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뱀파이어 퀸 디아나 블라디미르] 3
10 분 동안 디아나에게 쉬지 않고 맞은 보링논은 거의 곤죽이 된 후 디아나는 뱀파이어 퀸의 권능, 매혹의 유도를 사용하여 보링논에게서 필요한 정볼르 모두 빼내었고, 쓸모가 없어진 보링논은 곤죽이 된 채로 카이라스에게 반환되었다.
"여기 빌린거 돌려줄께."
"필요없어."
"뭐?"
카이라스의 예상하지 못한 말에 디아나가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자 카이라스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해본 말이다."
카이라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보링논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 모습을 본 디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나는 여왕에 아름다운 레이디라고. 좀 배려 같은걸 해주면 안되는거야, 인간 꼬마?"
"카이라스."
"뭐?"
"내 이름이다. 내 이름은 인간 꼬마가 아니라 카이라스 폰 아르테일, 똑똑히 기억해둬."
"우웅...카이라스...카이라스..."
그 이름을 확실히 기억하려는듯 몇 번이고 중얼거리던 디아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흥! 영광으로 알아. 아름다운 여왕이신 이 디아나 블라디미르님이 친히 이름을 기억해주는거니까 말이야."
입술을 삐죽이며 도도하게 말하는 디아나였지만, 카이라스는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너무나 뻔히 보였다.
'결국 자기 이름도 기억해달라는거잖아.'
쓸데없는데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까지도 참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있는 디아나는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카이라스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카이라스가 쳐다본다 싶으면 바로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것이 무슨 도둑질 하다가 걸린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카이라스는 그런 디아나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파악하였다.
바로 호기심.
그녀는 현재 카이라스에게 깊은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치름하게 카이라스를 몰래 힐끗 쳐다보던 디아나가 갑자기 카이라스를 불렀다.
"저기 카이라스?"
"왜 부르지?"
카이라스의 딱딱한 대답에 디아나는 불만스러운듯 살짝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름답고 고귀한 여왕님인 내가 이름으로 불러줬는데 그런 태도야? 아무리 내가 어린아이들을 좋아한다고 해도 자꾸 그러면 기분 나빠."
"...페도필리아?"
"아니거든!"
디아나가 바로 카이라스의 말을 부정했다.
"난 그냥 부모 없는 고아인 어린애들만 모아다가 돌봐주고 있을 뿐이야."
그 말에 카이라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미래에서 디아나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던 중 그가 얻은 정보에서는 그녀가 고아원을 운영했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부모가 없거나 버림받은 어린아이들을 모아다가 돌봐주며 그 숫자가 30 명에 달하였고 식량은 인간들의 마을에서 구해오는 방식으로 그 아이들을 돌봐주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하지만 에라시안의 노예로 전락한 후, 직접 그 아이들을 전부 죽였지.'
지금의 디아나가 그 사실을 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신이 돌보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모두 죽여버린다는 미래를 알게 된다면 아마도 보링논을 직접 자신이 죽여버리겠다고 할테지만 카이라스는 그것을 믿게할 방법이 아직은 없었다.
애초 단순한 수준의 미래예지가 아니라 그런 정확한 미래에 대한 예지라면 미친 놈 취급받는 것이 정상이었다. 더군다나 미래에서 왔다는 얘기를 한다면 완벽하게 미친 놈으로 인식될 터였고 11 살의 육체나이로 미친놈으로 인식되고 싶은 생각이 그에겐 없었다.
"보링논은 여기서 죽여야겠어. 데리고 다니긴 좀 위험하거든. 불만 없지, 디아나."
"응, 마음대로 해."
디아나는 보링논을 죽이겠다는 카이라스의 말에 바로 수락했다. 이미 정보를 빼낼 것은 전부 빼낸 상태였고 그녀의 머리 속은 지금 상당히 복잡할 것이었다.
카이라스 덕분에 있는 것을 확인한 자신의 권능인 매혹의 유도를 통해서 보링논을 심문한 결과 자신을 세뇌하려 한 그의 배후가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뱀파이어 퀸인 그녀라 해도 중간계 최강의 존재라는 드래곤 로드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런 고민에 빠져있는 동안 카이라스는 곤죽이 되어있는 보링논을 쳐다보며 작게 중얼거리며 마법의 시동어를 입 밖으로 내었다.
"데스 스펠."
6 서클의 마법이며, 9 서클의 살인 주문인 파워 워드, 킬의 약화판인 데스 스펠 마법의 시동어가 카이라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보링논의 마지막 남은 한 쪽 눈에서 생기가 급격히 없어졌다. 카일라를 납치하고 디아나를 세뇌하려 들었으며 셀리나를 죽이려 들었던 에라시안의 수하인 뱀파이어 후작 보링논은 이렇게 유언도 남기지 못한채 사망했다.
화르르륵!
카이라스는 죽어버린 보링논의 시체를 그대로 태워버렸다. 10 서클 마법의 힘 중에서는 시체만 있다면 죽은 자를 되살리는 마법도 있었기에 시체를 남겨두었다간 에라시안이 되살려내어 자신들에 대한 정보를 역으로 얻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체를 태워버린 카이라스는 이어서 보링논의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에게 원한을 품은 혈기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물어뜯는 광경을 아무렇지도 않은듯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우아아아악!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다! 이 비천한 것들이 감히!]
보링논의 영혼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혈기들을 떨어뜨리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보링논의 영혼은 그대로 혈기에 의해 갈가리 뜯겨져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그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1 만에 달하는 인간들의 원한이 달성한 복수였다.
"......"
디아나도, 카이라스도 보링논의 영혼까지 깔끔하게 사라지는 광경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우우우웅!
혈기들이 일제히 요동치며 카이라스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운의 의지를 읽은 카이라스는 그들이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음을 알아듣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살포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대들에게 평안이 깃들기를."
카이라스는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그들이 쉽게 평안이 깃들 수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말만으로도 혈기들에 녹아있는 원한들로서는 마음에 조금은 위안이 될 것이었다.
"저기, 카이라스."
혈기들이 카이라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끝내고 카이라스도 인사를 끝냈을때 디아나가 다시금 카이라스를 불렀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지?"
타박을 하도 당해서인지 아까전의 그녀였다면 도도하고, 또 어찌보면 철 없고 건방지게 부탁을 해왔겠지만 그녀는 조심스럽게 카이라스에게 물어왔다.
"태도가 많이 공손해졌네?"
"흐, 흥! 시, 신경 쓸거 없잖아. 이 아름다우신 여왕님이 부탁하는거면 기쁘게 받아들여주면 될텐데...정말...내가 고아원에서 돌보는 애들은 참 착하고 말도 잘 듣는데 카이라스는 왜 이리 삐딱한지 모르겠어."
디아나의 묘하게 꽁해있는듯한 모습이 귀여워보인 카이라스였지만 그는 급히 그 생각을 지웠다.
"부탁이 대체 뭔데?"
"...나와 셀리나...아르테일 공작가에서 지내면 안될까?"
예상 밖의 말에 카이라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르테일 공작가에서 지낸다고? 뱀파이어 퀸 디아나가?'
전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그가 볼 때 디아나는 자존심이 상당히 강한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허세를 부리며 자신이 틀리더라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철부지 같은 성격도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에 대해서 디아나가 느끼는 공포가 상당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혀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었다.
"아르테일 공작가에서 지낸다고?"
디아나의 부탁에 대답한 것은 카이라스가 아니었다. 디아나의 목소리만큼이나 맑고 아름다운 미성의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인간으로 되돌아온 와중에 느낀 고통 때문에 15 분 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다가 방금 막 정신을 차린 카일라였다.
"카일라 누나, 이제 좀 괜찮아졌어?"
"응, 괜찮아."
인간으로 되돌아온 카일라의 두 눈동자는 완벽하게 차가운 싸늘함을 담은 푸른색 눈동자로 되돌아와있었고 동시에 그녀의 목에 나있던 보링논에게 물렸던 두 개의 송곳니 자국 역시 사라져 백옥의 피부에 나있던 유일한 흠 역시 사라진 상태였다.
"라스, 어떻게 생각해?"
"디아나와 셀리나. 이 둘이 아르테일 공작가에서 지내는거?"
"응."
"흠, 글쎄..."
카이라스는 진심으로 깊이 고민에 빠졌다. 디아나와 셀리나가 뱀파이어인 이상 아직까지 카이라스는 그녀들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었고 또 그녀들이 안전하다고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간 에라시안이 그녀들에게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랐고 미래에서 최강의 암살자라고까지 불렸던 디아나와 그 디아나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셀리나를 감안하면 그녀들을 아르테일 공작가로 데려가는 것도 방법이었다.
"맹약을 몇 가지 해준다면 데려가지 못할 것도 없다고 보는데?"
"...아르테일 공작가의 차기 주인은 라스, 너니까 네가 결정해. 나는 그냥 결정을 따를테니까."
카일라는 아르테일 공작가의 소가주인 카이라스의 권위를 존중하여 그에게 선택권을 넘기었다. 그 일면에는 당연히 카이라스에 대한 신뢰감도 있었는데 비록 나이는 11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데다가 자신을 구해주기까지 한 카이라스였기에 그가 올바른 선택을 내릴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워, 누나."
"......"
카일라는 카이라스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카이라스는 그녀가 아직도 자신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것은 없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치졸하고 쪼잔한 면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관대한 카이라스는 그녀가 품고 있는 미안해하는 감정이 오래 있지 않았으면 했다.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정말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니까.
"결정은 했어?"
디아나가 살짝 허리를 숙이고 카이라스와 눈높이를 마주치면서 물어왔다. 살짝 핏빛에 가까운 붉은 색의 진한 보석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지만 카이라스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는 대신 떨떠름함을 느끼고 있었다.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하고 있군.'
그러면서도 동시에 기대감을 담은 별빛 같은 눈동자라니...참으로 뱀파이어 퀸 답지 않은 언밸런스함이었다.
"맹약을 몇 가지 한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어. 단 디아나, 당신과 셀리나. 이 둘만을 받아들일 수 있고 다른 뱀파이어들은 일절 받아들일 수 없어."
"문제 없어. 근데 우리는 살려면 피가 필요한데..."
"아, 그것은 걱정할 것 없어. '블러드 캔디'라고 피와 같은 맛과 영양을 모두 지닌 사탕이 있거든. 또 동물 피나 사형수의 피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 피가 부족할 일은 없을거야."
카이라스의 말에 그 부분을 약간 걱정하던 디아나가 안도했다. 그러나 카이라스는 그녀들을 공짜로 자신의 가문에서 지내게 해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하숙비로 내가 원하는 몇 가지 물건들을 줬으면 하는데..."
"어떤 물건인데?"
순진한 디아나가 수락할 뜻을 보이자 카이라스는 속으로 상당히 기뻐했다. 뱀파이어 퀸인 그녀가 가진 물건들 중에서는 쉽게 구하기 힘든 물건들도 상당수였고 그 중에서 지금의 그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얻어낸다면 그가 이번에 정령석들의 기운을 급히 흡수함으로서 본 손해를 채울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순진한 애를 속여먹는듯한 느낌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