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6화 〉이벤트 대회, 배틀 호러퀸(5) (96/109)



〈 96화 〉이벤트 대회, 배틀 호러퀸(5)

(ㅏ)


글자 하나가 무심히 떠올랐어요...


뭐… 뭐야?
ㅏ…?


고장난건가…?


잠시  종이에 새겨진 ‘ㅏ’는 사라졌어요…
그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어요…


뭐냐고, 대체…


그가 다시 스위치를 눌렀죠… 이번엔 여러 번…

(ㅈㅇ/ㄹ;)
(ㅏ!ㅠ)
(?ㄴㅂ..ㅍㅇ)

마찬가지였어요…
 수 없는 의미의 글자들이 멋대로 종이 위에 떠오른 후,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수십번 반복한  그는 겨우 눈치챘어요..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무작위 모음과 자음, 또는 문장부호 중 하나가 종이 위에 나타난다는 걸…


하지만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는 아직도 알  없었죠…

답답함에 미칠 듯 숨이 막혀왔어요…
허나 지금 그에겐 맘 놓고 크게 심호흡할 손톱만큼의 공간도 없는 상태…

게다가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점이 또 하나 있었어요…

어떤 글자는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데 어떤 건 오래 남아있어…. 뭐지….?

그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보자마자 원리를 이해할 순 없었죠...

머리가 제아무리 좋다 한들 이렇게 관짝에 몸이 꽉 끼인 상태에선 제 기능을 발휘하기도 힘들겠지만…

한참을 스위치를 누르며 애를 쓴 후에 그는 겨우겨우 하나의 현상을 발견했죠…

처음에 ‘ㅈ’이 나타나면 스위치를 더 누르지 않는 한 저절로 사라지지 않아…
왜지?


그는 종이에 (ㅈ)이라고 띄워놓고 필사적으로 생각했어요…


평소라면 머리 아프게 고민하길 관두고 즉시 때려치웠겠지만,
지금 그에겐 시간이 지나칠 정도로 넘쳐흘렀어요…

할 거라곤 오직 눈앞의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스위치를 누르는 거밖에 없었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위치를  번 가까이 더 누른 후 그는 다음 법칙을 깨달았습니다…

‘정’ 이 글자도 사라지지 않는군….
제길…. 대체 뭐야….

정.. 정…. 정……..


옴싹달싹할 수 없는 관 속에서 그는 미친 사람처럼 되뇌고  되뇌었어요…


그때 어떤 생각이 하나 떠올랐어요….

머릿속에 번갯불이 내리치는 충격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일었어요…


정….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는 소장이 그에게 한 말을 떠올렸어요….


….

….
경판을 만드는 심정으로 진심을 담아 쓰게.
 쓴다면, 즉시 내보내 주겠네.
 약속하지.

….
….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게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렇군.
스위치를 누르면 무작위로 자음,모음,문장부호중  글자가 종이에 써진다.

하지만  문장에…
이른바 ‘반성문’의 내용과 어긋나는 글자가 입력된다면…
지금까지  글은 전부 다 리셋된다…
라는 건가…

설령, ...기회를 주십시ㅇ 까지 썼더라도… 마지막에 ㅗ대신 다른 글자가 나온다면 말짱 도루묵…!?


그는 머릿속으로 세어봤어요…

자음, 모음 합쳐서 40개…

문장부호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20개? 30개?


그렇다면,
한 번 스위치를 눌러서 올바른 글자를 입력할 확률은… 대략 70분의 일.

‘반성문’을 쓰는  필요한 음절과 문장부호의 개수는...94개.


70분의 일의 확률을 94번 연속 적중시키려면…

여기서 그의 계산은 멈췄어요.

그를 탓할 순 없어요...
그가 아니라 대학교 수학교수가 와도 암산으로 이 계산을 해내긴 힘들었을 테니까요…

아니, 교수에게 종이와 펜을 줘도 오랜 시간이 걸렸겠죠…

불가능해.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는 짐승 같은 비명을 질렀어요…


차라리 죽여…!
이 미친 놈들…!
 죽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고,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자해하고 싶어도 머리를 움직일 수조차 없었어요…

혀를 질끈 깨물었지만, 그 순간 그의 이가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하다는 사실을 눈치챘어요…
그의 이로는 혀는커녕 두부도 으깰 수 없었죠...

숨을 참았어요…
그렇게 자살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어도 그거밖에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1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자살하려고 숨을 참은 순간부터 강제로 피부를 통해 호흡이 이뤄졌죠…



그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모든 고통은 그대로 느껴졌죠…


전신이 짓눌리고 조여오는 압박감…

피가 안 통해 무감각해진 팔과 다리…



그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어요…

정신이 나갈 듯한 압박감 속에서 몸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한 거죠…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미치지 않았어요..
몸에, 마음에 가해지는 고통을 1초 1초 단  순간도 놓치지 않고 느끼고 있었죠…

괴롭고 괴로운데 의식을 잃을 수조차 없었죠…

감각이 어그러져 그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고 생각했어요…

냉동실 안에 잊힌  방치된 생선토막처럼, 그가 빙하의 가장 안쪽 아무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 박혀있는 거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 몸이 불탄다고도 느꼈어요…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열기가 느껴졌죠…

얼굴과 사지를 짓누르는 금속 벽이 벌겋게 달아올라 그의 살덩이를 태우는 환상이 떠올랐어요…

나중엔 이게 현실인지 환상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비록 현실과 동떨어진 그만의 착각이라 해도 그가 느끼는 고통은 진짜였어요…

그의 정신이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었던 거죠…

혹한의 냉기와, 타오르는 작열  사이에서 그는 울부짖었어요…


제발… 제발 나가게 해줘...크흑...흑….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그는 스위치를 미친 듯이 눌렀어요…


(리히갶”[ㅂ개ㅈㅂㅇ.ㅂㅇㄹ폊ㄱㄻ)


하루가 지났을까요,  달이 지났을까요?
그에겐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있는 어떤 방법도 없었어요…

손가락 관절이 녹슨 것처럼 삐걱거릴 때까지 그는 스위치를 누르고 또 눌렀어요…


눈물로 흐려진 눈으로 문득 종이를 가만히 바라봤어요...

(정말)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어요…
환각인가?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떴어요…


(정말)

종이엔 ‘정말’로 ‘정말’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기...기적인가?


70분의 1의 확률을 6번 연속으로 뚫고 ‘정말’까지 쓰다니…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어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어요…

그는 뺨을 경련하며 간절히, 아주 간절히 스위치를 눌렀어요…

(정말ㅂ)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자...잠깐!
기다려…!


 )


야속하게도 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정말'은 사라져버렸어요...



그의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영혼에 조각조각 금이 간 사람이 있다면 지금 그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겠죠…


이제야 10억 년이란 무게가 그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진짜로 그는 이 안에서 10억 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에요…

감옥의 10억 년은 밖에선 겨우  하루에 불과해요…



나는… 나갈 수 있나?


그는 되뇌였어요…
나갈 수는 있었어요…
가능성은 분명히 0이 아니거든요…
한없이 0에 가까울 뿐...

그게 언제가 될지는 신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죠…

차라리…
차라리…
감옥 밖의 세계가 멸망하고…
이 감옥을 유지하는 시스템이 붕괴해서…
내 원래 몸을 죽여줄  어떤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몰라...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십 년? 백 년? 천 년?


거기에 십억 년을… 곱한다면?



그는 생각하고  생각했어요…
기대하고 또 절망했어요…

어찌됐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마음을 담아서 스위치를 누르고 또 누르는 수밖에...



***

스이나의 이야기가 끝났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는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자, 그러면 점수는 어떨까.
비명 점수는... 0점.
예상했던 바다. 어차피 이쪽은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

반면에 심박 점수는 쭉쭉 올라갔다. 85점, 90점, 94점…

100점에 도달하자 점수 계측이 멈췄다.



“이….이럴수가!! 만점입니다!!
스이나 선수, 심박 점수 만점!”
“엥, 진짜로?”

라이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 맥박을 재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잠깐, 내 심장이 그렇게 빨리 뛰었다고? 아닌  같은데…?”


말은 하지 않지만 하루루와 시즈도 미심쩍어하는 얼굴이었다.

세 선수가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읽은 MC가 상황정리에 들어갔다.

“뭐 흔히 있는 일이죠~
이야기에 몰입하면 본인의 신체 변화도 미처 눈치채지 못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스이나 선수의 예상치 못한 고득점에 놀란 선수들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희  측정 장비의 신뢰도는 아주 높습니다.
선수 세 명의 장비가 동시에 고장이 날 리도 절대 없고요…
아마 기술적인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한번 확인은 해보죠. 혹시 장비에 이상 있습니까?”

무대  스태프들이 신중히 기계를 점검해본 후, 양팔로 크게 X를 그렸다.


“예. 이상 없다고 합니다.
스이나 선수 기이하게도 비명 점수는 0점, 심박 점수는 만점을 기록합니다.

그러면 뇌파 점수는 어떨까요?”



선수들의 이마에 부착되어있는 작은 파스처럼 생긴 뇌파 측정기.
이것을 통해 인간이 공포를 느낄  뇌에서 발생하는 ‘베타 파’의 파형을 분석한 후, 뇌파 점수를 매긴다.

심박 점수와 마찬가지로 뇌파 점수도 쭉쭉 치솟았다.

결과도 마찬가지.
만 점.


“이야~~ 대단합니다!
심박 점수 만점, 뇌파 점수 만점!
비명 점수 0점을 만회하고도 남는 고득점입니다.

스이나 선수 총점 200점!
130점의 하루루 선수를 제치고 종합순위 1위에 등극했습니다.”


역시 우리 전략이 맞아떨어졌다.

 대회의 본질은 괴담의 완성도를 겨루는 대회가 아니다.

각자의 능력으로 얼마나 점수를 높게 뽑느냐 그걸 겨루는 대회.

기획측의 의도와는 많이 엇나갔지만…

여하튼 하루루가 그 대단한 ‘환상공간’의 능력을 썼는데도 130점이었으니, 스이나의 우승은 이걸로 확정이나 다름없다.


‘크큭…’


모두의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다.
그렇게까지 무서운 괴담이었나? 라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태반.

그도 그럴만하다.




사실 우리는 반칙을 썼다.

먼저 미리 대회에서 사용될만한 측정 장비를 구하는 것부터가 작전의 시작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뇌파 측정장비는 꽤나 전문적인 장비여서 <블루 윙>의 협조를 얻어서야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내부 설계를 분석한 뒤, 스이나의 ‘염동력’으로 자극을 가해 점수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방법을 연습해뒀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스이나는 어디를 어떻게 조작하면 수치가 뻥튀기되는지 완벽히 익혔다.

오히려 어려운 건 너무 과하게 자극하지 않는 것.
맘만 먹으면 섬세한 기계를 박살 낼 정도로 지나친 자극을  수도 있으니 한껏 조심해야 했다.

게다가 우리 작전도 완벽한 건 아니다.

심박이나 뇌파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니 걸릴 일이 없지만,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는데 비명점수가 오르면 누가 봐도 이상할 터.

그래서 비명 점수만큼은 아무래도 건드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걸 보면…

200점을 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환상공간’이라는 치트키를 쓴 하루루조차 기껏 130점.

시즈의 능력이 뭔진 모르겠지만 스이나의 200점을 꺾는 건 무리일 것이다.



***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다시 짧은 휴식시간.
<로즈 엔젤스>의 시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배틀! 호러퀸>의 마지막 주자.

볼 때마다 애가  똘똘하게 생겨서 꽤 호감이 든다. 지금은 우리의 경쟁자지만.

“그 이론에서 모티프를 따온 거 맞죠?

무한한 수의 원숭이들이 무한한 시간동안  아무렇게나 타자기를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 원숭이들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이야기를  번씩은 집필해  거라는 이론.”
“글쎄요. 저는 잘…”


나는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스이나는 ‘맞아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득점의 비결은 뭔가 다른 데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걸 차근히 탐구해보는 것도 흥미롭겠지만…
 기껏해야 이벤트 대회고, 애초에 규정도 그렇게 빡빡하지 않으니까.”

말에 뼈가 담겨있군.
시즈는 은연중에 스이나의 ‘염동력’이 사용되었다는 걸 눈치챈듯했다.
그래 봐야 이제 와서 뭐 어쩔 텐가.
이미 점수처리는 끝났다.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시즈 선수도 자신 있으신 거 같네요.”


그녀는 “글쎄요, 꼭 그렇진 않지만.”하고 말을 이었다.

“스이나 선수가 지금 아주 유리하다고는 생각해요.

근데 이 대회가 <홍삼 스포츠>의 우승으로 순탄하게 끝나진 않을 거라고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니까요. 어떻게 될지는.”

그녀의 말이 묘하게 거슬리는 뒷맛을 남긴다.
얘도 뭔가 준비한 수가 있는 걸까?


“그냥 평범한 괴담으론 100점을 넘는 것도 무리일 텐데…

그러면 시즈 선수는 200점을 넘을  있는 능력이 있는건가요?”
“아니요.”


시즈는 별 고민 없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제 특기는 ‘싸이코메트리’예요.
물건이나 장소의 기억을 읽는 능력.

뭐… 지금 당장 괴담에 어떻게 써먹을 만한 그런 건 아니네요.

소리를 지르게  수도 없고,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할 수도 없어요.

...기계조작도 불가능하고.”


거기까지 눈치채고 있었나.
우리가 측정 장비를 조작했다는 사실을.


“그러면…?”
“그거는 본경기의 즐거움으로 남겨둘게요.
 대회가 어떻게 흘러가나 한번 지켜보세요.”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저 자신만만한 태도가 몹시 거슬린다.

스태프가 휴식시간이 끝났다고 알려줬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마세요. 그러면 먼저 실례.”

시즈는 먼저 무대로 돌아갔다.
스이나와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약간 쫄리는데.”
“...그러게요.”

시즈 녀석, 누가 <로즈 엔젤스>아니랄까봐 상대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이 탁월한 소녀였다.

갑자기 200점이 그리 높은 점수가 아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역전당하면 어떻게 하지?


“근데 뭔가… 시즈 선수는… 대회 결과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데… 기분 탓일까요?”
“뭐?”
“승패보다… 어쩌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나온 걸지도…”


스이나는 시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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