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카일라 누나는 돌려받겠다.] 2
"누나, 정신 들어?"
카이라스의 말에 카일라는 여전히 전신이 허공에 귀갑묶기의 자세로 묶인채로 고개를 살포시 끄덕거렸다.
"응...흑..."
카일라는 평소의 차갑고 도도하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채 그저 흐느끼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보링논에게 잡혔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거의 전부 기억하는 그녀는 보링논에 의해 옷이 하나하나 벗겨져 알몸이 되었던 치욕스러운 기억도 떠오르고 그에게 강제로 입맞춤을 당하다가 그대로 목을 깨물려 피를 빨리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를 빨린 후 그가 자신의 피를 자신의 체내에 주입시켜서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든 것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 후에 그녀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그녀를 백치로 만들어 그녀의 의식을 어둠 속 저 깊숙히 강제로 집어넣어서 자신의 육체를 자신이 움직일 수 없고, 제 3자의 관점으로 지켜봐야했던 것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돼! 9 서클의 마법이라고?"
그리고 11 살 짜리 인간 꼬맹이가 9 서클의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에 경악한 보링논은 카일라가 의식을 차린 것도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이 쯤 되니 카이라스라는 꼬맹이는 사실 마계의 마왕이 변신한 가짜가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보링논이 뭐라 생각하든 카이라스에게는 지금 카일라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나가 이렇게까지 우는 모습, 처음보네...'
시공회귀 이전에도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며 카이라스는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는 붉은 눈동자, 붉게 물들어있는 새하얀 여신과도 같은 아름다운 얼굴은 항상 차갑고 고고하며 세련되고 멋진 그녀의 평상시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틀렸다. 귀엽고 사랑스러워보인달까?
"우욱!"
그러나 그런 여유로운 생각과는 별개로 카이라스는 바로 각혈을 했다.
'여, 역시 아직 9 서클 마법을 쓰는 것은 무리였구나.'
심한 수준은 하지만 피를 토하고 난 후 정신이 어질어질 해지는 것을 느낀 카이라스는 잠시 휘청거렸다. 그러자 카일라는 다급히 오러를 뿜어내여 카이라스가 해두었던 마력의 구속을 끊고는 급히 달려가 카이라스를 품에 받아 안았고 브래지어와 T팬티만을 입고 있던 카일라였기에 카이라스는 그대로 그녀의 향긋한 맨살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인간의 향기라고 믿겨지지 않을 자극적인 향기가 코를 찔러왔다.
"라스, 괜찮아?"
카일라는 카이라스를 급히 안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이런 상황이 된 것은 다른 것도 아닌 자신 때문이었기에 그녀의 마음 속은 거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가득채우고 있었고 자신을 향해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는 카일라의 모습에 카이라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누나. 포커페이스가 무너졌어."
"...라스."
이런 와중에도 가벼운 농담을 날리는 카이라스의 모습에 카일라는 안도했다. 그가 이런 말까지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었으니깐.
실제로도 카이라스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았다. 그저 살짝 가벼운 내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쳇, 8 서클 마법을 이미 써둔 것은 몰라도 새로 쓰는 건 무리겠어.'
하지만 완전히 안정이 되지 못한 심장에 위치한 그의 8 번째 고리는 내상의 영향 탓에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현재 그는 7 서클 마스터나 다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누나, 잠시만 비켜줘. 나랑 접촉해있는 것은 현재 누나에게도 힘들잖아?"
"으...응."
카일라는 무엇인가 힘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바로 방금전 카이라스가 토해낸 피 때문이었는데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그녀는 당연히 피를 주식으로 여기게 되며 강렬한 흡혈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지금은 갓 뱀파이어가 되었기에 그 충동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흡혈충동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태에서 카이라스가 피를 토해냈으니 그 피 냄새를 맡은 카일라는 지금 억지로 흡혈충동에 저항하고 있는 상태였다.
"후우..."
카일라가 품에서 놔주자마자, 숨을 가다듬고 카일라의 품에서 벗어나 일어선 카이라스는 여전히 혈기에 제압되어있는 보링논에게 다가갔고 엎드린채로 쓰러져있는 그의 얼굴을 그대로 발로 걷어찼다.
"크억!"
오러를 담은 발길질이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보링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냈다. 그는 뱀파이어였지 케르베로스가 아니었기에 케르베로스처럼 단단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우우우웅!
보링논을 억누르던 혈기들이 보링논이 카이라스의 발길질에 맞고 고통스러워하자 기뻐하며 요동쳤다. 원한을 품은 대상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그들에게 유일한 기쁨인듯 했다.
'이 혈기들을 다 흡수한다면 9 서클 마스터는 순식간일테지만...포기해야지.'
카이라스는 이 혈기들에 녹아있는 원한들이 너무나 강력하여 흡수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기에 이 혈기들을 애초 흡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9 서클 마법 한 번만 사용했을 뿐인데도 내상을 입었는데 만약 혈기들을 흡수했다간 혈기들에 녹아있는 원한들이 날뛰어대는 것을 통제하다가 마나로드가 손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아직 그의 육체는 10 서클이 아니었으니깐.
"자, 보링논. 우선 대화에 앞서서 몇 마디 하지. 카일라 누나는 돌려받겠다, 악취나는 쓰레기 봉투 같은 자식아!"
카이라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공간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더니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시키고는 그대로 보링논의 손등을 찔러넣었다.
"크으으윽!"
혈기에 제압된 상태에서 보링논은 손등에 오러 블레이드가 박힌 것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기랄, 네 놈은 대체 어떻게 된 꼬맹이냐? 분명 11 살 짜리 꼬맹이에 신분도 확실한데 아무리 아르테일 공작가의 후계자라지만 9 서클의 마법을 쓰지 않나, 소드 마스터이질 않나, 정령까지 다루질 않나! 네 놈은 대체 정체가 뭐냐?"
"말했잖아. 카이라스 폰 아르테일이라고. 자, 그럼 대화를 해봐야겠는데...에라시안의 수하로서 무슨 짓을 했지?"
"크윽, 내가 대답할 거 같으냐!"
"....흠."
카이라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에 보링논은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 때문이라고 착각하고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미 리드 마인드 마법을 시전해두고 있던 카이라스는 보링논의 마음을 읽는 것으로 그가 가진 정보들을 빼내고 있는 상태였다.
'에라시안, 역시 이 사악한 년은 이 시대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군. 아직 같은 드래곤들도 모두 설득하지 못했을텐데 말이야.'
드래곤들도 모두 설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녀가 꾸미는 작업들을 생각하니 치가 떨려왔다. 보링논이 에라시안의 수하로서 한 짓은 매일매일 디아나가 마시는 동물들의 피나 카르시스 제국에서부터 구입해 오는 사형수들의 피에 몰래 에라시안이 준 약을 타는 것이었다. 그 약이 무슨 약인지 정보를 읽은 카이라스는 디아나가 왜 성격이 그렇게 바뀌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후계자인 셀리나가 죽은 것은 다른 뱀파이어들을 속이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을 위한 가짜였고, 진짜는 이거였군. 미래에서 디아나는 꼭두각시나 다름 없었어.'
아까전 세뇌당한 10 명의 뱀파이어 미녀들처럼 보링논은 몇 년에 걸쳐서 매일매일 디아나의 피에 약을 넣는 것으로 그녀를 차근차근 세뇌해가고 있었다.
뱀파이어 퀸인만큼 정신력이 막강한 그녀였지만 에라시안이 준 약을 몇 년 동안 투입되자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앞으로 몇 개월만 더 지냈다면 디아나는 보링논이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면 서슴없이 옷을 벗게 되는 정도로 세뇌가 강해졌을 것이었다. 그리고, 보링논의 배후에 있는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노예로 전락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럼 디아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약이라도 먹였나?"
카이라스는 리드 마인드로 마음을 읽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보링논에게 다른 질문을 해왔다. 이미 대부분 알고 있긴 하지만 혹시나 보링논의 마음에서 자신이 얻지 못한 정보를 읽어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링논은 카이라스가 자신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디아나에게 약을 먹였다는 대목에서 살짝 찔끔했다. 그러나 그는 금방 비웃는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쿠후후후, 내가 말해줄 것 같으냐? 꼬맹이."
보링논의 마음을 읽어본 카이라스는 다시금 인상이 찡그려졌는데 보링논은 이번에도 카이라스가 자신이 대답을 해주지 않는 것에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라 착각했지만 카이라스가 얼굴을 찡그린 이유는 다른 이유였다.
'이 놈, 역시 디아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어.'
카이라스가 읽어낸 정보에 따르면 보링논이 에라시안의 수하가 된 것은 바로 디아나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전대 뱀파이어 퀸인 루나 시절에는 후계자의 자리에 있던 그녀는 순진한 성격으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뱀파이어 퀸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그야말로 고고하고 날카로운 여왕 다운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보링논은 남자로서 강한 정복욕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고 에라시안에게 충성을 하는 대가로 디아나를 자신의 노예로 쓸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미래에서 확실히 디아나는 카일라, 유리아나 등에 필적하는 여신과 같은 미모로 카이라스를 비롯한 인간들에게는 적이었지만 그 아름다움 자체는 아무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을 정도였다.
'이 자식 역시 살려둬선 안되겠어.'
그리고 디아나에 관련된 마음을 읽다보니 읽어낸 정보에선 보링논은 카일라와 디아나를 나란히 임신시켜 여신과 같은 두 미녀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야말로 자신 전용의 정액변소로 전락시킬 예정이었다. 디아나야 어떻게 되든 카이라스로서는 알 바 아니었지만 카일라에게 이런 흑심까지 품고 있다니! 예상은 했지만 직접 확인하니 도저히 용서를 할 수가 없었다.
"디아나에게 매일매일 세뇌를 하기 위한 약을 투입하고 있었을테니, 앞으로 몇달 후였으면 디아나는 그야말로 네 놈의 정액받이로 전락했겠군."
"?!"
보링논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던 카이라스가 이 사실들을 알고 있자 경악하였고, 카이라스는 그를 향해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셀리나를 죽여서 그 죄를 인간에게 뒤집어 씌우고 세뇌한 디아나를 이용하여 뱀파이어 족 전체가 인간들을 적대하게 만드는 계획이라. 쓰레기 봉투도 안될 놈이로군. 하지만 그것까지는 그렇다쳐도 카일라 누나에게까지 흑심을 품고 저지른 일은 네 놈의 영혼이 파괴되어도 용서할 수 없어!"
그리고 카이라스는 그의 손을 그대로 검을 휘둘러 절단시켜버렸고 손이 절단되자 혈기에 눌려있는 상태에서는 뱀파이어 족의 재생력도 발휘되지 않고 있는지 보링논은 큰 소리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쿠아아아악!"
보링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본 카일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카이라스가 보여주는 모습은 11 살 짜리가 보이기에는 너무나 잔혹한 손속이었지만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수도 없이 몬스터들을 죽여오며 피를 보아오며 자란 카일라에게는 거부감이 드는 광경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치욕을 준 보링논이 당하는 모습에 동정심을 품을 쓸데없는 오지랖 따위는 그녀에게 없었다.
"잠시, 그 놈 좀 빌려주면 안될까?"
그리고 카일라와 카이라스는 물론이고 보링논까지도 비명을 멈추고는 셋이서 나란히 동작을 멈추었다.
너무도 나긋나긋한 여인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카일라의 목소리에 비할만큼 맑고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는 상당한 위압감이 담겨져있었고 카이라스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디아나...!'
전생의 숙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뱀파이어 퀸 디아나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