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단합 대회(3)
“...별로 보이고 싶지 않던 모습인걸.”
어둠 속에서도 스텔라가 민망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로서도 난감하리라.
감시하는 사람이 감시 대상에게 도움을 받게 생겼으니.
“그러게, 왜 산에 힐을 신고 와요? 도통 이해가 안가네.”
“나도 후회 중이야.”
스텔라는 힐을 벗고 발목을 주무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겉보기에는 뼈가 부러진 것 같진 않은데, 가볍게 인대가 늘어난 모양이다.
그거 상당히 아프지.
“잠깐 봐도 돼요?”
“...그래.”
스텔라가 다리를 쭉 내밀었다.
촘촘하고 부드러운, 50데니어 스타킹.
섹시하다.
이 무서운 아가씨가 내게 무방비한 상태로 다리를 맡기고 있다는 게 너무 낯설어 현실같지가 않다.
종아리를 지압하듯이 꾹꾹 눌러봤다.
“여기 아파요?”
“...아니, 괜찮아.”
“여기는요?”
“거기도 괜찮아.”
발목 윗쪽 복숭아 뼈 근처를 누르자 그녀가 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아, 아야야… 거기부터 아파.”
“발목 염좌네요.”
“후…”
스텔라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오빠한테 연락은 했어.
헌데 이시간이면 대개 퍼자거나, 취해서 빌빌댈 시간이니까 별 기대는 안되네…”
“어쩔 수 없죠. 제가 병원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한데.”
‘지옥의 여동생’이건 뭐건, 지금은 그냥 다친 환자에 불과하다.
상처입은 암컷 표범.
나중에 내게 이빨을 들이댈게 뻔하더라도 어쨌든 눈앞에서 낑낑대는 꼴은 못봐주겠다.
그냥 내버려두기엔 내 마음이 불편해.
“갑시다. 업을게요.”
“...”
딱히 거부하지 않길래 더이상 묻지 않고 바로 등에 짊어졌다.
산 위는 해가 지면 금새 추워진다.
스텔라의 몸도 조금 걱정될만큼 식어있었다.
‘얘는 가슴 크네.’
등에 묵직한 여체의 감촉이 다가온다.
스이나를 업어줄 때와는 전혀 다른 자극.
팬 위에 호떡 반죽을 큼직하게 한 주걱 떨어트린 후, 뒤집개로 한번 지그시 눌러준 것처럼 내 등 위로 풍만한 가슴이 넓게 뭉개지며 짓눌렸다.
예전부터 느낀거지만 상당히 육감적인 스타일의 스텔라.
D...아니 E...인가.
어느쪽일까. 속옷보정도 있으니 까보지 않으면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우리는 말없이 산을 내려갔다.
야간투시경을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
한 치 앞도 안보이는 깜깜한 산.
길도 없는 산을 내려가려면 야간투시경 없인 고생 깨나 했을 거다.
“아직도 저를 못믿으세요?”
“...”
“어디 안 도망갑니다. 이제는 그럴 생각도 없어요.”
“...알아.”
“그러면 이제 밤에는 좀 쉬세요.”
계획에 없었던 야간산행.
그것도 50kg쯤 나가는 아가씨 한 명을 들쳐업은 강행군…
헉헉거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콧김이 훅훅 절로 뿜어져나왔다.
스텔라가 업혀있어 체온 발산이 안되는 등이 축축하게 젖어간다.
운동, 평소에 꾸준히 해두길 천만다행이다.
믿음직스럽게 딱 업고 가다가 중간에 지쳐서 퍼지기라도 하면 그거만큼 쪽팔린 일도 없다.
“힘들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이거 한 제 채무에서 천 골드는 깎아주셔야 되겠는데요.”
“아하하… “
스텔라가 어이없어했다.
"사실 너를 감시한다기보다,
이제는 그냥 재밌어서 구경하는 거야.
너희들 노는 거 지켜보는 게 즐겁거든."
"..."
"근데 오늘은 확실히 무리했다.
산 속에까지 따라오는 건 좀 아니었네. 그치."
"스텔라 씨..."
몸은 힘들지만, 지금 분위기는 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스텔라가 내게 역으로 마음의 빚을 진 상황.
한밤중에 달빛 아래 단 둘이 걸어가는 지금이라면,
스텔라도 무시무시한 징수인으로서의 모습은 다소 접어두고,
평범한 여자애의 마음을 내보이지는 않을런지.
"전에, 절 구해주신 적 있죠?"
"...그랬나. 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제 생각엔 말이죠."
내 등에 납작 업힌 스텔라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저희 그렇게 나쁜 사이는 아닌가봐요."
"..."
"그냥... 이제는… 평범하게, 친하게 지내면 안될까요?"
"그렇게 빚을 져놓고, 어떻게 평범하게 지내자는 거야?
트래쉬, 농담이지?"
"빚 같은 건 이제 별 문제가 안돼요. 솔직히 전 조금만 시간 있으면 다 갚을 수 있어요."
"아하하... 그 자신감 싫진 않아. 그래도..."
스텔라는 말꼬리를 흐렸다.
다시 침묵의 산행이 이어진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구간은 다 지나갔다.
이제부터는 비교적 덜 힘든 평탄한 내리막길뿐.
으쌰, 하며 업혀 있는 스텔라의 몸을 한 번 가볍게 들어 올린 후 안전하게 고정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도로로 이어진다.
거기서부턴 응급차를 부르던 콜택시를 부르던 방법은 많을 터.
“그러면... 이렇게 할래?”
말이 없던 스텔라가 나직히 속삭였다.
“예?”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 트래쉬?
지하 스포츠 말야.”
“아...예.”
양지의 밝고 건강한 대회와는 다른 세계가 있다.
어두운 지하에서 은밀히 거액을 걸고 살벌한 게임을 벌인다는 얘기를 스텔라가 한 적이 있다.
“만약 네가 거기서 날 도와준다면... 빚을 전부 탕감하는 걸로 해줄게.”
“...정말입니까? 제가 알기론 많이 갚긴 했어도 아직도 꽤나 남아있을텐데...”
“맞아.
그치만 지하 스포츠에서 벌 수 있는 상금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지.”
이 제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도 안되는 거액의 보상이 날 유혹한다.
단 한 번의 협조로 지금까지의 빚을 전부 탕감할 수 있다니.
하지만 동시에 두렵다.
예로부터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격언이 있지.
너무 달달한 제안이라 이가 썩을 것 같다.
독사과.
내가 스텔라의 이야길 듣고 떠오른 이미지는 붉고 먹음직스러운 사과 한 알이었다.
깔깔거리며 그 위에 주의깊게 한 방울의 독을 떨어뜨리는 스텔라의 모습.
요망한 마녀의 제안일까, 아니면?
"프로 스포츠 팀의 코치가, 지하 스포츠에서... 부업을 뛰는 게 걸리면..."
"끝장이지."
스텔라는 시원하게 단정지었다.
"그런 제안은... 수락하기 힘들겠네요.
전 지금 <홍삼 스포츠>에서 일하는 게 행복해요.
죄송합니다, 스텔라 씨."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내 거절에도 스텔라는 당황하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하 스포츠에는, 사연 있는 사람들이 많아...
음지에서 뛰는 게 걸리면 곤란한 사람은 너 뿐만이 아니란 거지.
그래서 자기 신상을 숨기더라도 아무도 캐묻지 않는게 불문율이야.
가면, 음성변조기, 화려한 분장, 동물 탈...
가끔 보면 할로윈 코스튬 파티같아서 재밌기도 하거든."
"..."
"절대로 들키지 않아."
속지말자, 진수현.
달콤한 꼬드김에 넘어가면 안돼.
"하지만 스텔라 씨는 알고 계시잖아요?
지하 스포츠에 참가한 코치가 저라는 걸.
나중에 그걸 약점으로 잡아 절 협박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
"그걸 아는데 제가 어떻게..."
"트래쉬, 날 못 믿어?"
...스텔라의 다크초콜릿처럼 진하고 고혹적인 목소리가 훅 파고들어온다.
널 못믿냐고?
내가 어떻게 널 믿겠어.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우리 사이라... 어?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보자고 말한 건 너잖아."
"..."
"나도 아무한테나 이런 제안을 권하진 않아.
당연히 유능해야 하고,
...그리고 믿을만 한 사람이어야 하지.
사람마다, 신뢰를 쌓는 방법은 다 다른거잖아?
내 신뢰의 방식은 이래.
나와 함께 살 떨리는 위험의 구렁텅이 한 가운데로 빠져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나는 믿지 않아.
지옥 끝까지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
"..."
머릿속이 복잡하다.
정말 이상하게도,
스텔라의 말투에서 거짓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을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뭐, 마음대로."
"다음에 스이나와 작은 대회 하나에 참가할 예정이 있어요.
그 대회가 끝나면... 마음을 정해서 답변 드리겠습니다."
어느덧 길가에 드문드문 켜져있는 가로등이 보였다.
굴러다니는 나무상자 위에 스텔라를 내려놓으니 이제서야 피로가 확 몰려온다.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겁다.
여기까지 데려다줬으면 알아서 돌아갈 수 있겠지.
스텔라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고생 많았어, 트래쉬. ...미안."
"아니에요."
"...어째 분위기가 좀 그렇다.
이거 불안한데."
다친 발목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발목 상태 심각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흐름이 안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
"흐름이요?"
"이러다가... 정말...
나 너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는 거 아냐?"
푸웃..!
갑자기 사레가 들려서 풋 헛기침을 연발했다.
뜬금없이 훅 치고 들어와서 몹시 당황스럽다.
"컥... 갑자기 뭔..."
"트래쉬, 조금 거리 좀 두자, 우리.
응?
약간 감정 과잉이야.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있다고..."
"스텔라 씨, 감정과잉이 아니라 그거 자의식과잉이예요.
전 그런 생각 조금도 없거든요?
진짜 웃기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스텔라와도, 무지 가까워지고 싶다.
그치만 조금이라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허세를 부렸다.
"아, 싫어.
너하고 이런저런거 하고 싶지 않단 말야.
상상이 안가.
진짜 좀, 봐주라.
나말고 다른 여자애들 많잖아?"
"안그런 줄 알았는데 농담도 잘하시네."
우리가 잠시 티격태격거리며 기다리자 차 한대가 도착했다.
무광으로 풀도색한 고급 세단.
가까이 다가오기 전까진 알아차리기도 힘들만큼 소음도 적다.
창이 열리고 메이슨이 고개를 내밀었다.
"에라이 칠푼아."
"...뻗어 있을 줄 알았는데 웬일로 문자 봤나보네."
"너 바보냐? 혼자 산에 쳐올라갔다가 발목이나 삐고.
...빨리 타."
메이슨은, 너도 있었냐, 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니가 업어다 준거야?"
"아, 예."
"짜식, 남자답네. 조오금 다시봤다 야."
"..."
저녀석한테 칭찬들어봐도 전혀 기쁘지 않다.
짜증나는데다 피곤하기까지 해 절로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메이슨은 히죽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래도 내동생한테 찝쩍거리면 안돼? 뒤진다 진짜?"
"그럴 생각 조금도 없어요."
"흐흐... 스텔라, 가자."
메이슨이 스텔라를 번쩍 들어 조수석에 태웠다.
창을 살짝 열고, 스텔라가 빼꼼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그렇게 빚쟁이 남매가 탄 차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정말 뭐냐고, 대체.
***
캠핑장에 돌아오니 스이나가 얘기를 잘 해놨는지,
다들 걱정없이 잘 자고 있었다.
나는 안꺼진 불씨가 혹시 주변에 튀진 않았나 확인하며 꼼꼼히 체크했다.
나도 사람 하나 업고 왔다갔다 하느라 피곤해서 바로 침낭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해야 할 일은 빼먹으면 안되니까.
"코치, 왔어?"
나무 밑에서 누가 부르길래 보니 앨리스다.
"안 자고 있었네요?
혹시 절... 기다리고 있었던 건?"
"뭔 소리래."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흘겨본다.
"그냥 잠이 안와서 나와 있었어."
"그럴 수 있죠. 그럼 잠깐만 있어보실래요?"
휴대용 전기포트로 물을 끓여 머그컵에 코코아 두 잔을 탔다.
마시멜로를 듬뿍 올리고, 시나몬 가루도 뿌린 후, 길쭉한 막대과자 두어개를 꽂아 완성.
생각지도 못했을 아기자기한 코코아를 건네주자 앨리스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이상하게 코치는 가끔씩 센스가 있단 말야."
"원래 담력테스트 끝나고 모두한테 타주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둘이서만 마시게 됐네요."
한밤중의 밤공기 아래에서 서늘해진 몸에 따뜻하고 달달한 코코아가 감미롭게 스며든다.
두 손으로 머그컵을 들고 홀짝홀짝 마시는 앨리스.
"후... 너무 맛있어...
몸에는 안좋겠지만.
코치, 왜 맛있는 건 다 건강에 해로울까?"
절절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가끔씩 먹는 건 괜찮아요."
"그렇겠지?"
나는 무릎담요와 점퍼를 가져와 앨리스에게 둘러줬다.
가끔 마시는 코코아는 괜찮지만 찬 공기까지 허용할 수는 없다.
"달달하네."
"좀 찐하게 탔나요? 단 거 좋아하시는 줄 알고."
"아니, 코치가... 나한테 너무 달다고."
먼 산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앨리스.
"너무 잘해줘. 화날 정도로."
"..."
"코치가 이럴 때마다,
가끔 내가 그냥 속 좁은 소인배처럼 느껴져.
괜히 쓸데없이 틱틱거리기나 하고.
코치, 치사한거 아냐?"
"에이, 왜그래요."
"그게 그렇잖아.
내 몸만 몇 번 취했으면 그걸로 만족해야지,
마음까지 얻고 싶다는 거 아냐.
그치, 내 말 맞지?"
정답이다.
난 앨리스의 몸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쟁이다.
사랑 없는 쾌락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걸 알기에.
내가 앨리스를 사랑하는 만큼, 앨리스도 날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타고난 천성이 이러니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부담감 느끼지 않으셔도 돼요."
"..."
"앨리스가 원하는대로, 앨리스 마음에 따라 행동하시면 됩니다.
전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니까요."
앨리스는 막대과자를 하나 뽑아 오독거리며 먹었다.
잠시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한 후, 중얼거린다.
"내가 영원히 코치 마음에 보답하지 못해도 괜찮아?"
"...그럼요."
"그러면 상처받을 거 아냐."
"그렇기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하기야, 뭐 괜찮겠네. 코치한텐 라비도 있으니까. 그치?"
"..."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날 째려보는 앨리스.
"그래, 욕심도 많지.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나까지 넘보는 거 자체가 웃기잖아?
꿈도 꾸지마, 이 플레이보이, 바람둥이 코치."
"하하, 들켰네요."
따뜻한 코코아를 마셨더니 몸도 훈훈해지고, 잠을 청하기 딱 좋은 기분이다.
산 위라서 밤하늘이 참 맑다.
검은 벨벳 위에 뿌려놓은 보석처럼 하늘에 별들이 무수히 수놓아져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서 잡시다."
"...응, 그러자."
앨리스는 모르겠지.
굳이 자기가 뭘 보답하려 하지 않아도...
얘가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기쁨이라는 걸.
...그냥 평소의 너답게 있어.
그걸로 충분해, 요 까칠한 아가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