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3 년 후] 3
'역시 너무 여려...'
카이라스는 셀리나의 그런 말을 듣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게 전투기술을 가르쳐주기는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를 죽이기에는 너무 착하고 순수하였다.
'디아나는 그래도 적에 대한 공격은 망설임이 없는데 말이야.'
디아나 역시 순진하고 철부지 같은 성격이었지만 그래도 적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르테일 공작가에서 그의 어머니인 엘리나와 주로 대결을 하며 보다 기술들을 단련하고 다양한 힘의 운용법들을 배우면서 디아나의 실력은 3 년전에 비하면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강해져있었다.
물론 그녀가 뱀파이어 퀸으로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선 것 같은 것은 아니고 그저 힘의 운용법과 전투를 하는 법을 체계적으로 배운 것 뿐이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는 가장 필요했다.
뱀파이어 퀸으로서 막대한 힘을 지녔지만 그 힘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던 디아나였기에 힘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이야말로 그녀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제압 계열인 유술들을 가르쳤지만...뭐, 이대로 지내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괜히 이런 순수한 아이까지 전쟁에 끌어들이면 마음이 불편할테니.'
카이라스의 사고는 3 년 사이 많이 변해있었는데, 3 년전의 그는 셀리나의 재능을 보고 그녀를 훗날 있을 전쟁에 이용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셀리나를 전쟁터로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만큼이나 그녀가 가진 여리고 순수한 마음이 크게 카이라스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연무장 안에 붉은 안개가 들어와 가득차기 시작했다. 갑자기 붉은 안개가 연무장 안에 가득채워지는 광경은 보통 인간이라면 공포를 느낄 법도 했지만 카이라스는 팔짱을 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폼 잡으며 등장하지 말라고 했잖아, 디아나."
그러자 붉은 안개 속에서 풍만한 가슴의 파여진 부분과 새하얀 어깨를 드러내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가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여왕님의 등장인데 이 정도의 분위기 연출은 해줘야하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셀리나?"
"......"
셀리나는 창피한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디아나는 그 모습에 잠시 아름다운 입술을 살짝 벌리고는 침묵을 했다.
"......"
"......"
"......"
잠시간 침묵 후 카이라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셀리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거 같은데?"
"세, 셀리나는 아직 어려서...여왕의 등장에 화려한 분위기 연출이 필요한 걸 모르는거야!"
"...화려함이 아니라 음침함이겠지."
"으, 음침함..."
카이라스의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디아나는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이내 아름다운 얼굴에는 삐짐이라는 감정이 새겨지며 입술을 삐죽인 그녀는 카이라스에게 다가와 물었다.
"꼭 그렇게까지 말을 해야겠어? 그냥 적당히 맞장구 좀 쳐달라고..."
"오늘 드레스가 참 예쁘네. 어제 꺼와는 달리 문양도 없고 말이야."
"우웃...내, 내가 아니면 드레스가?"
"둘 다."
디아나가 칭찬을 원한다는 것을 파악한 카이라스는 바로 그녀가 원하는 칭찬을 날려주자, 디아나의 새하얀 얼굴이 연분홍빛으로 물든채로 당황해하는 것이 여지 없이 보였다. 여전히 카이라스는 미성년자에 어린 소년이기는 했지만 3 년전에 비하면 키도 160cm를 가뿐히 넘을 정도로 커지고 외모 역시 보다 남성적으로 성장했기에 외모 역시 상당히 디아나의 취향에 맞춰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르테일 공작가에서 생활하면서 그녀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공주이던 시절부터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뱀파이어들은 그녀를 경외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물론 보링논 같이 음흉한 눈으로 그녀를 노리던 쳐다보던 자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그녀는 주위에서 워낙에 떠받들여주다보니 자연히 철이 없는 공주님으로 자랐고 여왕이 된 지금도 그런 성격들이 그대로 이어져있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동생까지도 자신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모습에 섭섭해하며 가족의 사랑을 바라고 있었고 가족 중 유일하게 그녀의 아름다움에 경외심을 품지 않는 존재가 바로 그녀의 조카인 셀리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디아나에게 자신을 고모로만 대해주는 셀리나의 존재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보이고 특별했고 그렇기에 디아나는 바로 그녀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해버렸다.
그럴 정도로 가족애에 굶주려있던 디아나는 아르테일 공작가로 와서는 혈연으로서의 서로간의 신뢰나 가족애가 강한 공작가 내의 모습들에 처음에는 크게 놀랐다. 특히나 아르테일 공작가의 가주이며 카이라스의 아버지라는 루스칼리스와 그의 아내이며 카이라스의 어머니인 엘리나, 그리고 카이라스의 삼촌이라는 카이우스 등 모두 카이라스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을 알아본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앞에서 카이라스의 말로는 '내숭'을 선보이며 연기를 했다.
바로 자신도 그런 가족으로서의 애정이 담긴 것을 받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이 가족에 합류하고 싶은데...'
이 생각이 디아나를 차지했지만 그녀는 카이라스의 나이가 어린 것이 참으로 한스러웠다. 그렇지만 3 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나자 14 살이 된 카이라스는 이제 1 년만 기다린다면 성인이 될 것이었고 셀리나가 카이라스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디아나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인간들의 황제나 왕, 고위 귀족들 중에선 자신의 이모랑 결혼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디아나도 여러번 들어봤기 때문이었다.
'나는 카이라스의 이모도 아니고 셀리나의 고모이니 오히려 그보다는 더 정상이지.'
그렇지만 이 얘기를 그녀는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카이라스는 아직 미성년자였고 아직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답을 내리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가문에서는 어떻게 된 것이 자신에 필적하는 미모를 가진 여인이 둘이나 있었으니깐.
그나마 그 중에 한 명이 카이라스를 낳아준 친어머니여서 다행이었지만 카이라스가 다른 한 명인 카일라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볼때는 분명히 예쁘기는 한데 인형 같이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고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빛을 한 그녀를 카이라스는 어떤 점 때문에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무미건조한 말투도 기분 좋게 듣는 것을 보니 무언가가 있기는 있는거 같은데 디아나로서는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카일라의 흉내를 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카이라스의 앞에서 카일라의 말투와 표정을 흉내내봤더니 마치 '미친 년'을 보는 듯한 표정에 울컥해서 포커페이스가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실패한 과거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아나."
얼굴이 달아오른채로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는 카이라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으, 응? 왜?"
"...아니다. 근데 유리아나랑은 어제 대체 몇시까지 논거야?"
"...새벽 1시까지...놀았어."
"내가 뭐라고 했지?"
"우우...어린아이는 일찍 재워야한다고..."
카이라스의 추궁에 디아나는 잘못한 것을 알았기에 고개를 숙이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뱀파이어 퀸인 그녀가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자 카이라스 역시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하기 뭐해지자 살짝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다음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돼. 알겠지?"
"...알았어."
디아나는 카이라스가 자신의 뺨을 만지자 그 느낌이 싫지 않은지 얌전히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주인에게 벌을 받고 기 죽은 강아지가 주인에게 칭찬을 받자 안도하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카이라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참아야 하는데...정말 시공회귀 이전의 동료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정말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 해도 웃기단 말이야.'
시공회귀 이전의 디아나는 카이라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소리 없이 찾아오는 최강의 암살자인 그녀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죽음의 사신이었고 그녀에게 맞상대가 가능한 것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 최상급이나 9 서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절대강자들 중에서도 절대강자의 반열에 오른자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디아나는 시공회귀 이전의 세뇌된 디아나와는 외모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유리아나와 사이가 좋은 것이 그 증거였다.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디아나는 자신을 예쁜 언니라고 부르면서 잘 따르는 유리아나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해서 그녀에게 소설책을 읽어주기도 했고(물론 카이라스의 입장에선 불 질러버리고 싶은 삼류 쓰레기 로맨스 소설들이었다.) 가끔 유리아나와 대련을 해주기도 했으며 뱀파이어 공작들이 보내오는 보석들을 돈으로 바꾼 후 유리아나에게 먹을 것들을 밖에 나가서 사주기도 했다.
시공회귀 이전에 유리아나가 디아나에게 살해당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엄청난 변화였다.
'그나저나 진짜 말랑말랑하네.'
디아나의 뺨은 마치 어린아이의 뺨을 만지는 것 같이 말랑말랑했는데 그 감촉이 좋아서 카이라스는 웬지 중독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디아나의 붉은 아름다운 입술로 향하자 카일라의 연분홍빛 입술과는 다른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의 입술을 보고는 키스를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그 충동을 억눌렀다.
디아나에 대해 불신하는 감정이나, 악감정이 남아서가 아니었다.
이미 3 년의 생활로 그녀를 완벽하게 신뢰하기 시작한 그였다. 그리고 디아나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철이 없기는 하지만 카이라스의 눈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워보였고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을 숨기려고 애쓰는 모습도 무척이나 귀여워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인 카일라와 결혼을 하기 이전까지는 다른 여자와는 섹스는 커녕 입맞춤 같은 애정 행각조차도 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디아나와 키스를 하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른 것이었다. 한번 자신이 정한 기준을 풀었다가는 어디까지 연달아 풀릴지 몰랐으니깐.
잘못하다간 충동적인 욕구에 휩쓸려서 카일라와 합방을 이루기도 전에 디아나와 시공회귀 이후의 첫경험을 체험하게 될 지도 몰랐다.
"셀리나, 디아나. 근데 너희 둘 아르테일 공작령에만 있으면 좀 답답하지 않아?"
"네, 아...저는 괜찮은데..."
"어디 데려가 줄려고?"
셀리나는 겸양의 말을 하는 반면 디아나는 살짝 눈을 빛내면서 카이라스에게 물었다. 그리고 카이라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리아나와 카일라 누나도 함께 데리고 이번에 열리는 검술대회를 구경하러 갈 예정이야."
"검술대회를?"
"그래, 20 살 이하만 출전할 수 있는 검술대회지."
20 살 이하만 출전할 수 있는 대회라면 차기 제국의 인재들이 자신들의 잠재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는 종류의 대회일 것이었다. 그렇지만 디아나는 그런 것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근데 왜 그런 대회에 가려는거야? 별로 도움 될 것도 없어보이는데...아, 혹시 설마 그 대회에 참전하려고?"
카이라스는 9 서클 익스퍼트라는 사실에 묻혀서 그의 검술의 경지가 묻혀져있지만 그의 경지는 엄연히 소드 마스터 최상급이었다. 20 살 이하의 사람들 중에서 그를 검술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거기에서 만날 사람이 있거든. 그 녀석은 가능성이 큰 놈이라서 약간 도움이라도 줘볼려고."
바로 시공회귀 이전의 그의 친구가 그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