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지하대회, 턴파이트(4)
메이는 김이 샌 표정을 지었다.
좀비끼리 서로 썩은 육신을 토막내는건 별로 재미없나보다.
실제 좀비 영화에서도 좀비는 산 사람만 공격하지 지들끼리 싸우진 않던데,
비슷한 감성일지도 모른다.
서걱, 서걱.
메이는 되는대로 적당히 가위질해 스텔라의 손가락 다섯개를 커팅했다.
“비명도 안지르고, 덜덜 떨지도 않고.
노잼이네요… 키킷..”
난 바닥에 투두둑 떨어진 손가락들을 얼른 챙겼다.
스텔라의 말대로면 나중에 다시 원래대로 붙일 수 있다니, 소중히 보관해야 한다.
“영 기분이 이상한 걸…”
스텔라가 중얼거렸다.
잘려나간 왼쪽 손을 들여다보며 복잡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머리만 남겨놓고 다 토막나도 아무 느낌도 없겠어.”
“무서운 소리 마세요.”
“근데, 직접 손가락을 잘려보니 하나 깨달은 게 있는데 말야…”
스텔라는 “의외로 간단히 끝나는 거 아냐, 이 게임?” 하고 말을 이었다.
“예?”
“공격당해도 아프지 않다, 다시 붙일 수 있다.
그게 끝이잖아.
생각보다 그렇게 위협적이진 않은걸.”
“아…?”
그런가?
충격적인 비주얼에 압도당해 지금은 눈치를 못챘는데,
스텔라가 말하고보니 또 그런가 싶기도하다.
“다시 못 붙일 정도로 만들어주면 그만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
과연 스텔라의 말대로였다.
다음 턴 난 스텔라가 뽑은 카드대로 메이의 다리를 날려버렸다.
하지만 이번엔 아까와는 달랐다.
자르는걸로 그치지 않고 전기톱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려 아예 원형을 찾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양 다리를 잃은 메이는 더이상 링 위에 서지 못했다.
그녀는 스텔라의 목을 공격할 권리를 얻었지만 일어서지 못하니 거기까지 팔이 닿지도 않는다.
억지로 몸을 타고 기어올라가려고 애써보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메이 선수, 공격 턴 10초 남았습니다. 10, 9, 8…”
결국 메이는 바닥에서 버둥거리다 공격 시간을 전부 허비하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 체념이 깃들었다.
경기가 시작한 후 처음으로 그녀는 완전히 웃음을 거두었다.
“에이 씨... “
죽여줍쇼, 하듯 완전히 포기한 태도로 벌렁 드러누운 메이.
아무래도 여기서 경기는 사실상 끝난 것 같다.
“됐으니까 빨리 끝내줘요, 코치님…
진짜 재미없네.”
“...”
이 소시오패스 여자애는 자기 목숨이 곧 날아가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걸까.
몸 이전에 이미 마음이 먼저 죽어있었던 걸까.
이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와중에 걸레짝이 된 채 죽으려고 태어난 거냐?
마음이 씁쓸해졌다.
승부의 흥분이 사라지자 차갑게 가라앉은 기분을 걷잡을 수가 없다.
“뭐 할 말 없어?”
“...있겠어요?”
“허세부리지 마.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죽으면 전부 끝장이라고.
네 의식이, 자아가, 너라는 존재가,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거야.
두렵지도 않아?
적어도 유언이라도 제대로 남겨…
악당이면 악당답게.
천하의 나쁜 년이었다고 나중에 기억이라도 하게.”
메이는 코를 킁, 훌쩍이고 힘없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래요. 코치님.
한 마디 남길게요.
코치님도 어차피 언젠간 죽을겁니다.
잘난척 하지 마세요.
...됐죠? 키키킷...”
“...그래, 좀 낫네.”
메이는 눈을 감았다.
난 전 <홍삼 스포츠>의 주장의 머리에 천천히 전기톱을 겨냥했다.
뇌를 일격에.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날 터.
길고 긴 악연이었다.
***
경기가 끝나자마자 메이슨이 한 무리의 치유마법사들을 대동하고 들이닥쳤다.
“스텔라 소… 손가락!! 5개 다 있지!?”
“예. 여깄어요.”
메이의 ‘좀비화’마법에 더불어 잘려진 손가락, 그외 기타 자잘한 상처까지 전부 말끔히 치료가 끝났다.
돈이 참 좋긴 좋다.
“뭘 호들갑이야.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 미친 년.”
메이슨이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다시 또 한바탕 남매싸움이 벌어질 분위기라, 이번엔 내가 미리 끼어들었다.
“이겼으면 됐잖아요.
메이슨 씨, 한 몫 단단히 챙겼겠네요. 어때요?”
“...지금까지 본 손해는 다 메꿨어.”
짧게 얘기하고 입을 꾹 다문다.
아무래도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스텔라가 눈을 세모 모양으로 치뜨고 쏘아붙였다.
“뭐야, 수익은 제대로 계산하고 나눠야지.
혼자 다 먹으려고?
우리는 목숨까지 걸고 겨우 이겼구만.”
“알았어, 알았다고.
다 오픈할게. 1원 한 장까지 철저하게 나눠준다. 됐냐?”
“당연히 그래야지.”
4일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던 지하 생활을 끝마치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바깥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땅 밑에선 해가 뜨고 지는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지 알 겨를도 없었으니,
이런 악천후조차 반갑게 느껴진다.
건물 지붕 밖으로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느꼈다.
스텔라도 가만히 지켜보다, 나를 따라한다.
“싫든 좋든… 이제 너도 우리 패밀리다.”
담뱃불을 붙이며 메이슨이 말했다.
“말했던 대로… 스텔라 책임지고.”
옆에서 여동생이 “아직도 그 소리야.”하며 핀잔 주는걸 무시하고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선 네가 우리 패밀리 사업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솔직히 가늠이 안되긴 하지만…
어쨌든 혹시라도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패밀리로서 모른 척 하면 안돼.
알겠냐?”
“...불법적인 일이면 좀…”
내 말에 메이슨이 한 대 칠 듯 손을 들었다가, 꾹꾹 눌러참는 표정으로 다시 내렸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 패밀리라 아랫사람처럼 손찌검하지 못하게 된 걸까.
“너한테 그런 거 안시켜, 멍청아.
아마추어한테 내 일을 맡길 거 같냐?
하여튼 지레 짐작하고 쫄기는.”
“그러면야 뭐.”
“일단 넌 <홍삼>의 코치니까 당분간은 거기에 집중해.
별일 없으면 내가 너같은 반푼이 손을 빌릴 일은 절대 없으니까, 그냥 너 할거나 잘하라고.”
수상한 마약운반 똘마니같은 일로 부려먹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그렇게 굴리진 않을 생각인가 보다.
메이슨으로서도 일일이 자기 여동생이 들고 참견할 남자친구에게 뭘 시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겠지.
“...그리고, 앞으로 니 적이 누구든 걸리적거리면 나한테 말해.
그 놈은 우리 패밀리의 적이기도 하니까.”
오오.
이건 약간 그럴듯한데.
영화 <대부>의 한 장면 같다.
뒷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 특유의 의리인가.
메이슨은 우산도 쓰지 않고 먼저 비를 맞으며 차로 걸어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텔라를 돌아봤다.
“스텔라 씨는, 이제 그러면…?”
“나도 가봐야지.”
스텔라는 왼손의 손가락을 꼼꼼히 살피며 말했다.
지하스포츠 경기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녀의 손가락이 숭덩숭덩 잘려나갔다는 걸 절대 믿지 못하리라.
조금의 흉터도 없이 감쪽같이 붙은 고운 손가락.
“음, 재밌었어. 나름 이색적인 경험이었네.”
“그거 다행이네요…”
난 솔직히 말해서 잊고 싶은 끔찍한 기억이었다는 인상이 더 강하지만.
“혹시 나중에… 선수 필요하면 말해.”
“예?”
“<홍삼 스포츠>말야.
객원 멤버, 가능하잖아?
가끔씩이면 보는 것 말고 직접 뛰는 것도 재밌을 것 같으니 말이야.”
“그러면 저야 너무 좋죠.
든든하네요, 감사합니다.”
스텔라는 “그럼 가볼게.”라고 말하며 우산을 폈다.
쏴-
빗줄기가 거세지기 전에 나도 돌아가봐야겠다,하고 생각하는데 스텔라가 뭔가 말할듯 말듯 우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우산을 쓰고 있지만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젖어들어가는게 신경쓰인다.
정말 이상하군.
아까 경기 중에도 그랬는데 지금도 또 그렇다.
왜 스텔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거같지?
괜히 빗속에서 꿈지럭거리는 스텔라를 대신해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나중에 또 만날 수 있죠, 스텔라 씨?”
“...!!”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무,물론이지.”
“연락할게요. 저희 그러면 매주 한번씩은 꼭 보는거예요.”
“많기도 하다. 나 바쁜 사람인데?”
그렇게 말하면서 스텔라는 행복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보는 우리 <홍삼 스포츠> 선수들.
라비는 마하와 듀오로 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거뒀다.
앨리스도 마찬가지. <메이즈>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해 숙원을 풀었다.
스이나는… 원래는 <배틀! 호러퀸> 대회 우승자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로 대회가 취소되면서 흐지부지되긴 했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선 1등이다.
“코치님~~~ 보고싶었어요!”
라비가 날 보자마자 품에 쏙 뛰어들며 안겼다.
자전거 타는 법을 한 번 배우면 몸이 타는 법을 기억해 몇십년 뒤에도 까먹지 않는다는데,
라비의 몸이 감겨오자 딱 그 느낌이다.
‘아… 이거였지. 그래, 이 사이즈, 이 촉감, 이 볼륨감.
이게 라비였어.’
하지만 앨리스와 스이나도 있는데 조금 지나치게 부비대는터라 난 약간 진정시킬겸 라비를 겨우 떼어놨다.
“알았어, 알았어. 몸은 안다쳤고?”
“그럼요!”
지하 스포츠에서 있었던 일은 팀 선수들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던 만큼,
라비는 아무것도 모르고 천연스럽게 웃었다.
눈 앞에 있는 그녀의 코치가 하루 전에 전기톱으로 다른 여자애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왔다는 걸 알면 틀림없이 크게 놀랄 테지…
“앨리스도 너무 수고했어요.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뭐 당연하지. ‘불의 마법’을 쓸 필요도 없었다니까.”
라비와 앨리스 둘 다 내 도움이 없어도 높지 않은 수준의 대회에선 순조롭게 이기고 왔군.
좋아, 좋아.
“모두 모였으니 이제 저희 팀이 나아가야 할 다음 목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미 단장과 메리와는 상의가 끝난 일이다.
스이나가 시즈에게서 받은 한 장의 ‘하계 전국대회 티켓’.
금박을 입혀 반짝거리는 한 장의 티켓을 바라보며 곰곰히 생각한 끝에, 결국 결정했다.
“저희는 내년 봄 전국대회에 참가합니다.”
순간 정적이 일었다.
내가 뭐 잘못 말한건가 가슴이 철렁해지려고할 때, 라비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와와~~~ 진짜요!? 저희가 전국대회를요?”
“들떠하지마, 라비야.
아직 나간 것도 아닌데.”
“그래도… 앨리스도 두근거리지않아?”
앨리스는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양, 품위를 유지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코치, 티켓은? 세 장 다 모아야 할텐데.”
“일단 한 장이요. 스이나 선수가 하나 얻었어요.”
라비와 앨리스가 다시 봤다는 듯 스이나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저도 그냥 누구한테 받은 거지만요…”
일단 대회를 향해 나아가야 할 첫 목표는 티켓 세 장 모으기.
결승점을 명확하게 잡으니 과정도 자연스레 분명해진다.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신분?”
“없어요~~!!”
“없어.”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라비와 앨리스는 흔쾌히 동의.
스이나는 평소처럼 별로 의욕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딱히 거부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올 겨울은, 전국대회를 대비해 맹훈련에 돌입할겁니다.
적어도 대회가 끝나고 한 점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건 다 해두자고요.”
“벌써부터 대회 분위기인데요, 아까부터 심장이 두근거려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