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0화 〉[평화로운 시간] (60/380)



〈 60화 〉[평화로운 시간]

대륙력 1815 년.

인간의 연합군이 모여있는 카르시스 제국의 동쪽의 영토에서 한 차례의 전쟁이 끝났고 가까스로 인간의 연합군은 이종족 연합군의 공세를 방어해내는데 성공하였다.

전쟁은 일단 방어에 성공한 인간들의 승리라 할 수 있었으면 곳곳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의 곡소리와 죽은 전우를 떠올리며 술을 마시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흑발의 수려한 용모에 큰 키를 가진 뚜렷하고 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잘생긴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 카이라스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카이라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부상자를 치료해주며 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는 신관들의 모습이었다.

"신은...정말 무능하군. 아니면 무심하거나."
"그렇지, 않아요. 카이라스 씨."

카이라스의 말에 고운 목소리로 반박하며 그에게 다가온 것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에 코발트색에 가까운 밝은 남색의 눈동자를 가진 성스러운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녀의 이름은 실비아, 주신 일루바타르를 섬기는 일루바타르 교단의 성녀이며 올해 18 살의 소녀로 올해 35 살인 카이라스보다 17 살이나 어렸지만 역사상 손꼽히는 수준의 막대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카이라스는 그녀를 향해 존경을 표할 이유가 없는 10 서클 마스터였다. 당연히 그녀의 말에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가 그렇지 않다는거지? 실비아, 성녀인 너에게는 이 참혹한 꼴이 보이지 않는거냐?"
"신은...저희를 사랑하고 계세요. 저희에게 신성력을 내려주시면서...단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사랑하시는거죠."
"후후후, 그래. 신을 섬기는 성녀인 너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겠지. 하지만 기억해둬. 적들까지 사랑하는 신은 나한테는 필요 없는 존재라는걸 말이야. 그리고 전쟁에 괴로워하는 수많은 인간들에게도 말이야."

카이라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싸늘하게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얼음장 같이 차가우면서도 섬뜩하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에도 실비아는 두려움에 떨지 않고 오히려 측은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카이라스 씨의 아버님이신 루스칼리스 님의 전사는...정말 유감이에요. 하지만 일루바타르님께서 축복을 내리셔서 안식에 편히 드셨을...웃!"

카이라스의 손이 그 순간 실비아의 연약한 목을 붙잡았고 실비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 가는 목이 분질러지기 싫거든, 입을 닥치고 있는게 좋을거야. 실비아."

카이라스의 말에 실비아는 그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죄송해요, 카이라스 씨. 당신의 아픔을...건드려버렸어요."

진심으로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실비아의 코발트색 눈동자를 보자 카이라스는 실비아의 목을 조르던 손에서 힘을 놔주었고 주변에서 둘의 모습을 보고 웅성거리던 성기사들이 급히 달려와 카이라스에게 검을 겨누었다.

"카이라스 씨! 당신이라고 해도 성녀님에게 이 무슨 무례입니까?"
"성기사 루베른! 감히 네 놈이 우리 주군에게 소리를 지르는 무례함을 벌이는 것이냐!"

그러자 카이라스를 따르는 흑마법사들과 백마법사들 역시 감히 자신들의 주군에게 검을 겨눈 루베른을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그만."

그러나 카이라스는 강력한 프레셔를 뿜어내며 그런 휘하의 마법사들을 강제로 제압한 후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종족이라는 멸종시켜 마땅할 적들이 있는데 우리 인간끼리 내분이라니. 너희들이 제정신이냐!"
"죄, 죄송합니다. 주군..."
"면목 없습니다."

흑마법사들과 백마법사들은 카이라스의 말에 바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고, 카이라스는 차가운 눈으로 실비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신이라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둬.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은 우리들을 그저 힘이 강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드는 저 이종족들까지 사랑하는 신이라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있으나 마나한 쓸모 없는 공기에 불과하니까. 그나마 주신인 일루바타르라도 그 쥐꼬리만한 신성력이라도 내려서 도움이라도 약간은 되니 썩은 공기에서 맑은 공기로 취급해주는 줄 똑똑히 알아둬라."
"......"

카이라스는 그 말을 남기고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기도 싫은지 자리를 떠나버렸고, 성기사들이 카이라스를 뒤에서 욕을 하는 가운데 실비아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만들 하세요. 저 분을 욕하는 것은...제가 용서 못합니다."
"하지만 성녀님! 저 자는 신을 모욕하고 성녀님에게 위해를 끼치려고 했습니다."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실비아가 그녀 답지 않게 강경하게 성기사 루베른을 향해 말하자 루베른은 아직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카이라스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실비아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어쩌면...당신의 말이 모두 맞을지도 몰라요. 인간들에게...우리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지도 않는 방관자인 신들은 필요하지 않겠죠. 더군다나 이미 세상에 제대로 관여도 하지 못하며 신성력을 제공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무능한 신들이라면 더더욱요. 하지만...이 신성력...이 신성력만이라도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저는 계속 성녀일 거에요. 당신의 분노는 신을 대신해서 성녀로서 제가 모두 대신 받아드리겠어요. 카이라스 씨.'

그녀 역시 카이라스의 생각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도 이해할 수 있었고, 그의 슬픔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이라스의 신들이 무심한 존재들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었고, 무능한 존재들이라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은 그녀 역시도 이 전쟁터를 보며 확실히 느끼었다. 인간들이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도,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데도 신들은 아무런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니깐.

하지만 그녀는 그렇다해도 성녀로서, 신을 계속 믿고 옹호하며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이 신성력이 계속해서 유지될테고, 이 신성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수 있을테니.

'나중에 따로 사과하러 갈께요...모든 것을 알면서도 외면하는듯한 제 모습이...너무 보기 싫으셨을테니까.'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솔직하게 사과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실비아는 성녀라는 직위가 새삼스럽게 서글퍼졌다. 교황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고귀한 직위라 불리는 성녀라는 직위는, 그녀가 느낄때는 자유의사조차 표현할 수 없는 신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직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가진 특징은 그녀가 생각할 때는 대외적으로 과시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미모와 신성력을 담을 수 있는 막대한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육체 뿐이었고 그렇기에 그녀는 전쟁터에서 언제나 인류를 위해서 앞장서서 큰 활약을 보이는 흑마법사들이 차라리 부러울 지경이었다.

'일루바타르님, 당신은 대체 어쩌자고...주신이면서 이런 인간들의 시련을 무시하고 넘기시는거죠? 아니면 당신 역시 다른 신들처럼 세계에 관여를 할 힘도 없는 무능한 신인건가요? 아니면 제게 신성력을 주신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시는건가요?'

일루바타르에게 불경한 생각이었지만 실비아는 이 순간만큼은 갑자기 주신인 그에게 정말인지 자세하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자기 할말만을 하고 멈추고는 그녀가 섬기는 신은 이번에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10 여년 후, 실비아는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과 그녀의 이종족 군대들에게 포위당한 부대를 탈출시키기 위해 홀로 남아 신성력으로 방어를 하며 싸우다가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의 마법에 죽음을 맞이했다.

"아무리 기도를 해봤자 신은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아.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면...인간들 스스로 지키고 얻어내야해."

실비아의 전사 소식을 들은 카이라스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정이 든 사람들이 하나하나 떠나가는 느낌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              *             *

끼이익!

유리아나가 잠들어있는 그녀의 침실로 들어온 카이라스는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새끈새끈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는 유리아나를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잘 자고 있구나.'

자신이 온 것도 모르고 이렇게 자고 있을 정도면 깨우기도 뭐했기에 카이라스는 조용히 유리아나의 모습만을 한 번 더 바라본 후 밖으로 나간 후 유리아나가 깨지 않도록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리고 디아나와 셀리나가 있는 방으로 향하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평화롭구나..."

정말 평화로웠다. 이종족들이 본격적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할때까지 남은 시간은 약 11년. 그 동안은 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반드시 대전쟁이라는 끝이 기다리고 있을 평화를.

"......"

디아나와 셀리나가 있는 방으로 온 카이라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책을 읽고 있는 디아나와 셀리나의 모습이 그의 눈에 비춰졌다.

"카이라스?"
"주인님, 벌써 목욕시간이에요?"
"그래, 생각보다 좀 일찍 목욕할 것 같으니 둘 다 갈아입을 옷을 들고 따라와."

따라오라는 말에 디아나가 카이라스에게 물었다.

"카이라스, 근데 목욕은 카일라의 방에서 하는거야?"
"그럼 당연하지. 거기 욕조가 제일 넓거든."
"...칫, 알았어."

자신에게 배정된 방이 아닌 카일라의 방에서 목욕을 한다는 것에 디아나가 살짝 삐진 표정을 지었지만 카이라스는 웃으면서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새하얀 얼굴의 말랑말랑 뺨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일은 이 방에서 할테니, 오늘은 카일라 누나의 방에서 하자. 디아나."
"으, 응."

카이라스가 뺨을 쓰다듬어주자 금새 기분이 풀린 것인지 디아나가 화색이 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이라스는 손을 뻗어서 붉은 드레스로 가려져있는 디아나의 엉덩이가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쓰다듬었고 디아나가 다시 인상을 찡그리더니 카이라스를 노려보며 물었다.

"또 내 엉덩이를 만지는거야?"
"응, 안쓰러워서."
"뭐가 안쓰러운데?"

디아나가 추궁하는 말투로 카이라스를 노려보며 묻자, 카이라스는 진짜로 측은하다는 시선을 그녀에게 보내면서 말했다.

"전대 뱀파이어 퀸인 루나에게 얼마나 여기 엉덩이를 많이 맞으면서 혼났을지 생각하니 안쓰럽지 않을 수가 없잖아."
"어, 어떻게 그걸...!"

디아나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카이라스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자신과 전대 뱀파이어 퀸인 루나만이 아는 비밀로 가끔 너무 철이 없다며 뱀파이어 퀸이 되기 이전 후계자이던 프린세스 시절에는 정말 엉덩이를 루나의 손바닥에 여러번 맞아본 경험이 있었다. 그렇지만 뱀파이어 퀸이 된 이후 잊고 있었고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리라고 생각했는데 카이라스가 그 사실을 말하자 그녀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로 많이 맞았었구나."
"고모님..."
"에엣...? 아, 아니 그...그런 적 없거든! 없어, 없어...없는...데."

디아나는 카이라스가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닌 그냥 장난으로 했던 말임을 이제서야 알아차리고는 급히 부정을 하려했지만 이미 셀리나까지도 그녀를 측은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고개를 숙인 디아나를 끌어안은 카이라스가 그녀의 엉덩이를 다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달래주었다.

"걱정마, 나는 네가 바보 짓을 해도 엉덩이는 안 때릴테니까."
"우, 우우...바보..."

그러나 카이라스의 병주고 약주기에 순진한 디아나는 다시 넘어가 카이라스에게 안겨서는 얼굴을 연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수줍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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