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흑마법사 협회] 2
대마왕만이 가질 수 있는 기운이라는 암흑투기의 기세가 뿜어지는 것을 느낀 것은 슈리안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 역시도 보기 드물게 놀란듯 했고 검은 로브를 입은채로 그는 살짝 무릎 한쪽을 꿇으면서 허리와 고개를 숙였다.
"슈리안이라고 합니다. 카이라스 공자님과 황제 폐하, 그리고 대마왕님을 뵙습니다."
질세라 아릴리아 역시 양쪽 무릎을 꿇고 허리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릴리아라고 합니다. 카이라스 공자님과 황제 폐하, 그리고 대마왕님을 뵙습니다."
바로 자신들을 알아보는 그들의 모습에 카이라스가 아이린과 세르티네스의 허리에 팔을 하나씩 두르며 그녀들을 자신의 품으로 동시에 끌어안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세르티네스. 암흑투기는 갈무리해두라고 했잖아."
"딱히 갈무리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카이라스."
아름다운 미소를 살짝 얼굴에 드리우면서 세르티네스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암흑투기를 검사로서 사용하기에 내부에 갈무리해둔 카이라스와는 달리 세르티네스는 굳이 자신의 암흑투기를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대놓고 과시하듯 밖으로 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전의 그녀였다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육체를 가지고 자유를 맛보게 된 그녀는 암흑투기를 억지로 억눌러놓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암흑투기를 풀어두고 있으면 보다 자신이 자유라는 느낌이 더욱 생생하니까.
카이라스의 이런 태도에 놀란 것은 오히려 아릴리아와 슈리안이었다. 드래곤 로드와 동급으로 취급받는 대마왕와 저렇게 편히 말을 주고 받고 있다니?
"후후훗, 카이라스 공자. 세르티네스는 지금 드디어 자유를 얻은지라 약간 들떠 있어요."
"역시 린은 잘 파악하네. 틀린 말은 아니지."
"나도 알고는 있어. 들떠있는 감정이 눈에 훤히 보이거든."
서로를 편하게 대하는 사이 좋은 모습들에 아릴리아와 슈리안은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지 그저 조용하게 있었다.
디아나와는 달리 이들은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라는 진리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자, 그럼. 설명을 해줘야지. 일단 나의 신분이 아르테일 공작가의 소가주인 카이라스 폰 아르테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리고 또 다른 소개를 하자면 현존하는 인간 중 유일한 10 서클 마스터다."
카이라스의 소개에 아릴리아와 슈리안은 경악했다. 10 서클 마스터라니?
10 서클의 경지는 초고대문명이라 불리우는 제 1의 마도시대 때에는 존재했다는 확실한 기록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초고대문명의 시대인 제 1의 마도시대 당시 때나 존재했다는 전설이었다.
그런데 그 전설적인 경지에 도달했다고 카이라스는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릴리아와 슈리안은 감히 그의 말을 의심하지 못했다. 애초 마법사는 말을 돌려서 말하기는 해도 거짓말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도 있지만, 말을 듣고보니 자신들과 같은 9 서클 마스터라면 도저히 불가능할 위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9 서클 마스터보다 상위의 경지라면 당연히 10 서클일터였고, 즉 눈 앞의 흑발의 소년은 틀림없는 10 서클의 마법사였다!
그러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이곳 흑마법사 협회는 당연하게도 수많은 마법진들이 수도 없이 쳐져있었고, 인증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 외부에서 텔레포트 마법으로도 침입해올 수 없도록 철저한 방비가 되어있었다.
물론 카이라스의 경우 시공회귀 이전부터 이곳의 위치를 알았고 당연하게도 인증번호들도 모두 꿰고 있는데다가 이곳의 마법진들 역시 전부 꿰고 있기에 간단히 온 것이었지만 그들이 이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18 살에 10 서클의 경지에...도달한 것입니까?"
슈리안이 놀라운 목소리로 카이라스에게 물었다. 상식적으로 16 살에 9 서클을 마스터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18 살에 10 서클을 마스터했다는 것은 그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틀린 일이었다.
그렇지만 놀람은 끝이 아니었다.
붉은 장신구가 달린 화려한 검은 부채를 들고 앞으로 나온 검은 색이 섞인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흑발적안의 미소녀, 아이린이 살포시 앞으로 나오더니 황제 답게 허리를 숙이지 않고 부채로 살포시 얼굴의 절반을 아래에서부터 가리며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르시스 제국의 황제인 아이린 폰 카르시스라고 해요. 그리고 황제 외에도 마신의 성녀의 자리도 겸하고 있죠."
마신의 성녀!
아릴리아와 슈리안은 그 말에 오늘 찾아온 그들이 생각 이상의 거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10 서클 마스터에...마신의 성녀에...대마왕까지..."
물론 마신의 성녀라고 해도 이전의 흑마법사들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흑마법사들이 적극적으로 공손하게 대할 이유는 없었다.
이전의 흑마법사들이 마족들과의 계약을 통해서 마기를 공급받았던 것과는 달리 당대의 흑마법사들은 모두 마족에게 영혼을 빼앗길 위험이 있는 계약을 하지 않고 간단히 스스로 마나연공법을 통해서 마기를 쌓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마기를 이용한 마나연공법 중에서는 마법사용만이 아닌 검사용의 마나연공법도 있었기에 수많은 음지의 검사들이 그 힘을 통해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며,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도 오르고는 했다.
당연하게도 마족과 계약을 하려는 머저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마족과 계약을 하면 한 번에 많은 양의 마기를 공급받겠지만 마왕 급 정도의 마족이 아닌 이상 마기의 순도가 좋지 못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다.
그에 비해서 마나연공법을 통해서 모으는 마기는 정순하기가 이를데 없으니 당연히 마족들과 계약을 한 흑마법사는 흑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금방이 들통이 나 왕따는 기본이었고 마족의 하수인이 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같은 흑마법사들에게까지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신세가 되었기에 마족과 계약은 이미 흑마법사들 대부분은 방법조차도 모르고 있는 판이었다.
더군다나 던전이라는 곳은 마치 마계의 환경과도 같고 순수한 마기가 너무나도 풍부하였기에 마기를 빠르게 모으고 싶은 흑마법사들은 선배 흑마법사들에게 부탁해 던전에 동행하여 그곳에서 마기를 모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기에 마계의 마족들과는 관계되지 않고 그저 자연에 존재하는 기운 중 하나인 마기를 끌어모아 쓰는 것 뿐인 흑마법사들에게 더 이상 마신의 성녀와 대마왕은 크나큰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마신의 성녀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마기를 다루는 자들 뿐이기 때문이었다.
마신의 성녀가 한 번 축복을 내리는 순간, 흑마법사들도 다크 나이트들도 이전보다 마법의 위력이 강해지거나 다크 오러들의 위력이 보다 강해지게 되며 소모되는 마기의 양 역시 대폭 줄어드는 반면 회복되는 마기의 양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마신의 성녀가 카르시스 제국의 황제인 저 소녀였다니 정말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마신의 성녀 이전에 황제라는 것만으로도 흑마법사 협회는 그녀를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녀의 남편은 10 서클의 마법사였으니까.
어느 사이 흑마법사들까지도 아이린이 낳은 딸의 아버지가 카이라스라는 것을 확신할 정도로 소문이 깊게 퍼진 것이었다. 사실이기도 하지만.
"실례지만 대체 세 분은 어떤 관계인지...?"
아릴리아가 조심스럽게 카이라스에게 묻자 카이라스가 키득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의 관계? 글쎄? 남편과 아내들이라고 해야하나?"
"난 아직 처녀다. 카이라스."
카이라스의 말에 바로 세르티네스가 반박하자 카이라스 역시 바로 반박을 했다.
"어차피 오늘 밤까지잖아?"
무척이나 사이가 좋아보인다 생각하며 이들의 말을 듣던 아릴리아는 아직 처녀라는 세르티네스의 말에 대충 여태까지는 연인과 같은 사이였다고 인식했다.
'따라야해. 이것은 황금 밧줄이야."
참으로 튼튼한 황금 밧줄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낡아서 끊어질듯한 밧줄이 아니었다.
황실에 아르테일 공작가, 대마왕을 뒷배로 둔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특히나 아르테일 공작가라면 믿을만 했다. 흑마법사들이 잔혹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안전하게 살아갈 구역을 만들어주기도 한 대륙에서 유일한 가문이니까.
"후후, 어쨌든 뭐 이런 사이니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뭐 대륙을 지배하겠다거나 하는 음모 같은걸 꾸미는 것이 아니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창피하긴 하지만 오히려 세계 평화를 위해서 싸운달까?"
"...세계..."
"...평화?"
아릴리아와 슈리안이 멍청한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이 갔기 때문이었다.
10 서클 마스터인 카이라스는 그렇다쳐도 마신의 성녀와 대마왕이 세계 평화를 위해서 싸운다고?
"뭐, 그렇게 이상한듯 쳐다보지 마라고. 얘기를 들어보면 너희들도 납득이 갈테니까. 내가 왜 너희들을 모두 휘하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지 말이야."
그리고 카이라스의 기도가 달라졌다. 이전까지가 장난스럽고 능글맞은 잘생긴 청년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의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차가웠고, 동시에 무엇인가 잔혹함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그에게서는 강렬한 증오가 엿보이기도 했다.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 그 저주받을 년이야말로 우리가 맞서 싸워야할 적이지. 그리고 그 드래곤 로드는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꿈꾸고 있거든."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한다고요?"
"드래곤 로드가?"
아릴리아와 슈리안이 믿기지 않는듯 카이라스를 쳐다보자 카이라스가 싱긋 웃었다.
"믿기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내 모든 마나를 걸고 맹세를 하건데 내 말은 전부 사실이다.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은 엘프, 드워프, 오크, 고블린, 트롤, 늑대인간 등 이종족들을 모아서 인간들을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전쟁을 시작하거야."
"맙소사...대체 누가 마왕인지를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한 아릴리아가 슬쩍 세르티네스를 쳐다보았다.
암흑투기를 보유한 것을 보아서 틀림없는 대마왕이었다. 그렇지만 딱딱하게 말을 하기는 하지만 성격이 은근히 부드러운 면이 보이는 것이 도저히 대마왕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좀 성격이 딱딱한 마법사 같아 보인다고 할까?
물론 수정구에 오랜 세월 동안 봉인당하면서 인내심이라는 것이 크게 길러진 세르티네스였기에 대마왕 답지 않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고 그 안에 이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포함되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나는 흑마법사 협회를 휘하에 두려고 왔지. 10 서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마법왕으로서 흑마법사 협회도 내 휘하에 둘 생각이거든. 나는 너희들에게 여러가지를 약속해줄 수 있지만 그보다 너희들에게 묻겠어. 너희들,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나의 밑에서 나와 함께 싸워줄래?"
카이라스가 아릴리아와 슈리안에게 물었고 슈리안이 아릴리아에게 살짝 눈짓을 보내자 아릴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흑마법사 협회의 수장으로서 말했다.