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공포의 스이나(4)
다음으로 우리가 향한 곳은 호러컨셉의 방탈출카페.
지극히 인싸취향의 감성이 가득한 곳이라 낯선 풍경에 다소 어색해하는 스이나.
피어싱을 한 젊은 알바생이 간단히 룰을 설명했다.
“눈가리개하시면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제한시간 한시간 반이고,
트릭룸 안에 억지로 힘줘서 열거나 해체해야하는 물건은 없어요.
이 점 꼭 유념해주세요~”
알바생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후 안대를 벗으니 온통 음산한 핏빛 조명으로 가득한 방이었다.
우리가 택한 ‘어려움’난이도의 방.
“지금부터 시작할게요~ 두 분 모두 시간 내에 꼭 탈출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스이나와 나는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시뻘건게 암실 같기도 하고, 분위기는 그럴듯하네요.”
“...바로 문, 따버리고 나가면… 탈출할 수 있는거 아닌가요?”
스이나의 염동력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럼 재미없잖아요. 문 수리비도 저희가 물어내야할테고…
정석대로 갑시다.”
“...”
일단 기본 공략법대로 방 안의 물건들을 차분히 하나하나 살펴봤다.
서랍 안, 시계 뒤, 두꺼운 책 사이.
뭐 없나?
테이블 위엔 작은 체스판이 놓여있다.
일사불란하게 전열을 갖춘 백과 흑의 체스말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코치, 여기 이런게…”
스이나가 책장 옆에 붙어있던 메모 한 장을 보여줬다.
-벽은 조여오고,
도망칠 곳은 없도다.
바보의 최후.
“바보의 최후…? 이게 무슨 말일까요?”
“....흐음….”
스이나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체스판이 괜히 있을리가 없어요…
쓸데없는 걸 놔둬서 헷갈리게 하면 똥겜이니까....”
“똥겜이라니…”
“아마, 이게 답 아닐까요…”
스이나는 체스판의 말 하나를 집어들었다.
하얀색 폰.
체스를 잘 몰라 난 말 이름과 행마법만 겨우 알 뿐이지만, 스이나는 나름 익숙하게 폰을 한 칸 앞으로 옮겼다.
“그래서요?”
“여기서, 흑도 e7의 폰을 e5로 옮겨요.”
e7은 뭐고 e5는 뭐지?
스이나는 다시 오른쪽에서 두번째 하얀 폰을 집어들었다.
“백이 g2의 폰을 g4로 이동시킨다면, 몹시 잘못된 대응… 게임은 여기서 끝이에요.”
“예? 2수만에요?”
“왜냐면 이렇게 되거든요.”
검은색 퀸을 들어 대각선으로 죽 끝까지 전진시키는 스이나.
“이러면 백의 킹은 도망갈 곳이 없으니, 체크메이트예요.
이론상 가장 빨리 게임 한 판이 끝나는 수죠.
하지만 백이 말 그대로 바보처럼 플레이하지 않는 이상 이런 결과는 좀처럼 안나와요…
그래서, 풀스메이트Fool’s mate.
바보의 체크메이트라고도 부르죠.”
“아, ‘바보의 최후’...”
기껏 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만 아는 내가 보기에도 백의 킹은 더이상 흑의 퀸으로부터 도망갈 곳이 없어보였다.
앞, 뒤, 옆, 모두 막혀있다.
“진짜 끝났네요.”
띠리링~
따라라라… 뚜루루...
스이나가 ‘바보의 체크메이트’대로 수를 놓자,
체스판에서 오르골소리가 흘러나왔다.
붉은 조명 아래서 울려퍼지는 음악이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 뭐, 뭐야 이거?”
쿠구궁-
기계장치들이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의 벽이 우리에게 짓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천장까지 내려온다.
자동차 폐차장의 압축기 안에 들어온 기분이다.
“위,위험한 거 아닌가요?”
“...연출 괜찮네요…”
1m정도 움직이자 벽의 움직임은 멈췄다.
덕분에 실제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확 줄어들었다.
“...이런 설정인가봐요. ...힌트를 찾고 문제를 풀며 진행할 때마다, 방이 좁혀지는…
‘벽은 조여오고, 도망칠 곳은 없도다’...”
“세상에.”
“그래도 진짜 죽을 정도로... 압축하진 않을거예요.
당연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좁혀질 쯤에 탈출구가 열리겠죠.”
이 세계의 방탈출카페는 꽤 연출에 힘을 줘서 만들었나보다.
우리들은 다시 방 수색을 이어나갔다.
전체적으로 방이 좁아지며 구조가 변경되어, 이전에 드러나지 않았던 서랍이나 벽장들이 보였다.
하나하나 열어봤다.
“비밀번호 입력식 금고… 보석함…새로 찾은건 이정도네요.”
보석함에는 싸구려 브로치와 반지, 말린 꽃잎들이 담긴 작은 포푸리가 들어있다.
거기에 ‘우리 사랑 영원히, 21년 3월 21일.’라고 쓰인 메모 한 장.
“이건 어떻게 풀죠?”
“...”
곰곰히 하나하나 들고 주의깊게 살펴본 후 스이나가 말했다.
“아마… 비밀번호를 알아내 금고를 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거예요…
그러면 비밀번호가 뭐냐 이게 문제인데요…”
“이 21년 3월 21일이 힌트 아닐까요?
숫자라곤 이거 밖에 없으니까.”
“그럴까요…”
비밀번호는 네 자리.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월, 일의 순서로 네 자리 숫자를 입력해봤다.
0321.
틀렸다.
“이게 아닌가? 그래도 어찌어찌 잘 조합해보면 될 것 같은데.”
숫자야구하듯 년, 월, 일을 이리저리 순서를 바꿔가며 입력해봤다. 하지만 다 오답이다.
“뭘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스이나가 포푸리를 집어들었다.
산 지 오래되었는지 향은 다 사라진지 오래다.
“숫자는 페이크… 같아요.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제 생각엔 이쪽…”
“포푸리요?”
“예. 보면 자스민, 라벤더, 로즈마리 세 종류가 있어요…”
의외로 꽃 지식에 해박한 스이나.
“꽃의 이름으로 어떤 아나그램을 만들어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아마 꽃말...이 힌트지 않을까 싶어요…
자스민의 꽃말은, ‘당신은 나의 것’...
라벤더는, ‘정절’...
로즈마리는, ‘영원한 사랑’...”
“호오.”
꽃말까지 잘 아는, 의외로 소녀소녀한 스이나.
스이나가 말을 이었다.
“로즈마리의 꽃말이, 사진의 문구와 유사하지 않나요?...
‘우리 사랑 영원히’, ‘영원한 사랑’...”
“그렇네요.”
“그러면 또 이제…”
반지를 집어든다.
“평범한 반지 같지만, 이건 ‘공명석’으로 만든 반지일 가능성이 높아요.”
“공명석?”
“예. 주변의 소리에 반응하는 특이한 마법적 성질이 있는 보석이예요.
근데 일반 보석들하고 외관상으로는 거의 구별하기 힘들어서,
주인이 아니면 공명석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힘들죠…”
여기서 판타지스러운 설정이 나오다니.
나 혼자였으면 여기 절대 탈출 못했겠다.
“보통 첫 신혼여행이나 프로포즈때, 특별한 음성을 녹음하곤 해요…
사랑해, 라든지, 언제까지나 함께… 이런 간지러운 말들 말이죠...
그렇게 둘만이 알수 있는 ‘시동어’를 속삭이면, 돌에 녹음한 짧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신기한 보석이죠…”
스이나가 ‘사랑해’라고 말할 때 살짝 얼굴을 붉힌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냥 조명이 붉게 번득여서 그렇게 보인 것뿐인가.
“그래서 아마 이 반지에 속삭이면 암호가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정말 스이나 말대로, 반지 위 작은 보석에 입을 가까이 대고 ‘로즈마리’라고 말하자 예의 그 오르골소리가 흘러나왔다.
뚜루루루… 따라라… 1125. 1125.
뚜루루… 1125. 1125. 따라라…
“진짜다! 1125가 비밀번호인가 봐요. 스이나 혹시 천재인가요?”
“...쿡쿡…”
스이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
그렇게 여러 문제들을 푼 후,
우리는 무사히 ‘어려움’난이도의 방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스이나가 혼자 90%는 다했고 나는 옆에서 감탄만 했을 뿐이지만…
“그럭저럭… 재밌네요…”
스이나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즐긴 모양이다.
“포인트 앤 클릭 방식의 어드벤쳐 게임같은 구성인데…
직접, 실감나게 체험한다는 점이… 좋네요… 별로 무섭지는 않지만…”
“전 좀 무서웠는데…”
“코치는 쫄보라서 그래요…”
아까부터 피어싱을 한 알바녀석이 스이나를 흘깃흘깃 곁눈질하는게 거슬린다.
녀석, 우리 스이나가 귀여운건 알아가지고.
오늘 스이나가 좀 예쁘게 차려입긴 했다.
하얀 원피스에 하늘색 가디건이 정말 잘 어울린다.
나는 일부러 보란듯이 스이나의 손을 턱 잡았다.
알바녀석의 표정이 푹 구겨진다.
헌데 동시에 스이나도 긴장하는게 느껴졌다.
“....코,코치…?”
“슬슬 갈까요?”
“....예….”
오늘따라 좀 얘가 쭈뼛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평소엔 무신경하던 애가 이제와서 손 잡는 정도로 새삼 놀라긴.
“저, 하나, 또, 생각난 게 있는데…”
“괴담이요?”
“네.”
들려주세요, 라고 말하려다 순간 멈췄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볼 때 얘의 괴담은 여전히 허무맹랑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간단히, 한번 줄거리만 얘기해주실래요?”
“그러면 별로 안 무서울텐데… 알았어요.”
***
<스이나의 괴담: 정말 탈출해야 한다구!>
방탈출카페에서 놀던 커플의 이야기예요…
한창 몰입해있는데, 밖에 불이 난거예요...
그런데 바보커플은 그것도 게임의 일환이라고 착각한 거죠…
실감나네!
그러게 말야, 진짜 뜨겁기까지 해!
...라면서 말이죠.
검은 연기가 흘러들어오고, 벽지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방 한복판에서…
매운 기침을 연발하며...
재미있다며 자물쇠와 비밀번호를 찾아요…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겨우 진화작업이 끝나죠…
타버린 문을 걷어차고 소방대가 들어오니…
대원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숯검댕이가 되었는데도 비밀번호 풀이에 매진한채로 죽어있는,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행복한 얼굴로 죽은 커플의 모습이에요..
***
“전보다 나아졌어요.”
“예?.... 정말이에요, 코치?”
“약간 괴담이긴 해요.
근데 그렇게 무섭진 않아요.
무서운 것보다 한심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
그래도 약간 발전한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아까 그 우주선 게임이야기보다는.
“일단 방탈출카페라는 소재는 어느정도 듣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요.
게다가 카페에 불이 났다는 설정도 전혀 허황된 건 아닙니다.
불타는 건물 안에서 숨이 막혀 죽어가는게 끔찍하고 무서운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요.
즉 우주선에서 외계인의 타노스식 선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아케이드 게임을 한다는 설정보단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거죠.
다만 괴담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너무 말도 안돼요.
무섭다기보다 한심하고 바보같아요.
그래서 저는 여기서 조금 점수를 깎았어요.”
“...”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두려운 상황을 제시할 것.
우주선 일대일 격겜은 안된다.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할 것.
방탈출카페의 바보커플은 곤란하다.
조금조금씩 경험을 쌓아가며 발전하는 스이나였다.
***
영화에 오락실, 방탈출카페까지 달리고나니 스이나가 조금 피곤해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다리 좀 뻗고 쉬게 해주는 게 좋겠지.
다음 코스로 만화 카페에 가기로 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만화책을 뒤적거릴 수도 있지만, 만화 카페엔 누워서 맘놓고 뒹굴거릴 수도 있는 오픈된 룸들도 많기 때문.
우리는 2층 사다리를 올라가 동굴처럼 파인 안락한 룸에 자리를 잡았다.
안에 들어가 커텐을 치니,
소리야 어쩔 수 없지만 외부로부터의 시선이 차단되어 둘만의 아늑한 보금자리같다.
“먹고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맘껏 주문하세요. 제가 다 쏠게요.”
“...네.”
카페 안 책장을 둘러보며 이 세계의 유명한 공포 만화들을 싹쓸어왔다.
공포만화들은 대개 표지부터 무섭다.
어쩐지 저주의 기운이 뿜어져나올 것 같아 내 방 책장엔 절대 꽂아 놓기 싫은 비주얼…
“만화는 역시 괴기스러운 그림의 임팩트로 승부를 보는 경향이 있네요.
페이지를 넘겼을때 헉! 하고 놀라게 된다고나 할까.
말로 공포를 느끼게 해야하는 괴담하고는 잘 안맞는 것 같기도…?”
“...그러...네요…”
영 대답이 시원찮다.
스이나는 옆에서 페이지를 몇 장 팔랑팔랑 넘기는가 싶더니, 좀 있다가 보니 고개가 옆으로 기우뚱 넘어가있다.
넘어갈듯 말듯 오뚝이처럼 스이나의 머리가 가물가물 흔들린다.
‘졸린가보네.’
자연스레 내 어깨에 기대 꾸벅꾸벅 조는 스이나.
이곳저곳 돌아다녀 피곤했던 모양이다.
깨우지 않고 한 잠 자게 냅두기로 했다.
만화카페의 매력은 자고 싶을 때 그대로 푹 자고 일어나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거다.
나는 홀로 만화를 탐독했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괴기현상을 다룬 공포만화.
처음엔 별로 내 취향이 아닌 듯 했는데 읽다보니 묘하게 푹 빠져서 몰입했다.
“쿠우… 쿠우…”
귀여운 숨소리를 내며 쌕쌕 잘도 자는 스이나.
별 신경 안썼는데 자연스럽게 내 무릎을 베고 잔다.
어쩐지 아까부터 다리가 좀 저린다싶더니.
미인은 자는 모습도 참 예쁘다.
따로 정리를 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그대로 자란 눈썹.
높고 날렵하진 않지만 오똑하니 보기 좋은 코.
앵두같니 뭐니 하는 촌스러운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그냥 앙증맞다는 말이면 충분한 작은 입술.
대가가 힘을 빼고 가볍게 그린 화풍의 미인같다.
종류는 유화보단 수채화.
제목은, 글쎄, <아직 사랑을 모르는 아가씨> 정도면 어떨까.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평소엔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없으니 실컷 봐두기로 맘먹었다.
저번 빼빼로게임이 생각난다.
그때도 이렇게…
갑자기,
예고도 없이 스이나가 뿅 눈을 떴다.
무릎 베개를 한 그대로 눈만 가물가물 뜬 채 빤히 날 바라봤다.
그림의 제목은 <자다 일어난 아가씨>로 바꿔야겠다.
“...뭔가 가깝네요, 코치…”
“...그러게요. 잘잤어요?”
“네…”
아직도 꿈 속에서 헤매는 듯 몽환적인 목소리로 스이나가 말했다.
“만화카페…. 였나요, 여기?
...잠이 무척 잘 오네요…
맘에 들어요…”
“그쵸? 저도 즐겨 오는 곳이에요.”
“...”
근데 이제 깼으면 슬슬 일어나도 되는 거 아니냐?
스이나는 머리를 들 마음이 조금도 없어보인다.
“좋은 기분이에요.”
“뭐가요?”
“무릎베개요. …옛날부터, 저게 뭐가 좋다고 하는걸까… 하고 궁금했는데.
실제로 해보니 알겠네요…”
그거야 누워 있는 입장에선 편하겠지.
해주는 입장에선 조금 무겁고, 자칫하면 다리가 저리기 쉬우니 마냥 좋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저기, 있잖아요…”
“예.”
“궁금한 거, 하나만... 더 해봐도 되나요?”
“뭔데요?”
“있어요, 그런게…”
아직 잠에서 제대로 안 깨 정신이 혼미한 모양이다.
혹시 꿈속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해보세요.”
“...”
스이나가 머리를 들었다.
그대로 목을 쭉 빼고, 가만히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