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지하대회, 턴파이트(2)
나와 스텔라의 운명을 결정할 세 장의 카드가 눈앞에 나타났다.
-오른손, 안면 타격
-왼손, 안면 타격
-오른손, 오른팔 타격
어떤 걸 골라야 하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집중하기 시작하니 귀가 먹먹해지며 주변의 소음이 안 들리는 신묘한 현상이 일어난다.
뭐가 최선일까…?
‘생각해보니 이건 고를 것도 없나.’
<턴 파이트>에서 어지간하면 인체 최중요 급소인 머리를 공격하긴 힘들다.
누구나 머리만큼은 방어카드로 보호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저쪽도 머리 방어카드를 못 뽑았을 가능성이 있으니 도박을 걸어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면 ‘안면 타격’ 두 장은 자동으로 선택지에서 제외된다.
난 ‘오른손으로 적의 오른팔 타격’을 선택했다.
다음은 방어카드다.
-머리
-하복부
이건 좀 고민되는데. 둘 다 급소다.
여자도 남자의 불알 못지않게 성기가 치명적인 급소인 건 마찬가지다.
‘둘 다 고르고 싶지만…’
하지만 머리를 택했다.
머리 방어카드가 안나왔다면 모를까 나왔는데 안 고를수도 없는 노릇.
메이는 어떻게 나올까…?
링의 반대편에서 메이도 카드를 고르는데 골몰해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같은 팀 파이터에게 유리한 카드를 쥐어주려는 나와 달리,
메이는 싱글거리며 마치 재밌는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별로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비디오게임이라도 하는 마냥 아직 중압감이 피부에 와닿지않는걸까?
인간의 마음을 상실한 저 미친년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나와 메이, 양 측의 브레인이 카드를 모두 택한 후 첫번째 공방이 시작되었다.
“오른 팔 타격이라…”
스텔라가 어깨를 쥐고 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너무 커서 그냥은 닿지도 않겠는걸.”
아닌게 아니라 키 160 남짓인 스텔라에 비해 저쪽 파이터는 3m도 넘어, 둘이 마주보고 서 있으니 어른과 아기처럼 보일 지경이다.
스텔라는 발을 통통 구르더니 무릎을 굽혔다가 있는 힘껏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콰직-!
놀라울 정도로 높게, 거의 2m 높이로 점프한 스텔라가 망치를 내려치듯 상대 파이터의 어깨를 손날로 찍었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박살나는 무참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끄...끄윽…”
쿵, 하고 파이터의 오른팔이 정육점 덩어리 고기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고장난 수도꼭지같이 맹렬한 피보라를 뿜어내는 파이터의 어깨.
허옇고 둥근 뼈의 단면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미친… 한 방에 팔을 뜯어내버렸잖아.
그건 그렇고 저 녀석 아프지도 않나?
지 팔이 잘려나갔는데?’
진통제 수십개를 섞은 칵테일이라도 원샷했는지 파이터는 제 팔이 떨어져나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굳건히 서있었다.
스텔라도 그런 말도 안되는 파이터의 강인함에 약간 위압감을 느낀 모양이다.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버틴다고 버틸 수 있는게 아닐텐데…?
이대로 오체 불만족으로 만들어줄게.
어디 그때도 아무렇지 않은지 보자.”
스텔라의 공격 턴이 끝났다.
다음은 파이터의 공격 차례.
파이터는 박치기, 배를 골랐다.
‘위… 위험한데.’
저 공룡같은 거구로 배를 들이받으면 스텔라가 무사할리가 없다.
내 걱정을 눈치챘는지 스텔라가 돌아보지 않고 한쪽 손을 들고 말한다.
“괜찮아. 저 정도면.”
“그래도…”
“싸움은 덩치로 하는게 아냐. 지켜보고 있어.”
상대쪽의 거인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자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흉악한 괴물의 형태가 되었다.
콧김까지 씩씩 뿜는 품이 그야말로 투우 시합에 나선 황소와 같다.
뒤로 도움닫기를 한 후 있는 힘껏 머리를 갖다 박는 외팔 거인.
스텔라의 몸이 발 끝부터 머리까지 크게 한 번 떨린다.
“쿠으…”
하지만 놀랍게도 스텔라는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않았다.
금강불괴라도 쓰는걸까?
그녀가 입을 우물거리더니 피가 섞인 침을 턱 뱉었다.
“덩치값 못하는구나, 너.”
이걸 두고 걸크러쉬라고 하는걸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스텔라.
너무 멋지다.
제 2턴.
난 이번엔 공격 카드론 왼손, 배 공격을 뽑고,
방어 카드론 똑같이 머리를 뽑았다.
지금까지는 아주 순조롭다.
“트래쉬.”
불현듯 날 부른다.
“예?”
“이거 금방 끝나겠는데.”
“아직 2턴인데요…”
“나도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쟤랑 한번씩 주고 받아보니까 알겠어.
뭔 조화인지 모르겠지만 내 몸이 좀 말이 안돼, 지금.”
내 ‘LOVE파워’의 영향으로 대폭 파워업했기 때문에 그렇겠지.
지금 스텔라는 어지간한 운동선수들이 십년도 넘게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성취를 한번에 뛰어넘은 상태다.
“다음 한 번으로 끝장낼 수 있겠어.”
“그러면야 좋죠.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응, 알았어.”
메이는 무슨 카드를 뽑았을까.
지금쯤 본인의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걸 뒤늦게 눈치채고 초조해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보니 여전히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메이는 공격카드론 오른다리, 짓밟기, 방어카드론 머리를 골랐다.
“일단 한 명.”
스텔라가 뚜벅뚜벅 상대팀의 파이터에게 걸어갔다.
약에 취해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키 3M의 괴한이 가소롭다는 듯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스텔라도 얼굴을 들어 거인을 마주봤다.
천천히 왼손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접어 주먹을 쥐는 스텔라.
그리고 그녀의 주먹이 아주 잠깐, 번개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투쾅-!
저게 사람의 펀치에서 나올 위력인가…!?
파이터의 배에 총구를 직접 갖다대고 샷건을 갈긴듯한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렸다.
끔찍하게도 거인의 배가 발로 힘껏 찬 젖은 쓰레기봉투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내용물을 그대로 드러냈다.
내장이 사정없이 쏟아지며 고약한 냄새가 진동한다.
“아직도 살아있어?”
수건으로 손을 슥슥 닦으며 스텔라가 중얼거렸다.
거인이 천천히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제아무리 고통도, 공포도 못느낀다 한들 내부 부품이 작살이 난 인체는 더이상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약으로 뇌를 속여 어떻게 될 일이 아니다.
구어어억.
파이터가 허리를 꺾고 피와 기타 위액이 7:3의 비율로 섞인 혼합물을 걸쭉하게 토해냈다.
위에서도 토하고, 배에 뻥 뚫린 구멍으로도 질질 흘려댄다.
차마 똑바로 지켜보기 힘든 끔찍한 광경이다.
스너프 필름을 보면 이런 느낌일까.
하지만…
‘저녀석이 뒈져야 우리가 산다.
미안하지만… 잘 가라.
어쩔 수 없었어.’
이건 지하 스포츠다.
정정당당한 스포츠가 아니다. 전쟁이다.
전쟁에선 먼저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법.
죄책감과 연민은 나중에 포장마차에서 소주라도 한 잔 기울이며 감성에 취해 곰씹으면 충분하다.
“<캐비어&시가렛>팀 파이터, 더이상 못 싸우는 거 아닙니까?
내가 지적하자 그제야 같이 넋놓고 있던 심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경험이 풍부한 심판조차도 이런 원펀치 KO는 처음 보는 장면이리라.
“아...예! 예! 그렇군요!
브레인 메이 선수, 시합 전에 양팀에서 동의한 특별 룰에 의거해, 이제 직접 파이터로 나오셔야…”
“예에~~~? 왜요~~~?”
메이가 비아냥거리듯이 말끝을 한껏 늘이며 요사스럽게 웃었다.
“파이터 잭슨 선수의 경기 속행이 힘들어보이는데요…”
“다시 한 번 보실래요.”
우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배에 구멍이 뻥 뚫려 내장을 질질 흘리는 놈이 살아있다고?
지랄도 작작해라.
...라고 생각하면서 링 안을 보는 순간, 난 말을 잃고 말았다.
“끄르르르….”
메이의 파이터는 죽지 않았다.
아니, 잘 모르겠다.
죽은 거냐, 안 죽은 거냐.
일단 겉보기엔 누가 봐도 죽은 걸로 밖에 안보이는데,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뭐야, 이 녀석. 이상해…”
스텔라도 인상을 찌푸리며 주춤거렸다.
“코치님은 아시겠죠? 저만의 특별한 능력.”
그렇게 말해도 난 모르지만…
메이는 혼자 쾌락에 취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재잘거렸다.
“꼭두각시 조종술…
<홍삼> 시절엔 기껏 쪼그만 벌레나 쥐 시체같은 것밖에 못다뤘지만,
지금은 달라요… 키킷…
저는 이 능력을 ‘데드맨즈 나이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 가호 아래에선… 사람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에요. 보시다시피.. 시시시싯... “
간단히 말해서 ‘좀비화’군.
파이터는 이미 신체 지표상으론 사망한 지 오래다.
하지만 메이의 사악하기 그지 없는 능력의 조종을 받아,
죽은 육신이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저렇게 산 사람 흉내를 내며 조종당하고 있는거다.
“말도 안돼요. 인정 못합니다.
누가 봐도 죽은...”
“코치님…
이 링 위에서 저랑 인간의 죽음의 정의에 대해 토론이라도 하실 생각이세요…?
키키킷…
움직이면 살아 있는거죠…
뭘 어렵게 생각해요...”
개열받지만 메이의 말에 더 설득력이 실리는 분위기다.
이런 말초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경기에선 관중들은 말 많은 놈을 좋아하지 않는다.
죽은 놈이 다시 움직인다는 말도 안되는 상황도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흐름.
“괜찮아. 트래쉬. 쟤 말대로면 아예 못움직이게 가루를 내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어차피 껍데기만 억지로 움직일 뿐이야.”
스텔라는 날 안심시키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척추까지 박살난 저 꼴론, 팔이고 다리고 제대로 힘도 못실어.
그냥 깜짝 서프라이즈지 별 의미도 없어.”
메이의 공격 턴이 되었다.
움직이는 시체는 그대로 다리를 번쩍 치켜들어 무자비하게 스텔라를 짓밟았다.
하지만 스텔라는 자동차 진입방지용 시멘트기둥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괘...괜찮아요?”
“그래. 봐. 아까보다 훨씬 약해졌잖아.”
스텔라는 별 고통을 느끼지 않아하며 툭툭 몸을 털었다.
아픈것보단 더러운 시체의 발에 밟힌게 기분나쁜 모양이다.
“카드, 빨리 뽑아줘.
아까부터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가까이 있기도 싫어.”
보통의 인간이라면 죽자마자 바로 시체가 급속도로 부패하지는 않을 터.
메이의 지독한 사념이 배어있는 마법이라서 그런가,
마치 그녀의 썩어버린 마음처럼 죽은 거인도 고약한 악취를 뿜기 시작했다.
아예 못움직이게 전신을 박살내줄수밖에 없다.
지금 상황에 딱 적당한 카드가 등장했다.
-양손, 3초 전신 난타
이거라면…!?
어딜 막든 그부분만 빼고 곤죽을 낼 수 있다.
“스텔라 씨… 3초면 될까요?”
“충분해.”
스텔라가 양주먹을 꾹 쥐고 허리춤에 가져다댔다.
권법소녀처럼 잠시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양손으로 광속의 러쉬를 날렸다.
“오라오라오라~~~~!!!”
투콰콰콱-!!
묘한 기합성을 내지르며 시체의 썩은 육체를 초당 순두부처럼 박살내버리는 스텔라.
시체 파이터가 이제는 그 누구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수백개의 파편으로 분쇄되어버렸다.
메이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조차도 스텔라의 흉악한 연타에 기가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괴물인지, 원… 키키킷…”
억지로 웃어보지만 이미 주도권은 완전히 우리한테 넘어왔다.
메이는 파이터를 허무하게 잃은 데다, 스텔라에게 별 데미지도 주지 못했다.
억지로 허세만 꾸역꾸역 부리고 있을 뿐.
“<캐비어&시가렛>의 파이터 잭슨 선수… 이번엔 분명히, 정말 분명히 사망했습니다!
처참하게 박살이 나버렸네요…!
메이 선수, 이의 없으시죠?”
설마 저 박살난 조각 하나하나를 조종해서 또 여전히 살아있다고 개소리를 할까 우려했는데, 이번엔 순순히 메이도 인정했다.
“아, 예~~ 죽었네요. 죽었어요.
키킷..
그럼 이젠 내차례인가…”
대체 뭘 믿고 아직도 여유를 부리는 거지?
조금 의아했다.
스텔라의 괴력을 똑똑히 지켜봤으면 저렇게 기고만장할 수가 없을텐데.
“근데 이걸로 끝이 아니에요…
단장님…
저희 파이터가 혼자 가기 외롭대요…
억울해서 이대로는 그냥 못가겠다는데요…?
키키킷…”
“뭐라는 거야?”
메이를 바라보며 스텔라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단지 허세에 불과한걸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스텔라도 나처럼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느낀건지, 표정이 싸늘하게 굳기 시작했다.
표정뿐만이 아니다.
별안간 그녀의 몸도 녹슨 기계처럼 뻣뻣하게 삐걱였다.
스텔라의 눈빛에 공포가 서렸다.
나를 돌아보고 입을 벌린다.
“이게… 무슨…”
그러나 말을 채 끝까지 잇지 못하는 그녀.
스텔라의 몸이 창백한 회색과 시퍼런 색으로 변색되기 시작했다.
“제 ‘데드맨즈 나이트’는 단지 죽은 시체를 움직이는 시시한 꼭두각시술 정도가 아니랍니다… 키힛…
스텔라 단장님에겐, 이걸 어쩌나, 원혼이 들러붙어버렸어요…
몸이 썩어들어가는게 보이시죠?
안됐네요…
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아쉽게도 스텔라 단장님도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시시싯...”
모두가 말을 잃은 와중에 기묘하게 비틀린 메이의 광소만이 마녀의 웃음소리처럼 울리고 또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