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피의 맹약]
드래곤들은 용언(龍言)으로 한 약속을 죽을 각오라도 하지 않는한 결코 어길 수가 없었다. 용연으로 한 약속은 그만큼 무게가 깊었기 때문이었고, 어긴 드래곤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미쳐버리는 운명을 맞이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뱀파이어들에게는 피의 맹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바로 뱀파이어 스스로에게는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신의 피를 걸고 하는 약속으로 피의 맹약으로 이루어진 약속을 어기는 뱀파이어는 있을 수가 없었다. 애초 맹약을 거스르는 생각도, 행동도 저절로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용언을 하더라도 한 번 어기고 죽을 각오라도 할 수 있는 드래곤과는 달리 뱀파이어는 절대로 피의 맹약을 어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피의 맹약을 카이라스는 디아나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받아들일께."
그리고 아르테일 공작가의 보호가 필요하며, 또 어린 인간 소년임을 틀림 없는데 유독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카이라스에게 깊은 호기심을 느낀 디아나는 단순한 맹약도 아니고 피의 맹약인데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피의 맹약의 내용은 어떤데?"
"이거면 간단하지. '디아나 블라디미르는 무조건 카이라스 폰 아르테일의 말에 복종한다.'"
확실히 간단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디아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건 싫어. 그러면 평생 카이라스의 명령을 받으며 살아야하잖아."
디아나의 격렬한 거부에 애초 못 먹는 빵 찍어본 심정이었던 카이라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다지 기대도 안했어. 잠시 계약 내용을 적어줄테니 한번 보고 결정해."
"응."
그리고 카이라스가 적어준 계약 내용은 이러했다.
1. 디아나 블라디미르와 셀리나 블라디미르는 절대로 카이라스의 허락 없이 인간을 죽이거나 피를 빨지 않으며, 죽기 직전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2. 디아나 블라디미르와 셀리나 블라디미르는 카이라스를 비롯하여 아르테일 공작가를 절대적으로 위해야하며 합당한 이유가 없을 경우 카이라스의 말에 따라야한다.
3. 디아나 블라디미르와 셀리나 블라디미르는 아르테일 공작가 내에서 예의바르게 행동해야한다.
4. 디아나 블라디미르와 셀리나 블라디미르는 카이라스를 비롯하여 아르테일 공작가의 사람들은 카이라스에게 위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면 공격해서는 안된다.
5. 디아나 블라디미르는 카이라스가 요구하는 아래의 물품들을 하숙비로 지불해야한다.
....생략....
"이 5 개면 되는거야?"
"일단은 이거면 충분해."
디아나는 4 개의 조항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문제 없네. 정말 이상한 꼬마야. 나 같이 아름다운 여왕님이 같이 집에서 지내주겠다고 하는데 정말 이런 계약까지 해야하다니."
"카일라 누나, 저 정도면 공주병이라 할만하지?"
"응."
카일라 역시도 디아나에 비교해서도 떨어지지 않은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한 적도 없었고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디아나의 외모는 확실히 같은 여자인 그녀가 봐도 아름다웠으며,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고모인 엘리나에 비교해서도 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미모였다. 하지만 그 외모에 너무 심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카일라가 볼 때는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그녀는 디아나가 어떻든 별 관심이 없었지만 카이라스가 물으니 그냥 대충 대답해준 것이었지만 그와 그녀의 말을 들은 디아나는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나...진짜 공주였는데..."
뱀파이어 퀸인 디아나는 당연히 퀸의 자리를 전대 퀸인 루나가 차지하고 있을 당시에는 그녀는 여왕의 자리가 아닌 공주의 자리였었고 그렇기에 지금 그녀의 공주병 증상은 그녀가 공주이던 시절부터 생겨버린 것이었다.
'하기야...저런 미모에 다들 떠받들여주니 저런 성격이 될법도 하고 무엇보다 저 정도면 양호한거지.'
사실 디아나 정도면 인간들의 왕국의 공주들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는데 어떤 공주들의 경우는 공주로 태어나 너무나 오만하게 자란 나머지 하인이나 하녀들을 벌레 같이 여기고 길가에 있는 평민들을 짐승으로 부르며 취급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디아나는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부심이 좀 지나치게 강하고 철이 없기는 해도 본성이 사악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녀가 그런 공주들 같은 성격이었다면 반말로 대하고 있는 카이라스를 공격하려 들었을 것이었고, 그럴경우 그녀는 파워 워드, 킬에 당해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렸을테니깐.
"알았으니, 피의 맹약을 시작하지 그래?"
"잠깐만, 근데 셀리나도 꼭 같이 해야하는거야?"
디아나가 셀리나까지 피의 맹약을 해야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듯 카이라스에게 묻자 카이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외는 없어."
"...알았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습관적이게 아름다운 입술을 삐죽이며 디아나는 살짝 자신이 가진 블러드 마나를 운용하여 권능을 사용했고, 카이라스는 그것이 통신 계열의 권능임을 알고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아악!
빛 한 점 없는 연무장의 곳곳에 놓여져있는 빈 화로들에 불이 켜지더니 이윽고 연무장 전체가 밝아졌다. 그리고 밝아진 연무장에 4 명의 인영들이 나타나더니 일제히 디아나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뱀파이어 공작, 루커드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뱀파이어 공작, 세리스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뱀파이어 공작, 레이라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뱀파이어 공작, 에이리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약간 어두운 금발의 미남자인 루커드를 제외하고는 뱀파이어 공작들은 4 명 중에서 3 명이 무려 여자였다. 세리스는 긴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강렬한 인상의 요염한 미녀였으며, 레이라는 마치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잘랐지만 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미녀였으며, 에이리는 긴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약간 도도한 인상의 미녀였다.
'저들을 여기서 보니 묘하구나.'
카이라스는 당연하게도 저 4 명의 뱀파이어 공작들도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유리아나가 디아나에게 살해당한 것은 저 4 명을 패퇴시킨 후 체력이 떨어져있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4 명이 모이면 유리아나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해도 지치게는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연계기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들은 명실상부한 디아나를 제외한 뱀파이어들의 최강자였다.
스으으윽-
그리고 여전히 기척과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흑발에 적안을 지닌 어린 소녀, 셀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계자인 그녀는 공작들처럼 무릎은 꿇지 않지만 디아나에게 다가가 살포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뱀파이어 프린세스, 셀리나가 퀸을 뵙습니다."
"아아, 셀리나. 딱딱한 예절은 하지 않아도 돼. 그냥 고모님~이라고 불러주기만 하면 돼."
셀리나의 예의 바른 태도가 디아나는 마음에 안드는지 디아나는 그녀에게 애교스럽게 고모님~이라는 말투를 불러주길 원했고 본인이 시범까지 보여주자 카이라스는 디아나의 저런 모습들이 익숙해지기 힘들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었다.
"......"
그렇지만 셀리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디아나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난처해하는 표정이 되었고, 카이라스는 혈기에 자신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그녀에게 진 빚을 생각해서 그녀를 도와줄 겸 앞으로 나서서 디아나에게 말했다.
"디아나, 그것보다는 맹약을 해야지."
"아, 그래. 셀리나. 당분간 고모와 함께 저기 카이라스네 집에서 머물러야할 것 같아."
디아나는 셀리나에게 설명을 해주려 했지만 그 때 루커드가 끼어들었다.
"여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왕님이 인간 꼬마가 사는 집에서 공주님과 함께 지내게 되다니요!"
"...루커드. 여왕님이 말씀하시는데 좀 입 다물어."
셀리나와 대화를 하려는 것에 방해를 받자 디아나가 기분 나쁘다는듯 루커드를 째려보자 루커드는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디아나의 명령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천성이 순진한 바보라 해도 디아나는 엄연히 뱀파이어들의 여왕인 뱀파이어 퀸이었고 그에 따른 힘을 지니고 있으며 그만한 위압감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셀리나에게 시선을 향하는 순간 셀리나가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디아나의 표정을 잠시 어이없는듯 보던 카이라스는 카일라에게 말했다.
"누나, 보링논의 방에 누나의 옷과 검집이 있죠?"
"응."
"가서 입고 와요. 저기 루커드는 남자인데 누나의 속살들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알았어, 잠시 다녀올게."
카일라 역시도 처음 보는 남자에게 아슬아슬한 부위들만 가린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금방 옷을 돌려받으러 떠났고 카이라스는 이제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카일라가 지나간 자리에서 뱀파이어 공작들의 표정을 본 카이라스는 그들이 입맛을 살짝씩 다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까...그 여자 체향이 너무 먹음직스럽덴데..."
그렇지만 인간들을 습격해서는 안된다는 과거 뱀파이어들과 인간들 사이에 적혀진 조항을 알고 있는 그들은 모두 입맛만 다실 뿐 카일라를 습격하려는 마음들은 조금도 품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해서..."
그리고 그 동안 카일라의 먹음직스러운 체향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쭉 보여주던 디아나는 셀리나에게 친절하게 설명들을 해주고 있었고 디아나의 설명들은 들은 셀리나는 사태가 상당히 심각함을 어린 나이임에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에게 설명을 모두 들은 셀리나는 카이라스에게 다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폐를 끼치게 되었네요."
셀리나의 태도는 무척이나 예의바르고 공손했으며, 또 기품이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카이라스에게 신세를 지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듯 했고 그녀의 마음을 읽어본 결과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안 카이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 하숙비는 받을테니까."
"하숙비요?"
이미 카이라스는 디아나에게 받기로 한 물품들이 있었고 카이라스의 말을 들은 디아나가 살짝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하숙비 치고 너무 비싸단 말이야. 나 같이 아름다운 여왕님하고 귀여운 셀리나가 같이 집에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일텐데 대체 왜 이리 삐딱하게 구는거지?"
진심으로 디아나는 그 점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남, 녀를 가리지 않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거나 그녀의 아름다움을 숭배했고 그런 그녀에게 카이라스의 태도는 상당히 신선하기는 했지만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자, 그럼...피의 맹약을 시작해야지?"
카이라스의 재촉에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를 셀리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계약서의 내용들은 셀리나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문제가 될 것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저 둘을 한 번 키워볼까?'
카이라스는 귀여운 애완동물들을 키워본다는 셈 치고 둘을 미래를 위한 전력으로 키워볼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카이라스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셀리나는 디아나가 계약서를 보여주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하자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살짝 그를 흘겨보았고,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살짝 홍조가 띄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