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0화 〉스텔라(3) (100/109)



〈 100화 〉스텔라(3)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VVIP룸의 지하스포츠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번은 봐둬야 했기에,
 김에 스텔라와 함께 경기를 관람하기로 했다.

‘여긴 조용하군.’


품위있는 안내인이 정중히 우리를 자리로 인도했다.

마치 넓은 영화상영관이라도 들어온 듯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여기엔 바깥 콜로세움 경기장의 요란한 환성 같은 건 전혀 들리지 않는다.

둘러보니 자리의 삼 분의 일 쯤이 차 있었다.
이곳의 관객들은 신분을 노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지, 대부분 나처럼 가면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쪽에 앉으시죠.”


안내인이 정중히 말했다.
한 사람당 두 명씩 앉아도 충분할 커다란 의자에 앉자 서버가 잽싸게 와인과 가벼운 요깃거리를 날랐다.


“오늘 경기는…<턴 파이트>네.
요즘은 이게 유행이군.”


스텔라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턴 파이트>...?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 의문에 대답하듯 스텔라가 설명했다.


“지하 스포츠 전용 종목이야.
선수 한 명이 의식을 잃을 때까지 죽어라 싸우는 경기거든.
보면 재밌을 거야.”

살벌한 설명에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경기가 시작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스텔라는 아는 VVIP들이 많은지 그동안 주변 사람들과 인맥관리에 열중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도 알 사람들끼리는 다 알아보는 모양.
나는 뻘쭘하게 가만히 있었다.

‘와인… 비싸 보이긴 하는데...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어.
크림치즈하고 연어 올린 크래커는 맛있네.’

다른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느라 바쁜 스텔라를 대신해 걔 몫의 음식도 내가 친절하게 먹어줬다.
남기면 아까우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어느덧 불이 꺼지고 무대에만 조명이 집중되었다.
이제 시작인가 보다.


“오늘도 이 자리에 모여주신 귀빈분들께 먼저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선수들을 소개해 드리죠.
자, 나와 주세요~!”


진행자의 멘트에 이어 참가 선수들이 한 명씩 걸어나왔다.

“<턴 파이트> 2 대 2 경기에 참가할 우리의 용사들…!

오늘의 테마는 ‘살인 전문가’들입니다.
이야~ 벌써부터 흥미로운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살인 전문가라.
지하 스포츠답게 양념 팍팍 친 과장된 멘트구만.


...이라고 생각한 나는 잠시 후 입을 떡 벌린 채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진짜 범죄자, 그것도 사형수들이었다.

공장에서 분노를 못 이겨 동료 열 두 명을 야구방망이로 때려죽였다는 ‘4번 타자’.

작전활동 중 정글의 원주민 마을에서 대량학살을 저질러 사형선고를 받은 ‘특수부대원’.

3달 동안 경찰의 추적을 피해 가며 연쇄 토막 살인을 저지른 ‘해부학 박사’.

수학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한 반 학생 전체와 교사, 운전기사까지 커터칼 하나로 난도질해 죽였다는 ‘살인 영재’.

이들이 오늘의<턴 파이트>참가 선수였다.

“자, 정말 어렵게 모신 선수들입니다.
하나같이 쟁쟁한 이름들이죠~?

이 분들을 빼 오는데 협조해주신 정·재계의 큰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리고,

그러면 바로 본경기로 들어가겠습니다.”


<턴 파이트>는 2대 2 종목이었기에 선수들은 먼저 팀 편성부터 했다.

‘살인 전문가’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제비를 뽑았다.
뽑기 결과 4번 타자와 살인 영재가 한 팀, 그리고 특수부대원과 해부학 박사가 한팀이 되었다.

잠시 후 무대 위에 사각의 링이 올라왔다.
얼핏 보면 복싱 경기용 링 같기도 하지만 링을 둘러싼 로프가 좀 특이하다.

“전기가 흘러. 이유는 왜 그런지 말  해도 되지?”



스텔라가 속삭였다.
그렇군.
누구 한 명이 죽기 전까진 아무도 내보내 줄 생각이 없는 경기장이다.


“그런데 저러고 그냥 2대 2로 싸우는 건가요?”
“그러면 재미없지.”

스텔라는 간략히<턴 파이트>의 룰을 설명했다.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하드코어한 격투 스포츠다.
두 명이 팀을 이뤄,  명은 ‘브레인’, 한 명은 ‘파이터’의 역할을 맡는다.

파이터 두 명이 서로 쓰러트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게 핵심.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격투기와 다를 게 없으나, 이 경기에서 파이터는 자기 마음대로 싸울 수 없다.

대신 브레인이 턴마다 무작위로 카드를 세 장 뽑아,   한 장을 택한다.

그리고 파이터에게 그 카드의 지시(예를 들어 안면 펀치)를 내리면 파이터는 오직 그것만을 수행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매 턴 반복한다. 파이터  명이 의식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그래서<턴 파이트>.

“참고로 브레인과 파이터는 아무 때나 서로 교대도 가능해.
하지만 어지간해선 잘 안 해주긴 하지…
브레인 쪽이 말야.

들으면 짐작이 가겠지만 이 게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어디까지나 파이터 뿐이거든.”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면 선수 두 명 다 무조건 자기가 브레인 역할을 하겠다고 고집하지 않을까?

“그 이유 때문에 서로 싸우는 일도 흔하긴 하지만…

저렇게 강제로 끌려온 선수들은,
어차피 브레인이 혼자 살아남아 봤자 결국 먼저 가나 나중에 가나 그 차이밖에 없어.

VVIP룸의 경기에선 진 팀의 생존자한테 자비를 베풀지 않거든.”
“이긴 팀은요?”
“다시 안전한 교도소로 돌아갈 수 있지.”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4번 타자와 살인 영재가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브레인을 맡느냐 문제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모양이다.

4번 타자가 살인 영재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퍽, 퍽 좌우로 두 번 죽빵을 갈겼다.

이걸로 둘의 다툼은 끝났다.

살인 영재가 손으로 코피를 훔치며 경기장 가운데에 섰다.

이런 광경도 관람하는 VVIP들에겐 그저 흥미로운 유희에 불과한지 카메라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했다.

상대팀은 특수부대원이 파이터로 나섰다.

“저쪽은 머리가 잘 돌아가네.”
“그러게요. 체격만 놓고 보면 특수부대원이 해부학 박사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이기기 위한 선택인거지.
자기가 파이터로 나서야 이길 확률이 더 높아지니까.

반대로 4번타자는 싸움은 잘할지 몰라도, 큰 그림은 못 본 거야.

살인 영재가 자기 팀한테 뚝배기를 두 대나 맞아서 벌써 데미지를 잔뜩 입고 시작하는 거잖아.
시작하기도 전에 불리해졌어.”


땡땡땡-


타종소리가 울리고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두 파이터는 그저 서로를 노려보며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한 건 뒤에 선 브레인들.

4번 타자가 카드를 뽑았다.

경기중인 선수들은  수 없는 스크린에 4번 타자가 뽑은 카드가 표시되었다.

-오른손 펀치, 안면 타격
-왼손, 눈 찌르기
-오른발, 조인트 타격


“오, 나쁘지 않네.”


스텔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 같으면  고를 거야?”
“글쎄요…”

역시 눈 찌르기 아닐까?
저 중에 가장 위력적인 공격이니까.
잘하면  방에 경기가 끝날 수도 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눈을 다치고 계속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조인트요.”
“왜?”
“잘은 모르겠지만 상대가 그렇게 쉽게 급소타격을 허용하지 않을  같아요.”

스텔라가 빙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역시 넌 우수해.”



4번 타자에게 다시  장의 카드가 주어졌다.
이번에 그는  장을 뽑았다.

-머리
-복부


“저건…”
“서로 공격을 주고받기만 하면 너무 금방 끝나니까.
아마 대부분의 경기가 한 3턴이면 끝나지 않을까?

그래서 공격 카드말고 방어카드도 있어.
방어카드로 지정한 부위는 상대의 공격을 무효할  있지.”
“근데 저것도 무작위네요.”

과연. 그런 게임이군.
아마 누구든 가급적 머리만큼은 무조건 방어하고 싶으리라.

그래서 눈찌르기는 굉장히 치명적인 공격이지만 그만큼 성공률도 낮겠지.

해부학 박사도 카드를 뽑았다.

그는 공격 카드로 왼  손가락 꺾기, 방어카드로는 머리와 사타구니를 골랐다.


“이제 첫번째 턴, 서로의 공방을 진행하겠습니다.”

살인 영재가 먼저 특수부대원에게 다가갔다.
둘의 키가 30cm는 차이가 나 살인 영재는 고개를 들고 특수부대원을 올려다봤다.

“먼저 공격하는 쪽이 약간  유리하겠네요.”
“그렇지.”



살인 영재에게 먼저 공격권이 주어진  체격에 따른 핸디캡일까?
그는 망설임 없이 있는 힘껏, 무회전 프리킥을 차듯 특수부대원의 발목을 후려갈겼다.


“크어얽....!”

특수부대원이 가래끓는 탁한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데미지를 주진 못한 모양이다.

애초에 선수들은 가벼운 유니폼만 입고 있을 뿐 맨몸이다.
묵직한 신발을 신었다면 조인트의 위력도 더했겠지만 맨발이니 자연히 공격력도 떨어질 따름.


특수부대원이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얼굴이 야차처럼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넌 뒤졌다.”

살인 영재는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허세를 부렸지만,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건 숨기지 못했다.


“손 내.”

선수들의 목엔 목걸이가 장착되어있어, 명령을 거부하거나 돌발 행동을 하면 즉시 전기충격이 가해진다고 스텔라가 말했다.

살인 영재가 왼 손을 내밀자 특수부대원의 얼굴에 흉악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가 살인 영재의 네 손가락을 한번에 감싸 쥐었다.
특수부대원의 이두박근이 순간 부풀어 오르고 혈관이 도드라지는  보였다.


우두둑, 으직-!


차마 맨정신으로 듣기 힘든 끔찍한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뼈가 으스러지고 관절이 뚝뚝 꺾여나가는 소리.

나는 못보겠어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눈을 돌린 사람은 나뿐이었다.
VVIP들의 가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리는 게 보였다.



“끄아아아-!!!”

살인 영재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허리를 기역자로 꺾었다.

“세상에…”
“봐봐, 역시 4번 타자가 파이터로 나서야 했어.”
“...4번 타자라 해도 손가락이 저렇게 꺾였는데 버틸 수 있을까요?”
“그게 아니라,
조인트 공격으로 특수부대원의 발목을 먼저 부러뜨렸어야 했다는 얘기야.

이 게임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상대를 걸레 짝으로 만들수록 내가 입는 데미지도 줄어드는 거지.”

듣고보니 또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한쪽 발목이 부러진 상태에선 아무래도 제대로 힘을 내기 힘들 테니.

괴로워하는 살인 영재는 신경 쓰지 않고 경기가 냉정하게 속행되었다.

4번 타자가 다시 세 장의 공격카드를 받아들었다.

-왼 손, 고환 공격
-왼 손,  찌르기
-무기 획득

“운도 없지.  장이나 왼손 공격카드가 나왔네.”
“저거 일부러 저렇게 조작한 거 아니죠?
왼  다쳤으니까  손 카드를 주자, 하고...”
“설마.
그렇게 아마추어처럼 억지로 판을 꾸미진 않아.
그냥 쟤들이 순수하게 운이 없었을 뿐이야.”

4번 타자는 고심했다.
그도 그럴게, 손가락이 죄다 부러진 왼손으로 공격해본들 별 성과도 없을 터.
그는 ‘무기 획득’을 택하고 턴을 넘겼다.

방어 카드는 배와 사타구니를 골랐다.

상대팀의 브레인인 해부학 박사는 ‘안면 박치기’와 ‘머리, 가슴 방어’를 택했다.

두번째 턴.

“자, 4번 타자 선수는 살인 영재 선수에게 무작위 무기 중 하나를 쥐여주기로 했습니다.

과연 어떤 무기가 등장할지 정말 기대되는데요, 룰렛, 돌려주세요~!”

처참한 사투에 걸맞지 않은 귀여운 룰렛이 링 위에 내려왔다.
지독한 악취미의 농담 같다.

살인 영재가 멀쩡한 오른 손으로 ‘스탑’ 버튼을 누르자 돌아가는 룰렛이 천천히 속도를 늦추다, 이윽고  팻말에서 멈췄다.


-오함마


VVIP들이 술렁거렸다.
꽤 쓸만한 무기가 걸렸나 보다.

아니, 그냥  보기에도 좋은 무기다.
오함마라면 어딜 때리던 치명적인 일격을 선사할 둔기계의 베스트셀러가 아닌가.
(사람에게 상해를 입힐 목적으로 구매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저러면 바로  수 있나요?”
“아니, 다음 턴 부터.”


오함마를 얻어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선 살인 영재였지만 그에겐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특수부대원이 살벌한 얼굴을 한 채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살인 영재가 오함마를 꼭  채 심호흡을 했다.
특수부대원으로서도 결코 여유 부릴 상황은 아니다.
이번 턴에 끝장을 내지 못하면 다음 턴부턴 살인 영재의 오함마 질을 몸으로 받아내야 할 처지니.


투콱-!!

특수부대원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처럼 상체를 뒤로 젖힌 후 있는 힘껏 박치기했다.

클린 히트.

흩뿌려지는 피보라에 섞여 허연 무언가가 공중에 흩날렸다.
코뼈인가, 이빨인가.

살인 영재는 제대로 몸을 못 가누고 비틀거렸다.

그가 4번 타자의 발치에 나동그라졌다.


“교… 교대…. 교대해줘…”
“...”


4번 타자가 냉정한 눈으로 살인 영재를 내려다봤다.

지금 교대하는 판단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제 오함마라는 강력한 무기도 얻었겠다, 교대하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상대를 도륙할 수 있으니.

“너, 브레인 제대로 할 수 있어?”
“후...후윽…”


살인 영재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4번 타자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지금 정신을  차리고 있잖아.
니가 똑바로 명령을 못 내리면 교대해봤자 나까지 아무것도  하고 맞아 죽는다고.”
“...할… 할 수 있어…”
“9 X 8 뭐야?”


갑자기 구구단인가.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는지 VVIP 몇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파...팔십…. 팔십… 팔십 일…”
“안돼. 무리야. 그냥 니가 책임지고 마무리해.”


4번 타자는 결국 교대하지 않고 그대로 경기를 속행했다.

아마 살인 영재에게 조금만 더 움직일 수 있는 기력이 남았다면,
오함마를 이용해 승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껏 얻은 오함마를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했다.

경기는 여섯 턴이 지나 살인 영재가 완전히 뻗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서야 끝났다.


“감상이 어때?”
“...제 취향은 아니네요.”
“그럴 수 있지.”



이후 여러 가지 테마의 경기들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더 지켜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라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완전히 미친놈들이다.

사람이 서로 죽여대는  보며 즐기는 년놈들이나,
하란 다고 하는 놈들도.

“어찌 됐든 대강 게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알았어요.

제가 보기엔 운빨의 비중이 높…”
“아야!”


VVIP룸을 나가는  어깨에 누군가 부딪혔다.
얘기에 정신이 팔려 앞을  보고 걷고 있었더니만.

“죄송합니다.”
“눈  똑바로 뜨고 다녀요.”


싸가지없긴… 지가 와서 부딪힌 거면서…

속으로 투덜거리며 지나가려는데 부딪힌 여성이 안 비키고 날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여우 같은 눈이 좁혀지며 거의 실처럼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대뜸  내뱉었다.


“...코치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