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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화 〉스텔라(5) (102/109)



〈 102화 〉스텔라(5)

메이를 다시 떠올리는 건 나에게도 괴로운 일이라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자네와 그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본 적이 없는 것 같군.
은연중에 언급 자체를 터부시했다고 할까…

알겠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다 얘기해주겠네.

어쩌면 내가 아는 이야기와 자네가 아는 이야기가 서로 다를 지도 모르니 말이야.
비교하면서 들어보게나.

메이는…
<홍삼&인삼 파워 스포츠>의 창립 멤버였지.

그때는 우리  이름이 이렇게 멋지지도 않았었군, 돌이켜보니.

<자양강장 신토불이즈>였었나…
아마 내가 지었던  같은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구리긴 하구먼. 허허...

그걸 라비와 메이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었지.


그 애는 유능했어.
그건 부정할 수 없네.

지금의 자네의 역할을, 그 때는 메이가 했었다고 봐도 좋겠지.

헌데 거기에 더해 선수로 직접 뛰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더 대단했을지도.

하지만 좀 지나치게 씀씀이가 컸지…
그리고 주변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였어.

 때는 알아서 척척 팀의 일을 도맡아 처리해주니 마냥 편하기만 해서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팀의 운영비까지 관리할 수 있게 허락한 게 잘못이었는지도 몰라.

메이는 선수의 권한을 넘어서 점점 팀을 입맛대로 좌지우지했지…

내 잘못이네.

아무리 주장이라고 해도 그런 월권을 허용해서는 안 됐는데 말이야.

영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영악한 아이더군.

<홍삼 스포츠>의 각종 권리와 장비가 휙휙, 나도 모르는 새에 다른 곳에 팔려나갔어.

가끔 지나가는 말로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보면 항상 이유는 있었지.
메이의 말만 들으면 모든 게 다 그럴듯했어.
투자에, 임대에…

전부 팀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이야.

지금이라면 절대 안 속겠지만, 그 때는 나도 뭐가 뭔지 잘 몰라서 그러려니 했지.

후회가 된다네.
내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더이상 그런 짓을 못하게 말렸더라면…

자네가 우리 팀에 들어온 게 아마 그때쯤이려나.

제대로 된 코치도 들어오고, 그녀는 전보단 조금 몸을 사리는 듯했어…

신중해졌다고 할까.

분명 자네를 경계한 거겠지.
전처럼 본인이 마음대로 팀을 쥐락펴락할  없으니 말야.

팀의 물건을 소소하게 빼돌리는 일은 사라졌지.

하지만 그건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 하기 전의 밑작업에 불과했다는 걸 누가 알았겠나.
허 참…

이후의 일도 더 설명해야 하나?
아마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자네가 더 잘  텐데 말야.

응?
아, 그런가.
제3자의 입장에서 듣고 싶다고?

괴롭구먼.


그래. 아마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걔가 그렇게 운을 띄웠을 거야.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듣고 어찌 가만있을  있겠나.

모두가 각출해 십시일반으로 조금이나마 병원비를 모아줬지.

메이가 제대로 훈련장에도 나오지 않은 것도 그쯤부터였지.

부모님이 편찮으신데 운동이 머리에 들어오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이해해줬지.


지금은 알지.
어머니는 애초에 예전부터 사이가 소원해져 헤어진  오래고,
걔는 도박에 빠져 빚을 엄청나게 지고 있었다는 것도.

하지만 그 때의 우리는 몰랐던 거지…

정말 걔가 보기엔 호구가 따로 없었을 걸세.
얼마나 웃겼을까?

나도 사비를 털어 십만 골드 가까이 쥐여줬지만,
자네는…


자네가 어마어마하게 사채빚을  것도  때문이 아닌가.
참… 마음이 아프군.

뭐?
이제 다 갚았다고?
아니, 벌써?
어떻게?

허허… 어쨌든 잘됐네.

휴,  말을 들으니 나도 마음이 조금 놓이는구만.

여하튼, 메이가 말하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짓말밖에 없었지.

결국 그녀는 더이상 팀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잠적했어.

지금은 어딨는지 알 길이 없네.
소식도 없고.


누가 알겠나.


***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된 거였군.

가슴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길 조용히 기다렸다.
허나 이상하게 내 마음은 미지근했다.
분명 화를 내고 길길이 날뛰어야 마땅할 일인데,
지금의 내게는 그냥 옛날에 있었던 불운한 에피소드의 하나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직접 겪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가.

‘그래서 나와 그렇게 악연을 쌓게 된 거군.’

하지만 도통 이해가 안 된다.
내가 먼저 화를 냈으면 몰라도  메이 지가 피해자인 양 깝죽댄단 말인가.

결국 이 세계에 온 이후 겪게  수난의 근본 원인은 녀석에게 빌려준 돈 때문이란 말이지.

어떻게 하면 빌려준 돈을 이자까지 쳐서 돌려받을 수 있을까.


***

“미쳤냐?”



VVIP께서 직접<건파우더&젤라틴>의 사무실 문을 발로 차며 납셨다.

선글라스를 치켜올리며 부릅뜬 눈으로 스텔라를 노려보는 메이슨.


“오빠.”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니가 직접 뛴다고?”
“...”
“절대 안 돼. 그런 줄 알아.”
“이미   해놨어. 이제 무를 수도 없어.”
“뭐?”


스텔라는 그런 메이슨에게 위축되지 않고 팔짱을 낀  당당하게 그를 마주 봤다.

“메이슨의 여동생이 직접 출전한다는 소문, 벌써 퍼질 만큼 퍼진지 오래야.

역대급으로 돈이 모이고 있다던데.

이거 한 번만 이기면 지금까지 입은 손해 다 복구하고 거기에 플러스로 몇 배는 먹을 수 있어.”
“누가 돈 때문에 그런 줄 알아?
집어치워.

 놈들은 니가 죽는 걸 보길 원하는 거야.
알아?
이 철없는 것아.”
“이기면 아무 문제 없이 끝날 일이야.”


메이슨이 검지 둘째 마디로 미간을 톡톡 두드리며 깊은 인상을 썼다.
 눈 사이에 계곡이라도 파일 만큼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다.


“두   다리를 부러뜨리면 더이상 헛소리 못하겠지?”



농담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메이슨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스텔라가 핫,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오빠가?
아직도 내가 옛날처럼 어린애인  아나 봐.
이젠 아니거든?
누가 누구 팔다리를 부러뜨린다는 거야.
나보다 약하면서.”
“좋은  할 때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해…”


메이슨이 씹어뱉듯 윽박질렀다.
그러다 이제서야 내가 옆에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 호랑이 같은 시선이 별안간 나를 향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야? 얘한테 개좆같은 소리 지껄인 게?”
“아니… 그건 절대 아니고요…”
“너 나와봐.”
“어딜. 가지마 트래쉬. 일로 와.”

스텔라가 자기 뒤에  숨겨줬다.
나는 마다하지않고 쏘옥 몸을 숨겼다.

“진짜냐… 진짜냐고… 돌겠다.
그래서 어디의 누구랑 붙는데?”
“...아직 안 정해졌어.”

그러고보니 아직 상대가 안 정해졌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이번 승부의 행방이 갈린다.
매우 중요한 문제지.


“저… 한마디 해도 될까요.”

남매가 동시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순간 헉, 하고 간이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나 역시 목숨을 건 당사자다.
할 말은 해야겠지.

“<캐비어&시가렛>과 승부를 하는  어떨까요.
이번 대결.”
“뭐?”
“거기 단장하고요.”
“<캐비어&시가렛>이면 지하 스포츠 최강 팀 중 하난데.

걔들이 왜 승부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스텔라가 냉정하게 지적했다.
나와 메이의 사연 많은 스토리를 모르는 제3자 입장에선 영문모를 소리로 들리는  당연하겠지.

“거기 단장하고 제가 아는 사이예요.
...좋은 사이는 아니고요.

<홍삼 스포츠>의 트래쉬 코치가 직접 선수로 나온다고 하면, 아마 흔쾌히 응할 겁니다.”
“뭔가 우리가 모르는 원한이 있나보군.”
“...예.”


메이슨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드려보는 모양이다.

가끔씩 “단장끼리 붙으면… 그러면 적어도 일반 경기보단…”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트래쉬.”



그가 말했다.

“예.”
“스텔라가 털끝만이라도 다치면  손으로 때려죽일 거야. 알겠어?”
“그건 무리예요.”

컥…!

그가 난폭하게 내 멱살을 잡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내 발끝이 공중으로 30cm는 족히 떠올랐다.
숨이 막힌다…

“그럼 지금 죽어, 이새끼야.”
“오빠!”

스텔라가 날카롭게 외치자 그는 여전히 날 노려보며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후…”
“너, 분명히 말하는데…”
“메이슨 씨, 애들 장난처럼 보여요?”
“뭐…!?”
“지하 스포츠인데  다칠 리가 없잖아요.
저도, 스텔라 씨도 이미 최악의 경우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요.
어설픈 각오로 승부에 나서기로  게 아닙니다.

뭐뭐하면 죽이겠다 어쩐다,
이런 협박, 이제 별로 안 무서워요.
죄송한데.”
“...이새끼…”
“경기에 나서는 당사자는 저와 스텔라 씨입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니 얌전히 응원이나 해주세요.
괜히 헛심 쓰면서 방해하지 마시고.”

메이슨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이 크게 떠져 살짝 떨렸다.

“그래  잘했어, 트래쉬.
오빠, 이 일은 내 일이야.
우리가 알아서 할게.”
“...”
“그리고 무조건 이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

메이슨이 뭐라고 말할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의 이마에 혈관이 굵게 두드러졌다.
많은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그는  마디만 내뱉고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알아서들 해. 씨팔.”


***

메이슨이 나간 후 스텔라는  가지 일 처리를 했다.

승부 날짜도 잡고, 내가 말했던 대로<캐비어&시가렛>팀에 의사를 타진한 모양이다.




“트래쉬, 아까는 그럴듯하던데.”
“뭐가요?”
“오빠한테 한 말 말이야.
다시 봤어.”
“그냥 나오는 대로 떠들었을 뿐이에요.”
“그래?”


스텔라는 폰을 내게 내밀었다.

“<캐비어&시가렛>의 단장하고 연락이 닿았어.
처음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하더니, 네 이름을 대니까 전화 좀 바꿔달라는데.”
“그럴 만도 하죠.”

폰을 받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내가 직접 하지 않은 일로 내게 적의를 품고 있는 사람과의 통화라.

콜센터 상담원의 기분이 이런 걸까.

전화를 받았다.

“예. 트래쉬입니다.”
“...”

아무 말도 없다.

“저기요?”
“무슨 일?”
“메이 씨 맞죠?”
“맞는데, 무슨 일이냐고요.”

톡톡 쏘는 목소리가 매우 거슬린다.
얘한테 감정이 있어서 그런  아니라 목소리  자체가 그냥 짜증난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을까.
더이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니 숨기지 않고 본성을 드러낸 걸까.


“메이 씨와 저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말이죠.”
“...”
“결국 결착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거예요.”
“...아하.”

한껏 사람을 얕잡아보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속이 부글부글 끓으셨던 모양이네요.
직접 자기 손으로 패 죽여야 성이 차실만큼.
그래요, 코치님?”
“그 정돈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얘는 얘가 알던 과거의 트래쉬와 지금의 트래쉬는 다른 사람이란 걸 알까?

지금의 나는 메이에 대해  감정이 없다.
원한도 딱히 없다.
단지 얘와 있었던 일들은 과거에 있었던 일, 그냥  일일 뿐이다.
난 그런 사적인 원한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우리 사이의 악연을 이용해 내 의도대로 메이가 승부에 나서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것만이 중요할 뿐.

물론 조금 궁금한 게 한가지 있긴 하다.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요.”
“...”
“백만 골드도 넘게 뜯긴 제가 메이 씨에 대해 원한을 가지는 거야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메이 씨는 절 증오하시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평생 갚아도 모자랄 빚까지 대신 졌는데 말이죠.

그거 하나가 궁금했습니다.”


메이는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꾸 메이 씨 메이 씨 하지 말아줄래요, 코치님?”
“그러면 뭐라고 해요.”
“평소처럼 메이라고 해줘요. 어색한 존댓말도 집어치우고.”


얘하고 트래쉬는 생각보다 더 친한 사이였나…
어쩌면 남녀관계가 얽힌 일인걸까.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별 이유 없어요.
그냥 코치님의 가식적인 표정과 위선이 역겨웠을 뿐이니까.
지켜보고 있기가 끔찍할 정도로.

코치님은 제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이었어요.

방탕한 어린 양이라도 바라보듯 안쓰러운 눈길로, 절 뜯어고치려고 했죠.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요?

코치님이 뭔데요?
성자라도 돼요?
일개 무능한 코치 주제에, 웃기지도 않아서.”


...그러냐.

 이해하길 포기했다.

그래, 이럴 것 같더라니.
애초에 소시오패스 사기꾼에게 직접 물어본다고 그럴듯한 이유를 얘기해줄 같지도 않았다.

인간이 인간을 좋아하는  이유가 없듯이,
증오하는데도 이유가 없다던가.

남한테 백만 골드나 넘게 빚을 지워놓고 얘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다면 나도 좀 망설였을지도 모르니.
얘가 순수한 인간쓰레기여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쳐죽일 수 있게 됐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예?”
“메이야, 그게 끝이야?”

갑자기 일변한 내 태도에 메이가 잠시 당황했다.

“미안하다고 설설 기어도 모자랄 판에 역으로 원한을 품다니,  정말 안될 년이다.”
“왜… 왜 이래요?  잘못 먹었어요?”
“니가 알던 트래쉬와 지금의 트래쉬는 미안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야.
더이상 어리광부릴 생각하지 마.”
“미쳤어요? 코치님?”
“아니, 미치긴. 지금 난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인걸.

솔직히 그래.
어차피 서로 이러쿵저러쿵 계속 떠들어봐야  의미도 없잖아, 맞지?


너  좋아하지?
서로 패죽이고 이긴 사람은 돈도 잔뜩 챙기고, 이보다 깔끔할 수가 없네.
나와. 숨지 말고.”



메이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아는 트래쉬는 분명 이런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유약한 개호구 그 자체였겠지.
하지만 이젠 다르다.

“하아...? 어이가 없네. 누가 그렇게 말하면 무서워서 쫄 줄 알고요?

코치님을 직접  죽인다니 꿈속에서도 바라마지 않던 일이네요.

무르기 없어요. 코치님?”
“3일 후 좋지?”
“물론이죠.

 착각하나 본데,
 옛날의<홍삼> 주장 따위가 아니에요.

지하 스포츠의 여왕이라고요.

아직도 내가 만만해 보이나? 하.”


예상대로군.

정말 다행이다.

피떡으로 만들어버려도 아무 죄책감이 들지 않을 적절한 상대가 나타나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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