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이벤트 대회, 배틀 호러퀸(4)
하루루는 130점이라는 나쁘지 않은 점수를 얻었다.
큰 역할을 한 건 역시 그녀의 능력 ‘환상공간’.
단지 괴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듣는 사람이 이야기를 직접 체험하게 하는 점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남들이 라디오라면 그녀 혼자 4DX 영화인 셈.
대회 관계자들도 룰을 조금 재고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어디까지가 괴담의 영역인지…
괴담의 담은 말씀 담談.
이야기로 승부해야 할 거 아닌가, 이거.
완전 치사하다.
어쨌든 하루루의 괴담이 끝나고 모두에게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방금 들었던 괴담의 영향으로 고조된 신체를 다시 평상시 리듬으로 되돌리기 위한 시간이다.
초밥을 먹을 때 다른 맛의 초밥을 맛보기 전 입 안을 개운하게 하려고 먹는 초생강마냥...
방송사에서 기획한 이벤트라지만 대회긴 대회니 최소한의 공평함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인 셈.
나는 스이나와 스튜디오 밖 복도로 나왔다.
잠시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스이나도 내심 감탄한 모양이다.
“...하루루 씨, 대단하네요.”
“장난 아니던데, 진짜.
우리 괴담하고 살짝 공포 요소가 겹치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제 생각엔… 우리 것보다 하루루 씨 괴담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아마 우리가 아무 대책도 없이 정직하게 대회에 나왔다면 몹시 초조했겠지.
현재 대회 1등은 130점의 하루루.
뭐 사실 비교 대상은 0점의 라이카밖에 없으니 1등이라고 해도 대단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근데 하루루는 그런 능력이 있으면 굳이 괴담을 들려주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않나?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환상공간’안에서 계속 놀라게 하기만 하면 되잖아.
어차피 괴담의 완성도가 아니라 신체 반응만 보고 평가받는 대회니까 말야.
맘만 먹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기절시킬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거의 정신 고문마냥...”
“...그것도 그러네요.”
“하기야 뭐 우리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닌가.”
나름대로 괴담 애호가인지, 아니면 너무 심하게 하면 실격당할까 걱정했던 건지 그녀의 꿍꿍이는 알 길이 없다.
“이제 제 차례네요…”
스이나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살짝 긴장되는 모양이다.
“컨디션은 어때?”
“...좋아요.”
“딱 200점만 찍어보자고. 너무 오버할 필요 없어.
안 그러면 라이카처럼 되니까.”
‘번개의마법’으로 임팩트를 줘보겠다고 설치다 자폭해버린 바보 라이카.
어처구니 없는 에피소드였지만 우리도 조심은 해야 한다.
잠시 후면 모두 놀라게 될 것이다.
하루루도 대단했지만, 스이나에겐 상대도 안 될 테니.
“10분 후부터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스탭이 큰 소리로 외쳤다.
스이나는 먹고 남은 쿠키 봉지를 살포시 창가에 올려놓았다.
눈을 살며시 감고 잠시 집중한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염동력의 파장.
봉지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저 홀로 쭈욱 잡아당겨 지며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게 펴졌다.
그러더니 반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접히고 펴지길 반복하며 점차 모양을 갖춰나갔다.
스이나의 ‘염동력’은 수도 없이 봐왔지만 볼 때마다 항상 신기하다.
잠시 후 스이나의 손안에 빈 봉지로 접은 예쁜 종이학 한 마리가 톡, 안착했다.
“멋진데.”
컨디션은 최고다. 컨트롤도 완벽하다.
이제 실전에서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
<스이나의 괴담: 무한 원숭이 정리>
그가 받은 첫인상은, ‘악명높은 감옥치곤 별거 아닌데’였어요...
이봐, 자세를 신중하게 잘 고르게…
한 번 정하면 당분간은 바꾸기 힘들 테니 말야…
감옥의 소장이 친히 그를 데려왔어요...
소장이 그에게 말했어요…
그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어요…
신경끄쇼. 내 알아서 할 테니깐.
그의 심기는 불편했어요…
은행을 털려고 시도 한 건 분명 범죄니 할 말은 없었어요…
하지만 먼저 총을 갈긴 건 경비원이었거든요...
쏘는대로 가만히 맞아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라고 그는 생각했어요…
애초에 그딴 쪼끄만 리볼버로 자동소총에 대항하려 드는 게 잘못이잖아?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도 그때는 눈이 뒤집혔거든요…
화가 나서 앞뒤 안 가리고 흩뿌린 총알에 웬 할머니가 벌집이 된 건 조금 미안하게 생각했어요…
처음 통장을 만들러 온 어린 자매와 어머니까지 죽인 것도요…
신혼 부부,
막 은퇴한 노신사,
만기 적금을 타러 온 주부…
많이도 죽었네요…
자기들 운이지 뭐 어쩌겠어요...
별 수 없잖아요, 하지만…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일일이 주변을 봐가면서 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물론 법정에선 이런 그의 항변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말이죠…
들어가게.
소장이 문을 열었어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천장이 낮고 좁은 독방…
아니, 방이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그것은, 흡사 관…
그를 보관하기 위한 한 짝의 관이었죠…
돌겠군. 이딴 곳에서 살라는 거냐?
제대로 허리 펴고 일어설 수도 없잖아.
개집도 이거보단 넓겠어...
옆으로 누울까, 위를 보고 누울까,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위를 보기로 했어요…
평소 잘 때도 그런 자세로 자니까요....
영안실의 시체보관함 속 시체처럼 그가 자리를 잡고 눕자 소장이 설명을 시작했어요…
머리가 깊숙이 방 안까지 들어가 소장의 얘기소리가 조금 멀게 들렸어요...
지금부터 자네가 받게 될 형벌을 설명하겠네.
귀담아서 잘 듣게.
한 번 놓치면 다시 들을 수 없으니.
쓸데없이 분위기 잡기는, 하고 그는 속으로 비웃었어요…
소장은 계속 얘기했어요…
자네는 죄질이 극히 불량해 이 특별한 감옥에 오게 되었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감옥은 다른 감옥과는 조금 다르다네.
먼저 하나 물어보겠네.
‘시공간왜곡현상’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당연히 그는 그런 어려운 말은 몰랐어요…
간단히 설명해주겠네.
이 감옥 안에선 시간이 평소와 다르게 흘러간다네.
바깥에서 하루가 흐를 때 여기에선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가지.
대강 어느 정도일 것 같나?
…몰라. 일주일?
소장은 웃었어요…
틀렸네. 10억 년 정도라네.
뭐… 뭐라고?
순간 그의 개념을 아득히 뛰어넘는 숫자가 튀어나와 그는 당황했어요…
뭔 개소리야, 인간이 10억 년 씩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
아하 ….그렇구만.
그냥 죽을 때까지 영원히 가둬놓겠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군.
시시하기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소장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어요...
틀렸네.
먼저 첫 번째로, 여기서 자네는 죽지 않아.
뭣…?!
지금 자네는 자네의 몸이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아니라네.
자네의 본래 육체는 저 멀리 담당 시설에서 안전하게 보존 중이야.
지금 자네는 인공 육체에 정신만 옮겨진 거지.
그럴수가…
그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해봤어요.
평상시와 똑같은 그의 몸이었어요...
말도 안 돼. 이게 내 몸이 아니라고?
그렇다네.
정교하게 잘 만들지 않았나?
원래의 몸과 100% 동일한 성능이지만, 딱 하나 다른 점은 절대로 고장 나지 않는다는 거지.
평소처럼 보고 듣고 느끼는 건 그대로야.
….말도 안돼…
두번째, 자네는 영원히 갇혀있을 필요가 없네.
충분히 반성하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어.
뭣… 나는… 사형수 아니었나?
이런.
사형 제도가 폐지된 지가 얼마나 됐는데 그런 말을 하나.
우리 사회는 설령 극악무도한 범죄자라 한들 목숨을 뺏지 않아.
자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없도록 조치를 취해 뒀네.
혀를 깨물든 숨을 참든 죽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말했듯이 자네의 지금 몸은 진짜 인간의 육체가 아니니 말이야.
그러니 부디 잘못된 생각은 하지 말게.
언제가 되건 우리는 자네가 갱생하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사형은 커녕 무기징역조차도 아니니, 안심하게.
무기징역….도 아니라고….?
나… 나갈 수 있다고.
어….언제 나갈 수 있지? 그러면…!?
생각지도 못한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걸 느끼며 그는 간절하게 외쳤어요…
소장이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어요...
혹시 종교를 믿나?
농담해? 집어치우고 빨리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난 언제,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냐고…!
우리 세계에는 인간의 번뇌와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종교가 있다네.
많은 사람에게 깨달음과 용기를 전해준 위대한 성인이 창시했지.
이 종교엔 그 창시자의 가르침을 나무판에 옮겨 적은 ‘경판’이란게 있어.
경을 쓸 때 어떻게 하는지 들어본 적 있나?
….
그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애초에 소장이 말하는 종교조차 들어본 적 없었으니까요...
먼저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질 좋은 목재를 준비한다네.
일반적으로는 단풍나무나 벚나무를 쓰지.
좋은 목재가 준비되면 다음엔 음지에서 반년 이상 건조시킨다네.
이후 바닷물에 1년 동안 담가 둔 후 다시 꺼내 2년을 말리지.
그렇게 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목판이 된다네.
위대한 말씀을 기록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건 쉽게 찾기 힘들걸세.
자, 오래오래 가는 그릇도 준비했으니,
이제 글귀를 담을 차례군.
그렇게 정성 들여 준비한 목판에 담을 글귀를 그냥 허투루 새길 리 없지 않겠나.
유서깊은 사원에서 오래오래 수양한 승려들이 이 의미 있는 작업을 맡지.
그분들은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 절하고, 글자의 의미를 오래오래 마음속으로 되뇐다네.
한 쪽 면에 삼백 개씩, 양 쪽에 정성들여 글자를 새기지.
그렇게 새긴 경판이 삼만 장에서 많게는 팔만 장도 넘게 모여 하나의 ‘경’을 만드는 거야.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고가 배어있을지 짐작이 가나?
그래서 나는 서가에 꽂혀 죽 늘어선 경을 보면 압도되는 기분을 느낀다네.
경판 한 글자 한글자에 새겨진 시간과 노력을 상상하면서 말이야.
무슨 개소리야.
그는 중간부터 거의 흘려 들었어요…
이런 곳에서 설교라니, 기가 찼죠...
그래,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느냐고 물었지.
알려주겠네.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하게.
그게 끝이야?
물론이지.
누우면 눈앞에 한 장의 종이가 보일 걸세.
실제가 아닌 홀로그램으로 된 종이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닳거나 해지지 않지.
자네를 위해 준비한 특별한 경판이라고 생각하게.
그 종이에 쓰게나.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게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라고 말야.
경판을 만드는 심정으로 진심을 담아 쓰게.
다 쓴다면, 즉시 내보내 주겠네.
내 약속하지.
그는 터져 나올듯한 웃음을 가까스로 억눌렀어요…
속으로 한껏 비웃었어요...
장난해? 그딴거야 순식간에 할 수 있지.
원한다면 천 장, 만 장이라도 써줄 수 있어.
이런 순진한 녀석들.
소장은 스위치를 누르며 말했어요...
그러면, 수고하게.
나중에 또 볼 수 있다면 좋겠군.
소장의 발소리가 멀어졌어요...
어디선가 기계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원래도 제대로 운신하기 힘들 정도로 좁은 방이, 돌연 더욱더 그를 향해 좁혀오기 시작했어요…
그는 경악했어요....
압착당한다…!
이대로면 벽에 짓눌려 죽어…
빌어먹을…!!
역시 구라였어… 개자식들….!!
방에서 기어 나오려 했지만 이미 입구는 닫혀버렸어요…
그의 독방은 어둠으로 가득 찼어요…
이제는 정말 관이나 다름없었죠…
그를 향해 다가오는 천장을 마구 손바닥으로 두드렸어요…
애초에 소장도 말했듯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그를 압착시킬듯 다가오던 벽은 곧 멈췄어요…
하지만 좁혀진 채 그대로였죠…
이마와 뺨이 천장에 짓눌렸어요…
양옆의 벽이 좁혀져 강제로 차려자세가 되었어요…
더이상 천장을 두드릴 수도 없게, 옴싹달싹 못하게 몸이 고정되었죠…
자세를 바꾸긴커녕 고개조차 돌릴 공간이 없었어요…
이런 미친….!!
그는 비명을 질렀어요…
딱히 폐소공포증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좁은 공간에 꽉 끼어 있으니 없던 폐소공포증도 절로 생겨날 지경이었죠…
아주 잠깐, 천장을 보고 눕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옆으로 돌아누운 자세였다면 더 끔찍했을 거라고...
하지만 뭐 별 차이는 없었죠…
단 몇 분 만에 몸이 저리고 숨이 막혀왔어요…
등에 땀이 흥건히 젖기 시작했어요…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따끔따끔하면서 간질거리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손을 뻗어 등 뒤를 긁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의 독방…
바….반성문… 빠, 빨리…. 빨리 써야 해…
지금 당장 이 곳에서 나가고 싶어….
허억… 허억…
번쩍, 하고 눈앞에 작은 불이 들어왔어요…
사물함 안에서 작은 틈으로 내다보듯,
그의 눈이 닿는 몇 cm의 지점만 작고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었죠...
검고 아무것도 없어 마치 우주처럼 보이는 유리 밖 공간 너머로 종이 한 장이 보였어요…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간신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저게 반성문….을 써야 할… 그 홀로그램인가… 허억… 흑…
하지만 손이… 닿지 않는데… 도구도 없고…. 대체 어떻게…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는 다 움직여봤어요….
손가락, 발가락, 엉덩이…
심지어 혀까지 내밀어 천장을 핥아봤죠…
엇… 허억… 이거… 손끝에 뭔가… 있어….!!
작은 버튼 같은 게 하나, 오른 손가락 손톱이 겨우 긁을 수 있는 지점에 튀어나와있었어요…
그는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움찔거렸어요…
꾸욱.
겨우 버튼에 힘을 주자 버튼은 뻑뻑하게 눌렸어요…
그러자, 그의 시선 멀리 있는 종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