 챙겨 와 들여다보고 있다.
안되겠다. 압수다.
내가 쓱 서류를 뺏어 가방 안에 던져넣었다.
대신 아이스박스에서 355ml 짜리 맥주 두 캔을 꺼내 하나를 메리에게 권했다.
“어떻게, 요즘 일은 할만 해?”
“네네. 이제 완전 마스터했어요.”
칙-
메리도 웃으며 맥주캔을 깠다.
산을 오르느라 이리저리 흔들려서 그런지 거품이 주르륵 흘러나온다.
바로 입술을 대고 급히 쪼로록 마시는 메리.
옆얼굴이 참 귀엽다.
이걸 두고 수수한 매력이라고 하던가.
편안하면서도 은은한 미모가 배어나오는 얼굴.
익숙하게 대하다가도 가끔씩, 얘가 이렇게 귀여웠나, 하면서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요즘 보면 일할 때 오히려 내가 너한테 물어보면서 해야겠더라.
니가 제일 전문가야, 이제는.”
“...별 말씀도, 히히.
근데 원래 그래야 맞는 거죠. 선배는 코치니까, 현장 실무 보는 거고.
이런 사무업무는 제 담당이고. 그쵸?”
“그런가…?
여튼 너 들어와서 난 완전 편해졌어.
진짜 고맙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메리가 비서로 들어오기 전까진 대회 없을 땐 매일같이 야근에 시달렸다.
일을 잘 모르는 아재한테 떠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저도 고맙습니다, 선배. <홍삼 스포츠>에 불러주셔서.
요즘 하루하루 너무 재밌고 보람차요.”
“...내 앞에선 이렇게 말해놓고 나중에 막 저놈의 코치가 빡세게 부려먹기만 했다고 뭐라 하는 거 아니지?”
“에이, 설마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맥주 작은캔은 벌써 바닥을 보였다.
“하나 씩만 더 할까?”
“어...괜찮아요. 저 좀 술 약해서, 빨리 취하거든요….”
빈말이 아닌게 메리는 쪼끄만 캔으로 하나 마시고 벌써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말투도 살짝 어눌한 것 같기도 하고…
술 더 맥이면 안되겠다.
메리는 돗자리가 깔린 잔디밭 위에 편안하게 드러누웠다. 나른한 표정을 보니 딱 술기운이 기분좋게 오른 얼굴이다.
맨날 열심히 일하는데 간만에 좀 편하게 쉬게 냅둬야지.
-<래피드 팬더스>의 아라이 선수 중견수 좌중간 뚫는 이루타…!!
좌익수와 중견수 사이를 시원하게 가릅니다…!!
“허허, 이거지.”
레이지 아재가 짝! 박수를 쳐서 나도 모르게 바라봤다.
아재는 대머리를 벅벅 긁으며 큰 소리로 기뻐했다.
여기도 야구가 있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돌아다니면서 기념으로 우리 식구들 사진이나 찍어야지.
평화로운 산 속의 오후가 그렇게 흘러간다.
***
저녁은 앨리스와 내가 준비했다.
미리 보온통에 듬뿍 담아온 카레를 가스버너로 데우고, 소시지와 야채도 구웠다.
큼직한 종이 트레이에 취향에 따라 밥이나 바게트를 담고 카레를 넉넉히 붓는다.
거기에 먹음직스럽게 구운 후랑크 소시지와 야채를 곁들이면 완성.
캠핑용 벌레퇴치등을 켜고, 내친김에 쪼끄만 알전구 무드등도 여러 개 밝히니 나름 분위기가 산다.
“잘먹겠습니다~~”
“이야, 맛있겠다. 수고했어. 잘먹겠네.”
당연히 맛도 기가 막히지.
카레는 하루 지났을 때부터 시작이다.
재료 속까지 카레가 듬뿍 배어 하나로 일체화된 맛이 끝내줄 터.
거기다, 산 속에서 캠핑중에 먹으면 이상하게 모든 음식이 1.3배 더 맛있어진다.
모두 게눈 감추듯 접시를 비우고 한 그릇 더 청했다.
심지어 스이나까지.
이건 좀 놀랐다.
“....맛있어요, 코치…”
“앨리스가 만든 거니까 앨리스한테 맛있다고 해줘요.”
항상 새모이만큼 조금씩만 밥을 먹는 스이나가 두 그릇을 먹는다는 건 진짜 맛있다는 보증서나 다름없다.
대놓고 기뻐하진 않았지만 앨리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떠올랐다.
“그래, 많이 먹어. 넉넉하게 가져왔으니까.”
“앨리스, 요리 잘하네요…”
“그,그래? 아하하, 당연하지.
난 맘만 먹으면 일류 레스토랑의 쉐프 자리도 노릴 수 있다구.
이깟 카레야 별 거 아니지.”
들떠서인지 또 허세가 폭발한 앨리스.
“그러면… 다른 요리도 또…. 해주세요… 앨리스 요리, 더 맛보고 싶어요…”
“어….어….? 그...그래! 알았어. 하하..하하하.”
앨리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가 스이나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너무 늦지 않게 주특기 요리를 더 개발해야겠지.
지금은 그저 카레 원툴이니까.
슬슬 해가 지고 피부에 와닿는 공기도 선선해졌다.
모두 배부르게 먹고 나니 기분좋은 포만감에 빠져 한없이 느긋한 기분에 빠졌다.
“슬슬 켜볼까.”
나는 접이식 경량 미니화로대를 폈다.
미리 준비한 장작을 다섯 개 정도 올려놓고 불을 피웠다.
수학여행에서 피우곤 하는 본격적인 커다란 캠프파이어의 불길만큼은 아니지만 분위기는 그 못지 않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에 다들 감성이 촉촉해지는지 말없이 불길을 바라본다.
‘mp3가 있었다면 이럴 땐 <마법의 성>이 딱인데…’
감성을 간질간질 자극하는 촉촉한 ost가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자 그러면 분위기도 괜찮은데 간단한 토크를 나눠보도록 할까요?”
내 진행에 따라 평소라면 말할 기회가 없는 서로의 솔직한 마음 속 이야기들을 얘기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첫번째 주제는 ‘서로 칭찬하기’ 입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칭찬해줍시다. 먼저 저부터.”
내 옆에는 레이지 아재가 있다.
뭐 아재 칭찬할거야 많지.
좋은 사람이니까.
“단장님은… 한번도 저희에게 화를 내신 적이 없습니다.
화는 커녕, 싫은 소리 한 번 하신 적 없죠.
저희가 뭘 하든 항상 믿고 지지해주십니다.
항상 큰 힘이 됩니다..”
“에이, 부끄럽게 뭘.”
아재가 멋쩍은지 맥주캔을 들며 웃었다.
다음은 메리의 차례다.
“메리는… 새로 들어왔는데, 정말 똘똘하고… 허허… 그냥 뭐 내가 거들 일이 없어.
다 잘해, 다.
지금처럼만 해주라, 응?”
메리의 다음은 앨리스.
메리가 손을 가슴앞에 모으고 눈을 반짝이며 얘기했다.
“저는 원래부터 앨리스 선수의 팬이었어요.
그래서 앨리스 선수의 장점이라면 2박 3일이라도 얘기할 수 있답니다.
항상 성실하고, 우아하고, 현명하고, 지적이고, 아름답고, 재능 넘치고, …”
“그, 그만요! 메리 씨, 고마워요. 그정도면 됐어요.”
앨리스가 헛기침을 하며 제지했다.
중간에 말리지 않았으면 정말 한없이 얘기할 분위기였다.
밤이 깊어가고 훈훈한 분위기는 더해진다.
앨리스가 칭찬할 사람은 라비.
“라비는… 밥을 참 맛있게 잘 먹어. 게다가 빨리 먹지.
거의 흡입한다고나 할까?
얼핏보면 게걸스럽게 먹는데, 또 보기 싫지는 않아.
약간 아기 송아지 밥 먹는 모습같아서 흐뭇하기도 하고…”
“저기, 그거 칭찬… 맞지? 앨리스?”
라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밥 잘먹는게 얼마나 복을 타고난 건데. 음, 난 이정도만 할까.”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저는 스이나를 칭찬하면 되죠?
스이나는… <슈퍼 캣파이트>를 무지 잘해요.
오후 내내 했는데 한 판도 못이겼어요.”
그 게임은 나도 스이나를 이긴 적이 없다.
라비도 당했군.
“몇십 판 하다보면 한번 쯤 져줄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아요.
한 오십 판은 한 것 같은데 오십 판 다 졌어요.
완전 스이나는 게임의 신이에요.
엄청 약오르게 잘해요.
하다 보면 이길 것 같은데 절대 못이기는…
나중엔 제가 살짝 진심으로 삐질 뻔 했는데…
그래도 스이나는 져주지 않았어요…
정말이지, 프로의 귀감, 냉정하고, 단호하고…”
“오케이. 그만그만. 다음은 스이나 차례.”
말하다가 서러워졌는지 라비가 울먹울먹하길래 내가 중간에 끊었다.
나도 안다.
개열받는 그 기분.
하지만 뭔가 중간부터 칭찬 릴레이의 취지가 어긋난 듯도 하고.
“....저요…. 코치 칭찬이라…”
스이나는 꿈꾸듯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코치는… 벗었을 때… 거기가…엄청 크고...”
“응?”
“예?”
“뭐라고.”
이런 미친….!?
모두가 술렁거린다.
내가 급히 끼어들었다.
“스이나, 칭찬은 고마운데 그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전에 제가 짐 옮길 때 더워서 소매를 걷었는데 그 때 이두박근이 멋있었다고 제대로 말해야죠.”
“....아, 아…. 맞아요. 이두박근…근육이 엄청 컸어요… 평소에 단련을 꾸준히 해서...네.”
스이나가 어색하게 발언을 수정했다.
뭐야, 깜짝 놀랐네, 하며 겨우 납득하는 사람들.
그 와중에 앨리스만이 내게 노골적인 의심의 시선을 날린다.
“자자, 칭찬 릴레이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크흠…”
하마터면 즐거운 단합대회가 스캔들과 폭로의 장으로 변할 뻔 했다.
나는 남들이 보지 않게 몰래 식은땀을 훔쳤다.
스이나… 나를 보내버리려고… 아니지?
이어지는 토크 프로그램.
근래에 하고 싶은 계획.
라비는 <블루 윙>에서 마하와 팀을 짜 대회에 참가해보자는 초청을 받았는데, 관심이 있다고 한다.
앨리스는 전에 라비한테 밀려 우승하지 못했던 <메이즈>에 미련이 남아,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한다.
스이나는 별 목표가 없다고 한다.
미래에 이루고 싶은 일.
라비는 <홍삼 스포츠>를 최고의 팀으로 만들고 싶다고 한다.
앨리스는 전국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다고 한다.
스이나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미니 캠프파이어 앞에서 서로의 속마음을 알아보는 재충전의 시간이 마무리되었다.
이쯤에서 분위기 전환을 해볼까.
“자… 그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스이나가 준비한 레크리에이션은 특성상 밤이 깊을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어요.
그게 뭔가 하면, 두근두근… 담력테스트!!
시간도 됐겠다, 한 번 재밌게 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