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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화 〉공포의 스이나(2) (87/109)



〈 87화 〉공포의 스이나(2)


스이나는 생각했다.


트래쉬 코치는 그럭저럭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그뿐일까?

단지 그것만으론, 지금 자신의 변화를 설명하기 힘들다.

재미있고, 편한 사람이다.

같이 있으면 온통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해 질리지않는다.

...그뿐일까. 단지 그뿐일까.




***


그의 첫인상은 별로 특별하지 않았다.

새삼스럽진 않다.
사실 그녀에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으니.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인간군상의 연속.

그녀가 좋아하는 RPG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그들은 일개 NPC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을만한 전용 이벤트가 있는 것도 아니며, 경험치를 듬뿍 보상하는 퀘스트를 내주지도 않는다.

하나같이 따분하고 지루하다.

그저 뻔한 말,말,말들.
억지로 짓는 표정.
하나도 관심없는 수백 수천가지 화제들.


이미 서로의 대화가 시작부터 끝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있으면서도,

대본 읽듯 성실하게,
가짜 미소를 지으며,
자기의 배역을 충실히 연기한다.

그걸 인간관계라고 부른다.


질리지도 않고 똑같은 대화를 매일같이 기계적으로 반복해내는 사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맘에도 없는 말을 종알종알.


그런 사람에게 사회성이 뛰어나다고들 한다.

지긋지긋하기 짝이없다.
게임이었다면 엔터키를 꾹 눌러 전부 스킵해버렸으리라.

헌데 현실에선 그조차 불가능하다.

대화문 스킵이 안되는 게임은 욕먹어야 마땅하다.
최저 평점을 매겨줄 잠시의 수고조차 과분하다.

고로, 현실은 똥겜이다.
그게 스이나의 결론이었다.

유치원이었나, 초등학교였었나.
아무튼 한참 전의 일이다.

그 혹은 그녀였는지도 기억 안나지만,
누군가 스이나에게 말했다.

-왜 편식을 하니? 안좋은 습관이란다.


당시의 스이나는 어렸다.
납득이 안가도, 굳이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는게 세상 사는데 낫다는 걸 그  몰랐다.

-...좋아하는 거만 먹고 싶으니까요.
-그러면 안돼.
-...왜 안되는데요?
-건강하게 쑥쑥 크려면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한단다.


스이나는 굳이 더 건강해지고 싶지도, 쑥쑥 크고 싶지도 않았다.

파프리카, 양파, 피망, 버섯을 꾸역꾸역…
토악질을 참아가며,
한 젓가락에 물 한 컵씩 알약 삼키듯...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렇게 괴로움을 참아가며 오래 살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사는게 아니라 발악이오, 연명이다.

그녀의 생각을 아이의 언어로나마 서툴게, 하지만 최선을 다해 전했다.
한 명쯤은 내 말을 들어주겠지, 라고 생각하며.

부질없는 노력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오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스이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내려진 평가는 냉정했다.

‘버릇없는 아이.’
‘게으르다.’
‘사회성이 떨어진다.’


언제부턴가 스이나는 남들과 별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해할 마음이 없는데 얘기해봐야 공연히 감정만 부딪힐 뿐이니.

그녀도 알고 있다.

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은 그녀가 아니라 저 반대쪽이라는 걸.

어쩌면 그들의 말대로, 그녀는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평생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는 걸.

‘그래도 하기 싫은건 하기 싫은거야.’


괴로운 건 싫다. 즐겁게 살고 싶다.
그저 그 뿐이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그녀에게 피망이니 하는 것들을 억지로 먹이려는 사람은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나아진 건 없었다.
편식이 사소한 문제로 여겨질만큼 그녀에게 바라는 주변의 기대가 훨씬 늘어났을 뿐이니까.


-머리는 좋은데, 왜 공부를 안하니?
-반에서 친구들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자퇴한다고? 세상에.
-사람이면 사람답게 자기 앞가림은 하고 살아야지. 언제까지 방 안에 콕 틀어박혀서 귀신처럼 살래?


너무 지겨워져서, 그냥 다 그만두기로 했다.
지독히도 따분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한없이 스스로의 안으로 침잠하기로 마음먹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최소한의 생리작용을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면 방에서도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


4평짜리 방은 스이나의 요새.
어둑하고 마음 편한, 유일한 안식처.


그런 그녀를 신경써주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언니 한 명.
언니에겐 그저 미안한 마음 뿐이다.

이런 자신을 한없이 기다려주는 유우를 대할 때면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고 아팠다.

못난 스스로가 싫다.
그 반작용으로 더더욱 현실에서 멀어진다.
그녀의 껍데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밖이 아니라 안에서 딱딱하게 굳어 이제는 주인인 그녀조차 뚫고 나갈 수 없다.


그랬었는데…
그렇게 살아왔었는데…

자꾸 억지로, 자기 손을 붙잡고, 있는 힘껏 끄집어 올리려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

“자, 이제 우리 뭐부터 할까요?
보니까 호러 영화 하나 새로 개봉한  있는데.
그거 볼래요?”
“...”


극장이라.
언제 마지막으로 갔었는지 기억도 안난다.

영화는 좋아하지만, 방에 있는 TV로 혼자 본다.

그게 훨씬 편하니까.

“시내까지 나가야 하는데요…”
“가죠 뭐.
간 김에 영화 말고 다른 것도 싹  한번 체크해보자구요.
공포 만화, 공포 게임...
괜찮죠?”
“...알았어요.”


스이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의 권유는 어쩐지 거절하기가 힘들다.

왜일까?

처음엔 그냥 언니가 시켜서, 억지로 몇 번 어울려줬을 뿐이다.

스포츠라니.
지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어색하고 황당하다.
우스꽝스럽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어린애같다.

금새 서로 지치고, 포기하게 될 줄 알았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항상 그랬듯.

그러다 감정의 부스러기들만 남기고 흐지부지되는 거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같이  자꾸 하자고 꼬드긴다.
해보면 재밌을거라나.

그래,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처음엔 죽을만큼 힘들었지만 하다보니 그래도 진짜 죽지는 않는구나, 싶었다.


<홍삼 스포츠>에서 알게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이다.

그녀를 편하게 받아주되, 뭘 강요하지는 않는다.

<홍삼 스포츠>의 사무실 맨 안쪽 두번째 소파가 언제부턴가 그녀의 지정석이 되었다.

 일이 없어도 훈련장에 꼬박꼬박 ‘출근’해 굳이 거기에 앉아 게임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느 날 언니가 말했다.

요새 아주 건강해졌다고.
보기 좋다고.
마음이 놓인다고.

사랑하는 언니가 기뻐한다니 그건 다행이다.
하지만 의아하다.

내가 정말 달라진건가?
스이나는 자문했다.

잘 모르겠는데…
코치가 시키는대로 의욕없이 적당히 맞춰준 것 뿐인데 말이지.


지금도 그렇다.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어물쩡대며 코치 하자는대로 따라가니 이게 웬일,

어느샌가 사람 많은 영화관 로비에서 팝콘을 고르고 있다.

“고소한맛, 달콤한맛, 양파맛, 치즈맛… 뭘로 할래요?”
“...음…”


 난 여기서 팝콘을 고르고 있는 건가.

스이나는 문득 잠들었다가 낯선 곳에서 깨어난 것처럼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영화관에 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표를 뽑고 간식거리를 사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다.

“...하나만 고르기 좀, 힘든데요…”
“그러면 라지콤보로 할래요?
두가지 맛을 반반씩 담아준대요.
음료도 한 잔씩 주고.”
“...괜찮은 것 같아요.”


하나는 양파맛, 하나는 치즈가 좋겠다.
양파는 싫지만 양파맛은 좋으니.
음료는 콜라로.

스이나가 말하자 코치는 알아서 척척 주문에 계산까지 처리해줬다.


“그치만… 달콤한 맛도 궁금하긴 하네요…”
“그래요? 다음에 또 오죠 뭐.
다음 주든 다다음 주든 저는 시간 많으니까 언제든지 말만 하세요.”
“...네.”


‘다음’이라.

그 말에 스이나는 마음 한구석이 저도 모르게 편안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이 감정은 뭘까.



***

로비에서 잠깐  트레일러만 봐도 짐작이 갔지만, 역시 형편없는 영화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꽥꽥 시끄럽게 소리만 지르는 B급 싸구려 호러무비.


너무 구려 오히려 시간을 들여 감상해  스이나쪽에서 돈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완전 별로다. 그쵸.”

코치와 스이나는 스탭롤을 기다리지 않고 나왔다.
어떤 영화들은 가끔 스탭롤 끝에 짤막한 쿠키영상같은 걸 집어넣기도 하지만 지금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싹싹 비운 팝콘통을 버리며 스이나도 동조했다.


“전… 마지막 30분은… 이에  팝콘 쪼가리 빼는게 더 재밌었어요…”


코치가 웃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나보다.
스이나는 100% 진심이었건만.

“너무 영화가… 설명조인게… 악령의 정체는 무슨무슨 악마였고…
하면서 괜히 말이 많은 느낌….이었어요.”
“아, 뭔 느낌인지 알겠다. 저도 그런 생각했었는데.”

뒤의 커플이 실례합니다, 하며 그들을 지나쳐갔다.
통로가 좁아 그녀와 부딪힐 것 같다.
코치는 익숙한 동작으로 스이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 사람은 스킨쉽이 자연스럽다.

여자경험이 많은걸까.
겉보기에 그런 분위기는 아닌데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코치의 넓은 어깨 안에 잠시 바짝 몸을 붙인 채 스이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킁킁.

코치의 품 안에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오랜만에 맡아본다. 괜찮은데, 어느 회사 제품일까…?

향에 심취해 코를 벌름거리다 시선이 느껴져 올려봤다.

코치가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냄새나요?”
“...아니요.”


죄지은 건 아니지만 부끄러운 기분.

스이나는 멋쩍은 얼굴로 괜히 한 번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부끄럽다….니. 이것도 이상해…
이 사람 앞에선, 가끔씩 부끄러워질 때가 있어. 내가 왜 이러지…?’

저번에 그녀의 방에서 같이 놀았을 때도 그랬다.
살면서 느껴본 적이 없던 부끄러움, 떨림, 긴장, 설렘...

떠오른다. 코치의 거대한 물건이.

그 사이즈는 스이나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아직까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성의 몸에 대해 성적인 흥미를 보이며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되어간다.

친구와 비밀스런 토크도 나누고, 성교육도 받고, 필요하면 서적이나 영상을 참고자료 삼아가며.

발랑 까진 녀석들은 직접 실습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남들과는 괴리된 정서를 유지한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된 스이나는 자연스럽게 성장하며 쌓았어야할 성지식이 다소 부족했다.

국어사전을 들춰야 겨우 의미를 알 수 있는 난해한 어휘들처럼,
성적인 이야기들은 그녀에게 잘 와닿지 않는 머나먼 세계의 이야기였다.

부족한 영양 섭취로 인해 다소 부실해진 그녀의 바스트처럼 스이나의 성관념도 천진난만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이성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스이나는 생각했다.

그 때 코치와 자기 사이에 흐른 분위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건이 크고 단단해지는 것은, 성적인 자극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알고는 있다.
보기는 처음이다.

남자의 성기가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부풀어오를 줄은 몰랐었는데...

쿠퍼액이 분비되는 것도 마찬가지.

스이나는 혼란스러웠다.
코치는 그  나와 사랑을 나누길 바란걸까?

나같이 별난 여자애와?

만약 코치가 원했다면… 그  나는 거부했을까?
아니면, 무슨 농담을 하냐며 웃어버렸을까.

모르겠다.

나는 코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애초에, 옷벗기 게임이라니.
그런 건 왜 한걸까?
분위기가 너무 달아올랐던  문제다.

이제와서 스이나는 자기가 부주의했음을 깨달았다.

‘코치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내가… 유혹이라도 하는 줄 알았으면 어떻게 하지?’

치녀가 따로없다.
남녀사이에 해도  게임이 있고 아닐 게 있지,
좋다고 훌렁훌렁 벗어던지다니…

부끄러워서 언니한텐 말도 못한다.



“무슨 고민을 그리 해요?”
“아...아니에요.”

다정하게 건네오는 트래쉬의 물음에 스이나는 화들짝 놀랐다.

코치는 꿈에도 모르겠지.

내가 이런 음란마귀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걸…

스이나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평소에는 별 생각 없던 코치의 평범한 얼굴을 지금은 똑바로 마주하기가 힘들다.

‘아… 왜이래. 나.’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스이나는 트래쉬의 일거수일투족이 눈에 밟혀 어쩔줄을 몰랐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남들보다 늦게 찾아온 성적인 호기심은 은밀하면서도 깊었다.


지금이라도 조금 거리를 둬야 하는 걸까.

하지만 또,

그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게 문제다.

코치와 함께 하면 그럭저럭, 만사가 재미있다.

시시껄렁한 B급 영화.
빈말로라도 좋은 평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런데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냥...같이 보니까 뭘 보든 재밌었다.

팝콘도 먹고, 콜라도 마시고.
둘이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영화 참 별로라며 감상을 나누고.

이렇게 함께 보내는 시간 자체가 즐겁다.

당분간은 조금만 더,
이 사람이 하자는대로 끌려다니고 싶다.

내키지 않아도 코치가 말해준다면.

‘한 번만 같이 해봐요.’라고 말해준다면.

뭐든 못이기는  따라갈  있을텐데.

“이제 뭐할까요?”
“...글쎄요…”


무관심하게 대답해도 코치는 그러려니 태연하게 받아넘긴다.

이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상처받지 않는걸까.

내 무신경함도, 나태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때로는 오빠같고, 때로는 아버지같기도 한 희한한 사람.

그리고 때로는…
이 다음의 감정은 아직 그녀로선 정의내리기 힘든 미지의 영역이다.

스이나는 속으로 웃었다.

하기 싫은  억지로 하는데도, 즐겁다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다.


"아, 오락실 갈래요? 가서  쏘는 게임 몇 판 해보자구요.
무서운 걸루다가."
"...좋아요."


이번엔 오락실인가.
지치지도 않는 사람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코치도… 나와 노는게 재밌는걸까?'

그랬으면 좋겠다,하고 스이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처음이다.
나뿐만 아니라… 내 눈앞에 있는 사람도 즐거웠으면, 하고 바란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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