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황태자 알렉스] 5
"아버지, 근데 이 놈이 말한게 황실의 뜻으로 대변되나요? 그럼 여기에 모인 귀족들은 우리를 포함해서 전부 반역자에 처단될 대상들이라는건데."
"그건 결코 아닙니다."
계획대로, 아이린이 혼란 속에서 황실의 대표를 스스로 자처하기 위하여 카이라스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다시 뵙네요, 카이라스 공자."
"아이린 황녀 전하."
공식석상이었기에 반말로 하던 것과는 달리 카이라스는 무척이나 공손한 어조로 아이린을 대했고, 반면 아이린은 변함없는 어조로 카이라스를 대하였다.
"린."
"네?"
"그냥 간편하게 린이라고 불러줬으면 한다고 말했는데 말이죠."
그러면서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짓는 아이린의 모습에 카이라스는 카일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보다 황실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주시죠."
"딱딱한 태도이시네요. 하지만, 이쪽의 잘못이니 일단 해명부터 하겠어요."
약간 아쉬운듯한 눈빛을 보내는 아이린에게서 느껴지는 화려한 기품과 요염함, 그리고 치명적인 색기 등은 벌써부터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여 보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게 하는 매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녀는 지금 알렉스와 비교가 되어서인지 더욱 당당해보였다.
"이 알렉스는 더 이상 황태자도 뭐도 아닌 그냥 미친 놈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놈은 더 이상 황실의 일원도 아니며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놈이 과거에 황실의 일원이었던 것과 황태자였던 것은 사실이니, 제가 이 나라의 1 황녀로서, 황실을 대표하여 사죄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허리를 숙인 후 이어서 고개도 숙이며 카이라스에게, 카일라에게, 그리고 아르테일 공작가에게 깊이 사죄를 했다.
"......"
카이라스는 잠시 말 없이 쳐다보았다. 여기까지는 아이린과 그의 계획대로였다.
알렉스가 카일라를 노리고 무례한 짓을 저지르고 추태를 보이면서 아르테일 공작가의 분노를 이끌어낸다면 아이린이 끼어들어서 알렉스를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며 아르테일 공작가에 사죄를 하여 아르테일 공작가를 대표하여 카이라스가 그 사죄를 받아들인다가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알렉스가 상상 이상으로 미친 놈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예 반역자니 떠들어대면서 대놓고 엘리나와 카일라를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며 소리를 질러대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들을 반역자로 매도하면서 자신이 황제가 되면 모두 처단해버리겠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하였다.
그 덕분에 아이린이 이렇게 황제도 아닌 황녀에 불과하면서, 아예 황실을 대표하는 것을 자처하며 나서며 황태자를 서슴없이 황태자의 자리에서 내쫓으며 그를 황실에서까지 추방한다는 말까지 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카르시스 제국의 황제인 카를로스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지금 그가 저곳에 끼어들으면서 아이린이 황실의 대표로서 나선 것이나, 황태자인 알렉스를 아예 황실에서 쫓아내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을 부정한다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귀족들의 악감정 서린 눈을 그가 모두 받아야할 것이며 겨우 풀어져가던 아르테일 공작가는 크게 분노하여 진짜로 제국을 쪼개버리려는 움직임을 보일지 몰랐고 황제파에 속하는 귀족들 역시 황실에 실망감을 느끼고는 경멸하며 아르테일 공작가에 붙을 수가 태반을 가뿐히 넘을 것이었다.
'허어...알렉스가 아이린의 반만이라도...아니라 100 분의 1 이라도 닮았다면 좋았을 것을...'
카를로스는 그래도 아들이라고 알렉스를 계속 황궁에는 두고 싶었지만 지금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이미 귀족들의 분위기로 보아서 알렉스에게 그 정도의 처벌을 내리지 않는한 결코 납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나마 알렉스의 목숨이라도 살리는 방법은...하나 뿐이다.'
바로 아이린의 주장에 힘을 실으면서 그녀를 지지하며 은근슬쩍 그를 죽이지 않고 처벌만 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카를로스 황제가 내린 결론이었다.
"흠흠!"
황제의 헛기침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심지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린까지 고개를 살짝 숙인채로 돌리며 황제인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모이신 모든 여러분들께...참으로 면목이 없소. 부족한 아들 놈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여주셨거늘, 여러분께 큰 실례만 끼치게 되었구려...황제로서, 아비로서 여러분들께 사죄하고 지금부터 황제인 카를로스 폰 카르시스의 이름으로서 알렉스 폰 카르시스를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하며, 카르시스의 성을 사용하는 것 또한 금지시키며 더 이상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공표하오!"
아이린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자 아이린은 카이라스와 카일라만이 볼 수 있게 키득 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황제의 사죄는 계속되었다.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특히 아르테일 공작가에게는 짐이, 뭐라 할 말이 없소...정말...그저 사죄를 하며, 용서를 구한다고 밖에 못하겠구려..."
그러면서 제국의 일인자인 황제가 아르테일 공작, 루스칼리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하는 광경까지 연출되자 알렉스로 인해 황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던 귀족들의 기분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황제가 고개를 숙인 것은 그만큼 엄청난 파급력이었다.
- 아버지, 이제 사죄를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아이린의 덕분이라는 것도 강조하시고요.
- 후후, 알았다. 역시 계획이 있었구나?
-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 놈이 이렇게 미친 놈일 줄이야...
카이라스의 말을 들은 루스칼리스는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아르테일 공작으로서 말했다.
"아르테일 공작가의 가주, 루스칼리스 폰 아르테일. 황제 페하의 사죄를 받아들이며 이 일을 잊을 것을 천명합니다. 아이린 황녀의 진심어린 사죄로 인해 이미 황실의 뜻과 이 자의 뜻이 다르다는 것은 알게 된 바이옵니다."
"아르테일 공작가의 소가주, 카이라스 폰 아르테일. 아이린 황녀의 사죄를 통해 이미 알렉스의 제 약혼녀에 대한 무례와 저와 아르테일 공작가에 대한 모욕와 선전포고는 황실과는 별개임을 납득하고 있었기에 황제 폐하의 사죄를 받아들입니다."
루스칼리스와 카이라스가 황제의 사죄를 받아들이자 파티장의 분위기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더 이상 파티를 지속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황태자도 아니게 된 알렉스의 생일을 축하하는 일 따위는 더더욱 있을 수 없었다.
"크으으...이건...이건 꿈이야...말도 안돼...나는 황태자다! 제국의 황제가 될 고귀한, 존귀한 몸이란 말이다!"
그러면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알렉스는 토사물로 범벅이 된 모습으로 광기 어린 눈으로 카이라스와 루스칼리스를 증오스럽게 노려보다가 엘리나와 카일라를 다시금 탐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알렉스는 카일라보다는 엘리나를 향해 더욱 광적인 집착의 욕구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처음 보게 된 카일라보다는 오랫동안 가지고 싶어했던 엘리나에게 더욱 강한 집착을 느끼는 것이었다.
"흐흐흐, 엘리나! 내 아름다운 부인...자, 어서 그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고 다리를 벌려!"
누가 봐도 완전히 돌아버린듯 토사물을 뒤집어쓴채로 음흉한 눈으로 다가오는 알렉스의 모습은 경멸을 넘어서서 아주 혐오와 공포의 합작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착한 엘리나라고 해도 참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크아아악!"
알렉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멈춰섰다가 뒤로 자빠졌다. 바로 엘리나가 더러운 토사물로 뒤집어쓴 광인(狂人)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이른 기세를 뿜어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죽여버릴 정도는 아니고 위협만 하는 정도였지만 그랜드 소드 마스터 최상급에 이른 엘리나가 알렉스에게 집중적으로 뿜어냈다는 것으로도 미쳐있던 알렉스는 비명을 지르며 자빠졌다.
"으으으으..."
아주 오줌까지 지린듯 지린내까지 풍기며 쓰러진 황태자의 꼴을 보던 루스칼리스가 너무 한심해서 아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듯 가만히 있는 태도를 보이자 앞으로 나선 카이라스가 말했다.
"황족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네놈이...그 추악한 몰꼴로 내 어머니에게 보인 그 행동은 틀림없는 강간미수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군. 체인 라이트닝!"
지지지지직!
"끄아아어어어버버법!"
3 서클의 가벼운 전격 마법이었지만, 그 효과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목표에 명중한 후 주변에까지 전기가 퍼져야겠지만 카이라스가 완벽히 통제를 하고 있었기에 그의 마법은 오직 알렉스만을 정통으로 명중시킨 후 그를 고문하고 있었다.
"끄어어어버버버버법!"
새까맣게 타버린 알렉스는 더 이상 빈말로라도 잘생겼다고 할 수 없었고 그의 그런 처참한 모습에 황제인 카를로스는 급히 후속타를 날리려는 카이라스를 말리려 하였다.
"잠깐, 멈추게!"
일단 황명이었고, 또 미래의 '장인 어르신'의 말이었기에 카이라스는 알렉스에게 후속타를 날리려던 것을 멈추었다.
"네, 폐하."
그리고 카이라스가 자신의 명을 듣고 후속타를 멈추자 카를로스는 급히 다가와 알렉스가 살아있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하지만 이미 황제의 이름으로 그를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한 상태였기에 방금전 알렉스가 보인 행동은 엘리나로서는, 카이라스로서는 당연한 행위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살릴 방법은 있었다.
"황궁에서 피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네. 근위기사들에게 명해서 알렉스를 평민으로서 황궁의 밖으로 추방할터이니 그만 잊도록 하게. 미친 놈이지 않는가?"
알렉스는 미친 놈일 뿐이니 그를 죽이지 말아달라는 의미를 간곡히 돌려서 말하는 황제의 말에 카이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황궁 밖에 나간 후 사고로 위장시켜서 죽게 하죠 뭐.
그런 속마음을 말하지 않은 카이라스는 정중히 황제의 말에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당당함으로 과연 차기 아르테일 공작이라는 귀족들의 감탄소리를 들으면서 서있었고, 아이린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채 그와 카일라를 향해 살짝 미소를 보내왔다.
그리고 세르티네스 역시 카이라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린을 도와줘서 고맙다, 카이라스 군.]
'별로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이 새끼는 이제보니 반드시 죽여버려야할 놈이니까.'
당연하게도 카이라스는,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댔던 놈을, 자신의 여자에게 흑심을 품었던 놈을, 자신의 아름다운 어머니에게 음심을 품었던 놈을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알렉스는 당연히 죽어마땅한 놈에 불과한 것이었다.
'인간이 인간 같아야 인간이지.'
지그문트가 제일 먼저 다가와서 카이라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여러가지 말들을 하기도 하고 그 외에 여러 귀족들이 다가와 그를 칭찬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카이라스는 피곤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별장으로 돌아온후 바디 체인지를 통하여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화려한 사교계의 데뷔를 보여준 카이라스와 카일라를 아르테일 공작가로 돌아왔고 그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몇달 사이, 기품 있으며 우아한 태도, 그리고 화려한 외모 등으로 귀족들에게 황족 다움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보여준 아이린은 급기야 황자들을 누르고 여자로서 황태녀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카르시스 제국의 역사에서도 몇 안되는 전례를 가진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계속 흘러서 카이라스는, 마침내 15 살이 되어 성인식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