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제이하 백작가]
카르시스 제국의 황궁, 트리에스타.
"정말 실망이군요."
치명적일정도로 요염한 색기를 담은 붉은 눈동자를 살포시 뜬 흑발의 아름다운 소녀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향해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채를 살포시 피며 자신의 아름다운 미모의 얼굴을 살짝 가린 그녀는 검은색이 드문드문 섞인 화려한 붉은 드레스의 고귀한 기품이 넘치는 카르시스 제국의 황태녀, 아이린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면목이 없다는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황태녀 전하...최선을 다했지만..."
"그만, 저는 변명 따위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공식적으로 제국에 등록은 되지 않았다지만, 갓 8 서클에 올랐다지만 그래도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른 당신이 이렇게 일처리가 형편 없을 줄 몰랐군요. 역시 아르테일 공작가에게 부탁을 할 걸 그랬어요."
아이린의 말에 무릎을 꿇은 사내의 얼굴에 치욕감이 떠올랐지만 그는 아이린에게 고개를 들지 못했고 반발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못했다. 그녀의 등 뒤에 서있는 로브를 입은 한 명의 여인 때문이었다.
아르테일 공작가에서 파견한 과거 8 서클의 마스터로서 대륙에 이름을 날리다가 최근 9 서클에 이른 대마도사 중의 대마도사, 유노 폰 아르테일이 바로 그녀의 정체였다.
현재 그녀는 아이린과 루스칼리스가 서로의 합의하에 그녀에게 내린 백작이라는 작위로 인해 아르테일이 공작가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했기에 성으로 불리는 대신 유노 백작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작위를 받을때 새로운 성을 지급받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아르테일 공작가의 마법사들이 그렇듯이 그녀 역시 아르테일의 성을 버리는 것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르테일 공작가의 방계 중에서는 가신의 가문으로 바뀌면서 성을 바꾼 경우가 여럿이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아직까지는 루스칼리스의 사촌동생으로서 직계의 혈족이었다. 그녀의 후대에 이르어서는 방계가 되겠지만.
어쨌든 그녀가 저렇게 아이린의 뒤에 버티고 있는 이상 그가 무례한 행동을 하는 순간 그녀의 공격이 그를 덮칠 것이었고 8 서클인 그로서는 9 서클인 그녀에게 상대가 될리가 없었고, 황태녀의 앞에서 무례를 범한다는 것은 곧 제국의 공적이었다.
8 서클의 대마법사가 되면서 서출 출신인 그가 백작이 되기까지 했으니 그저 잠깐 혼나는 것으로 자신이 가진 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작위를 통해 보다 좋은 영지를 받고, 그 영지를 통해서 얻은 이익들로 보다 마법 연구에 매진하여 9 서클의 경지에 오르고 싶었다.
"다시...기회를 주십시오."
"좋아요. 대신 티가 나지 않게 깔끔하게 처리하고 없애버리도록 해요. 요새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것들이 많거든요.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하는 이런 때 쓸데없이 권력이나 탐하면서 주제를 모르는 오라버니들과 동생들은 저도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어찌보면 냉혹하기까지 한 말이었지만 아이린에게는 정말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미 황궁은 물론이고 제국이 돌아가는 것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황제인 카를로스의 경우 이미 알렉스의 추태로 인해서 그의 통치에 큰 흠집이 생겨버렸고, 그 틈 사이를 아이린은 끼어들어 철저하게 권력을 장악해 제국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어있었다.
아르테일 공작가와 리히테나워 공작가는 이미 그녀에게 큰 힘을 보태주고 있었고, 그들이 힘을 보태주는 만큼 아이린 역시 철저하게 제국의 내부들을 정리하면서 만약 전쟁이 일어날 것을 가정한 대비를 이종족들이 눈치채지 못할 선에서만 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카이라스가 준 기억들과 여러 기록서들을 뒤져가며 이종족들을 상대할 전술들을 짜기도 했고 또 신뢰할 수 있는 은퇴한 강자들과도 연락을 취해가고 있었다.
그런 바쁜 나날들을 보내는데 그녀의 오빠나 남동생이라는 것들은 알렉스가 실각하고 후계자의 자리를 여자인 아이린이 차지하자 그것이 눈꼴이 시려웠는지 세력들을 모아가면서 아이린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황태자가 될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아이린으로서는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카를로스는 황제로서는 제법 괜찮은 편이었었지만 자식들에 대해 관해서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녀가 생각할 때 그야말로 욕심만 많은 탐욕스러운 존재들로 아들들을 키웠으니 만약에 자신이 없었다면 나라 꼴이 아주 볼만했고 보다못한 귀족층들이 들고 일어나서 못난 황제를 폐위하고 황족 중에서도 똘똘한 사람 하나를 골라서 대충 앉혀버렸을 것이었다.
"그럼...이만 가겠습니다."
사내가 물러나 사라지자 아이린이 유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유노님, 카이라스 공자는 현재 어떤 상황이죠?"
"마침 보고가 온 것이 있습니다. 보고를 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보고문을 읽어보시겠습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대륙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해안가들까지 보유할 정도로 대륙에서 가장 넓은 땅을 보유한 초강대국이 바로 카르시스 제국이었다.
그에 걸맞는 정보망들을 대륙 곳곳에 보유하고 있었고 상심이 큰 카를로스 황제의 빈틈을 치고 올라와 황실의 최고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낸 황태녀 아이린은 황실이 보유한 정보망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서 카를로스 황제의 경우는 특히나 아이린에게 양위를 하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고 황실의 실권자가 아이린인만큼 대륙 곳곳에 퍼져있는 정보단체들 역시 아이린에게 충성을 하며 정보들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보를 보내오는 방식은 보통은 종이에 정보들을 자세하게 적어서 보내오지만 수정구를 통해서 그 지역의 정보단체의 담당자와 직접 대화를 나눌수도 있었다.
"그냥 보고문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고문들은 특수한 아티팩트를 통해서 유노의 아공간으로 자동적으로 이동되게 되어있었기에 현재 유노는 아이린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심복이었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 아르테일 공작가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는 대륙 곳곳의 정보를 맡기는 셈이기도 했지만 아이린으로서는 상관 없었다.
미래에 인류가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아르테일 공작가의 힘이, 카이라스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보고문을 읽고 있는 아이린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흐응...이 보고가 사실인가요?"
아이린이 검은 부채로 눈 밑의 얼굴의 절반을 가린채 유노를 붉은 색 눈동자로 응시하며 묻자 유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겁니다. 아르칸 왕국의 왕도 쪽의 정보단체에서 죽고 싶지 않다면 거짓 보고를 올릴리가 없으니까요."
"부부애가 좋기로 유명했던 카르쟌 국왕과 티세라 왕비의 이혼이라?"
아이린은 가는 손가락으로 살짝 보고문을 툭툭 치며 계속해서 보고를 읽었고 그녀의 표정이 다시 묘하게 변해갔다.
"이건 또 뭐죠? 티세라 왕비를...아니, 이제 왕비도 아니니 티세라를 카르쟌 국왕이 카이라스 공자에게 맡겼다고요? 그리고 카이라스 공자가 티세라를 마법사로서 제자로 받아들였어요?"
왕녀인 레이나도 제자로 들어가기는 했다지만 그녀는 카이라스가 아닌 카일라의 제자로 알려져있었다. 카이라스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은 아는 것은 극소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딱히 숨기려고 하는 것은 아닌데 15 살에 9 서클의 마법사도 믿기 힘든 놀라운 일이다보니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기도 하다는 것은 대부분 헛소문 취급을 받아버리는 것이었다.
"저는 보고문을 안 읽어봐서 모르니, 물어봐도 소용 없습니다."
"후우, 그렇네요.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잠깐 실수를 했군요."
순순히 사과를 한 아이린은 다시금 보고문을 흝어보았다.
"레이나 왕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라...보고문은 카일라 양으로 되어있지만 아마도 실질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카이라스 공자겠죠."
"그럴 겁니다."
"그나저나 아르칸 왕국은 꽤나 소란스럽겠군요? 왕비의 자리가 공석이 됨에 따라 자신들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들이려고 하는 귀족들로 분주할테니 말이죠."
"그렇지만 그렇기에 혼인을 통해서 귀족들의 세력을 보다 이용할 수 있겠죠."
"페드로 공작가가 이미 차기 왕권을 쥐었는데 왕가와의 혼인을 통해서 권력을 얻고 싶어하는 욕심들은 정말인지...어느 나라든 똑같아요."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는 있다지만 아이린에게는 딱히 권력욕이 없었다. 황제의 자리를 그녀가 노리는 것도 어디까지나 인류의 안전과 미래를 위해서였지 그녀 본인은 그냥 적당히 사교 파티 같은데 나가 구경을 하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카이라스 공자...'
사교 파티를 생각하자 문득 카이라스의 얼굴이 떠오른 아이린은 자신의 친우, 세르티네스와 함께 있을 그를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고 세르티네스가 부럽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유노는 조용히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자신의 조카뻘인 카이라스를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카이라스 공자의 다음 행선지는...제이하 백작가겠군요..."
보고문에는 그것까지 적혀있진 않았지만 티세라가 카이라스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린은 충분히 그것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 * *
아르칸 왕국, 제이하 백작가.
아르칸 왕국 내에서 10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마법사 가문으로 가주인 제이하 백작은 대마법사는 아니었지만 대마법사를 바라보는 7 서클의 마스터인 고위 마법사이자 마도사였다.
7 서클의 마법사 중에서도 최근 상당히 높은 경지에 들었기에 어쩌면 8 서클의 벽을 깨고 8 서클의 대마법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받고 있는 기대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전 그는 무엇인가에 습격을 당했는데 그를 습격한 것이 무엇인지는 습격을 당한 제이하 백작 본인조차도 알지 못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큰 중상을 입은 그는 본인의 마법은 물론이고 가문의 마법사들의 치료 마법이 일절 통하지 않자 거액을 들여서 신관들을 불렀지만 그 어떤 신관도 그의 상처를 치료해내지 못했다.
제이하 백작가로서는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제이하 백작가의 가주인 제이하 백작이 중상을 입어서 거동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비상 상황이 되었을때 제이하 백작가에서는 티세라 왕비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리고 티세라 왕비가 제이하 백작가로 출발한지 3일 후, 갑자기 카르쟌 1세는 티세라 왕비와의 이혼을 발표했다.
거기다가 그녀가 9 서클의 마법사인 카이라스의 제자가 되었음을 알리기도 했고 그녀가 마법의 길을 다시 걷기로 했다는 것이 공식 발표였지만 제이하 백작가는 다르게 판단했다.
그녀가 카르쟌 1세와 이혼하면서까지 9 서클의 대마법사인 아르테일 공작가의 소가주, 카이라스를 끌어들여서 제이하 백작을 치료하려고 한다고 생각(착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혼의 발표가 있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들의 기대대로 티세라는 카이라스와 그의 아내들과 유리아나, 그리고 티세라 본인의 딸인 레이나와 함께 제이하 백작가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