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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화 〉이벤트 대회, 배틀 호러퀸(2) (93/109)



〈 93화 〉이벤트 대회, 배틀 호러퀸(2)

“미...미안요.
놀라게 연출 좀 해보려고 ‘번개의마법’을 써봤는데…
조금 오버였네. 아하핫…”


라이카가 어색하게 웃으며 정수리를 긁적거렸다.


“기사님 전력시설 확인 좀 부탁해요..”
“촬영장비 이상 없나 다시 체크해봐.”



한바탕 난리가 났던 스튜디오는 겨우겨우 혼란을 수습했다.

라이카의 ‘번개의마법’이 실수로 전력 시설에까지 튀어들어 가 복잡한 기계장비들이 작살나는 초유의 사태.

대충 의도는 알겠다.
마지막에 ‘쾅쾅’거릴 때 깜짝 놀라게 하는 게 핵심인 괴담이니,
거기에 ‘번개의마법’까지 더해 아예 확실히 임팩트를 줘야겠다 그 생각이었겠지.

근데 좀 과했다…

“이게 연출입니까? 거의 테러 아니에요?”
“...할 말이 없네… 킁…”


자칫하면 광과민성발작을 일으킨 사람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던 라이카의 번개쇼.

 어이없는 건 그런 수고에도 라이카가 얻은 점수는 0점이라는 거다.

측정 장비들의 전원까지 나가버려 비명이고 심박이고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다.

라이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에이, 망했다!”

그녀의 과도한 퍼포먼스의 후폭풍을 수습하느라 잠시 촬영은 중단되었다.


“...라이카 언니, 근데… 정말 실화예요?”
“내 괴담? 에이 뻥이지.”
“...”

스이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애초에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를 약간 꼰 정도에 불과하니까.


“마지막에 쾅쾅쾅~ 이거는 내 창작이야.

근데 자려는데 옆방에서 톡톡톡… 소리가 들렸던  진짜.
가봤더니 아무도 없었던 것도 실제 있었던 일이고.

실제 경험은 거기서 별일 없이 끝났지만, 마지막만 약간 바꿔서 한번 괴담으로 만들어봤어.”
“그렇군요…”


라이카는 ‘어차피 우승은 물건너갔다’며 의욕을 잃은 모양이었다.
음료수나 뽑아 마셔야겠다고 한가로이 스튜디오를 나갔다.

자기 때문에 남들은 개고생인데… 태평한 여자애다.

스이카가 내게 속삭였다.


“무섭지 않았나요? ...라이카 언니의 괴담…”
“그랬나. 그냥 깜짝 놀라게 하는, 소위 깜놀계 괴담 아니야?
별 대단할  없었는데.”
“아, 괴담보다… 이야기 이면에 자연스럽게 깔린 정서가 무서웠어요…”
“응?”
“<블랙이글>말이에요…


선배의 구타와 그걸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옆방에서 살며시 벽을 두드리는 무언가보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때리는 <블랙 이글>의 선배들이 사실 더 무서운 존재가 아닐런지…”

스이나는 유우의 걱정을 하며, 언니도 정말 힘들었을 거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

다시 <배틀! 호러 퀸>대회가 재개되었다.
두 번째 이야기꾼은 <래피드 팬더즈>의 하루루.

대나무가 우거진 깊은 산 속에서 도술을 연마하는 모습이 어울릴  같은 신묘한 아가씨다.

그 난리가 있었는데도 별로 당황하지 않던 모습이 인상적인 여유로운 하루루.

그녀는 진한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얘기했다.


“제 괴담은 듣는 게 아닌 체험하는 것이랍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제 능력 ‘환상공간’이 보여주는 환상을 체험하게 될 겁니다…

신체  정신에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으니 안심하시길..

다만 마음이 약한 분들께는 다소 무서운 체험이 될 수도 있겠지만요.”

그녀가 눈을 감고 가만히 집중하자 일렁이는 오오라가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주변 선수들과 MC뿐만이 아니라,
무대 밑의 나와 PD, 스태프들까지 모두 그녀가 빚어내는 괴이한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간과 공간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반죽되고, 환상이 현실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진수현은 이미 이야기 속 한가운데에 있었다.

***

<하루루의 괴담: 잘못된 선택>

나는 마침내 발견했다.

운명의 반쪽을.

그녀는 진한 커피 한 잔에 달디단 디저트를 곁들이는  좋아한다.

나도 그렇다.

그녀는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정해놓은 목적지 없이 훌쩍 자유로운 여행을 즐긴다.

...나도 그렇다.

그녀는 가끔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했다.

커피잔을 기울이며 꿈결 같은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어디로 가고 싶냐면...

내가 끼어들었다.

파란 바닷가 옆에 하얀색 예쁜 집들이 모여 있는 섬마을, 아닌가요.

그녀가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럴  같았어요. 저도 그렇거든요.

첫 만남에서 이미 더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수 있었다.

눈앞의 사람이 서로가 항상 찾아오던 영혼의 파트너라는 걸.

우리는 작은 취향 하나하나에서부터 가치관, 장래의 꿈까지 생각이  들어맞았다.

이런  두고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라고 하던가.

열렬히 사랑했다.
미래를 약속했다.

세상에 부러울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젊고 건강했다. 예술을 이해했고 유머를 즐겼다.

더없이 행복한 시간들.




마음이 편안하니 일도 술술  풀렸다.

언젠가부터 더 시간을 내서 일하지 않아도, 내가 쌓아둔 재산이 저 알아서 돈을 벌어다 줬다.

자고 일어나면 우리는 더욱더 부자가 되어있었다.

얼떨떨했지만 그만큼 인생을 즐길 시간이 늘어난 것에 기뻐했다.

이제부턴 함께 평생 즐기면서 살자고 마음먹었다.

짐도 하나 없이 훌쩍, 세계여행을 떠났다.
나의, 그리고 그녀의 숙원이었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신묘한 산.

새로운 경험에 목마른 우리는 어느덧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를 헤매고 있었다.


 산에는 기이한 전설이 있어.


그녀가 말했다.


뭔데?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신이 산다던데.

그런게 어딨어.

나는 웃었다.

게다가 만약에 사실이라고 해도 말야.

응?

난 더이상 소원 같은 거 없어.
갖고 싶은 것도, 바라는 것도 없거든.
이미 너와 함께 있는데  더 바라겠어.

바보.

그녀는 웃었다.

산을 오르다 보니 작은 신사가 하나 보였다.


이런 험한 곳까지 올라와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

그 간절함이 내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치만 여기까지  김에, 한  빌어볼까.

뭘?

너와 영원히 함께 하게 해달라고 말야.
어떤 운명이 우리를 방해하더라도, 절대로 떼어놓을  없게.

아하하, 낭만적이네.


 자못 비아냥거리듯 과장된 동작으로 합장했다.

그런데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발밑이 흔들리는듯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마에 손을 짚고 비틀거렸다.


뭐...뭐지?

고산지대라 그런가. 산소가 부족해서 잠깐 어지러워졌나 봐.

그런가…

어쩐지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예정보다 일찍 산에서 내려왔다.




우리는  후에도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가본적 없는 곳을 탐험하는 건 언제까지나 질리지 않을 줄 알았건만, 그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낯선 숙소의 천장을 바라보며 눈 뜨는 아침이 조금 피곤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감흥도 차츰 덜해갔다.

결국 사람 사는 곳이  거기서 거기구나.

이 정도면 충분히 돌아다녔지, 하는 자조적인 감상이 점점 마음을 잠식했다.

나와 그녀가 염원했던 파란 바닷가  섬마을에도 가봤다.


후회했다.
차라리 가지 말걸, 하고.

보기엔 예쁘지만,
뜨내기 관광객의 셔터 소리만 하루 온종일 들리는 흔한 관광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연히 찾은 아마추어 포르노에 고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아이가 나온 걸 목격한 심정이었다.

낭만과 동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람은 결국 살아가다 보면 타고난 천성조차 바뀔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정착하고 싶어졌다. 편안한 안식처, 안정감이 그리워졌다.



우리는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 재밌었다. 이제 뭐할까?

글쎄…

예전같으면 고민도 없이 수많은 즐거운 계획이 튀어나왔겠지만,
그녀는 애매하게 대답을 흐렸다.

많이 돌아다녔으니까 조금 쉴까.

그럴래?




세상사를 잊고 여행을 다니는 동안 우리의 재산은 더더욱 불어나 있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하도 돈이 넘쳐서, 안 쓰는  오히려 세상에 죄를 짓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레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소유와 소비의 쾌감.

세상엔 멋진 재화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전엔 사치라고 지레 단정 지었지만 내 오해였다.

그만큼 능력이 되니 씀씀이도 커질 뿐,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가 뭐라 할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의미한 자기 검열에 골몰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직접 가서 고를 필요도 없었다.

전화  통화만 하면 백화점의 최고담당자가 부리나케 달려와 뭐든 대령했다.

사고 또 사다 보니 나중엔 포장지 벗기는 것도 귀찮아 그저 쌓아놨다.

온갖 명품들이 던져두는 대로 쌓여 산을 이뤘다.
놓아둘 공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이지 않고 이참에 더 넓은 집으로 옮겼다.

당연하지만, 이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 없이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젊은 기업가들이 주로 거주하는 부촌의 궁전 같은 저택.
정원은 전투기가 이착륙해도 될 만큼 넓었다.

다 좋은데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며칠 살아보고 깨달았다.

넓디 넓은 저택이 밤에는 지독히도 적막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온갖 가치 있는 예술품과 기타 값진 것들로 장식된 집은 사람 사는 곳보단 미술관이나 전시회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복도에 또각또각 울리는 나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절로 삭막한 기분이 들었다.

대낮처럼 온 집안에 불을 밝히고 취향에 맞는 클래식을 틀어놔도 그저 공허하게 울려 퍼질 뿐.

그녀와 곰곰이 생각했다.


둘만 있으니 너무 조용한데. 사람들을 한 번 초대해볼까?

그게 좋겠어.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매일같이 파티를 열고, 수많은 사람을 초대했다.


기업가, 운동선수, 배우, 유명한 걸로 유명한 셀레브리티,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오는 파티 중독자들.

적막함은 사라지고 이제야 사람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한껏 들려오는 집으로 바뀌었다.

거실, 정원, 수영장, 발코니, 어딜 가든 내가 초대한 사람들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대신 그녀와 단둘이 마주 보며 하루의 일상을 얘기하던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별 수 없었다.

사람들을 잔뜩 불러놓고 둘이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집주인으로서의 예의가 아니니.


초대하고, 초대받고, 매일같이 술에 취해, 사람에 취해 지내다 보니 이거만큼 즐거운 인생이 또 있을까 싶었다.

허리를 길게 늘인 고급세단의 뒷좌석에서 시중을 받으며 내려 파티장소까지 걸어가는 그 잠깐에도 수많은 사람이  알아봤다.

잠깐이라도 어떻게든 나와 눈도장을 찍어보려고 애를 썼다.

미인들도 많았다.

가지각색 스타일의 여인들.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더군다나 모두 내게 친절했고, 관심을 보였다.


착실하게 살아온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미 내게 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가오는 그녀들이.

파티를 통해 친해진 친구들이 말했다.

이봐, 원래 다 그렇게 노는 거야.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 재미없잖아. 즐기면서 살자고.


나만 나쁜 놈이 아니라는 그들의 말이 면죄부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향락의 늪에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늪은 겉에서 보기엔 더러워 보였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이보다 짜릿하고 중독적일 수가 없었다.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자 그녀와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아졌다는 걸 느꼈다.

전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생각을 구구절절 읊어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

나도, 그녀도 비밀이 많아졌다.

하지만 제대로 감추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서로가 훤히 꿰고 있는 비밀은 엄밀히 말해서 비밀이 아니었다.

아직 불이 옮겨붙지 않은 폭탄일 뿐.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불씨가 튀었다.


그녀가 소리쳤다.


저번 파티 때 그 바보같이 가슴만 큰 금발 여자애랑 좋아 죽더라, 아주.
역겨워서 토나오는  알았어.



나도 말했다.

그러는 넌, 뭐가 떳떳한데?
젖가슴을 훤히 내놓고 어린 모델 품에 안겨서 헤벌레하고 있었으면서.
 눈으로 다 봤는데.


우리는 언성을 높이며 서로의 부정을 폭로했다.

마지막 똥물  방울까지 쏟아내고 나자  이상 태울 장작이 없어 불이 꺼지듯 싸움은 끝났다.

우리는  이후로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입을 열면 또 싸울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우리 둘은 이제 서로 증오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녀를 조롱하기 위해 한층 더 외도에 열중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애인을 갈아치우는 서로를 지켜보며 우리는 차가운 냉소만 흘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있는 듯 없는 듯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이러는 것도 지겹지. 우리 헤어질까.

...그러지,뭐.

나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미리 준비해둔 서류 몇 장에 사인하니 우린 법적으로 남남이 되었다.

화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재산을 반으로 갈라 내줘야 했지만, 그녀가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비용치곤 싸게 먹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겠어.

지독히도 거슬리던 그녀의 수많은 짐도,
역겨운 향수 냄새를 풀풀 풍기던 시시한 놈팽이들도,
그리고 그녀도 이젠 없다.

이 저택은 나만의 집이다.

이제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내게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그녀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은 스스로 내 눈앞에서 사라져주는 것이었다.


겨우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겠군.

나는 만족했다.


...그건 내 헛된 희망일 뿐이라는 걸 나는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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