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공포의 스이나(5)
실수가 아니다.
입술과 입술의 부딪힘.
방금 스이나는 키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행위를 했다.
아기새가 부리를 가져다 대듯 그렇게 얼굴을 마주 댄 후, 해야 할 일을 끝냈다는 표정으로 슬며시 고개를 떼는 스이나.
그러고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자, 어때요. 라고 묻는듯한 담담한 표정.
“...”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만 흘렀다.
“저기요, 스이나…”
“...네.”
태연하게 대답한다. 별일 아니라는 듯.
“빼빼로게임, 아니죠? 과자도 없고.”
“...네.”
“지금은, ... 혹시… 어떤?”
“키스예요.”
“키스...맞나요?”
“네.”
알고 한 거였나. 머릿속이 어지럽다.
얘는… 내게 별 감정 없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니면, 예전부터?
스이나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녀가 멋모르는 철부지 여자애에서, 깊은 비밀을 숨긴 매혹적인 팜므파탈로 바뀌어보인다.
“그냥… 궁금했어요.”
“...”
“어떤 느낌일까, 하고…”
다시 내 무릎 위에 편안히 머리를 누인 스이나는 차분히 얘기했다.
“심장이 조금, ...두근거리네요.
근데 그뿐...이에요.
기분이 그렇게 좋지도, 머릿속에... 폭죽이 터지듯 짜릿하지도… 않아요…
...코치도, 그렇죠?
말하지 않아도… 표정을 보니 알겠어요.
…죄송해요. ...괜히 분위기만 어색하게 만들어서…”
“...”
“아직은 ...전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저 같은 여자애는… 평생 알 수 없는 그런… 감각일까요.
...그런가보네요…”
나 이외에는 들을 수 없게 조용히 속삭이는 스이나의 얼굴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나는 흐트러진 스이나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상냥하게 정리해주며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해야 즐거운 거니까요.”
“...”
“키스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뭘 해도 그냥 몸을 부비적 대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어쩔 수 없는 생리반응이야 있겠죠.
그치만 수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예찬하는 그런 황홀하고 짜릿한 기분은 들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예. 언젠가 스이나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 사람도 스이나를 사랑하고 아껴준다면,
그 때 다시 한 번 도전해보세요.
분명 지금과는 전혀 다른 환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그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나이길 바란다.
내가 되도록 만들 거다…
스이나는 한숨을 쉬었다.
“코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스이나가… 저를요?”
“...착각이었나...봐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뭐가 뭔지 잘 몰랐어요.”
“...”
“...조금 더… 천천히 알아봐야겠어요.
이 감정이 뭔지…”
와.
지...진짜인가?
나는 놀라움에 몸이 굳어 뭐라 말도 하지 못했다.
얘가 날… 좋아하고 있었구나.
어쩐지 요새 예전과 달리 날 의식하는 모습이 엿보이긴 했다.
순간 그대로 스이나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도 스이나를 좋아하고, 스이나도 나를 좋아하는데, 해도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러기엔 가오를 너무 잡아버렸다.
뭐 소녀잡지의 연애전문가라도 된 마냥 괜히 주절 주절거렸다. 젠장.
하지만 내가 한 말도 크게 틀리진 않았을 터.
지금 스이나의 반응으로 미루어볼 때 얘는 아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보단 호기심이 더 강할 뿐이다.
스스로 자기의 감정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 관계를, 서사를, 무드를 쌓아올려야 한다.
평범한 여자애라면 지금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스이나라면 더 공을 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 찾아올 겁니다.”
“...네?”
“단지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몸이 자연스럽게 키스를 원할 순간이요.
스이나가 사랑이 뭔지 이해하게 될 순간.
그 때가 스이나의 진정한 첫 키스예요.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
***
만화 카페에서 휴식을 즐기고 나오니 이제는 해가 지고 거리에 가로등이 켜진 시간이다.
스이나가 좋아하는 경양식 왕돈까스로 저녁을 먹은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호러 영화, 호러 건슈팅 게임, 방탈출카페, 호러 만화… 재밌었지만 무섭진 않았어요. 그죠?
하지만 이번 건 좀 다를 겁니다.
뭣보다 허구가 아니라 리얼 100%니까요.”
사실 나도 처음이다.
폐가 체험.
시내 외곽에 있는 슬럼가.
인적없는 밤에는 발길을 들이지 말라고 시에서도 강력히 권고하는 우범지대다.
그 안에서도 특히 으슥하고 구석진 곳에 오래된 폐가가 하나 있다.
호러 매니아들이 꼽는 진짜배기 흉가 리스트엔 항상 순위 안에 드는 유명한 호러스팟.
우리는 지금 그 폐가 앞에 서 있다.
폭이 좁은 이층집.
높은 담장 벽엔 가지각색의 그라피티로 뒤덮여있고, 살짝 들여다보이는 마당엔 온갖 쓰레기가 가득하다.
“흉가로 전락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하더군요.
귀신들린 초상화,
일가족 동반자살,
정체불명의 연쇄살인마…
뭐가 사실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흉흉한 소문이 워낙 많아서, 하여튼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모두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그런 쪽의 취미가 없다면 일반인은 들어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거부할 외관이긴 하다.
“불량 학생들이나 노숙자의 아지트로 쓰였던 시절도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사람들조차 발길을 끊었다고 해요.
분명 뭔가 이유가 있겠죠…”
“...”
스이나는 집의 2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집의 유리창은 1,2층 가릴 것 없이 하나도 남김없이 깨져 바람이 그대로 안에 불어 든다.
“이 흉가를 탐험하면서 스이나가 진짜 공포에 대해 감을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볼까요?”
집의 대문은 굵은 쇠사슬로 칭칭 묶여 굳게 잠겨있었다.
이 집에 남이 드나드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담장을 넘었다.
먼저 스이나가 염동력으로 날 담장 위로 띄우고, 다음엔 내가 손을 잡아 스이나를 끌어올려 줬다.
끼이익-
문을 열자 녹슨 경첩이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냈다.
잠시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혹시 우리 말고 먼저 온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딱히 들려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거실로 향했다.
당연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깜깜하다.
누가 불을 피운 적이 있는지 거실 한가운데 잿가루가 가득한 낡은 페인트통 하나가 덜렁 나동그라져 있었다.
벽에는 온통 낙서들.
단순 외설적인 문구들,
조금 예술성이 엿보이는 그래피티,
그저 휘갈긴 듯한 페인트 자국들.
종류도 다양하다.
한편으로 고약한 냄새가 난다.
일단은 폐가라도 집이니 화장실로 구분된 공간이 엄연히 있건만, 이 집의 방문객들은 귀찮았는지 거실에서 용변을 처리한 모양이다.
“으스스하네요.”
“맞아요… 코치, 무서워요.”
“진짜요?”
스이나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집 관리를 하도 안 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어서 무서워요.
청소를… 조금은 하고 살아야겠어요…
반성할게요…”
다른 곳도 돌아봤다.
부엌, 안방, 다용도실 다 철저히 황폐해진 지 오래다.
낡은 가구에 뿌려져 있는 검은 얼룩이 몹시 신경 쓰인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갖가지 장식품들도.
단지 아무도 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이 집에는 수많은 사람을 끌어모으고, 또 달아나게 한 기묘한 귀기가 서려 있다.
과연 폐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좁고 가파르다.
난간 손잡이를 잡으려 했는데 먼지가 두텁게 쌓여있어 포기했다.
걸음마다 쩍쩍 신발바닥에 달라붙는 계단이 불쾌한 소리를 냈다.
“분위기 장난 아니네요.”
“그렇긴 해요…”
스이나도 동조했다.
그녀가 말했다.
“근데 코치,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는데…
정말 폐가가 무서운 걸까요?”
“네?”
“그게 그렇잖아요…
허락없이 남의 집에 들어간다 치면… 폐가보다, 평범하게... 주인 있고 사람 사는 집에 들어가는 게, 더 무섭지 않아요?”
“그냥 일반 가정집이요?”
“네…
상상해보세요…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에… 지금 저희처럼 담 넘어서 멋대로 들어온 거예요…
거실도 둘러보고, 화장실도 둘러보고…
그런데 안방에서 크게 코를 골며 누군가 자고 있어요…
사람이 있던 거죠, 사실...
들키면 뭐라 설명할 방법도 없어요…
누가봐도 무단침입… 이니까요…
큰일났다, 빨리 나가야겠다, 하고 발끝으로만 살금살금 뒷걸음질하는데…
갑자기 코를 고는 소리가 딱 멈추는 거죠…
순간 긴장해서 저희는 몸이 굳어요…
발이 제자리에 딱 멈추고,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까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어요...
안방문 손잡이가 철컥, 돌아가요…
천천히 문이 열려요…
그리고 안방에서 문틈으로 내다보는 집주인과 저희의 시선이 마주쳐요…
이게 더 무섭지 않나요?
주인없는 폐가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상상하니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건 좀 무서움의 벡터가 다르지 않나…?
“그건 그냥 불법 주거침입으로 걸릴까 봐 무서운 거잖아요…”
“그도 그렇네요…”
2층에는 방 두 개와 창고 하나가 있었다.
이 집에 살던 원래 가족은 방들을 어떤 용도로 구분했을까?
초대받지 않은 방문객들이 수도 없이 헤집어 놓은 덕택에 지금으로선 원래 방의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어라, 여기에 웬 노트가.”
벽장 안에 빼꼼하니 튀어놓은 무언가가 보여 꺼내보니 작은 노트가 한 권 있었다.
표지에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방의 원래 주인이 남기고 간 걸까요?”
“...”
스이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노트를 뒤적거려보니 어린아이의 글씨로 빼곡하게 일상의 신변잡기가 적혀있다.
적당히 페이지를 넘기며 읽어봤다.
***
-4월 8일.
체육수업시간에 또 넘어졌다.
모두가 놀렸다.
아빠에게 얘기하니 “너는 운동신경이 참 없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4월 13일.
동생이 웅변대회에서 우수상을 탔다.
어머니가 축하의 의미로 맛있는 요리를 잔뜩 해주었다.
동생은 저녁 식사 내내 “대단하다” “역시 우리 ...야”며 부모님께 칭찬을 들었다.
-5월 7일
짝사랑하는 ...가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와, 점심시간에 교정 뒤에서 잠깐 만나자고 은밀히 얘기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구름 위를 타고 날아가는 듯 정신이 아찔해 수업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점심도 거르고 먼저 가서 기다렸다.
너무 긴장돼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가 왔다.
“남들한테 비밀인데”라며 ...가 말을 꺼냈다.
...의 입에서 동생의 이름이 나왔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것 좀 전해줄래, 라며 ...가 곱게 접은 편지 한 장을 건네줬다.
“그래, 꼭 전해줄게.”라고 대답했다.
...가 돌아가자마자 편지를 꺼내 읽어봤다.
쉬는 시간에 농구하는 모습에 반했고, 친하게 지내고 싶고,
주말에 만나서 어디에 가서 놀면 재밌을 것 같고 하는 얘기가 시시콜콜 쓰여 있었다.
찢어서 하수구에 흩뿌렸다.
-6월 12일
평소처럼, 혼자 구석에서 조용히 급식을 먹는데 동생이 날 발견했다.
“왜 이런 데서 혼자 먹고 있어, 형. 같이 먹자”라고 청하는 동생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7월 1일
과학 시간에 사고를 쳤다.
평소에도 자주 실수를 했지만 이번엔 큰일이었다.
용액이 담겨있는 비커를 팔꿈치로 쳐 ...의 팔에 엎질러버렸다.
...의 팔이 즉시 벌겋게 부어올랐다.
선생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실험은 중지되었고, 선생님은 황급히 ...를 데리고 양호실로 갔다.
누군가 외쳤다.
“...가 복수한 거야. 일부러 부었어. 틀림없어, 내가 봤어.”
결코 사실이 아니다. 실수였다.
내가 입을 열고 말하려는데, 평소에 날 괴롭히던 ….가 내 배를 무릎으로 찍었다.
순간 숨이 막혀서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침을 흘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모두가 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괴물 같은 녀석.”
“이놈은 악마야.”
***
누군가의 일기인가보다.
비슷한 내용의 우울한 일대기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스마트폰의 플래시 불빛에 의지해 읽다 보니 눈이 침침해, 나는 적당적당히 건너뛰어 가며 읽었다.
“조금 읽어봤는데 죽 이런 내용이 이어지네요.
일기를 쓴 ‘나’는 초등학생인 것 같아요.
학교에선 따돌림당하고,
집에선 우수한 동생에 항상 비교당하는 한심한 형이네요.
‘나’는 부모님께서 동생을 편애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나’는 영리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생을 증오하게 되죠.”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페이지를 더 넘겨봤다.
온통 왕따 초등학생의 절절한 고통의 기록이라 읽기가 괴롭다.
이 일기의 하이라이트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초등학생치고 또박또박 적은 글씨가, 특정 지점에 이르자 돌연 난폭하게 휘갈긴 글씨로 변했다.
8월 23일.
6년만에 여름 최고기온을 찍은 무더운 날의 기록이다.
‘나’는 모두의 앞에서 짝사랑하던 ...의 소지품을 훔쳐갔다고 의심받는다.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나’의 책상에서 정말 ...의 물건이 발견된다.
‘나’를 괴롭히려고 누가 일부러 해놓은 짓이겠지만.
같은 반 아이들은 모두 ‘나’를 저주하고, 심지어 반 선생님까지도 그를 의심하기에 이르고 만다.
‘나’는 결국 오후 수업 중에 책가방을 움켜쥐고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해가 질 때까지 ‘나’는 거리를 떠돌며 방황한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할뿐더러,
담임선생님이 부모님께 먼저 연락했을 게 뻔하니 집으로 갈 수도 없다.
‘나’는 옛날에 자주 놀곤 했던 낡은 저수지에서 오래오래 시간을 죽인다.
슬슬 지금쯤이면 소식 없는 그의 행방을 몇 명쯤은 찾고 있지 않을까, 하고 ‘내’가 생각할 무렵…
“동생이 찾으러 왔겠군요.”
스이나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