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진실을 고백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막사 밖으로 나온 인류의 최강의 전력, 10 서클 마스터 카이라스는 조용히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마침 구름에 가려져 햇빛도 없었기에 바람이 더욱 시원하게 느껴졌다.
가끔씩 그는 이렇게 바람을 쐬는 것을 즐겨했다. 이런 끔찍한 전쟁이 없이, 그저 조용히 바람만 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여러번 해보았지만 그것은 그저 인류가 모두 원하는 바램임과 동시에 망상에 불과하였다.
적들은 무자비하고 잔인했으니깐.
"여, 카이라스. 오늘도 바람을 쐬고 있구나?"
허리에 검을 차고 새하얀 갑주를 차려 입은 기사 다운 복장을 한 남자 한 명이 씨익 웃으면서 다가왔다. 금발의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강인하면서도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의 청년의 모습을 한 남성, 검황 지그문트였다.
"지그문트. 또 뭔일로 찾아왔어?"
"그냥 네 녀석이 뭐하나 궁금해서 찾아왔지."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지. 곧 전투가 있을테니까 말이야."
"이런이런, 제수씨들한테는 그렇게 사근사근한 녀석이 이렇게 딱딱하니 이종족들이 마왕 같은 인간이라고 부르는거 아니야?"
"훗, 뭐 나쁘지 않지 않냐? 적들에게 마왕, 아군에겐 희망이 되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니까 말이야."
지그문트는 눈 앞에 있는 누구보다도 강한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다른 종족들이 모두 힘을 합치더라도 인간의 저력이라면 견딜만 하지만...그 놈의 드래곤들은 개체 하나하나가 강한 놈들이다보니 성가셔.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도 너라면 이길 수 있겠지만 그놈의 에이션트급 드래곤들이 방해를 하니 성공하지 못하고 있잖아."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어. 10 서클 마스터인 나니까 느끼는 건데 그냥 일반적인 대결이라면 내가 에라시안보다 항상 우위에 있긴 했지만 만약 목숨이 위기에 처했을때 보일 발악에 의한 결과는 어떨지 모르거든."
"휴우, 하여튼 면목 없다. 네 녀석을 제대로 받쳐줄 강자들은 대부분 죽었으니까 말이야. 특히...네 아버지의 일은 유감이야."
"......"
카이라스는 지그문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카이라스는 이윽고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이종족들이 있을 남쪽의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도...나도...너도...모두 바라고 있지. 이 잔인한 전쟁을 인간의 승리로 끝내자고, 그리고 인류를 아무런 원한도 없이, 그저 강성해졌다는 이유만으로 멸망시키려 하는 저 사악한 이종족들에게 심판의 철퇴를 내려주자고. 지그문트, 네 녀석도 잊지마. 저들의 잔악함을. 그리고 우리의 슬픔과 분노를."
지그문트는 카이라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로부터 10 년이 되지 못하는 해에 그는 늑대인간들의 우두머리인 대칸, 카루스를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쓰러뜨린 후 장렬히 전사했다. 그리고 전쟁의 끝까지 살아남은 카이라스는 확정난 인류의 패망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이종족을 향한 강렬한 증오를 가슴에 품고 과거로 회귀를 하였다.
* * *
저녁식사 때 디아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지그문트와 그의 호위기사들의 눈이 다시금 크게 떠지며 넋을 잃은 것과 카일라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생각하던 그들이 카일라에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가진 디아나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그들 역시 디아나가 은근히 카이라스를 신경쓰는 태도를 보며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런 사소한(?) 일들을 제외하고, 저녁식사 후 지그문트와 호위기사들이 모두 휴식에 들었을때 카이라스는 조용한 방에서 카일라가 단 둘이 마주 앉아있었다.
9 서클에 이른 카이라스와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이른 카일라는 각각 마법과 마나의 운용으로 주변에 자신들의 소리가 조금도 흘러가지 않게 한 후 단 둘이서만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누나, 할 말이 있다고 했지?"
"응, 이전부터 생각하던 말이었어."
이전부터 생각하던 말이라는 카일라의 말에 카이라스는 살짝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는 디아나에 관련된 얘기 때문에 그와 단 둘이 얘기를 하자고 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어째 다른 얘기를 하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숨기고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어?"
카일라의 질문에 카이라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며 그녀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짐작하고 있었어?"
"꽤 오래됬어. 정확히 네가 나를 보링논에게서 구해줬을때부터."
"...확신은 못했구나."
"응, 확신은 못했어.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터무니 없었으니깐."
카일라의 말은 즉, 이제는 확신을 했다는 뜻이었기에 카이라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사실 그가 진실을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것을 얘기하지 않은 것은 그 사실을 얘기해봤자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기 딱 좋은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루스칼리스나 어머니인 엘리나도 믿어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허황된 내용이고 이 진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오직 자신과 함께 과거로 회귀한 '그녀' 뿐이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검술과 마법, 정령술까지 비정상적인 성취를 보이고 있고 나에 대해서 나 자신보다도 더욱 잘 알고 있어. 거기다가 보링논 때 너는 어째서인지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그문트라고 하는 아까 그 애를 대하는 태도는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어."
"......"
그가 눈을 감자 카일라에게 이어서 또박또박 자신이 확신을 하게 된 이유들을 하나하나 지적해주자 카이라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숨길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야...그리고 그 정도로 확신을 하다니, 의외로 생각이 개방적이네."
"역시 진짜였구나."
카일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이라스의 뺨을 새하얗고 부드러운 손으로 쓰다듬으며 결정적인 말을 물었다.
"라스, 라스는 미래에서 여기로 온거지?"
"......"
카일라의 물음에 카이라스는 심장이 떨리는 충격감을 느끼다가 카일라의 부드러운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차가워보였지만 그 속에 자신을 향한 따스함이 담겼다는 것을 알았기에 카이라스는 안정감을 느끼며 살짝씩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미래에서 왔어. 40 년도 넘은 미래지. 인류의 문명이 모두 멸망하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노예만도 못한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미래에서."
"...인류의 문명이 모두 멸망한다고?"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했을때부터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것이 인류의 문명이 모두 멸망한 미래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카일라가 크게 놀라자 카이라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이 주축이 된 이종족 연합군이 인류의 문명을 멸망시키기 위해 공격을 가하지.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인간들이 너무 강성해져서 중간계에 위협이 될테니 아예 싹을 잘라버리겠다라는 기도 차지 않는 명분, 아니 개소리지."
그렇게 말한 카이라스의 말에서는 분노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라스. 미래에서 나는 어떻게 돼? 함께 오지 않은 것을 보니 역시 죽은거야?"
카일라는 미래에서 자신이 죽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듯 보였고 카이라스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세한 것은 내가 기억들을 보내서 보여줄게."
9 서클의 대마법사인 카이라스는 8 서클의 마법인 핸드 다운 어 놀레지를 사용하여 자신이 가진 기억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 물론 이 마법도 단점이 있어서 기억을 받는 대상이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 정신이 붕괴되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었지만 현재 카일라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있었고 그녀는 충분히 기억들을 받을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라스는 모든 기억들을 다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중요한, 중요한 기억들만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나의 기억과 지식을 전달한다, 핸드 다운 어 놀레지."
8 서클의 마법, 핸드 다운 어 놀레지가 카일라를 향해 시전되었다.
......
"...아."
잠시간의 침묵 후 카일라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수많은 정보들을 보았다. 미래에서 벌어진 수많은 일들...잔혹하기 그지 없는 전쟁, 인간들에게는 마법왕이라 불리며 영웅으로 불리우지만 이종족들에게는 마왕이라고 불리우는 카이라스의 모습, 그의 옆에 서있는 검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자신과 검의 여제라 추앙받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성장해있는 미래의 유리아나의 모습...
그리고 검황 지그문트와 권황 제이크라는 친구들...그 외에도 플로리아, 에이미, 레이나 등의 연인임과 동시에 동료인 여인들까지 보았다. 또 그를 주군이라 부르며 따르는 충성스러운 흑마법사들의 모습과, 신관들을 이끌며 적극적으로 협력해주는 믿음직한 동료, 성녀 실비아의 모습 역시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카일라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이라면 3 가지를 꼽을 수 있었는데 첫 번째는 자신의 고모인 엘리나의 비참함이었고 두 번째는 바로 에라시안에게 세뇌 당하여 그녀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뱀파이어 퀸 디아나의 모습이었으며 세 번째는 바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잃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카이라스의 모습이었다.
"라스..."
카일라는 카이라스가 보여준 기억을 통해 모든 진실들을 알고는 카이라스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눈이 많이 풀어져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안타까움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카이라스는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안쓰러운 표정은 짓지 않아도 돼, 누나. 누나는 현재 여기에 살아있잖아? 그 미래의 추억들은 난 결코 잊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된 기회에 나는 행복해하고 감사하고 있어. 그리고 나는 결코 에라시안의 뜻대로 되게 하진 않을거야."
카이라스의 말에 카일라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을거야."
"그래, 그러니까 미래에 강자가 될 사람들을 포섭하는 것이 중요해. 그들이 보다 강해지도록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야하니까."
이미 아버지인 루스칼리스에게는 비밀리에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의 음모에 대해 말해둔 상태였다. 시공회귀의 진실까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보링논에게서 정보를 읽어냈다는 것으로 적당히 위장하며 드래곤 로드가 꾸미는 음모에 대해 말해주자 그는 경악을 하면서도 카이라스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내가 8 서클에 올랐을때...그 때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쩌면 믿어줬겟지...핸드 다운 어 놀레지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갓 왔을 때야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겠지만 그것을 이유로 계속 미루다보니 어느 사이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숨기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종족들의 위협이 아직까지는 한참 남아있었기에 자신의 괴로운 미래를 가족들에게 밝히기를 자신도 모르게 또 두려워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숨길 생각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우, 후련하네. 그래도 진실을 모두 고백하니 말이야."
"다행이네, 라스..."
그리고 카이라스에게 가장 큰 소득은 그를 대하는 카일라의 태도가 보다 사랑스러워졌다는 것이었다.
"라스."
"응, 왜?"
"그 기억까지 봤으니 다른 여자들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허락하겠어. 하지만 12 명은 넘지마."
"후후, 알았어. 생각보다 높게 책정해줘서 고마워."
흑마법사들, 신관들, 이종족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지금 오늘만큼은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카이라스는 그 동안 스스로를 억압하던 기분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기분 속에서 카일라를 끌어안고 진하게 키스를 하며 그녀의 입술을 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