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피의 맹약] 2
'첫 키스였는데...'
비록 로얄 블러드의 가호를 실행시키기 위해서 한 키스였지만 아직 11 살 밖에 되지 않은 셀리나에게 있어서는 당연하게도 카이라스와 한 키스는 첫 키스였다. 이는 아직 키스는 커녕 남자와 다정하게 손도 잡아보지 못한 그녀의 고모인 뱀파이어 퀸 디아나보다도 빠른 진도였다.
'저 분은 날 싫어하겠지...하지만 같이 지내다보면 좋게 봐주실지도 몰라.'
비록 어려서 깊은 사랑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셀리나는 카이라스가 상당히 좋았다. 아직 어려서 이목구비가 완전히 갖춰졌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 카이라스의 외모는 아름답다보다는 잘 생겼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외모였고 그의 외모는 뱀파이어들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잘생긴 소년이었다. 애초 그의 아버지인 루스칼리스부터가 그 잘난 외모로 아직도 수많은 여자들을 홀리고, 또 후리고 다니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어머니인 엘리나가 디아나와 카일라와 비견될만한 절세미녀라는 것을 생각하면 카이라스의 이런 외모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한 수컷에게 끌리는 것이 이 세계의 암컷들의 기본적인 본능이었으며, 카이라스는 최고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카일라에게 신경 써주는 것을 보니 셀리나는 카이라스라면 자신의 여자에게 무척이나 따스할 것만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직까지는 그저 어린 소녀의 풋사과 같은 사랑이었지만 어떻게 변할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었다.
"자, 그럼 셀리나. 나부터 피의 맹약을 시작할께...아, 아플텐데..."
살짝 투덜거린 디아나는 바닥에 간단한 문장을 그린 후 새하얀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더니 자신의 송곳니로 살짝 깨물었고 그녀의 손가락에는 진한 붉은 색의 피가 고여졌다. 그리고 그녀의 피는 이내 문장의 위로 정확히 한 방울씩 떨어졌고 디아나의 피를 받은 문장은 살짝 붉은 빛을 내더니 막대한 기운을 풍기기 시작했고 디아나는 손가락에서 나는 피 때문에 아픈지 살짝 눈물이 고인채로 피의 맹약을 시작했다.
"뱀파이어 퀸이며, 고귀한 로얄 블러드의 후예 디아나 블라디미르의 이름과 명예, 그리고 고귀한 피를 걸고 이 계약서의 내용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만약 이 맹약을 어길 경우 로얄 블러드의 저주가 있으리."
디아나가 맹세를 끝나자 이번에는 셀리나의 차례였다. 디아나와는 달리 조신한 몸가짐을 보이면서 살짝 손가락을 송곳니로 깨문 그녀는 피를 디아나가 했듯이 문장 위로 떨어뜨렸다.
"뱀파이어 프린세스이며, 고귀한 로얄 블러드의 후예 셀리나 블라디미르의 이름과 명예, 그리고 고귀한 피를 걸고 이 계약서의 내용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만약 이 맹약을 어길 경우 로얄 블러드의 저주가 있으리."
셀리나 역시 피의 맹약을 끝내었고 겉으로 볼때는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기운의 움직임에 민감한 카이라스는 그녀들에게 제약이 걸렸다는 것을 알고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신뢰할 수 밖에 없겠어.'
사실 카이라스는 디아나와 셀리나를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합리적인 사고로는 그녀들이 죄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미래의 디아나가 한 잔혹한 짓들은 그녀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닌 모두 나쁜 것은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과 배신자인 보링논이라는 사실도 인정하고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10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쟁을 해오며 적으로만 보아왔던 뱀파이어들에 대한 사고를 단번에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리아나를 죽인 것은 지금의 디아나가 아닌 꼭두각시 인형과도 같은 다른 디아나였으니 용서를 한다해도, 뱀파이어 족이라는 것에 의해 감성적인 부분에서는 그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혈기들이 모여있는 이 방 밖으로 떠나지 않고 혈기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이 방에서 쭉 서있던 것이었다. 여차하면 파워 워드, 킬을 시전할 수 있는 곳은 현재 이곳 뿐이었으니깐.
그렇지만 이제 피의 맹약까지 한 이상 그는 그녀들을 신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자신이 그녀들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피의 맹약까지 해주었으니 그 역시 신뢰를 마주 해주어야만 했다.
"얘기는 전부 됬어?"
본래의 은색에 가까운 새하얀 속옷들이 벗겨지고 그 대신 보링논이 자신의 취향대로 입혔던 검은 브래지어와 검은 T팬티를 벗고는 원래 자신의 속옷들을 입고는 그 위에 새하얀 상의와 가죽 핫팬츠를 차려 입은 카일라가 그의 곁으로 사뿐히 걸어오며 묻자 카이라스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끝났어. 이제...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카일라 역시 카이라스의 의견에 동일했다. 몬스터의 사체는 충분히 모아둔 상태였다. 그리고 뱀파이어가 되었다가 인간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하고 무엇보다 강간까지 당할 뻔 했던 그녀는 하라나드 숲에 있기가 싫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리에 돌아오자 4 명의 뱀파이어 공작들은 동시에 살짝 얼굴을 찡그렸는데 카일라가 돌아온 것이 불쾌해서가 아닌 그녀에게서 풍기는 체향이 너무나 먹음직스러워서 그 유혹을 견디기 위해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진 것이었다.
반면 디아나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듯이 멀쩡하였고, 셀리나는 살짝 손으로 코와 입술을 함께 가리는 것으로 카일라를 향해 살짝 미안한듯 쳐다보았다.
"루커드, 세리스, 레이라, 에이리."
""네, 여왕님.""
디아나가 4 명의 뱀파이어 공작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을 향하자 디아나는 어느 사이 재생되어있는 새하얀 손가락으로 자신의 귓등을 살짝 쓰다듬으며 도도한 태도로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피의 맹약도 했고, 당분간은 여기 인간의 아르테일 공작가에서 지낼테니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마. 그리고 무엇보다도 먹을 것을 조심해."
"네? 먹을 것을 조심하라고요?"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성 뱀파이어인 세리스가 붉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무슨 소리냐는듯 디아나를 쳐다보자 디아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자존심 강한 그녀는 자신이 먹을 것을 잘못 먹어서 세뇌를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살짝 돌려서 말했다.
"그냥...드래곤 로드가...이상한 약을 만들어서 우리 뱀파이어들에게 먹이려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뱀파이어 공작들은 디아나의 말투에서 이상함을 알아차렸지만 그녀를 공주 시절부터 보아온 그들은 디아나가 숨기고 싶어하는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적당히 넘어가주었다.
"아, 그리고 피의 맹약에 이런 내용도 있는데 여기 적혀있는 것들 좀 빠른 시일 내에 아르테일 공작가라는 곳으로 가져와줘."
그렇게 말하면서 디아나는 하숙비 명목으로 카이라스가 요구하며 계약서에 끼워넣은 물품들의 리스트들을 계약서 통째로 뱀파이어 공작들에게 보여주었고 뱀파이어 공작들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금방 리스트들을 보고 외운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일 밤에 갖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응, 그럼 다들 잘가."
디아나는 손짓까지 하며 그들을 보내주었고 뱀파이어 공작들은 이내 안개가 되어서 전부 빠르게 연무장 밖을 나갔다. 이제 그들은 디아나의 성이 있는 남쪽 지역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자 디아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카이라스에게 말했다.
"카이라스, 이제 너희 집으로 가자."
"...묘하게 들떠 보이는데? 카일라 누나, 누나가 보기에도 그래보이지 않아?"
"응, 그런거 같네."
카일라는 카이라스의 말에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며 한 마디 대답만 해주고는 금새 침묵을 했지만 디아나는 얼굴을 붉히며 카이라스와 카일라의 말을 부정했다.
"벼, 별로 들떠 있지 않거든? 그, 그냥...남의 집은 가본 적이 없어서 궁금할 뿐이야."
디아나의 그런 말에 셀리나는 살짝 어색하게 웃더니 카이라스의 앞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고모님이 솔직하지는 못하셔도, 그래도 나쁜 분은 아니시고 오히려 좋은 분이세요.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혹시 고모님이 실례를 하더라도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이해해."
카이라스는 나이는 어려도 고모인 디아나보다 훨씬 조신하고 숙녀 다운 셀리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셀리나는 살짝 기쁜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카이라스의 속마음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틀렸다.
'이해하지. 저 철부지가 얼마나 많은 실례와 폐를 끼칠지 말이야.'
하지만 뱀파이어 족의 여왕이며 미래에서 최강의 암살자로 불렸던 디아나는 아직 가공되지 않은 원석과도 같은 존재였고, 그것은 셀리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저 둘이 적이 아닌 것 만으로도 훗날 이종족들과의 전쟁에서 인류는 보다 유리한 입장에 설 것이었다.
"그럼 보링논에게 물려서 뱀파이어가 된 10 명의 불쌍한 여인들도 치료하러 데려가야겠지."
귀족 뱀파이어인 보링논이나 왕족 뱀파이어인 디아나나 셀리나 같은 존재들이라면 햇빛에 내성이 있거나 햇빛이 아예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하겠지만 디아나나 셀리나도 아니고 보링논에게 물려서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10 명의 미녀 뱀파이어들에게 햇빛은 상당히 치명적인 고통을 줄 수 있었다.
하라나드 숲이 비록 햇빛이 통하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고는 하지만 드문드문 햇빛이 나무들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곳들이 있었고 상당히 이동에 제약을 받을 것이었다.
'지금 시간이 이제 해가 지는 시간이라는게 다행이지.'
때마침 해가 지고 있었기에 그녀들을 데리고 나가기도 딱 좋았다.
'이제 혈기들도 작별이네.'
혈기들이 웅웅- 거리기 시작했다. 카이라스가 떠나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에게 원한을 풀어줘서 고맙다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 다들 잘 있어."
카이라스 역시 혈기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혈기들은 알아서 자연의 기운에 녹아들어 자연의 일부들이 될 터였다. 그렇기에 그는 마음 놓고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카일라 누나도 되찾았고...이제 당분간은 집에서 좀 힘이나 회복하며 쉬어야겠어. 디아나는 숙부님이나 어머니가 잘 가르쳐줄테니.'
* * *
"......"
화려하게 치장된 황금의 방 안에서 한 명의 여인이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올듯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의 그녀는 마치 여신 같이 아름다운 미녀였고 그야말로 미(美)의 조각상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금안이 서서히 떠졌을때 그녀의 입가는 살짝 올라가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보링논이 죽었다라...후훗, 디아나가 눈치라도 챈 것일까? 아니면 보링논 그 멍청이가 어디서 원한이라도 산 것일까? 뭐 지금은 상관없지."
스으윽-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새하얀 손으로 황금의 벽을 매만졌다. 황금의 벽에 그려져있는 것은 수많은 종족들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들이었는데 그녀는 그 도중 인간에게 시선이 멈췄다.
"2 번이나 문명이 멸망했을텐데 다시금 이 정도까지 오다니, 역시 인간들은 위험해. 다시 싹을 잘라버려야겠지."
아직 그녀의 뜻에 동참하지 않는 드래곤들은 여럿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그녀는 여태까지의 드래곤 로드들과는 달리 드래곤들의 개체를 존중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모든 드래곤들의 군주(Lord)였고, 모든 드래곤들은 그녀의 명령을 따르는 신하들이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에게 거역한다면 반역자로 처분하면 그만이었다.
"후후훗."
그녀의 이름은 에라시안. 시공회귀 이전의 미래에서 카이라스의 최악의 원수이자 숙적이었던 인류를 멸망시킨 드래곤 로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