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무도회, 그리고 황태녀와의 재회] 4
그리고 셀리나는 이런 자리가 약간 거북한듯 살짝 긴장해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질문이 가지 않도록 카이라스는 모두 다 차단해주며 능숙하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상대해줄 때 갑자기 요염한 색기가 깃든 맑고 고운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죄송하지만 카이라스 공자를 빌려가도 될까요? 예약 시간이 되었거든요."
미성의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아이린이었다.
요염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그녀는 1 시간 동안 무도회장에서 그저 가만히 구경만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녀의 신분이 카르시스 제국의 황태녀라는 것에 혹해서 그녀에게 접근할 사람들은 원래라면 많겠지만 문제는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틀을 남겨둔 미성년자라는 것이었다.
나이를 새 해마다 쳐준다면 그녀의 나이도 15 살이겠지만 어쨌거나 대륙의 법상 그녀는 미성년자였고 미성년자인 그녀에게 먼저 접근하는 것은 그녀의 또래가 아니라면 그야말로 파렴치범으로 취급받기 딱 좋았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고, 설사 그녀가 성인이었다고 해도 접근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주눅이 들게 만드는 그녀가 풍기는 강렬한 위압감은 황제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카리스마를 지닌 자들이나 보일 법한 위압감이었고 그 위압감은 소드 마스터조차도 압도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제왕의 기운이라 할 수 있었다.
"크흠, 실례했습니다."
"크흠!"
아이린의 말에 헛기침을 한 귀족들이 전부 뒤로 물러나자 아이린은 셀리나에게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셀리나 양. 이 은혜 잊지 않을께요."
"으, 은혜라 할 것 까지는..."
"후훗, 언제나 생각하는거지만 셀리나 양은 정말 착하고 순수하네요. 부러울 정도에요."
아이린의 말에 셀리나가 쑥스러운듯 얼굴을 붉혔고 카이라스가 살짝 셀리나를 허리에서 손을 떼면서 셀리나의 새하얀 뺨을 부드럽게 손으로 만졌다.
"셀리나. 잠시 다녀올께. 항상 주시하고 있을테니 걱정하지마. 우리 공주님에게 접근하며 수작을 부리는 놈이 있다면...그 자리에서 죽여버릴테니까."
마지막의 말은 상당한 살기가 담겨져있었지만 그 살기는 셀리나가 아닌 셀리나에게 수작을 부릴려고 들 놈들에게 향한 것이었기에 셀리나는 카이라스가 자신을 깊이 신경써주는 것만을 순수하게 기뻐했다.
"셀리나 양, 잠시 이 부채 좀 맡아주실래요? 이래뵈도 아티팩트 거든요."
그리고 아이린은 셀리나에게 자신의 검은 부채를 맡기며 부탁했다.
어느 사이 황태녀인 그녀의 상징과도 같게 된 검은 부채과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약간의 검은색이 섞인 붉은 드레스. 그 중 아이린은 검은 부채를 셀리나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이거 아끼시는거일텐데 저에게 맡겨도 괜찮으신가요?"
"그래도 그걸 들고선 카이라스 공자와 춤을 출 수 없잖아요? 그리고 셀리나 양이라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어요."
셀리나는 카이라스와 카일라의 결혼식 첫날 때 디아나와 함께 카이라스랑 뜨거운 시간들을 보내냐고 아이린과 그다지 깊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고 그렇기에 아이린은 주로 유리아나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었다.
하지만 아이린도, 셀리나도 서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황태녀인 아이린에게는 세르티네스 외에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셀리나 역시 마찬가지로 셀리나 역시도 뱀파이어인데다가 공주라는 신분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을만한 또래의 친구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둘의 나이는 생일은 셀리나가 약간 더 빠르지만 엄연히 같은 해에 태어난 또래인데다가 흑비단 같은 긴 흑발의 머리카락에 붉은 색 눈동자를 가졌다는 공통점 역시도 서로에 대한 호감을 얻기가 쉬웠다.
황태녀, 즉 공주와 공주(왕녀 쪽이지만)라는 같은 위치, 흑발에 적안이라는 공통점, 같은 나이...이런 공통점들 외에도 그녀들은 둘 다 고귀한 느낌을 지니고 있다는 것 역시 또 다른 공통점이었다.
물론 아이린의 경우는 그야말로 만인을 위압하는 제왕과도 같은 고귀함과 위압감을 지니고 있다면, 셀리나의 경우 보는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순수함과 더불어 그 순수함을 바탕으로 한 공주와 같은 고귀함이 최근 들어서 풍겨지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녀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경외로 이어졌다.
아이린은 자신이 보아도 사랑스러워보이기까지한 셀리나의 순수함이 부러웠고, 셀리나는 카이라스에게 도움이 되는 아이린의 다재다능함이 부러웠으니까.
"잘 보관하고 있을꼐요."
"네, 누가 셀리나 양에게 접근하면 그것으로 후려쳐버리세요."
"네?"
"농담이에요, 호호."
전혀 농담 같지 않은 과격한 말을 해준 아이린을 잠시 쳐다보던 카이라스는 셀리나의 이마에 살포시 키스를 해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예정대로 1 시간 이상은 넘기지 않을 생각이니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카이라스는 당초 계획대로 2 시간 이상을 이곳 무도회장에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의 별장에선 그가 뜨거운 시간을 보내길 기대하는 아름다운 절세의 미녀인 아내들이 셋이나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카일라와 디아나, 티세라 모두 육체가 무척이나 뜨거운 여인들이었기에 만약 제대로 뜨거운 섹스의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면 순수하고 착한 티세라를 제외하고는 카일라와 디아나의 히스테리는 고스란히 남편인 카이라스, 그가 감당해야할 몫이었다.
'특히나 체력이 약한 티세라는 지금은 잠깐 자두고 있겠지만...'
아까전 낮에 즐긴 것은 전초전 밖에 되지 않았다. 그의 정력과 성욕이 상당하듯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카일라와 뱀파이어 퀸인 디아나 역시 성욕이 남달리 강했으니깐.
"1 시간 이내라...후훗, 저에게는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만 시간은 아니니까요."
1 시간 밖에 주어진 시간이 없다고 했지만 아이린은 상당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엇인가 상당한 자신감에 차있는 당당한 미소는 시공회귀 이전의 플로리아와 묘하게 닮은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닮지 않았다.
플로리아가 억지로 황제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면, 아이린. 그녀는 그야말로 타고난 황제의 자질을 가진 소녀였으니까.
"자, 그럼 카이라스 공자. 저에게 춤을 추실 영광을 주시겠어요?
아이린이 살포시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며 카이라스에게 새하얀 손을 뻗으며 묻자, 카이라스가 쓰게 웃었다.
"이건 원래 남자가 해야하는건데...아이린 황태녀 전하, 제게 같이 춤을 추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기꺼이요."
그리고 아이린은 카이라스의 손을 붙잡고 무도회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셀리나에 이어서 아이린 황태녀와 춤을 추게 된 카이라스는 수많은 부러움의 눈빛을 받았지만 감히 질투의 눈빛을 보내는 자들은 드물었다. 너무 잘났다보니 질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셀리나. 잘 지냈나보구나."
유노 백작, 아니 유노 폰 아르테일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셀리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유노 님."
셀리나가 유노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카이라스의 고모뻘인 유노는 아르테일 공작가의 강력한 전력인 대마법사들 중 하나였고 그에 따라 셀리나 역시 유노와 여러번 아르테일 공작가 내에서 마주치고는 했다.
당연하게도 아르테일 공작가 내에서 착하고 순수하며, 성실하기까지한 셀리나는 그야말로 사랑과 귀여움을 듬뿍 받았었고 카일라가 괜히 그녀에게 얌전히 목을 내밀어주며 피를 빨도록 허락한 것이 아니었다.
카일라까지도 그녀를 예뻐할만큼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르테일 공작가 내에서 완벽하게 카이라스의 아내로, 아르테일 공작가의 셋째 며느리로 인정받아버렸던 것이었다. 그것도 '미성년자'일때부터!
"약간 서운해?"
"아니에요, 솔직히 서운하긴 하지만...그래도 아이린 황태녀님이 주인님을 좋아하는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걸요."
"호호, 역시 우리 셀리나는 착하네. 이러니 카이라스가 그렇게 예뻐하며 끼고 돌지."
"유, 유노님..."
유노의 말에 셀리나가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부르자 유노가 말했다.
"근데 셀리나, 검은 부채를 들고 있는 것도 꽤나 잘 어울리네? 원래 공주라서 그런가?"
"부, 부끄러워요."
부끄러움이 많은 셀리나를 살짝 놀리는 것이 재미가 들렸지만 유노는 결코 한도를 넘어서는 놀림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울어버린다면 그녀의 조카, 카이라스는 크게 분노할테고 조카의 분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는 유노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떄문이었다.
'그런 점은 엘리나 언니를 닮았어.'
평상시에는 착하고 얌전하기 그지없는 엘리나였지만 그녀가 화가 났을때는 루스칼리스를 비롯해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르테일 공작가 내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과거 마법실험을 해서 만든 약을 자랑한답시고 현재 9 서클의 마스터에 올라있는 우르바누스 폰 아르테일이 4 살이던 어린 카이라스에게 약을 먹이고, 카이라스가 복통을 호소하자 분노한 엘리나가 검까지 들면서 우르바누스를 향해 휘둘러댄 것은 유명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7 살이던 카일라에게 폭언을 한 자신의 오빠를 엘리나가 과거 처녀 시절에 흠씬 두들겨팼다는 것은 이미 아르테일 공작가 내에선 전설이었다.
원래 평상시 화를 잘 안내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었다. 물론 카이라스는 그렇게 화를 잘 안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화가 났을때 특히나 무서운 것은 역시나 모친인 엘리나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무도회장에서 음악이 보다 빠르고 경쾌한 것으로 바뀌었고 아이린과 카이라스는 둘 다 제대로 따라가지도 못할 섬세한 움직임들을 보이며 빠르게 춤을 추어가고 있었고 정신없이 발 동작을 바꾸어가며 서로의 움직임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히 맞춰주고 있었다.
카이라스가 셀리나와 춤을 출때 카이라스와 셀리나의 모습이 마치 한쌍의 부부 다운 모습이었다면 지금 압도적인 위압감과 기세를 풍기면서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흑발의 미소녀와 흑발의 미소년, 아이린 폰 카르시스와 카이라스 폰 아르테일의 모습은 그야말로 여제와 제왕이라고 부를 법한 모습이었다.
독립을 안해서 공작가에 있을 뿐이지 이미 강대국에 속하는 왕국의 힘도 능가하는 수준의 절대강자들을 보유한 아르테일 공작가의 차기 주인인 카이라스와 대륙 최강의 제국인 카르시스 제국의 차기 황제인 아이린.
이 둘이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곳 무도회장은 전설이자 명물로 남을 것이었다.
특히나 아이린이 성인식을 치루기 이전, 마지막으로 춤을 춘 곳으로도 이름을 날릴 것이었고, 그녀가 황제가 된다면 더더욱 기념적인 장소가 될 것이었다. 거기에 그녀만이 아닌 아르테일 공작가의 가주가 될 카이라스까지 함께 춤을 추고 더군다나 서로가 춤 상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후후후, 성공이야...대성공이야..."
리마 시의 시장인 페드릭은 출세는 확정되었다고 생각하고 기쁨과 감격에 젖어있었다. 리마 시에 이런 명물적인 장소를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시에 엄청난 기여를 한 셈이었으니 그 동안의 노력을 생각하면 이 공적까지 더해진다면 그의 출세는 확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