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황궁으로 떠나기 전날]
1794년 8월 19일.
아르테일 공작가, 소가주 카이라스의 방.
"후우우..."
아침 식사를 마친 카이라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직 9 서클 '마스터' 수준이 되기는 무리구나."
아르테일 공작가로 텔레포트 마법을 통해서 단번에 돌아온 카이라스는 평소처럼 드래곤 하트들에 막대한 자연의 기운들을 담아놓거나 체내의 마나의 양을 늘리는 작업들을 병행하며 또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오르기 위한 검술을 꾸준히 단련했다.
'하지만 잘 안된단 말이지.'
하지만 특출난 성과를 보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의 경우는 9 서클 익스퍼트에 여전히 머물러있었다. 심지어 '마나집적진'을 그려서 보다 많은 마나가 한 자리에 뭉쳐지게 한 다음 그것을 흡수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9 서클 마스터가 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마나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10 서클의 경지는 더욱 많은 마나가 필요하지.'
시공회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문제였다. 그 때 그는 20 살이 넘어서 여행을 다니며 고대 마도시대의 유적들을 탐사하고 온갖 던전에서 카일라, 유리아나와 함께 대결을 벌일때 이미 9 서클 마스터 중에서도 특출난 마나의 양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 서클의 경지를 찾아내었을때는 당연하게도 나이가 20 대였던 만큼 보유한 마나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었고 아무런 문제 없이 그냥 깨달음을 얻어서 간단히(?) 10 서클의 경지에 도달했었다.
'후우, 20살 이전까지는 10 서클에는 오르겠지만...검술도 병행해서 익히고 있으니 아무래도 속도가 느려져.'
마법이 9 서클 익스퍼트에 머물러있는 것과 더불어서 검술 역시 미묘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오를듯 말듯 애매하기는 한데 뭔가 하나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령술은...'
[주인님!]
카이라스가 정령술에 대한 생각을 하려할 때 문이 갑자기 열리며 긴 푸른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는 푸른 눈동자의 푸른색 원피스 차림의 아름다운 소녀가 안으로 들이닥쳐왔다.
나이는 17 살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를 본 카이라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운디네, 문 좀 살살 열어라. 문 망가진다."
[어머, 죄송해요. 주인님♡]
그러면서 카이라스에게 달라붙은 그녀는 카이라스의 냄새를 맡더니 이내 흥분한 표정이 되며 안겨왔고, 카이라스는 한숨을 쉬었다.
'체취 페티시인 물의 상급 정령이라니. 이건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이로군.'
카이라스에게 안겨붙는 그녀의 정체는 바로 상급 정령이 되어 17 살의 소녀의 모습을 하게 된 물의 정령. 운디네였다.
[하아~주인님의 냄새...역시 미칠 것만 같아요.]
그리고 중증의 체취 페티시이기도 했다.
"생긴 건 멀쩡해서는...아니, 정말 대단한 미소녀이긴 한데...정신이 문제가 있다니."
[어머, 주인님. 그거 여자에게 실례되는 말이에요. 전 지극히 정상이라고요.]
그러면서 운디네는 더더욱 안겨왔고, 물의 정령이지만 인간과도 같은 체향을 풍기는 그녀였기에 상당히 강한 여인의 향기와 자극적인 여인의 부드러운 살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카이라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지금 미성년자라고...운디네. 내 년까지는 이런 행위 좀 참아줘라."
[주인님, 꼭 다음해까지 참을 필요 있어요? 어차피 저는 인간도 아닌 정령인데...그냥 가볍게 둘이서만 즐기면 아무도 모를 거 아니에요?]
운디네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면서 카이라스를 유혹해왔다. 누가 보면 물의 정령이 아니라 서큐버스로 오해를 할 법한 수준이었지만 카이라스는 운디네의 엉덩이를 세차게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꺅!]
"운디네, 네가 맞아야 말을 듣겠구나. 내가 좋게 말해주니 마구 기어오르는가본데...지금 9 서클 마법만 해도 마법검 하나 만들어서 거기다가 널 가둬버리면 그대로 값비싼 정령마법검 하나가 완성되거든? 한번 시험해볼까?"
[너, 너무해요. 주인님...그런 무서운 짓을...]
카이라스의 말에 운디네가 진짜로 겁에 질린듯 애처롭게 바들바들 떨어댔다.
정령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 바로 마법에 의해 마법검의 안에 갇혀서 정령 마법검의 재료로 쓰여지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령은 그야말로 누군가가 구해주기 전까지는 영원의 세월을 감금당해서 사는 것이나 다름 없었고 특히나 활발한 운디네에게는 소멸 이상으로 두려운 처벌이었다.
"그러면, 앞으로 말 잘듣고 착하게 굴꺼지?"
[네, 네. 앞으로 착한 짓과 이쁜 짓만 할께요. 그러니 제발 그런 무서운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알았어, 운디네."
카이라스는 살짝 운디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떼어낸 후 침대 위로 올라가 드러누우며 생각했다.
'황궁으로 내일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서 이동하는데...그 황태자 놈의 재수없는 면상을 봐야한다니 기분이 유쾌하지 못하네.'
현 카르시스 제국의 황태자, 알렉스 폰 카르시스.
그를 생각만 하기만 하면 카이라스는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지며,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가야한다는 사실까지 생각하자 황궁에 갈 필요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기 싫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플로리아도 아직은 4살 밖에 안됬을테니...아무도 그녀가 미래에 황제가 됬을 것이라고 생각은 못하겠지.'
대정령사인 플로리아 폰 카르시스. 현 제국의 황태자인 알렉스와 이복남매인 그녀는 사실 황위 계승권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종족들의 습격 당시 세뇌되었던 뱀파이어 퀸 디아나와 그녀가 이끄는 뱀파이어 암살자들에 의해 카르시스 제국의 황족들이 떼죽음을 당함으로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족이 된 그녀가 자동적으로 황제로 추대되고 인간 연합군의 명목상이나마 수장이 된 것이었다.
저주받을 트롤 대마법사 트루이의 함정에 빠져 에이션트급 레드 드래곤, 카르베너스와 트루이 놈의 합공에 죽기 이전까지는.
"운디네."
[네?]
카이라스의 기분이 좋아보이지 못하자 머뭇거리던 운디네는 카이라스가 그녀를 부르자 약간 화색이 돋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카이라스가 그녀를 부른 것은 심부름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가서 셀리나에게 시원한 레모네이드 하나만 만들어서 갖다달라고 전해줘."
[...네.]
시무룩한 표정으로 운디네가 방을 나갔지만 카이라스는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지금 그로서는 골치가 너무나 아픈 일들이 산더미였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할 일도 할 일이지만...아버지의 대비가 잘 되어가는가가 걱정이군.'
리히테나워 공작에게 이종족들의 위협을 말했듯이 카이라스는 디아나와 셀리나가 3 년전, 아르테일 공작가에서 머무르기 시작했을때 이미 그는 아버지인 루스칼리스에게 시공회귀의 진실은 말하지 않더라도 이종족들의 위협에 대해서는 단 둘이서만 있을때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미래에서 그가 10 서클의 깨달음으로서 개량을 한 보다 강력한 마법의 수식들을 틈틈히 아버지에게도 알려주는 한편, 10 서클에 오를 실마리를 은근히 건네주고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의 아버지인 루스칼리스는 9 서클에서 머물러있었다.
'10 서클이 쉬운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만.'
그가 워낙에 천재 중에서도 천재라서 10 서클에도 빠르게 오른 것이었지, 천재 중에서도 천재 축에 속하는 루스칼리스조차도 10 서클에 빠르게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정도의 재능이라면 언젠가는 오르기는 하겠지만 카이라스로서도 언제 쯤에 그가 오를 수 있을지 확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가능하면 전쟁 이전에 올랐으면 하는데.'
그러면서 카이라스는 드래곤 하트에 담겨진 자연의 속성들을 마나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10 서클에 오르는 것만큼 그의 경지도 마법을 제외하면 아직은 답보 상태였다.
마나집적진으로 많은 마나들을 한 번에 모을 수는 있었지마 마나집적진은 그만큼 주변의 마나들이 당분간 분포도가 줄어드는 리스크도 있었다. 거기다가...
'순수한 마나의 기운에서 특정 기운을 추출해내거나 혹은 변환시켜서 드래곤 하트에 불어넣는 것이다보니...마나집적진은 도움이 안되지.'
10 서클 마스터로서의 신의 영역에 발을 디디기까지 했던 카이라스였다. 그에게는 보링논 때처럼 원한이 녹아있는 혈기 같은 것이 아니라면 기운을 변환시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디아나에게 하숙비로 블러드 마나(순수한 혈기)가 담긴 마나석을 보유하였던 것이었다. 그 블러드 마나들은 각자 자연의 속성을 담은 기운들로 바뀐채로 카이라스가 드래곤 하트들에 넣어둔 상태였다.
"주인님, 레모네이드 가져왔어요."
"아, 들어와. 셀리나."
카이라스는 방 밖에서 들려오는 셀리나의 목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끼익!
문을 거칠게 연 운디네와는 달리 천천히 문을 열고 한 손에는 레모네이드가 담겨진 유리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는 메이드복의 흑발의 미소녀 뱀파이어, 셀리나가 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카이라스에게 다가와 레모네이드를 건네주었다.
"주인님, 여기요."
"아, 고마워."
셀리나가 타준 레모네이드를 받아서 천천히 마시던 카이라스는 레모네이드를 반쯤 마셨을때 셀리나에게 물었다.
"오늘도 네가 직접 만들었어?"
"그럼요, 주인님이 마시실 건데 당연히 제가 직접 해야죠."
당연하다는듯한 말을 하며 미소를 짓고 있는 셀리나의 모습을 보며 카이라스는 레모네이드를 모두 마신 후 빈 유리잔을 셀리나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셀리나, 내일 나는 황궁에 가는데 디아나랑 집에서 조용히 지내도록 해. 물론 너는 믿을만하지만...알다시피 네 고모가 많이 삐질 것 같아서 걱정되거든."
"안 그래도 많이 삐져 있으세요."
셀리나가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카이라스의 말에 대답했다.
그녀도 황궁에 같이 가지 못하는 것이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녀와 그녀의 고모인 디아나는 엄연히 뱀파이어. 그것도 뱀파이어 프린세스와 뱀파이어 퀸이었다.
뱀파이어 족의 위신을 생각한다면, 또 뱀파이어들의 나라의 여왕과 공주로서 체면과 지위를 생각한다면 제국의 황태자의 생일 때 카이라스를 따라서 멋대로 찾아가는 것은 결코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또 이대로 그냥 찾아간다면 카르시스 제국 측은 뱀파이어 퀸과 뱀파이어 프린세스의 사전 예고도 없던 방문에 무례하다고 분노할테고, 뱀파이어 족들은 자신들의 여왕과 공주가 참석했는데도 인간들의 공국의 공왕이 참여했던 것보다도 대우가 안좋았다며 분노를 할테니 그야말로 둘이 지금 참석한다면 두 종족을 이간질 시키는 행위 밖에 되지 않았다.
'미리 알리고 참석하는 것도 문제지.'
그렇지만 카이라스는 뱀파이어 퀸인 디아나와 뱀파이어 프린세스인 셀리나가 카르시스 제국 황궁에까지 출입을 한다면 이종족들을 모두 모아서 인간들을 말살하려는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의 귀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듯 하지만 디아나가 인간들과 동맹을 맺으려는 수준까지 나가려한다고 생각을 한다면 아마도 그 사악한 드래곤은 디아나를 미리 제거하려 들것이었고 그것을 인간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짓을 할 가능성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